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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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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35b38><colcolor=#fff> 제3·4공화국 박정희 정부 朴正熙 政府 | Park Chung-hee Government | ||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1] | ||
출범 이전 | 이후 | |
김현철 내각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
최규하 정부 | ||
대통령 | 박정희 ,/ 제5-9대, | |
국무총리 | 최두선 ,/ 제8대 (~1964.5.9.), | |
정일권 ,/ 제9대 (1964.5.10.~1970.12.20.)[외무], | ||
백두진 ,/ 제10대 (1970.12.21.~1971.6.3.), | ||
김종필 ,/ 제11대 (1971.6.4.~1975.12.18.), | ||
최규하 ,/ 서리 (1975.12.19.~1976.3.12.), | ||
최규하 ,/ 제12대 (1976.3.13.~), | ||
여당 | [[민주공화당|]] | |
연립여당 | [[유신정우회|]] ,(1973.3.10.~)[위성], |
▲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박정희 취임 선서 (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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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5-9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이끌었던 정부로, 제5대 대통령 선거, 제6대 대통령 선거, 제7대 대통령 선거, 제8대 대통령 선거,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승리하면서 1963년 12월 17일 정식 출범하여 1979년 10월 26일까지 존속하였다.1972년 10월 유신 이후로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가 폐지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면서 이 시점을 기준으로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을 구분한다.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되었다.
2. 국정지표
이것은 유신정권 시절 한정이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 자주국방과 국가 안보 확립
- 조국의 평화와 통일 기반 조성
- 중화학 공업의 추진
- 주체성 있는 민족 문화 창달
3. 상세
3.1. 제3공화국
3.1.1. 박정희 정부 제1기 (1963 ~ 1967)
박정희는 간발의 차(470만 대 454만의 15만 6,026표(1.55%)차)로 윤보선을 이겼다. 이는 1962년에 가뭄이 들어 경제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인 영향이 컸으며, 당시 야권이 선거 전략을 잘 짰으면 되려 역관광 당할 판이었다.이 기간 동안 추진했던 정책은 박정희 시대 내내 마찬가지지만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으며, 자금은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등을 파견해서 나온 수익금, 경제 원조와 투자단 유치, 1964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파병 때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과 1965년의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모색해 훗날 한일관계가 복잡해지는 시발점인 한일수교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등이었다. 이때의 자금과 투자단과 기술자 유치를 통해 만든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이다.
그러나 한일 협상은 여론의 과정을 자세히 알리지 않았기에 그동안 박정희 정부에 지지를 보냈던 이른바 4.19 혁명 세대 대학생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알려진 대로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당시 젊은 나이로, 이 시위에 주동자급으로 참여하였다. 박정희는 이런 반대 속에서도 당시 한국이 딱히 돈을 구할 데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당시의 박정희의 진압은 일본 측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 내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하고 실제로 박정희도 그런 측면을 인정한 바 있었다고 한다.
3.1.2. 박정희 정부 제2기 (1967 ~ 1971)
박정희는 자신의 경제개발 정책과 베트남전 특수로 수출이 급속히 늘어나는 등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51.44% 득표로 40.93%의 윤보선을 여유 있게 물리치고 당선되었다(116만 표차). 하지만 여전히 경기도 지역에서는 상당한 표 차이로 윤보선에게 졌으며(67만대 52만), 서울 지역에서마저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한(67만 대 59만) 상황이었다. 물론 서울 80:37, 경기 66:38이었던 지난 선거보다는 훨씬 낫지만. 또 전라도의 높은 지지도 수그러들었다(116만대 82만에서 104만 대 113만으로 역전되었다). 하지만 경상도에서의 대승과 부산, 충북, 강원, 제주에서의 승리는 충분히 다른 지역에서의 패배를 메꾸어주었다.뒤이어 총선에서는 특별시와 직할시 지역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에게 사실상 참패했지만(서울 1:13, 부산 2:5) 나머지 지역에서 민주공화당이 대승(129:45)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내 안정 세력 확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여당과 이에 맞서 개헌선 저지와 박정희 정권의 계속 집권을 억제하려는 야당의 필사적인 투쟁으로 인한 과열로 타락선거로 지목되었다. 다만 야당도 규모 면에선 차이가 나지만 현재 기준으로는 부정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하여간 야당은 장외 투쟁으로 맞섰고, 민주공화당 역시 너무 심했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선거 부정을 한 이들을 출당시켰다.
