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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1. 개요2. 주요 산업3. 역사
3.1. 미국3.2. 영국3.3. 중국3.4. 한국
3.4.1. 근대(~1945)3.4.2. 해방에서 전쟁까지(1945~1953)3.4.3. 전후복구기(1953~1962)3.4.4. 박정희 정부 전기(1962~1971)3.4.5. 박정희 정부 후기(1972~1979)3.4.6. 전두환 정부(1980~1988)3.4.7. IMF 이전 정부(1988~1997)3.4.8. IMF 이후 정부(1997~)
4. 관련 기업 목록/국가별
4.1. 아시아
4.1.1. 대한민국4.1.2. 중국4.1.3. 인도4.1.4. 사우디아라비아4.1.5. 일본4.1.6. 대만
4.2. 아메리카
4.2.1. 미국4.2.2. 캐나다4.2.3. 브라질4.2.4. 멕시코
4.3. 유럽
4.3.1. 영국4.3.2. 프랑스4.3.3. 러시아4.3.4. 독일4.3.5. 네덜란드4.3.6. 스위스4.3.7. 아일랜드4.3.8. 이탈리아4.3.9. 스웨덴4.3.10. 노르웨이4.3.11. 벨기에4.3.12. 오스트리아4.3.13. 룩셈부르크
5. 관련 기업 목록/품목별6. 가상의 기업7. 관련 문서
1950년대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현대 생산'(Modern Production). 공장에서 다양한 자동화 기기를 사용하여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개요

/ Heavy Industry

중공업이란 기계를 통해 둔중한 물체를[1] 제조하는 산업을 일컫는다.[2] 한자문화권에서 중공업이라는 단어는 Heavy(무거운) Industry(공업)의 번역어이다.

전통적으로 금속공업(제강, 제련, 금속제품제조)과 기계공업(화기 제조, 기관 제조 등)이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중엽에 걸쳐 출현한 화학공업, 전기공업(전력공업)도 이에 속한다.

기술의 발전에따라 합성 고무, 비료, 시멘트부터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광범위해졌다. 이러면서 화학공업까지 합쳐서 중화학공업이란 표현이 일반화되었다.

경공업에 비해 생산계수가 높기 때문에, 더 자본집약적이고 경기에 민감하다.

2. 주요 산업

금속공업은 금속소재(반제품이나 원자재)를 만드는 1차금속제조업과 이를 완제품으로 가공하는 금속제품제조업이 있다. 1차금속제조업은 제선, 제강, 압연의 공정을 갖는 철강공업과 광석(ore), 고철(scrap)에서 필요한 금속을 회수하는 비철금속공업으로 구분하고 있다.[3] 현대에는 채산성을 위해 한곳에 모여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기계공업에는 금속공업의 연장선상에서 기계공업의 기초를 담당하고있는 산업기계공업과 이를 가지고 소비재 등을 설계, 조립하는 전자기계공업(전자제품, 전자산업), 수송기계공업(자동차, 선박, 항공기), 건설기계공업(건설기계, 기관차), 방위산업(미사일, 로켓, 전차) 등이 있다.

화학공업에는 유기화학공업과 무기화학공업이 있다. 여타 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설비를 요한다. 오늘날에는 원유가 유기화학공업 종래의 것들을 상당수 대체하고 있다.

위와 같은 것을 총동원하여 대형공장, 댐, 초고층빌딩 등 초대형 건축물을 시공하는 것과 강도 높은 광업 또한 중공업에 포함된다고 한다.

3. 역사

3.1. 미국

세계최초로 중공업을 매우 발달시킨 국가다. 미국은 과거 2류국가였지만 중공업이 엄청나게 성장해 1류국가로 거듭난 국가이다. 지금은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국 역시 중국 다음으로 제조업 대국인지라 중공업을 중시한다.

3.2. 영국

산업혁명 문서로.

