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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1951년)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대한민국 여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자유당
(1951.12~1960.4)
민주당
(1960.8~1961.5)
대한민국 보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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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자유당
(원내 정당)[A]
자유당
(개별 합류)[B]
신정동지회
(개별 합류)
자유당
(합당)[C]
공화구락부
(개별 합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개별 합류)

대한국민당
(개별 합류)
자유당
(원외 정당)[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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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명 변경)
자유당
(개별 합류)[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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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
자유당
(원외 정당)[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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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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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
민주당
(개별 합류)
신정당
(창당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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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유당(1951년) 로고.svg
자유당
공식명칭<colbgcolor=#fff,#1F2023>자유당 (自由黨, Liberal Party)
창당일1951년 12월 17일 원외 자유당
1951년 12월 23일 원내 자유당
해산일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으로 와해)
선행조직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중앙당사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38 (견지동)
대통령이승만 / 제1-3대 (1951.12.17.~1960.4.26.)
당 색
청색 (#254170)

1. 개요2. 당명과 성향3. 현대 보수정당과의 연관성4. 역사
4.1. 원내 자유당의 창당 배경4.2. 원외 자유당의 창당 배경4.3. 두 개의 자유당4.4. 합당과 족청계 숙청4.5. 사사오입, 그리고 끝없는 파벌싸움4.6. 개헌 논의의 좌절과 온건파의 몰락4.7. 몰락4.8. 몰락 이후 ~ 해체
5. 부패와 악행
5.1. 수복지구 과세5.2. 연계자금 사건
5.2.1. 이승만 탄신 80주년 경축금
6. 역대 대표7. 역대 원내총무8. 출신 대통령9. 자유당의 인물, 정치인
9.1. 자유당 출신 주요 정치인
10. 역대 선거결과11. 주요 참조 항목
11.1. 관련 문서
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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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자유당2.jpg 파일:자유당3.jpg
부정으로 얼룩졌던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벽보.[8] 종로에 있던 자유당 중앙당사.[9]

대한민국 제1공화국정당.

1951년 창당되어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9년여 동안 대한민국 정치를 주도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집권여당이었다.[10] 사실상 이승만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후술하듯 집권 기간에 저지른 각종 악행과 사사오입 개헌 강행, 3.15 부정선거권위주의적, 반민주적 행위들로 국민에게 외면받기 시작하면서 4.19 혁명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실각했다. 이후 완전히 몰락해 형식상의 정당으로만 명맥을 유지하다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군부가 집권하면서 다른 여러 정당들과 함께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 2년여 만인 1963년 재창당이 논의되었으나 배종덕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 재건파, 김법린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 참여파, 이활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당 참여파,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 참여파 등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다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11] 결국 장택상 등 일부가 '이승만 정신 계승'을 내걸고 '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재창당했지만 만년 원외 군소정당 신세를 면치 못하다 1970년 단일 야당 신민당에 흡수합당되며 공식적으로 명맥이 끊어졌다.

2. 당명과 성향

당명은 '자유'당(Liberal Party)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름과 달리 결코 자유주의(liberal)·자유지상주의(libertarian)적인 정당이 아니었다. 당명의 '자유'가 당시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 진영인 북한과의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절 '반공을 위한 자유', '공산 진영과 대비되는 진영으로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냉전자유주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Liberal Party'가 아닌 'Party of Liberty'나 'Freedom Party'로 받아들여야 자연스럽다.[12]

다만 1950년대 한국 정치권에 존재했던 여러 정당 중 가장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정당은 아니었다. 민주국민당민주당으로 이어진 당시 야당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비판하며 대립하는 것이었을 뿐 이념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반공 보수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지층의 성격과 성향을 살펴보면 민주당이 더 우측이었다. 이 당시 일반적이었던 정치 구도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닌, 두 개의 보수우파 정당이 독재와 반독재로 나뉘어 대립하던 소위 '보수양당제'였다. 즉 당시 정치권에서 유일한 보수우파 정당은 아니었다.

3. 현대 보수정당과의 연관성

국민의힘을 오늘날 자유당의 직계 후신 정당으로 보기는 어렵다.[13][14] 상당수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친 자유당은 사실상 공중분해됐고,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각각 다른 정당으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일부는 재건된 자유당으로, 일부는 민주공화당으로,[15] 일부는 민정당, 국민의당민주당계 정당으로[16], 일부는 제3세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당시 민주공화당도, 민주당계 정당들도 자유당에 대한 정치적 계승을 주장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현재 자유당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는 정당은 없다.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뿌리정당은 3당 합당을 통해 창당된 민주자유당 혹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혁명재판을 통해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 정부 시절 주요 인물들과 정경유착 세력들을 철저히 파괴하거나 심지어는 사형까지 했으므로[17] 오늘날 국민의힘은 완전히 과거 이승만 정부 시절 자유당과 연관이 없다.

다만 국민의힘은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시절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영정을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정과 함께 당사에 걸어두기도 했다. [18]김재원 전 최고위원은 이승만을 박정희, 전두환 등과 함께 거론하며 "우리 당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대통령"이라고 발언한 적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듯 현재의 제1보수정당은 자유당의 후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자유당을 본인들 말로만 계승했다고 보는 게 맞다.[19]

그럼에도 자유당이 마치 국민의힘과 계보상으로 연결된 사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20] 이는 1990년대 정계, 언론계에서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등을 모두 보수여당계로 싸그리 퉁치는 정당분류법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정당들의 공통점은 각 공화국 때 집권여당이었다는 것 밖에 없으며 각 구성원 및 그들의 가치관들을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자유당 세력은 민주공화당 출범 이후 민주당 등과 함께 범야권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과 같은 진영의 전후신 관계로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4. 역사

사건 순서 자유당의 창당 과정[21][22]
1 무소속구락부(1950년)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청년단 국민회
2 민정동지회 국민구락부 대한청년단 내 족청계
3 공화구락부 신정동지회
4 1951년 12월 23일 원내 자유당 창당 1951년 12월 23일 원외 자유당 창당
5 잔류파(간부파) 합동파(삼우장파)
6 원외 자유당
7 신라회
8 1953년 5월 30일 자유당으로 재편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반에 걸쳐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을 통해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무능과 무책임이 드러난 결과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야당인 민주국민당김성수가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대통령 선출권한이 국회에 있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는 1952년을 앞두고 재집권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위한 신당 창당이 필요해졌다.