시끌시끌한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1968년부터 시작해서 1970년 7월에는 서울 ~ 부산 간의 경부고속도로를 2년 5개월 만에 건설했으며, 산업구조가 상당히 개선되었으며, 기간산업과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수출액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박정희는 이후 1969년 3선 개헌을 단행했고, 대통령의 연임횟수를 기존의 재선에서 3선으로 늘려버렸다.
3.1.3. 박정희 정부 제3기 (1971 ~ 1972)
1971년 4월 펼쳐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상당한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서울과 경기도, 전라도 일대에서 상당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가 앞서는 결과를 맞이했다. 비록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 등의 지지를 통해 박정희는 간신히 3선에 성공했으나 8%, 100만 표차까지 따라붙은 것은 박정희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직후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이 113석을 얻어 간신히 과반을 유지하고, 반면 야당이었던 신민당이 89석을 얻는 선전을 보여서 민주공화당의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였다이러한 상황 속에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북한으로 파견하여 김일성을 만나게 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계엄 선포와 국회를 해산하고 1972년 국민투표에 붙여 91.5% 찬성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열게 되었고, 제3공화국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시기의 중요한 경제정책 중 하나는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 15호'로 기업사채를 동결하였다. 이 긴급명령은 경제악순환의 근절과 기업이 고리사채에 허덕이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업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하도록 한 것이다.
3.2. 제4공화국
3.2.1. 박정희 정부 제4기 (1972 ~ 1978)
3.2.2. 박정희 정부 제5기 (1978 ~ 1979)
4. 내각 명단
4.1.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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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835B38> 김유택 → 장기영 → 박충훈 → 김학렬 → 태완선 | |||
국토통일원장관 | 신태환 → 김영선 | |||
외무부장관 | 정일권 → 이동원 → 정일권 → 최규하 → 김용식 | |||
내무부장관 | 엄민영 → 양찬우 → 엄민영 → 이호 → 박경원 → 오치성 → 김현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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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장관 | 민복기 → 권오병 → 이호 → 배영호 → 신직수 | |||
국방부장관 | 김성은 → 최영희 → 임충식 → 정래혁 → 유재흥 | |||
문교부장관 | 고광만 → 윤천주 → 권오병 → 문홍주 → 권오병 → 홍종철 → 민관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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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부장관 | 이병호 → 박충훈 → 김정렴 → 이낙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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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부장관 | 김윤기 → 안경모 → 박경원 → 강서룡 → 백선엽 → 장성환 → 김신 | |||
체신부장관 | 홍헌표 → 김홍식 → 김병삼 → 박경원 → 황종률 → 김태동 → 김보현 → 신상철 | |||
공보부장관 → 문화공보부장관 | 김동성 → 이수영 → 홍종철 홍종철 → 신범식 → 윤주영 | |||
총무처장관 | 이석제 → 서일교 | |||
과학기술처장관 | 김기형 → 최형섭 | }}}}}} }}}}}}}}} |
4.2.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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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DAA520> 태완선 → 남덕우 → 신현확 | |||
국토통일원장관 | 김영선 → 김용식 → 신도성 → 유상근 → 이용희 | |||
외무부장관 | 김용식 → 김동조 → 박동진 | |||
내무부장관 | 김현옥 → 홍성철 → 박경원 → 김치열 → 구자춘 | |||
재무부장관 | 남덕우 → 김용환 → 김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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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 | 유재흥 → 서종철 → 노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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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사회부장관 | 이경호 → 고재필 → 신현확 → 홍성철 | |||
교통부장관 | 김신 → 최경록 → 민병권 → 황인성 | |||
체신부장관 | 신상철 → 문형태 → 장승태 → 박원근 → 이재설 | |||
문화공보부장관 | 윤주영 → 이원경 → 김성진 | |||
총무처장관 | 서일교 → 심흥선 → 심의환 | |||
과학기술처장관 | 최형섭 → 최종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