3.3. 중국

1840년대 이후 중국이 동양 최초로 서구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게 되면서 근대화를 시도하나 누적된 악습과 제도의 미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과거 동아시아의 악습을 모조리 떨쳐버리고 북아메리카 및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에 다시 시동을 건다. 하지만 중국은 경공업이 더욱 대세였고 중공업이 그다지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미 중공업의 본좌로 거듭난 미국과 유럽 국가들 때문에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서구 열강의 투자와 외자를 유치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루나 이 마저도 중일전쟁과 이어진 국공내전으로 인해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여 그간 쌓아온 기반을 거의 잃어버린다. 추가로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인 혼란도 극심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개혁개방을 통해 흑묘백묘론 사상에 입각하여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된 중국에서는 경공업과 중공업을 모두 발전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경공업과 중공업이 매우 크게 발전하게 된다. 중국에서도 미국처럼 경공업보다는 중공업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브릭스를 구성하는 다른 인도, 러시아, 브라질도 중공업 위주로 발전하는 나라들이다.

3.4. 한국

3.4.1. 근대(~1945)

조선의 공업은 가내수공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기술을 천시하는 시대상으로 인하여[4] 가내수공업과 그 업무에 종사하는 기술자들도 천대받았고 이러한 기류속에서 기술직에 나가는 것은 선호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는 조선이 개항하고 나서 조선의 상업이 청나라일본제국에 밀리는 원인이 되었고[5] 조선 민족자본 형성과 자본주의 도입이 늦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은 자국이 외세에 휘둘리는 이유를 군사력 부족 때문으로 인식했고, 군사력을 진흥시키기 위한 세수확보를 위해서 상공업에 대한 제약을 풀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고종은 서구식 공업체계를 도입하기를 원했고, 공업진흥책을 추진하여 공장설립을 유도했다. 하지만 황실부터가 사농공상의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때문에 내탕고와 국고를 풀어서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공장 설립과 운영)을 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경제진흥책도 기존 지식인 계층의 상공업종사 기피와 상업자본가계급 형성 실패, 일본제국의 방해로 인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경공업에서 만큼은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던건 분명했고[6], 이를 경계한 일본제국은 조선의 상공업을 짓밟기 위해서 1904년에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해서 걸음마를 걷고 있던 조선의 자본주의에 철퇴를 가했다.[7][8] 일본제국의 조선 상업자본 탄압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중공업 진흥책은 시작도 못하고 돈좌되었다. 대한제국병탄하고 나서야 일본제국은 일본 본토의 기업을 끌여들여서 일본인들에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공업화를 실시했다.

때문에 한반도에 유의미한 중공업시설이 처음 생성된 것은 미쓰비시가 1918년에 황해도에 건설한 겸이포 제철소였고, 이후부터 중일전쟁 직전까지 중공업책은 일본 본토에서나 있었기에 유의미한 중공업 시설건설은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해서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1936년 10월, 조선산업 경제조사회에 따라 한반도의 중공업이 일본 제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 총독부의 시국대책 조사회의회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흥남 지역에 일본질소비료(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을 세우는걸 시작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화학콤비나트가 들어선다. 그 결과 1940년에 이르면 화학, 기계, 금속 공업 따위의 중공업 규모가 경공업의 그것과 동등해지며 우세를 띠게 되었으며 1944년 한반도의 자급률은 50%에 육박하게 된다.[9] 하지만 일제의 중공업 건설은 철저하게 일본의 자본으로, 일본의 기술에 의해서, 일본의 필요를 위해서만 추진되었기 때문에 주요 중화학공업 기업의 경영과 기술진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그 과실 또한 조선민중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10]

3.4.2. 해방에서 전쟁까지(1945~1953)

한반도일본제국에서 해방될 쯤, 잠시나마 한반도의 공업력과 일본 본토의 공업력 규모가 비슷해 졌다.[11][12] 일본제국은 연합국에 다른 식민지는 전부 내놓아도 한반도만큼은 남겨주길 원할 정도로 한반도는 제국주의 전성기의 상징이자, 패망시점 일본제국의 공업역량의 상당수를 보존한 지역이기도 했다.[13] 이러한 공업역량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고, 이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전개한 소련이 북한 지역을 석권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건준이 통제할 수 있는 한반도 내의 중공업 역량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14]