4.1. 원내 자유당의 창당 배경

공화민정회는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1951년 5월 통합해 150석이 넘는 의석으로 출범한 거대 원내교섭단체였다.

본래 신정동지회는 신성모 등이 이끌던 대한청년단이 여러 군소정당, 기타 친정부 성향 의원들을 규합해 만든 민정동지회를 근간으로 한다. 여기에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수 윤치영이 낙선하는 등 상당한 난관에 봉착한 대한국민당(1949년) 의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세력이 불어나게 된다. 그러다 잔류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의원들이 장택상계의 영우회와 합쳐 결성한 국민구락부와 합쳐 신정동지회를 이루었다. 국민구락부 의원 43명과 민정동지회 의원 63명이 합쳐져 신정동지회는 총 106석에 달하는 거대 의석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항해 반이승만, 반한청 성향 무소속 의원들이 공화구락부를 결성, 46명의 의원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공화구락부는 통합 바로 얼마 전에 실시된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민국당과 공조해 김성수를 부통령에 당선시켰을 정도로 반이승만 성향이었고, 신정동지회는 친이승만 성향이었다. 공화구락부 의원들은 대체로 일제강점기 시기의 관료출신, 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되었으며 전문직 정치인들보다는 초선의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공화구락부는 이후 야당에도 영향을 주어서 민주당 신파의 뿌리가 되었으며, 일제 치하에서 관료로 지냈기에 일본에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반일 성향을 지닌 구파하고 일본 관련 문제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신정동지회는 이미지 쇄신이 절실했고[23], 야권 주도권 싸움에서 민국당에 밀리고 있던 공화구락부는 세력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두 세력은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통합을 하게 된 것이었다. 국회의원은 공화구락부가 39명, 신정동지회가 69명으로 신정동지회 측이 훨씬 많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신정동지회는 약점이 많았기 때문에 신당 작업은 오위영 등 공화구락부계가 주도했다.

사실 오위영 등이 신당을 만들려고 한 것은 전쟁 직후부터였다. 의원들은 이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서울을 뺏기고 자신만 몰래 피신한 데 대해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왜 내가 책임이 있느냐고 역정을 냈다. 의원들은 국무위원들한테도 책임을 물었다. 그러면서 의원들은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것보다 정당을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위영 등의 신당은 1950년부터 모색되었고, 1951년 5월 공화민정회가 발족하면서 신당준비위원 등을 선출했지만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이는 신정동지회계의 내부 사정이 복잡했고, 이승만 지지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위영 등은 신당 작업을 벌이면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냈고 미국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장면 국무총리(2대)를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한 활동도 벌였다. 이처럼 원내 자유당은 이승만과는 거리가 먼 정당으로 시작했다. 즉, 아래에서 설명할 원외자유당과는 우연히 이름이 같았을 뿐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

4.2. 원외 자유당의 창당 배경

1951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이후 8월 25일 이승만은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그는 신당은 대부분이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민간단체인 경우 개인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원외에서의 정당 조직은 국무총리·국방장관이었다가 1951년 초 주중대사로 나가 있던 이범석이 8월 말 귀국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당시에 해체되었으나 여전히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고 있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계의 지도자였다.[24] 그는 원내 자유당에서 나온 신정동지회 또는 신정회라고 불리는 원내교섭단체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세계관, 정치관에서는 민주국민당을 필두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의원들이 지주, 자본가 등 부유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절대다수 노동인구를 대표해 이들 계급정당에게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승만 친위였던 '원외 자유당'의 본디 이름은 자유당도 보수당도 아닌 통일노농당이었다. 당시에도 이 이름은 좀 많이 쇼킹(...)했는지 원외신당과 원내신당의 합당협상을 결렬시킨 시비거리중 하나였다. 재밌는 것은 통일노농당이 자유당으로 이름을 바꾼 건 합당 협상을 진척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결국 통합이 무산되면서 애꿎은 당명만 바꿔 동명의 당이 두 개가 되는 꼴이 돼버렸다. 원내 자유당 측은 "당명이 같다는 그 이외에 아무런 공통성도 발견할 수 없다"며, "통일노농당이 자유당으로 참칭한 것은 본 자유당과 합류할 전제라 했고 본당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문호를 개방한 채 있다. 통일노농당이 본 자유당에 합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나 아무런 이념적인 변경도 없이 자기의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남의 명칭을 혼칭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던 분별 없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기사

4.3. 두 개의 자유당

1951년 8월 이승만의 광복절 기념사가 나오자 공화민정회 측과 국민회·대한국민당·대한청년단 등 이승만계가 자리를 같이했다. 공화민정회 측이 이 모임에 나간 것은 대통령 기념사 이후 신정동지회계가 동요한 것이 한 요인이었다. 원외 측과 공화민정회 측의 회동은 9월 말 다시 있었으나 신당 조직을 위한 양측의 회합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원외 측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화민정회 측은 이승만의 1인 정당에 반대했다. 원외 측은 대통령중심제와 대통령직선제, 양원제를 주장했는데, 공화민정회 측은 단원제, 내각책임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공화민정회의 중심 인사들이 원외 자유당 측과는 달리 이승만을 개인적으로 숭배한다기보다는 이승만의 명성이나 인기를 등에 엎고 자신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실권을 누리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들이 내각책임제를 주장한 것 역시 이러한 의도에서였다.

1951년 11월 말경 공화민정회 소속 70여 명의 국회의원은 공화당·자유당·민주사회당 등 세 개의 명칭을 갖고 투표에 부쳤다. 자유당이 41표로 가장 많아 자유당으로 당명을 정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12월 10일경 통일노농당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원외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명을 자유당으로 하기로 했다. 이들은 원내 측에서 당명을 자유당으로 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2월 14일 원내 측이 공보처로 정당 등록을 하러 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12월 17일 발기인대회를 가진 원외 측은 다음 날 이승만을 대표자로 한 자유당 등록서류를 공보처에 접수시켰다.

