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3:57:07

진산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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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시작2.2. 수습 과정2.3. 결과

1. 개요

珍山波動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대표 유진산의 행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1]

2. 전개

2.1. 시작

유진산제8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1971년 5월 6일에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등록하였다. 영등포구 갑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에게 지역구를 거저 내주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밖에 있던 신민당 청년 당원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거센 항의를 계속하였다. 일부 청년당원들은 유진산에게 정계은퇴, 당 총재직 사퇴, 전국구 후보 사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으며 유진산의 자택 앞에서 유진산계열 신민당 청년당원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급기야 1971년 5월 7일 관훈동 신민당 중앙당사에서 벽에 걸려 있던 유진산의 사진을 떼고 불태우는 난동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2.2. 수습 과정

신민당 비주류의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지만 운영위원회 소집에 앞서 친 진산 계열인 김영삼, 이철승, 이중재, 김재광, 김형일 등은 비공식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대표 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결국 신민당김영삼, 이철승 등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김대중 중심의 비주류로 갈려 유진산의 은퇴 여부와 당대표 권한대행 문제 등을 놓고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일시 행방을 감추었던 유진산19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대표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대표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반격에 나섰다.

이에 김대중은 "책임을 지겠다고 한 당대표가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어 당의 혼란이 마치 당권투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당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으로서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비난하면서 "당 운영위원회의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6인위의 결정은 합법적인 결정"이라고 맞섰다.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은 다음과 같은 중재안을 제시했다.
  • 유진산의 당대표직 사퇴
  • 당대표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대표 권한대행으로 한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 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 별다른 대안이 없던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유진산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신민당 당대표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은 김홍일은 5월 11일 총선 기간 동안 모든 당무와 선거대책을 수립할 선거대책소위원으로 자신과 김대중, 윤제술, 김형일, 김재광, 이충환, 윤길중 등 7명을 위촉하고 선거대책본부 차장에 김의택, 정헌주를 임명해 본격적인 선거 체제를 갖춤으로써 4일간에 걸친 '진산 파동'을 수습하였다.

2.3. 결과

신민당 중앙당은 그 기능이 마비 상태에 이르러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5월 11일부터 김홍일이 전국 지원 유세에 나섰으며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당 수뇌부를 각 지역에 파견해 바람을 일으키려고 했다. 선거 직전까지도 진산 파동의 여파로 신민당이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총선에서는 대선의 여세를 타서 개헌 저지선을 훌쩍 넘는 89석의 의석을 확보하고 득표율도 44%를 차지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고작 4%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선전을 보이게 되었다. 정작 이후에 10월 유신이 펼쳐졌지만.

영등포구 갑 선거구에 뒤늦게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훈은 결국 낙선하였다.

한편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진산 파동,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등을 거치면서 신민당의 파벌은 또다시 변화하였다. 유진산을 중심으로 뭉쳤던 범주류는 다시 김영삼계, 고흥문계로 갈라졌으며 이철승정해영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비주류는 대통령 후보를 차지함으로써 당내 영향력이 커진 김대중 중심의 단일 세력으로 파벌이 재편되었다. 이들 비주류는 1974년 정일형에 의해 화요회로 바뀌었다.


[1] 정확하게는 2차 진산 파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