(이후 38도선 이북의 공업 역사는 북한사에 해당하게 됨으로 한반도 이북의 공업은 설명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전신이 되는 38도선 이남이 미군에게 접수된 시점 당시에 미래 대한민국의 통치범위가 될 지역의 중공업 역량은 전무했다. 일본제국은 북부에 중공업을, 남부에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지역위주의 식민지 공업진흥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는 한반도의 지하자원 자체가 북부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도 있었는데, 1942년을 기준으로, 산업의 근간인 철광석과 근대시대 공업의 주 동력원인 유연탄은 98%이상이 북한에 존재하였고, 이외에 한반도 주요 광물인 구리(89.3%), 아연(78.4%), 텅스텐(72.7%), 무연탄(71.6%), (69.6%), (66.2%)이 모두 북에 쏠려있었다.[15] 자원 뿐만이 아니라 발전시설 등의 기반시설도 북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16] 그나마 있는 공장들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1948년, 미군정신생 대한민국에 38도선 이남의 통제권을 반환 했을 시점에, 한반도의 공업역량은 최악의 상태였다. 중공업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있음[17]은 물론 새로 육성할 때 필요한 자원과 자본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유지할 인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18] 대한민국이 공업역량을 창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다름아닌 교육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일본식 학제에서 미국식 학제로 바꾸고 이공계 교육과 실업공업교육을 증강시켰다.[19] 교육정책 뿐만이 아니라 산업부흥5개년계획(1949)으로 중공업 진흥개발계획을 수립했었으나,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기존의 얼마 있지도 않은 공업역량만 전부 갈려나갔을 뿐이고 실제로는 발전을 위한 행보는 하지 못했다.

3.4.3. 전후복구기(1953~1962)

휴전 이전부터, 한국정부에게 중공업 육성은 주요관심사가 되었다. 북한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국방력을 확충하려면 중공업역량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업개발의 해택을 보게 된 것은 영남 지방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의 소비재를 생산하기 위한 경공업육성의 해택을 받던 지역이라 열악하더라도 산업기반이 존재는 하는 지역이었고, 무엇보다 6.25전쟁 시기에 유일하게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이기에 자본가들의 역량도 온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0]

종전 이후, 한반도의 경제는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은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원조와 국채를 공업진흥에 집중시켜서 대한민국을 근대적 공업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1955년에는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신진공업사[21]가 설립되어서 자동차공업이 시작[22]되었고, 1962년에는 경성정공이 설립되어서 3륜자동차를 생산[23]하였다. 경성정공은 후에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했다.[24]

3.4.4. 박정희 정부 전기(1962~1971)

미국정부의 무상원조가 끊기자 삼백산업[25]이 무너져서 한국에는 심각한 불황이 닥쳤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장면 내각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진흥책을 수정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나, 정권이 1년도 못채우고 5.16 군사정변으로 무너져 국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앞선 정권들이 중공업 진흥책에 실패하고 경공업에 의존하다가 경제발전에 실패하여 퇴진하게 된 것을 그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고, 군인 출신들인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공업발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전 정권들과는 확연히 다른 추진력으로 중공업발전을 도모했다. 박정희 정부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장면 내각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유로든 육성에 도전하지 않던 제철산업 육성을 도모했다, 1968년에 한일국교정상화로 얻어낸 자본으로 포스코를 설립하여 중공업 발전의 포문을 열었다. 1968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처음으로 개통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현대조선삼성전자가 창설되어 각각 조선업과 전자산업의 모태가 되었다. 한국의 중공업 산업 중 가장 먼저 시작된 자동차산업도 큰 지원을 받아서 1962년 4월에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국산자동차 공업 보호육성법을 입안하며 그해 8월 새나라자동차[26] 공장을 준공하여 자동차 생산 수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중공업이 양적으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한국의 주요한 중공업 기업은 이 시기에 태동하거나 발족했다. 이 때, 야당에서는 중공업발전에 대한 투자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하지만, 정부가 중공업산업 위주로 발전을 결정한 것은 한반도의 안보환경 때문에 자주국방을 위한 선택이기는 하여도 결과적으론 상당히 옳은 결정이 되었다.