1951년 12월 23일 두 개의 자유당이 탄생했다. 이날 오전 국회의사당에는 90여 의원이 참석해 자유당 결당대회를 가졌다. 당수 격인 중앙위원회 의장은 이승만이었고,출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오위영이었다. 원내자유당 주류는 장면을 지지했다. 오후에는 원외 측에서 발당대회를 가져 당수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부당수에 이범석을 선임했다. 초기 원외자유당 의원은 양우정 등 두세 명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두 자유당이 출범한 직후 "내가 인정하는 자유당은 (원외) 하나 뿐"이라고 성명, 원내 자유당을 부정했다. 그래서 제1 공화국의 여당은 이때부터 원외자유당으로 치며, 이후 원외자유당이 원내자유당과 합당해 통합 자유당이 창당된 이후로는 이 통합 자유당이 여당이 된다. 실제로 당시의 신문 기사에도 원외자유당을 '여당'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승만이 저런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원내 자유당이 전혀 도움이 안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반면 원외 자유당은 비록 국회 외부에 대부분이 있지만 우선 족청계가 주도적으로 창당을 주도한 만큼 전국적인 조직기반이 이미 탄탄하게 갖추어져 있고, 따라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에 국민의 뜻이라며 데모와 전방위적인 국회 압박을 통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4.4. 합당과 족청계 숙청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이 제출한 양원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국회 투표 결과는 압도적인 부결이었다. 이는 민주국민당, 원내자유당 등 국회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세력들이 개헌안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투표 이후 반대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안하는데, 이에 대해 이승만은 정부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원내 자유당이 다음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승만은 원내 자유당 내의 반 이승만파를 내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52년 2월, 우선 원외자유당 측에서 국회 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재보궐선거에 후보를 내 7명의 후보를 당선시킨다. 이후 당의 전국적인 지방 조직기반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이승만은 지금까지 미뤄왔던 지방의회 구성을 밀어붙였고, 4~5월에 치러진 지방의회 선거에서 족청이나 기타 당 구성에 참여한 사회단체들까지 동원한 결과 원외자유당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원내자유당 내의 친이승만파와 반이승만파의 분열을 재촉하는 한편, 의원들을 하나하나 포섭해 나가며 반이승만파의 고립을 부추겼다. 그 결과 원내자유당은 원외자유당과 합당을 주장하는 삼우장파와 이에 반대하는 잔류파로 분리되었다. 이승만의 속셈을 알아챈 잔류파는 민주국민당과 다시 연합해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고, 이승만은 여기에 총리 장면이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해 장면을 총리직에서 내쳐버리고, 결국 장면은 자유당을 탈당하기에 이른다.

어쨋든 장면을 내친 이승만은 잔류파의 일원인 장택상을 총리로 임명해 잔류파의 분열을 가속화시켰고, 이에 장택상은 잔류파 의원들을 규합해 아예 탈당 후 신라회를 결성, 합동파는 원외 자유당과 합당함으로서 일차적인 통합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방해물이 다 제거되자 이승만은 52년 5월 다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이 과정에서 족청계나 정치깡패 등을 대거 동원해 부산 정치 파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발췌 개헌이라는 초법적인 수단을 통해 개헌에 끝내 성공했다. 이때 이승만은 원외자유당이 장악한 각 지방의회를 기반으로 개헌안 찬성 군중집회를 유도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국회 해산을 종용하도록 정치단체 및 정치깡패들을 이용함으로서 개헌안 반대 세력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이승만은 52년 8월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이범석이 아닌 이승만보다도 나이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다는 뜻. 이범석은 이에 반발하여 부통령 선거에 독자출마한다. 이범석은 자신이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두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걸 확인,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지만, 이는 흐지부지된다.[25]

한편, 2대 대선에서 원내 자유당 내 합동파(삼우장파)와 원외 자유당의 지지를 받아 대선에서 손쉽게 승리한 이승만은 이제 반이승만파가 완전히 숙청되었다고 보아[26] 1953년 5월 원내, 원외 자유당의 합당을 지시했고, 장택상이 이끄는 신라회 역시 여기에 참여함으로서 통합 자유당이 결성된다.

이승만은 이후 자유당의 당수·부당수제도를 폐지하고 총재제로 할 것, 중앙위원제로 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당수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총재가 되었으며, 부당수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이범석은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총재제 실시는 이범석의 힘을 꺾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공천부터 시작해 정당의 모든 것을 절대군주마냥 다룰 수 있는 총재라는 직위의 특성상 자신이 자유당의 모든 권한을 틀어쥐기 위함도 있다. 이승만은 6월 5일 이범석을 반 강제로 여비도 조금밖에 주지 않은 채 외유를 떠나게 했다.

다음 거세 대상은 남로당원이었던 특별징계위원회 위원장 신형식이었다. 그는 연설장에서의 실언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족청계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양우정의 구속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의 충실한 이데올로그로 활동했고, (원외)자유당을 만드는 데 공로자였던 양우정은 후로이 사건을 터뜨려 장택상을 실각시킨 『연합신문』 편집국장 정국은이 간첩 혐의로 8월 말 구속됨으로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에는 특무대장 김창룡이 팔을 걷고 나섰다. 10월 17일 족청계였으나 이미 돌아선 백두진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제출된 양우정 의원 구속동의안이 압도적 표차로 가결됨으로써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이범석의 정치 생명은 끝장이 났다. 결국 1953년 12월 이범석을 포함해 족청계가 대거 제명되었다.

족청계가 몰락한 이후로 이승만은 이기붕을 팍팍 밀어주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이기붕계가 점차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당 자체가 원래 서로 이질적인 계파들을 거의 억지로 합쳐놓은 것에 가까운지라[27], 파벌싸움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일차적으로 1954년 과거 원내자유당 출신인 장면, 현석호, 이태용 등 장면계가 대거 탈당해 민주국민당과 합당, 민주당을 창당했고 독립노농당~대한노동총연맹 출신이자 당내 거의 유일한 반공혁신계열인 전진한계가 탈당해[28] 노농당을 창당했다. 이때 장택상계 역시 탈당해 호헌동지회를 결성함으로서 민주당 참여를 시도했으나 조봉암을 민주당에 받아들이는 문제로 갈등이 생기는 바람에 실망하고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온다.

