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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연립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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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 (1973.3.10.~1979.10.26.) | 민주국민당 (2001.4.16.~2001.9.3.) | 더불어시민당 (2020.3.8.~2020.5.18.) | ||||
자유민주연합 (1998.2.25.~200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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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대개혁당 (창당준비위원회)[1] | → | [[새천년민주당|]] (개별 합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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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민당 | |
공식명칭 | <colbgcolor=#fff,#1f2023>민주국민당 (民主國民黨) |
약칭 | 민국당 (民國黨) |
창당일 | 2000년 3월 8일 |
해산일 | 2004년 4월 18일 |
의석 수 | 1석 / 299석 |
정치적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18 (여의도동, 극동VIP빌딩 5층) |
당 색 | 푸른색 (#353099) |
붉은색 (#C2012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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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성 여야의 거물 공천 탈락자 중심으로 급박히 창당했으나 불과 2석을 확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득표수 미달로 소멸되기 까지 정확히 4년 존속한 정당이다. 약칭은 민국당(民國黨).
의석수는 2석으로 적었지만 2001년 4월 16일, 새천년민주당이 선언한 3당 연합으로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연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4]
2. 역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중진급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정치 신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단행한다.[5]
이 때 공천 탈락자들 중에는 바로 이회창 총재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김윤환 고문[6], 한승수 前 부총리 같은 민정계 일부, 그리고 신상우 前 국회부의장, 문정수 前 부산광역시장을 비롯한 구 민주계 일부, 이기택 의원[7]을 위시한 옛 민주당 출신 인사, 여기에 1997년 대선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겨뤘던 이수성 前 국무총리[8][9]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수두룩했다. 그 외에도 현역 의원 공천탈락자가 수십여명으로 공천학살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공천을 받았음에도 각각 중진 대량 컷오프와 지역구 옮겨심기에 반발한 민주당 출신 조순 명예총재[10]와 김광일 前 대통령 비서실장[11]은 스스로 공천을 반납했다.
공천탈락에 반발해서 조순, 이기택, 김윤환, 신상우 등 중진급 인사들은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여기에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에서 밀려난 김상현[12][13]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대구에서 2회 내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던 서훈 의원[14], 국민신당 해산 이후 원외에서 독자행보를 하고 있던 박찬종 前 의원과 꾸준히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고 있던 재야운동가 장기표[15] 등의 인사들까지 합류하면서 세를 키웠다. 거기다가 막판에는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허화평[16]까지 참여했다. 창당을 선언한지 불과 19일 만인 2000년 3월 8일 조순을 당 총재로 추대하고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그러나 현역 의원만 수십여명이 참여할 것이란 호언장담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천탈락자들이 지도부의 설득으로 당 잔류를 선택하면서 새천년민주당에서 지역구 2석(김상현, 박정훈), 한나라당에선 지역구 6명(김윤환, 신상우, 한승수, 조순, 서훈, 김동주)과 전국구 2명(김철, 윤원중)만이 탈당해서 민국당에 합류하였다.[17] 그나마 정당법에 따라서 전국구 2명은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직 상실. 이러면서 많이 위축되었고, 최대 50석까지 노린다던 기세도 사그라든다. 그래도 창당초기에는 영남권을 중심으로 현역 의원만 10명에, 인지도가 높은 전·현직 의원, 장관, 지자체장급들이 다수라서 제법 여론조사에서 우위에 나오는 결과도 나왔다. 여기에 한나라, 민주 양당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나름 지역기반이 있는 정치 지망생[18]들을 대거 공천해서 전국 227개 지역구 가운데 161곳에 후보를 내면서 전국정당의 모양새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반호남지역감정을 폭발시켜서 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가담했던 정치인들의 성향이 워낙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관계로 여러가지 난맥상이 불거지면서 시망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쨌든 당장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영남권에서 워낙 인지도가 높은 인사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값으로 어찌저찌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대실패였다. 수도권이야 애당초 경쟁력이 있는 후보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살아남을 줄 알았던 영남권에서조차 한나라당에게 완전히 털린 것이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 경북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민정계의 거두 5선 김윤환 후보가 구미시에서 무소속 도의원 출신 김성조 한나라당 후보에게 털린 것, 전직 국무총리이자 유력 대권 후보였던 이수성 후보가 고향 칠곡군에서 한나라당의 정치 신인 이인기에게 패한 장면이었다.[19] 즉, 2000년 16대 총선에서 보여준 것은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민주국민당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 데에는 한나라당의 "민국당 찍으면 DJ를 도와주는 격"이라는 논리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른바 "이인제 학습효과"라는 것으로서,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를 찍었더니 김대중이 되었다는 영남권 유권자의 경계심리가 그것이다. '이회창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민국당을 찍으면 정권을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20]
그래도 영남권에서 2등 낙선도 있고 표도 긁어모아서 지역구 후보들의 전국 득표율 합계는 3.7%.[21] 이걸로 봉쇄조항 3%를 넘겨 전국구 1번 강숙자 후보[22]가 금배지를 달았고, 춘천시에서 부총리 출신의 한승수 후보가 당선되며 2석 짜리 정당으로 생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30석을 장담하던 초반의 기세에 비하면 한 없이 쪼그라든 수준.