3.4.5. 박정희 정부 후기(1972~1979)

이렇게 태동한 양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한 중공업은 박정희 정권에서 중공업과 화학공업의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양적인 발전 뿐만이 아니라 질적 발전까지 도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71년 경부터 시작되었는데, 경공업의 부가가치 창출과 중공업의 부가가치 창출은 단위부터 차원이 다르게 때문에 수출중심의 경제체제를 수립한 박정희 정부에게는 중공업발전이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은 매우 크게 성공해서 박정희 정부의 애당초 개획은 1980년에 100억불 수출을 달성하고 1981년에 국민소득 천불 달성이라는 목표를 가졌으나[27], 계획을 초과 달성해서 1977년에 이미 100억불과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28]했는데, 만약 중공업 중심의 발전체계를 설계하지 않았으면 달성하지 못했을 수치였다.

이러한 성공은 박정희 정부 초기에 기계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69), 자동차공업육성계획(1969), 철강공업육성법(1970), 조선공업진흥기본계획(1970) 등의 법적인 근거까지 마련하면서 미리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기반으로 1973년 1월 12일에는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중화학공업 집중 정책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공업 제품시장이 작고 따라서 경공업의 비중이 더 높았던 데다가 따라서 자본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내수시장을 외면했었고[29], 자본을 외채에 의존했었기 때문에, 때마침 불어닥친 오일쇼크에 큰 피해를 맞이해서 경제적인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조치[30]로 중화학공업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중공업을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31]

3.4.6. 전두환 정부(1980~1988)

10.26 사건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던, 최규하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을 유지한다는 정책적 결정외에 아무것도 못하고 고작 2달만에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에게 정권을 내주고 하야해야했다.

전두환 정부는 오일쇼크로 중화학공업 중심이었던 대한민국 경제가 박살나는 것을 이미 봐왔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말고도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때 한국에 전자산업과 통신산업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전자, 통신에 대한 투자는 훗날 중화학공업과 맞물려서 큰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 이 때는 아직 그 시너지를 받기 전이지만 중화학공업 자체도 일본이 미국에게 플라자 합의라는 정책으로 두들겨 맞고 제정신을 못차리던 시기였기에,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3.4.7. IMF 이전 정부(1988~1997)

3당합당으로 겨우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실적이 필요했다. 그 기존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정책에서 성공적이었던 부분을 최대한 살려서 인기를 끌어야 훗날 군사정권에 부역한 책임을 덜 수 있었다. 덕분에 군사정권이 끝났음에도 중화학공업은 높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한국의 공업력 증진이 순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상황 속에서 첫 민주주의 지도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실용적인 사람이었고, 중화학공업 발전과 재벌기업 체제가 국익에 알맞다면 그것이 군사정권이 이룩해 놓은 것이라고 해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김영삼 정부 아래에서 중화학 공업진흥 정책은 유지되었고,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큰 칭찬을 받았다.

3.4.8. IMF 이후 정부(1997~)

IMF 사태가 터지자 재벌기업부터 그 아래의 기업들까지 줄줄이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출역량이 있던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하고 살아나긴 했지만 수출역량이 없던 기업들은 무너졌다. 중공업도 이 시기에 양적성장이 끝났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시기에 한보그룹 등 수많은 대기업들이 날아갔음에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중공업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질적으로 점점 향상된 역량을 제고하는데 성공하면서 훗날 한국 경제를 책임지는 산업으로 불리는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 자동차, 조선업, 철강 등의 중공업을 대표하는 핵심 산업이 세계적으로 유망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이미 한국에서 사양 산업으로 접어들던 경공업1997년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에게 주도권을 내주면서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고속 경제성장과 중국 정부의 탄탄한 지원아래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중화학공업 및 첨단산업 기업들이 한국의 중화학 공업을 위협하고 있다. 다만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도 투입 증가를 통한 양적성장이 한계에 부딪히며 전체적으로 함께 침체하는 양상을 보이기에 중국이 한국의 중화학공업을 잠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점은 적어도 2020년대 초반 기준 대한민국의 전자산업, 조선업, 철강, 자동차, 방위산업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류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 주변국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체감하기 어렵지만, 과거 한국은 이런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방조차 힘에 부쳤기에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였다. 현대에 와서 신의 한수로 평가받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사실상 국방비를 대폭 탕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십조원이 넘는 막대한 국방비를 추가로 지불해야 겨우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기적에 가까우며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4. 관련 기업 목록/국가별