4.5. 사사오입, 그리고 끝없는 파벌싸움

제헌헌법에 대통령이 연임만 할 수 있다고 규정된 조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승만은 자신의 종신 출마를 위한 개헌을 시도했는데 의석수가 2/3에서 한 명 모자라 사사오입 개헌이란 사상초유의 병크를 터트렸다. 그러나 정작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출마를 하게 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봉암, 신익희[29]와 힘겹게 싸워서 온갖 부정부패를 통하여 승리하고 조봉암은 북한 간첩으로 몰아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사법살인으로 살해한 뒤 정당 자체를 해체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당 후보로 나선 이기붕이 낙선하고 야당 후보 장면이 당선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잠시동안 조용했던 파벌 문제가 끝내 폭발하여, 당시 자유당 내 양대 파벌인 이기붕계[30]조경규계[31]가 국회의장직을 놓고 극한 대치를 이어갔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의장직을 놓고 벌인 대립이지만 실상은 비주류파인 조경규계가 이승만을 등에 업은 이기붕계를 공박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 다툼은 이승만이 중간에 개입하는 바람에 이기붕계가 주류 지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으나, 도리어 자유당 내 파벌 문제는 더 격화되어 이재학계장경근계 등이 새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의 기사에 따르면 이기붕계와 다른 비주류계 간의 세력균형은 4:4~5:3 사이를 오갔으며, 이기붕계 측에서는 세력 균형을 자신들 우위로 확실히 만들어놓기 위해 뒷 정치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1958년 제4대 총선 이후로 파벌다툼은 더욱 격화되어, 이기붕계의 우세가 확실한 가운데 나머지 파벌들끼리 당무 주요 요직이나 국회 상임위 의장 직위를 놓고서 싸우는 형세가 연출된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상임위 의장을 사실상 자유당에서 완전히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에 더해 당직 개편 논의까지 겹쳐져 어느 파벌에 얼만큼 직위를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로 내분이 벌어진다. 조경규계는 새롭게 떠오른 이재학계에 합세해 당내 온건파를 이루었으며, 이에 대항해 장경근계가 당내 강경파를 이루는 한편 총선에서 이기붕에 의해 낙점되어 새로 국회에 입성한 의원들 중심으로 소위 '소장파'가 결성되었다.

이 소장파는 이름과 다르게 사실상 이기붕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집단으로, 이들은 현 자유당 간부진이 무능하다고 주장하며 강경파인 장경근계와 손잡고 이재학계를 완전히 배재하고 세력을 늘리려 시도하였다. 이들은 1958년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사실상 언론탄압 규정을 마련한 2.4 정치파동 이후로 이것에 대한 책임소재를 놓고 더욱 거세게 대립했으며, 본래 1958년 중반에 열려야 할 전당대회는 거의 1년 가까이 연기된 끝에 결국 1959년 중반이 되어서야 개최한다. 본래는 2.4 정치파동의 여파에서 실질적인 주도는 강경파 위주로 이루어졌음에도 당시 당 간부진을 이루고 있던 온건파가 야당의 집중 비판 대상이 됨으로서 강경파가 우세했으나, 1959년 새해 직후 벌어진 부산 범칙물자 처분사건의 여파로 강경파가 다시 수세에 몰렸다.

4.6. 개헌 논의의 좌절과 온건파의 몰락

일단 우세를 잡은 온건파는 2.4정치파동 이후 극도로 긴장 상태에 몰린 정국을 수습하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이재학 부의장 주도로 민주당 구파에 속하는 간부들과 함께 내각책임제 시행, 끝없이 연기되고 있는 참의원 구성, 국가보안법 중 언론탄압 조항[32] 삭제, 지방자치법 개정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 시행을 위한 막후교섭에 나섰고, 이기붕 역시 총선에서 개헌선 확보에 실패했으므로 개헌 시도를 포기하겠다는 초반의 입장을 바꾸어 개헌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표명했다. 한편 민주당 구파로 이루어진 당 지도부는 공식적으로는 민주당 신파 및 재야의 반대를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자유당과 막후 개헌 논의를 하지 않는다고 부인했으나, 뒤로는 의원들을 참석시켜 개헌 논의에 임하게 했고, 4월 초가 되자 공식적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에 자유당은 민주당이 작성하는 개헌안 초안을 보고 이에 대해 절충안을 작성하는 것으로 막후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이에 민주당 신파가 강경하게 반발하는 형국이었다. 민주당 신파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중에는 어떠한 개헌 논의도 있어서는 안되며, 자유당과의 협치 역시 불가하며, 개헌 논의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야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자유당 온건파가 갑자기 개헌에 나서게 된 것은, 현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이승만 이후 민주당으로부터 헤게모니를 유지할 만한 지도자 확보가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4월 중반 이승만이 공식적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은 불필요하다고 발표하고, 추가로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함으로서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자유당 내 개헌 논의를 이끌던 이재학은 '그렇다고 개헌 논의가 불필요해진 것은 아니다'라며 개헌 정국을 유지하려 애썼고, 민주당 구파 지도부 역시 신파의 격렬한 공격을 뚫고 개헌 논의를 이어가기로 합의했다. 한편 장택상 등 무소속 의원들 역시 대통령 간선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기하였다. 이후 거의 2달에 가까운 시간이 걸려 6월 11일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안 요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기붕은 개헌안을 추진하겠다는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사실상 보류나 거부에 가까운 태도를 취했고, 이후 전당대회에서 이승만, 이기붕의 정, 부통령 출마가 확실시됨으로서 개헌 추진은 사실상 물 건너간 셈이 된다. 이러한 자유당의 태도에 민주당 역시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후 개헌을 논의하기로 결심하고 정, 부통령 후보를 물색하기 시작함으로서 어쩌면 자유당 정권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마지막 가능성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당내 주요 간부진에 대한 지명은 본래 이기붕의 지명제였으나, 7월달까지만 해도 이기붕이 온건파 위주로 당 간부직을 지명한다는 소문이 나는 등 온건파가 승기를 잡나 싶었는데, 8월 후반기 들어 갑자기 이기붕이 당 간부를 강경파 위주로 독점시킨다는 소문이 유포되자 온건파가 강경하게 반발, 투표제를 주장하고 나선다. 그러자 이기붕이 개입해 온건파와 강경파 양 축에 모두 간부직을 배분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가장 중요한 직위인 원내총무(현재의 원내대표) 직은 온건파의 이성주도 강경파의 박만원도 아닌 엉뚱하게도 정문흠 의원을 지명함으로서 갈등은 일단락된다.[33]

이후 자유당은 온건파의 이재학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재학계, 강경파의 임철호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임철호계, 그리고 이기붕에 의해 국회 부의장에 지명된 한희석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한희석계로 재편된다. 한희석이 국회부의장으로 지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실상 이재학계(온건파)가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모습이었으나, 국회 부의장에 이재학과 함께 강경파에 속하는 한희석을 임명하자 다시금 급격히 강경파에게로 세력균형이 쏠리게 된다. 출처 한편 소위 '소장파'들 역시 십인구락부라는 이름의 정치단체를 출범시켰는데, 여기 구성원들에서 이재학계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이 십인구락부는 명목상으로는 소장파 의원들의 친목단체이나, 실질적으로는 이기붕계 및 강경파 핵심 간부들이 모여서 중요한 정치 현안을 자기들끼리 좌지우지하는 비선 조직에 가깝게 운영되었다. 심지어 아래에 나오듯 야당(민주당)과의 협의도 이 십인구락부가 실질적으로 담당했다. 해당 기사에 의하면 한희석 선출 이후 강경파와 온건파의 세력 비율은 3대 1정도 된다고 한다.