그 뒤 수석최고위원이던 김윤환 前 의원이 5달간의 대표권한대행을 하다가 2000년 9월 27일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추대되었다. 이후 집권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자유민주연합한테 국회의원까지 꿔주면서 다시 공조를 복원하였음에도 국회 과반수(137석)에서 2석이 모자라자 민주국민당에도 손을 내밀었다. 이 과정에서 이기택, 박찬종, 장기표 등 반 DJ를 표명했던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세가 줄었지만[23], 어쨌든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생존에 성공. 3당 연합의 대가로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했다.[24]
하지만 처음부터 이념이나 정책 등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이 당장 눈 앞의 금뱃지만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라 선거 결과가 안좋자 대부분 흩어져 버렸다. 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윤환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인사들은 명패만 걸어두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2년도 못돼서 2001년 9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 DJP연합이 붕괴했고, DJP연합의 부족한 틈새를 메꿔주던 민국당의 가치도 급속도로 추락한다. 당시 김대중 정부 입장에서는 자민련이 이탈했기 때문에 민국당 국회의원 2명을 잡고 있어봐야 어차피 국회 과반수에는 훨씬 못미친다. 배려해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성향만 놓고보면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던 민국당도 이 해임결의안에 찬성했기 때문에 민주당 입장에선 마음에 들지 않을 터. 결국 다음해 2월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에서 사퇴한다.[25]
당 대표였던 김윤환은 '차기 대통령 4~50대론',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후보론', '차기 대권주자 박근혜' 등을 내세우면서 원외에서 활동했다. 당시 김윤환이 주장했던 논리의 타깃은 이회창이었는데, 대선 당시 만 56세였고 호남 정당인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당선되었으며, 박근혜도 이회창을 비판하면서 탈당 후 복당했다. 김윤환 사후에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당을 재정비하고 차기 대권주자를 거쳐 대통령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선구안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국민당의 당세가 약해서 큰 효과를 보지는 못 했다.
그리고 지방선거와 대선이 예정된 2002년이 되자 모두들 자기 갈길을 가버렸다.
영남 출신 옛 민주계 인사들은 노무현 후보 캠프로 들어갔으며, 특히 신상우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의 후원회장을 맡았다.[26] 애초에 민주당 출신이던 김상현도 민주당으로 복당해서 지방선거 직후에 치러진[27]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야 출신 장기표도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영등포 재보선에 출마하였으나 권영세에 패배해자 다시 민주당을 탈당했다.[28]
당의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2002년 10월 한나라당으로 복당하면서 의석수도 1석으로 줄었다. 다른 한나라당 출신들도 대부분 조용히 원대복귀하였고, 월드컵 열풍으로 정몽준의 인기가 치솟자 김동주 같이 국민통합21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참가하였으나 모든 후보가 낙선하였다.
2002년 11월 27일에 김윤환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인 이회창을 지지선언하고 합당까지 가나 싶었지만 신장암 치료를 위해 이듬해인 2003년 1월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엎어지고[29], 김동주 최고위원이 대표권한대행을 하다가 2003년 4월 18일에 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민주국민당은 비례대표(전국구) 강숙자 의원과 껍데기만 남았으며[30], 결국 김동주 대표가 2004년 2월에 사퇴하고 김태룡 전 의원을 대표로 추대했다. 그렇게 용두사미가 된 민주국민당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폭망하면서 정당 등록이 취소[31]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당을 지켰던(?) 강숙자 의원은 금뱃지는 커녕 상습 범죄자로 전락해버렸다.
이 당에서 출마했던 정치 신인 중 이후에 국회의원이 된 인물로는 김한표, 심재엽, 이동섭, 이한정[32] 의원 등이 있다.