4.1. 아시아

4.1.1. 대한민국

4.1.2. 중국

4.1.3. 인도

4.1.4. 사우디아라비아

4.1.5. 일본

4.1.6. 대만

4.2. 아메리카

4.2.1. 미국

4.2.2. 캐나다

4.2.3. 브라질

4.2.4. 멕시코

  • 세멕스

4.3. 유럽

4.3.1. 영국

4.3.2. 프랑스

4.3.3. 러시아

4.3.4. 독일

4.3.5. 네덜란드

4.3.6. 스위스

4.3.7. 아일랜드

  • CRH

4.3.8. 이탈리아

4.3.9. 스웨덴

4.3.10. 노르웨이

  • 노르스크 하이드로
    • 야라인터네셔널[130]

4.3.11. 벨기에

4.3.12. 오스트리아

  • OMV

4.3.13. 룩셈부르크

5. 관련 기업 목록/품목별

5.1. 자동차/제조사

자동차/제조사 문서로.

5.2. 오토바이/제조사

오토바이/제조사 문서로.

5.3. 철도차량/제작사

철도차량/제작사 문서로.

5.4. 조선사

조선사 문서로.

5.5. 놀이기구 제조사

  • 인타민
  • 스카이라인 루지

6. 가상의 기업

7. 관련 문서



[1] 대표적으로 열차선박 같은 대형 이동수단들.[2] The manufacture of large, heavy articles and materials in bulk, 옥스퍼드사전.[3] 비철금속공업은 제련업이라고도 한다. 철이 하도 중요하다보니 철 이외의 금속을 뭉뚱그리게 되었으며 비금속(卑金屬)이 이에 속한다. 4대 메이저 비금속(卑金屬)으로는 알루미늄, , 구리, 아연이 있다. 비금속(非金屬)과는 다르다 비금속(卑金屬)은![4] 조선 초기에선 이런 경향이 비교적 약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 질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은 조선에서 도전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그 이외의 것들은 천한 것으로 여겨졌다.[5] 심지어 조선내의 시장에서 조차 조선인 사업가들이 외세의 사업가들에게 밀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의 공업제품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있고 이를 막아야할 관세가 개항 초창기에 제 구실을 못했던 이유도 있다.[6]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이 이 때에 성립했고,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도 이 때에 설립되었다.[7] 1897년에 시작한 공업화가 10년도 지나기 전에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던건 일본제국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총기를 비롯한 군수품을 자력으로 생산한다는 계획을 설립했었고, 그에 필요한 중공업진흥책도 있긴 했었다.[8] 실제로 1905년에 용산군기창이 설립되어 소총과 탄약 생산을 시작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된 탓에 제대로된 운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9] 카터 J. 에커트의 글에 나온다.[10] 당시 흥남 지역은 일본제국을 통틀어서 최대 규모의 공단지대였지만, 공장시설과 일본인 거주지를 제외한 대부분 조선인 구역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출처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11] 일본 본토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공업생산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반도는 원산, 신의주, 함흥, 인천, 부산 등에 있는 산업시설, 군사시설, 철도역, 부두에 대한 정밀폭격이나 신의주, 목포, 군산, 제주 등 항만을 목표로 한 소규모의 기뢰 살포 작전과 함재기를 동원한 인근 해상을 통과하는 전함, 화객선을 상대로 한 통상파괴 작전이 주를 이루어 민간인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폭격 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실제로 1945년 패전 직후,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 다수가 쑥대밭이 된 일본으로 돌아가기 보다, 조선에 계속 거주하기를 원했다.