여기에 이재학계에 속했던 최창섭 의원이 비리 혐의로 제명당한 것은 이 세력변화에 쐐기를 박는 셈이 되었다. 이때문에, 지금까지 자유당 내에서 대야관계 및 실질적인 국회 교섭을 온건파 간부가 담당해 온것과 달리 이 즈음부터는 강경파, 특히 십인구락부가 대야관계 및 국회 교섭을 독점하게 된다. 민주당에서도 자유당과 협상이 있을 대는 십인구락부 멤버들과 만나 상의하는 등, 확연히 강경파가 세력상 우위에 선 것이다.

4.7. 몰락

어쨋든 이런 이유들로 인해,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의 주도권을 잡은 강경파의 주도로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34] 3.15 부정선거지지도 90%를 이뤄냈다.[35]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4.19 혁명이 일어났고, 견딜 수 없었던 이승만하야하고, 이기붕이 아내 박마리아와 함께 아들인 이강석에게 살해돼 자유당 정권은 붕괴했다.

자유당의 악행이 너무나도 심했던지, 당시에는 힘 센 아이가 애를 때려놓고는 "왜 때리냐?"고 물으면 "난 자유당이다!"라고 하곤 했다고 한다.[36]

당시 자유당의 멸망에 대해 유행처럼 떠돌았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자유당은 두 가지 (癌)으로 죽었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는 박마리아 암이었고[37]
최인규[38]는 강심제 주사를 놓다가 바늘부터 부러진 격이다.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시대 배경이 바로 이 시대이며, 내용 자체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그 하나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만은 아니지만.

위와 같은 병크와 흑역사 때문에 국내의 자유주의 정치 세력들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자유당'이란 공식 명칭과 약칭을 쓰지 못하고, 다른 단어와 자유라는 단어를 붙이고, 자유가 아닌 약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당명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정당들을 살펴보면, 민주자유당의 약칭은 민자당, 자유선진당의 약칭은 선진당, 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약칭은 '한국당'이지만 자유한국당에 반감이 큰 민주·진보계열 인사들과 그 지지자들은 자유한국당을 지칭할 때 자국명인 '한국'을 붙이기 싫고, 이승만이 하야한 자유당과 박근혜가 탄핵당해 쫒겨난 자유한국당의 이미지가 겹치며,[39] 이승만을 국부라며 미화하니 일부러 '자유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40] 그래서 당명 개정 초기에 그걸 잘 아는 민주당의 홍영표 당시 환노위원장은 순순히 한국당이라고 안 불러주고 일부러 자유당이라고 부르면서 도발했고 그러자 엄용수 의원은 "야!" 하면서 반발하기도 했다. #

4.8. 몰락 이후 ~ 해체

자유당 자체는 4.19 혁명 이후에도 존속이 되었었고, 과거 이기붕계에 맞서 온건파를 이루었던 조경규 의원이 총재 겸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갑식, 정운갑, 김의준[41] 등 부정선거 규탄 등을 내세우며 '혁신파'를 자처한 전직 비주류 또는 온건파 출신 자유당 의원들 42명이 헌정동지회로 빠져나가는 등 내홍을 겪었으나,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둘다 사이좋게 망하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자유당이 없어진 것은 5.16 군사정변 직후 기존 정치단체들의 강제 해체 과정에서이고, 장택상에 의해 재건된 자유당이 1970년까지 남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당도 중간에 장택상이 탈당하고 자유당 온건파를 이끌던 이재학 중심으로 운영되다, 1970년에 신민당에게 흡수되어 해산되었다.[42]

자유당에 소속되었던 인사들은 최인규 등의 일부를 제외하고 그 이후에도 민주당계 정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에 영입되어 정치 생명을 계속 이어나간 경우도 있었으며, 대부분의 인사들은 기업인, 언론인으로 변신하여 잘나간 경우도, 정계를 아예 은퇴하고 조용히 산 경우도 있었다. 물론 5.16 정변 직후 '혁명재판'에서 4.19 핵심관계자들은 처형되었지만 말이다.

2020년에는 뉴스타운이라는 극우 언론이 주도가 되어 이 당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정당이 창당했다.[43]

5. 부패와 악행

자유당 내부에서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사방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 자신이 공무원들의 월급을 적게 줬던 것이 한몫했다. 왜냐면 이승만은 공직자들은 나라에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닌 봉사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고 공직자들의 월급을 엄청나게 적게 잡아 당시 한국의 공무원 월급이 통근전차요금도 안될정도였다. 그야말로 쥐꼬리만한 수준으로 주다보니, 공무원과 군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릴수밖에 없었고 미군이 준 원조물자나 군수물자들을 팔아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보다못한 백선엽이 이승만을 찾아가서 장교들 월급이 너무 박해서 장교들이 보급받은 c레이션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군인들의 월급을 올려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올려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면서 공무원 의식 개조를 위해서는 월급을 올릴 수 없다며 거절해버렸는데 그 결과는 시망. 애초에 조선 왕조에서도 이런 식으로 박봉을 줬다가 부정부패가 판을 쳐 나중에가면 조선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 왕조를 그렇게 혐오했던 이승만이었지만 결국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44]

5.1. 수복지구 과세

6.25 전쟁 이후 과거 북한 땅이었지만 휴전 이후 남한 땅이 된 강원도 양구, 화천 등 새로 수복한 지구인 수복지구에 가난한 시민을 대상으로 군 사령관을 시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으니 세금내야 된다는 명목으로 법에도 없는 세금을 받아[45] 자유당에서 사용했다.[46]

5.2. 연계자금 사건

1958년 5·2총선을 약 2주일 앞둔 4월 20일부터 산업은행에서 기간산업 육성자금 명목으로 특혜자금 40억환을 12개 기업체에 부정대출 했다는 것이다. 대출목표를 80억환으로 책정한 이 특혜자금의 재원은 산업은행에서 차후 금융채권을 발행해 마련키로 하고 우선 산업은행 지불보증으로 시중은행이 먼저 대출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연계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0년대 후반 당시 산업은행은 자유당 정권의 친여권 기업에 대한 권력형 부정대출의 주된 창구였다. 당시 산업은행 본점은 지금의 롯데호텔 서울 자리에 있었다.