3. 당색
민주국민당과 한나라당의 당 로고 비교 |
선거 공보물 스캔 이미지 |
이미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당색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한나라당의 상징색(
파란색 (#0000A8)
)보다는 탁하고 옅은 색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람할 수 있는 어느 후보의 벽보 외 여타 후보의 스캔 이미지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여담으로 한나라당 당색이 프러시안 블루에 가까운 편이라면 민주국민당의 당색은 울트라마린에 가까운 감청색으로 표현될 수 있는 편이며 공교롭게도 유사한 성향의 정당인 국민통합21도 채도만 다를 뿐 거의 동일한 색상을 당색으로 사용한다.4. 역대 당대표(총재)
총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조순 | 제2대 김윤환 | 제3대 김동주 | 제4대 김태룡 |
◀ 한나라당 총재 및 대표 | }}}}}}}}}}}} |
- 1대: 조순(2000.03.08 ~ 2000.04.24)
- 2대: 김윤환(2000.09.27 ~ 2003.01.20)
- 3대: 김동주(2003.04.18 ~ 2004.02.27)
- 4대: 김태룡(2004.03.07 ~ 2004.04.18)
5. 역대 선거결과
5.1. 국회의원 선거
연도 | 선거명 | 지역구 | 비례대표 | 결과 | 비고 |
2000년 | 16대 | 1 / 227 (4.3%) | 1 / 46 (3.7%) | 2 / 273 (3.7%) | 원내 4당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국민당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0) |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 후보를 내지 않고 지역구 후보만 출마시켰으나, 전원 낙선하였다.
5.1.1. 16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이름 | 지역구 | 경력 | 이후 선거이력 |
여익구 | 종로구 |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 |
이병희 | 중구 | 세종로 모임 총무 | [33] |
송재영 | 용산구 | 국민정치연구회 이사 | [34] |
이문용 | 성동구 | 김대중대통령후보 선대위원 | [35] |
심양섭 | 동대문구 갑 | 서울대 총학생회장 | |
최종근 | 동대문구 을 | 서울시의원 | |
전제웅 | 성북구 갑 | 한자연구원 교수 | [36] |
이병석 | 강북구 을 | 조순대표위원 경제특보 | |
정창인 | 노원구 갑 |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수 | |
이동섭 | 노원구 을 | 세계태권도선교회 대표회장 | 20대총선 당선 |
남요원 | 은평구 갑 | 민국당 정책위 부의장 | |
이동우 | 서대문구 갑 | 한국가스공사 국제협력실장 | |
정병훈 | 서대문구 을 | 노인행복찾기국민운동본부 이사장 | [37] |
진영환 | 마포구 갑 | 민국당 국제협력특위 위원장 | |
김세곤 | 마포구 을 | 통일사회당중앙상임위원 | |
김동수 | 양천구 갑 | 한국펩시콜라 대표이사 | |
김용신 | 양천구 을 | 한국그린크로스 사무총장 | |
김석영 | 강서구 갑 | 농심원 대표 | |
김기선 | 구로구 갑 | 개봉신용협동조합 상무이사 | [38] |
김상태 | 구로구 을 | 동서화합촉진청년운동본부 총재 | |
구재춘 | 금천구 |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 |
권기균 | 영등포구 갑 | 민국당 부대변인 | [39] |
이중식 | 영등포구 을 | 영등포구의원 | [40] |
김명기 | 동작구 갑 | 동작구의원 | 5,6,7지선 동작구의원 당선 |
송종섭 | 동작구 을 | 서울시의원 | |
김휴열 | 관악구 갑 | 민주사회경제연구원장 | |
정현우 | 강남구 갑 | 숙명평생교육원 강사 | |
도재영 | 강남구 을 | 기아그룹 부회장 | |
김경득 | 송파구 갑 | 송파구의원 | |
백만인 | 송파구 을 | 동서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
이상덕 | 강동구 갑 | 입시학원장 | |
김광일 | 서구 | 국회의원,대통령비서실장 | |
박찬종 | 중구 동구 | 국회의원 | [41] |