[12] 하지만 연합군의 공습으로 본토가 쑥대밭이 되어야 조선과 일본의 공업생산이 비슷할 정도로 반도와 열도의 공업생산 차이는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13] 전후복구에 필요한 공업역량을 보존하고 싶을 뿐만이 아니라 공업역량을 증설 및 유지할 철, 텅스텐 등의 원자재를 수급할 원산지이기도 했다.[14] 그리고 소련은 적지 않은 중공업 설비를 뜯어다가 자국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한반도 내의 공장들을 해방시킬 조선인들의 것이 아닌 일본 제국의 것으로 봤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15] 조선경제연감(1949)에 따른 1942년 매장량 기준[16] 발전소의 80% 빼앗긴 탓에 그나마 대한민국에 편중되어있던 다른 공장들의 가동도 어려워졌다. 수력에 한정해서는 96% 이상, 전체 발전 평균 실적으로 보았을 때는 92%를 빼앗겼다. 다만, 정부수립이 확실시 되는 1948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상당한 양의 전력을 공급해주었고, 공장 운영이 차질을 가장 큰 요인은 대일무역구조 붕괴와 공산화에 따른 물자 부족이었다. 이후로는 미군정의 관리부실 또한 크다.[17] 해방당시 제조업의 규모가 약 15억원이었고 이중 중공업(금속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이 7억원을 차지하였는데, 미군정에 넘어온 중공업 공장의 규모는 고작 1.4억원이었다. 그나마 기계공업의 경우는 대한민국 72%, 북한 28%으로 나뉘어졌는데 전체 규모가 5,30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18] 일본은 핵심기술자를 일본 본토에서 육성한 일본인 전문가로만 채웠다. 조선인은 기술자로 육성하지 않았다. 조선인 전문가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유학파가 아닌 이상은 대부분 전문학교를 졸업한 기술공들이었다.[19]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발전을 주도한 세대가 이 때 교육정책의 영향을 받은 세대다.[20] 대한민국은 지주들의 토지를 유상몰수 유상분배하고 농지소유에 한계를 두면서 자영농을 육성하면서도 지주들을 산업자본가로 키워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옛 지주들이 재산을 상실하거나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훗날 산업자본가로 성장할 인재들을 많이 상실했다.[21] 대우자동차의 전신. 자세한 내용은 신진자동차 문서로.[22] 25인승 H-SJ 차량 2천대를 생산하고도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고 이로 인해 부산에서 공장을 증설했다.[23] K-360, T-600[24] http://web.archive.org/web/20190811223312/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7360[25] 미국의 주요 원조품인 밀가루, 설탕, 면화를 가공하는 경공업 산업을 일컫는다.[26] 이 회사가 훗날 신진자동차와 통합해서 대우그룹에 넘어가서 대우자동차가 되었다.[27] 1972년 11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28]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던 1979년엔 1700달러대까지 상승하게된다.[29] 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30] 1972년 대통령의 비상조치로 모든 대기업사채를 동결하고, 강제로 금리를 대폭 인하하여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하거나, 출자전환하도록 하였다. 이외에 은행과 금융기관의 모든 예금을 동결하고, 강제로 금리를 내리도록 하였다.[31] 이와같은 성과는 짙은 음영과 함께 왔는데, 중강기업들이 무너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양극체제로 변화되어 현재의 재벌위주의 경제가 되었으며, 이러한 금융조치들이 사채업자들을 음지에서 양성화하여 악질적인 대부업이 발전하게 된다.[32] 구.삼성산요파츠/삼성전기파츠[33] 구.삼성조선[34] 구.코리아엔지니어링, 삼성엔지니어링[35] 구.삼성전관[36] 구.경성정공/기아산업/기아자동차[37] 구.