산업은행 자금은 이른바 정치 자금의 루트로 알려져 많은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고 있었는데 특히 이 연계자금의 대출대상기업체 중에는 부실 섬유기업체들이 들어있어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더욱 거셌다. 이들 기업체는 실제로 1∼2년 내에 파산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7월 15일 새로 구성한 제4대 국회에서 산업은행 연계자금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려 했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런 부실·불법대출로 인해, 1958년 말 산업은행의 대출연체액은 총 대출 1000억환 중 500억환 이상이었다. 산업은행은 이미 전과가 있었다. 1954년의 금융계 부정사건과 제1회 산업부흥국채사건, 1956년의 지불보증사건 등이다. 지불보증사건은 폭설피해 복구자금으로 5억9600만환, 대한석탄공사 8억환, 대한중공업 5억6000만환, 조선전업에 15억환, 주택영단[47]에 3억4000만환을 각각 국회동의 없이 불법 지불보증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재가 재발방지를 서약했다. 어찌 산업은행뿐이겠는가? 당시 정치 재벌의 손아귀에 장악된 시중은행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5.2.1. 이승만 탄신 80주년 경축금

자유당정권 하에서 가장 황당한 은행대출은, 아마도 1955년 실행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금 대출일 것이다. 그 해 봄 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 탄신경축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을 추대했다.

위원회에서는 이승만의 팔순을 축하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기 위해, 전국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20환씩 더 거둬 그 돈을 조성하기로 했다. 입장권이 200환 미만이면 10환, 200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는다는 것이니,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강제로 털어 자신들이 이승만에게 잘 보이겠다는 심보였다.

1955년 3월 26일에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에 따르면 "당일 아침부터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 온 방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내한한 미국의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 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자유중국 대사 등이 잇따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이 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숙명여고와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고, 그 주변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군인들까지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 하늘에는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국군의 날처럼 탱크부대까지 동원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에서는 탄신 경축 기념식수와 경축 경로잔치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내에는 ‘탄신’을 축하하는 꽃마차까지 다녔다. 여성 궁사들을 동원해 기념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려면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관객들에게 돈을 거두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래서 4대 시중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키로 한 것이었다. 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이승만이 총애하던 정치깡패)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4개 은행이 공동으로 3억환의 대출을 실행했다. 이 돈은 이승만의 동상건립기금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 후 1959년 4월까지는 전국의 극장에서 거둔 돈으로 원리금을 갚아나갔으나, 혁명이 터지자, 원리금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무자인 이기붕은 혁명 직후 살해되었다. 따라서 4개 은행은 1960년 11월 24일 현재 652만5944환의 부실채권을 안게 됐다.

이에 은행들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전국의 각 극장에 요청했으나, 채무자도 아닌 극장들이 갚을리 만무했다. 할 수 없이 은행들은 임화수 등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상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물론 승소했다. 임화수와 백운성 등에게는 압류할 만한 변변한 재산이 없었기에, 연체대출금은 대부분 끝내 회수하지 못했다.

6. 역대 대표

파일:자유당 심볼(백색).png 파일:자유당_투명.pn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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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54170> 제1-5대
이승만
제6대
조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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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직함 이름 임기 비고
초대 당수 이승만 1952년 3월 20일 ~ 1952년 9월 26일
제2대 총재 1952년 9월 26일 ~ 1955년 5월 10일
제3대 1955년 5월 10일 ~ 1957년 3월 28일
제4대 1957년 3월 28일 ~ 1959년 6월 29일
제5대 1959년 6월 29일 ~ 1960년 4월 24일 4.19혁명으로 사임
권한대행 1960년 4월 24일 ~ 1960년 6월 15일
제6대 대표 조경규 1960년 6월 15일 ~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으로 정당 해산

7. 역대 원내총무

파일:자유당 심볼(백색).png파일:자유당_투명.png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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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제2대
이재학
제3-4대
김법린
제5대
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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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익
제7대
정문흠
제8대
조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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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1 파일:이승만_흑백 공식사진.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이승만
(1875 ~ 1965)
1 1948년 7월 24일[48] 1952년 8월 14일 1948년 대선
간선 92.3%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 ~ 51)
자유당 (1951 ~ 60)
2 1952년 8월 15일 1956년 8월 14일 1952년 대선
직선 74.6%
3 1956년 8월 15일 1960년 4월 27일 1956년 대선
직선 70.0%

9. 자유당의 인물, 정치인

9.1. 자유당 출신 주요 정치인[49][50]

자유당 출신 정치인
<rowcolor=#000> 소속기간 이름 당 직위 비고
1954 김영삼 <colcolor=#000> 자료 없음.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신한국당 명예총재
1951~1960 이승만 내용없음 1대~3대 대한민국 대통령
? 이기붕 내용없음 ※ 3~4대 국회의장
? 강성태 중앙당 상무위원장 조선총독부 근무[51]
일제강점기의 관료.
자유당 소속 제4대 국회의원
? 유석형 자유당 마산시당 조직부장/
자유당 마산시당 감찰부장/
자유당 마산시당 고문
대한청년단 단장
국민회(한민회) 초대 조직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 결성.
1957년 국민회(國民會) 지부장
자료없음. 김종신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민보단 고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참여
조선독립촉진마산협의회 부의장
자유당 창당에 적극 참여/초대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마산시의원/마산시장/제3대 국회의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자유민주당[52] 지구당 위원장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신문사 사장/방송사 사장
자료없음. 문삼찬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
김종신의 국민회(國民會) 사업부장직을 넘겨 받음
1948년 민족청년단 경남지부 마산시단장
마산의 대흥주조장(大興酒造場) 양조업자/백광소주 사장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1955년 2월 결성된 마산문화인협의회(문협)의 2대 의장/3대 회장
1957년 마산체육회장
1960년 3.15 부정선거 시기 김종신과 같이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우당(民友黨) 경남 제1지구당 위원장
최종적으로 민주공화당에 합류