현대정공[38] 구.삼원제작소/기아기공/기아중공업/위아[39] 구.현대다이모스[40] 구.인천제철/INI스틸[41] 구.한국철도차량/로템[42] 구.케피코[43] 구.현대미포조선소[44] 구.삼호중공업[45] 구.극동석유/극동정유/현대정유[46] 구.두산인프라코어[47] 구.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48] 구.대한석유공사/유공/SK/SK에너지[49] 구.SK종합화학[50] 구.SK건설[51] 구.LG실트론[52] 구.금성사[53] 구.금성정밀[54] 구.금성소프트웨어/LG소프트웨어/LG소프트/LG LCD/LG-필립스LCD[55] 구.락희화학공업사/럭키[56] 구.호남정유/LG칼텍스정유[57] 구.락희개발/럭키해외건설/럭키개발/LG건설[58] 구.한국광업제련/럭키금속/LG금속/LG니꼬동제련/LS니꼬동제련[59] 구.금성포장/금성계전/금성산전/LG산전/LS산전[60] 구.한국케이블공업/금성사 전선사업부/금성전선/LG전선[61] 구.여수에너지/정우에너지/호유에너지/LG칼텍스가스[62] 구.금성전선[63] 구.럭키MMA/LG MMA[64] 구.조선알마이트공업사/LG하우시스[65] 구.호남석유화학[66] 구.한국비료/삼성정밀화학[67] 구,삼성BP화학/롯데BP화학[68] 구.한국화약[69] 구.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중공업 조선사업부/대우조선/대우조선해양[70] 구.한양화학/한화종합화학/한화석유화학/한화케미칼[71] 구.삼성종합화학/한화종합화학[72] 구.삼성토탈, 한화토탈[73] 구.하동환제작소/동아자동차/쌍용자동차[74] 구.현대양행/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75] 구.호남에틸렌/대림산업 석유화학사업부[76] 구.포항종합제철[77] 구.포항강판[78] 구.포스코켐텍/포스코ESM[79] 구.한국합성고무[80] 구.쌍용양회/대한양회[81] 구.대한유화공업[82] 구.충북시멘트[83] 구.RH시멘트/라파즈한라시멘트[84] 구.동양화학공업/제철화학/동양제철화학[85] 구.한국이란석유/쌍용정유[86] 구. 삼성자동차[87] 구.동양세멘트공업/동양시멘트/동양메이저 시멘트사업부/동양시멘트[88] 구.조선중공업/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89] 구.토요소다공업[90] 우베코산[91] 구.신에츠질소비료[92] 구.일본옥도/쇼와비료/쇼와덴코/히타치화성공업[93] 구.일본질소화약/아사히화성공업[94] 구.일본석유/미쓰비시석유/토우아연료공업/제네럴석유/쿄도석유/재팬에너지/토넨/닛세키미쓰비시/토넨제네럴석유/신일본석유/JX에너지/JXTG[95] 구.가미오카광업[96] 구.미쓰이화학공업/토요고압공업/미쓰이토아쓰화학/미쓰이석유화학공업[97] 구.전기화학공업[98] 구.토요레이온[99] 구.오노다시멘트/지치부시멘트/일본시멘트/지치부오노다[100] 구.스미토모전선제조소[101] 구.스미토모기계제조/우라가중공업[102] 구.벳시광업[103] 구.스미토모비료제조소/닛신화학공업/스미토모화학공업[104] 구.스미토모시멘트/오사카시멘트[105] 구.신미쓰비시중공업[106] 구.일본타르공업/일본화성공업/미쓰비시화성공업/신코레이온/미쓰비시수지/미쓰비시화성/미쓰비시화학[107] 구.미쓰비시에도카와화학/일본가스화학[108] 미쓰비시광업/미쓰비시시멘트[109] 구.아사히글라스[110] 구.일본합성고무[111] 구.쿠라시키레이온[112] 구.카와사키제철/일본강관[113] 구.퍼시픽 코스트 오일 회사/스탠더드 오일 회사/스탠더드 오일/걸프 오일/유니온 오일[114] 구.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퍼니[115] 세계 3위 규모의 건설장비 제조 회사[116] 자동차 및 항공기 부품 제조 회사[117] 소형 인공위성 제조 회사[118] 방위산업체. 현 영국 국방부 장관인 벤 월러스가 해당 회사의 임원이었다.[119] 군용 항공기를 제조하는 방위산업체[120] 구.영국철강/코닌클라이크 후고벤스/코러스[121] 구.프랑스석유회사[122] 구.틈슨CSF[123] HDW 등 인수[124] 구.바디셰 아닐린 & 조다-파브릭[125] 구.데구사[126] 구.네덜란드 국영탄광[127] 구.코닌클라이크 조트 오가논/악조/노벨인더스트리[128] 구.ASEA/브라운 보메리[129] 구.라파즈/홀심/라파즈홀심[130] 구.노르스크 하이드로 비료사업부[131] 구.아르베드/우시노르/아르셀로/미탈스틸[132] 동시에 방위산업체도 겸하고 있다.[133] 스타워즈 세계관 최대, 최강의 군수기업으로 스타 디스트로이어를 개발하였다.[134] 기업은 아니지만 인류제국의 중공업 상당수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