10. 역대 선거결과

11. 주요 참조 항목

11.1. 관련 문서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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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자유당 (1951.12.~1960.4.)
한국민주당 (1948.7.~1949.2.)
파일:투명.png민주국민당 (1949.2.~1949.11.)
파일:투명.png대한국민당 (1949.11.~1951.12.)
장면 내각 민주당 (1960.8.~1961.5.)
박정희 정부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전두환 정부 민주정의당 (1981.1.~1988.2.)
노태우 정부 민주정의당 (1988.2.~1990.1.)민주자유당 (1990.1.~1992.10.)
문민정부 민주자유당 (1993.2.~1995.12.)신한국당 (1995.12.~1997.11.)
국민의 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파일:투명.png민주국민당 (2001.4.~2001.9.)
참여정부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열린우리당 (2004.5.~2007.2.)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2008.2.~2012.2.)새누리당 (2012.2.~2013.2.)
박근혜 정부 새누리당 (2013.2.~2017.2)자유한국당 (2017.2.~2017.3.)
문재인 정부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 (2022.5.~현재)
국민의미래^[A]^ (2024.2.~2024.4.)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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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254170,#ddd><colbgcolor=#f5f5f5,#2d2f34> 구성 인사
여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자유당
연립여당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대한국민당
정책 및 방향 경제개발 3개년 계획 · 의무교육 · 의무 복무 · 시장경제체제 · 지방자치제 · 한미상호방위조약 · 농지개혁법 · 국가보안법 · 이승만 라인 (평화선) · 한국외국어대학교 · 인하공과대학
평가 평가 ·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타임라인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통과 · 행정권 이양 · 제주 4.3 사건 · 여순사건 · 국가보안법 제정
1949년 반민특위 해산 · 해병대 창설 · 공군 창설 · 병역법 제정 · 징병검사 실시 · 국회 프락치 사건 · 백범 김구 암살 사건
1950년 6.25 전쟁 발발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유엔군 참전 · 한강 인도교 폭파 · 부산 수도 이전 · 인천 상륙 작전 · 흥남 철수 · 한강 방어선 전투 · 춘천-홍천 전투 · 주문진항 해전 · 오산 전투 · 동락리 전투 · 진천 전투 · 천안 전투 · 대전 전투 · 장항-군산-이리 전투 · 안동전투 · 다부동 전투 · 흥남철수 · 보도연맹 학살사건 ·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 선거법 제정 · 국민방위군 설치령 · 농지개혁 · 한국은행 발족 · 유네스코 가입
1951년 1.4 후퇴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 · 한국조폐공사 설립 · 자유당 창당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 발췌 개헌 · 이승만 라인 (평화선) 선포 · 백마고지 전투
1953년 정전 협정 (휴전)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국제시장 대화재 · 노동 3법 제정
1954년 사사오입 개헌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독도의용수비대 파견
1955년 단성사 저격 사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 1956년 지방선거 ·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 한국증권거래소 발족
1957년 저작권법 제정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 가짜 이강석 사건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진보당 사건 · 농업협동조합 발족
1959년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 조봉암 사형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2.28 학생민주의거 ·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 김주열 최루탄 사건 · 장면 부통령 사퇴 · 이승만 대통령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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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제1공화국 ~ 제4공화국
(1948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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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이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선민족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노농당 일민구락부 대한청년단
대한국민당 통일노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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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농당 자유당 헌정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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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해산 (5.16 군사정변)
한국독립당 재건당 국민의당으로 합류 정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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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해산 (5.17 내란)
제4공화국 이후
동일시기 타정당: 진보정당 민주당계 }}}}}}}}}

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파일:1px 투명.svg제2대 국회
원내 구성
''' 1950.5.31. ~ 195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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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 여당
14석
24석
야당
24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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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석
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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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석
2석
4석
무소속
126석
재적
21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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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임기 종료 당시 교섭단체별 의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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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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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석
야당
24석
20석
비교섭단체 및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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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179석
임시의정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제헌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21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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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파일:1px 투명.svg제3대 국회
원내 구성
''' 1954.5.31. ~ 195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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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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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석
야당
15석
3석
3석
무소속
68석
재적
20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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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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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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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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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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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202석
임시의정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제헌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21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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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파일:1px 투명.svg제4대 국회
원내 구성
''' 1958.5.31. ~ 19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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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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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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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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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195석
임시의정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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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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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파일:1px 투명.svg제5대 국회
원내 구성
''' 1960.7.29. ~ 19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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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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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석파일:1px 투명.svg175석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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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파일:1px 투명.svg4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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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석파일:1px 투명.svg1석
0석파일:1px 투명.svg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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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석파일:1px 투명.svg0석
무소속
2석파일:1px 투명.svg49석
재적
58석 • 23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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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5.16 군사정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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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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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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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50석 • 233석
임시의정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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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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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참의원(상원) 의석 수, 우측은 민의원(하원) 의석 수



[A] 당시 동명이의 2개의 자유당이 존재했었고 법률상 두 정당은 각기 별개의 정당이다. 당시 법률상 다른 정당과 동명의 정당을 설립하거나 동명의 정당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었다. 두 정당을 구분하여 일컫는 상황에서는 편의상 '원내 자유당', '원외 자유당'으로 호칭되었다. 이후 1953년에 두 정당이 합당되어 하나의 정당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B] 원내 자유당 합동파(삼우장파)가 원내 자유당을 탈당하고 원외 자유당으로 개별 합류했다.[C] 1952년 9월 18일에 동명의 두 자유당이 '자유당'으로 합당되었다.[A] [B] [C] [C] [8] 부통령 유세 문구로 '이번에는 속지 말고 바로 뽑자'고 써있던 것은 직전 선거인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장면 박사가 당선됐기 때문이다.[9] 창문이 깨져있는 것은 4.19 혁명 당시 분노한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지금까지도 남아 NH농협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당 이전엔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도 쓰인 바 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는 아니고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10] 참고로 광복 이후 첫 여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다.[11]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73년에 출간한 대한민국 정당사 제1집에 나오는 내용.[12] 실제로 'liberty'와 'liberal'은 똑같은 뜻의 명사형과 형용사형일 뿐인데도 매우 다른 정치적 맥락으로 쓰이며, 본 문서의 자유당을 계승하겠다며 2020년에 창당한 자유당의 영문명은 'Liberty Party'였다. 또 'Freedom Party'는 똑같이 '자유당'으로 번역되지만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해외 우익 정당들이 주로 사용하는 명칭이다.[13] 오히려 민주당계 정당인 평화민주당과 계보적으로 연결성이 있는데, 이유는 국민의힘의 전신 한나라당신한국당통합민주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인데, 이때 통합민주당이 평화민주당의 후신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김영삼통일민주당과도 어느정도 연결된다.[14] 다만 세부적으로 본다면 자유당의 최대계파였던 이기붕계의 경우는 최종적으로는 상당수가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쪽으로 흡수된 느낌이 강하고 이승만계 역시 대다수는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쪽으로 흡수되긴 했다. 이재학계의 경우는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 보수정당과 신민당, 신한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으로 각각 나뉘어 흡수된 경우가 많으며 박세경 등의 일부 온건파와 일부 혁신파는 최종적으로는 민주당계 정당으로 흡수되었다.[15] 이때 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간 인사들 중에는 계속 보수정당에 잔류하면서 한나라당새누리당, 자유한국당 시절때까지 당 상임고문을 맡은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예 이승만계 출신인 성보경 새누리당 상임고문. 박정희계 4인방인 김성곤, 김진만도 자유당 출신이었다.[16] 다만 민주당계 정당으로 넘어간 자유당 인사들 중에도 상당수는 나중에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에 합류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비자유당 출신 민주당계 정당 출신 중에서도 그런 경우는 많았지만.[17] 물론 최인규를 제외하고는 나중에 모두 사면복권 되었다.[18] 물론 실제 이들 간 사이는 안 좋았다.[19] 심지어 이 정신 운운도 2000년대 이후에나 보수 일각에서 이승만이 재평가되면서 나온거지 90년대 이전까진 군부 세력, 민주화 세력 모두에게 배척받던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승만은 박정희, 김영삼에 비하면 보수정당내 실질적으로 이어지는 계파도 없고, 언급 빈도도 떨어진다.[20] 사실,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보는 뉴라이트 대부분이 국민의힘 지지자인 것도 그런 인식의 원인들 중 하나다.[21]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당 [自由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22] [네이버 지식백과] 명의를 도용한 최초의 여당, 자유당 (이승만과 제1공화국, 2007. 8. 13., 역사비평사)[23] 당시 신정동지회 소속 의원들 중 국민방위군 지도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24] 많은 자료에서 자유당은 국민회·대한부인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맹·대한농민조합총연맹 등 ‘5대 사회단체’를 기간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신당 조직 과정을 자세히 보면 각 단체에서 결의해 대표를 파견한 일도 없었고, 각 단체의 대표가 참가한 것도 아니었다. 5개 단체는 자유당 창당의 기간단체가 아니었다. 이승만이 담화에서 말한 대로 개인적으로 참여했으나 각각의 단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단체에서 나왔다는 의미의 대표라고 기록되기도 했다.[25] 이범석과 족청계는 나중에 장택상이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과 부산에서 만난걸 족청 부하들을 통해 입수하여 장택상을 친일파로 몰아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켰는데 이것이 밑에서 언급되는 후로이 사건이다.[26] 실제로 발췌 개헌, 2대 대선 이후인 1952년 9월의 기사를 보면, 원내 자유당 내 합동파는 일부 간부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원외자유당으로 이적했으며, 잔류파는 정치적 활동이 거의 없이 침체된 상태였다고 한다.[27] 심지어 당내에는 혁신주의 계열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뒤에서 나올 전진한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28] 전진한계가 탈당한 직접적인 이유는 족청계 숙청 때문이다.[29] 신익희는 유세 중 호남선을 타고 가다 뇌일혈로 급서했다.[30] 당시 이기붕은 국회의장이었다[31] 당시 조경규는 국회 부의장이었다[32] 2.4정치파동으로 신설된 조항이다[33] 정확히는 강경파는 원내총무직을 정문흠으로 준 것에 대해 이기붕이 대야투쟁을 회피하려 한다고 내심 불만을 가졌지만, 이 상황에서까지 파벌질을 하다가는 민주당 좋은 일만 시켜주겠다는 상식적인 판단 하에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참고로 박만원 의원은 대신 국회 예결위원장에 지명되었다[34] 이승만의 경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이 급사하면서 사실상 자동 당선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은 이미 팔순이 넘은 고령이었고, 건강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승만이 설령 당선되어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자유당에서도 유사시 대통력직을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 총력전으로 나섰다. 웃기게도 정작 이승만은 1965년에 죽어 자유당의 부정 선거는 결과적으로 어느 쪽으로든 뻘짓이 되었다(...)[35] 대구에서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자유당에서조차 기겁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99%에 육박한 곳도 있었다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유권자 수보다 이승만, 이기붕의 표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이승만은 70%, 이기붕은 그보다 조금 낮은 수치로 수정돼 발표됐다. 그나마도 위에서 지시한 수치보다도 높았다고(...)[36] 노무현 前 대통령 회고록 <성공과 좌절>[37] 두 사람은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인이다.[38] 내무부 장관으로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했다[39] 참고로 이승만도 위임통치 청원 사건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당한 이력이 있다.[40] 비슷한 사례로 열린우리당의 약칭인 '열우당'이 있는데, 하필 '열우'가 못난 친구들(劣友) 혹은 못나고 어리석은(劣愚) 당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열우당이라는 이름을 꺼리고 '우리당'을 선호했으며, 언론에서는 '열린당'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41] 이 사람은 장택상계 출신이다.[42] 신민당이 4.19 혁명 이전까지 계속해서 자유당과 대립을 빚었던 민주당의 후신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다.[43] 당연히 1951년의 자유당과는 연관이 없는 이름만 따온 정당이다.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친이승만 성향을 가진 정도.[44] 공무원의 월급을 무턱대고 올린다고 부정부패가 사라지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무원의 월급을 무턱대로 낮추면은 부정부패는 필연이다. 공무원도 설령 처자식이 없더라도 제 한 목숨은 있으니.[45] 당시 수복지구에는 과세를 못하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46] 당시 세금을 착취한 사령관은 수복지역의 군단장이었던 장도영이었다.[47] 훗날 대한주택공사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한국토지공사와 합병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이다.[48] 관보 및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 취임식 일자 기준.[49]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유석형, 김종신, 문삼찬 자료)[50]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유석형, 김종신, 문삼찬 자료)[51] 강성태 (1903년)[5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880&cid=46626&categoryId=46626[53] 당시에는 정당공천제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이런 촌극이 가능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승만이 민 후보는 이들이 아닌 무소속 함태영 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