김용원 | 영도구 |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 [42] |
김양수 | 부산진구 갑 | 유림종합건설대표 | 17대총선 당선 |
이철희 | 부산진구 을 | 부산광역시 약사회장 | |
김용철 | 남구 | 청와대 공보행정관 | [43] |
황상모 | 해운대구 기장군 갑 | 길운물산 대표이사 | [44] |
김동주 | 해운대구 기장군 을 | 국회의원 | [45] |
최광 | 사하구 갑 | 보건복지부장관 | |
김영백 | 금정구 | 대한석탄공사 감사 | |
문정수 | 북구 강서구 을 | 부산시장 | |
이기택 | 연제구 | 국회의원 | |
신종관 | 수영구 | 수영구청장 | |
신상우 | 사상구 | 국회의원 | |
김현규 | 중구 | 국회의원 | |
서훈 | 동구 | 국회의원 | |
서중현 | 서구 | 대구경제살리기 본부장 | 5회지선 서구청장 당선 |
권만성 | 남구 |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 | [46] |
김석순 | 북구 갑 | 열린사회연구소 이사장 | |
이성환 | 북구 을 | 계명대 교수 | |
임갑수 | 달서구 갑 | 대구여성문화센터원장 | |
서병환 | 달서구 을 | 대구환경문제연구소 이사장 | [47] |
장동학 | 중구 동구 옹진군 | 실리콘밸리 한미상공회의소 회장 | [48] |
정진관 | 남동구 갑 | 인천시의원 | |
조창용 | 부평구 갑 | 인천시의원 | |
이병현 | 계양구 갑 | 민주시민모임 상임대표 | [49] |
이영우 | 서구 강화군 갑 | 청와대 의전비서관 | |
김균진 | 남구 | 나주동신대 겸임교수 | [50] |
오완선 | 북구 갑 | 한국지리정보기술이사 | |
송재호 | 동구 | 민추협 산업국장 | |
박천일 | 중구 | 대전대 총학생회장 | [51] |
허윤범 | 대덕구 | 대덕사랑발전연구소장 | |
유송근 | 중구 | 용인대 객원교수 | |
한만우 | 남구 | 변호사 | |
서동우 | 북구 | 국제 옥수수재단 사무총장 | |
이대의 | 수원시 장안구 | 한국해양소년단 경기연맹장 | [52] |
진재범 | 수원시 권선구 | 국제변호사 | [53] |
손민 | 수원시 팔달구 | 아주대 경영대학 교수 | |
최상면 | 성남시 수정구 | 경영컨설턴트 | [54] |
양재헌 | 성남시 분당구 갑 | 국회부의장 비서관 | [55] |
강대신 | 안양시 만안구 | 북방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
신하철 | 안양시 동안구 | 국회의원 | [56] |
안기희 | 부천시 오정구 | 국회정책연구실장 | |
김선필 | 안산시 을 | 한청연합 경기총회장 | |
안병용 | 고양시 덕양구 갑 | 민주당 조직국장 | [57] |
설진성 | 고양시 일산구 갑 | 경기도의원 | [58] |
최성권 | 고양시 일산구 을 | 민국당 부대변인 | 3회지선 고양시의원 당선 |
박수천 | 구리시 | 경기민족민주연합의장 | [59] |
이용휘 | 남양주시 | 경기도의원 | |
이강원 | 군포시 | 월남참전전우회 경기지부장 | |
표대성 | 파주시 | YWCA청년운동간사 | [60] |
이한정 | 이천시 | 국무총리실 비서관 | 18대총선 당선 |
김종국 | 용인시 갑 | 경희대 법과대학 교수 | |
심우장 | 안성시 | 조순 대표최고위원 정치특보 | |
한규창 | 김포시 | 김포매립지대책위원장 | |
곽인식 | 광주군 | 한국4-H연합 사무총장 | |
한승수 | 춘천시 | 국회의원 | 당선 |
안재윤 | 원주시 | 조순 대표 특별보좌역 | [61] |
심재엽 | 강릉시 | 강원도 정무부지사 | 17대 총선 당선 |
원은상 | 제천시 단양군 | 국방연구원 전력부장 | |
장병수 | 진천군 괴산군 음성군 | 약사 | |
최덕찬 | 천안시 갑 | 민국당 부대변인 | [62] |
최기덕 | 천안시 을 | 민국당 정책위 부의장 | [63] |
박희부 | 공주시 연기군 | 국회의원 | [64] |
박창호 | 아산시 | 온양고 총학생회장 | |
이찬세 | 예산군 | 민국당총재 사회복지특별보좌관 | |
백완승 |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 | 논장출판사 대표 | |
설동회 | 순천시 | 전광일보 편집국장 | [65] |
채경근 | 장흥군 영암군 | 민국당 지방자치특위 부위원장 | [66] |
곽봉근 | 해남군 진도군 | 신상우 최고위원 특별보좌역 | [67] |
김재철 | 무안군 신안군 | 상진건설 대표 | [68] |
허화평 | 포항시 북구 | 국회의원 | [69] |
정홍교 | 경주시 | 청송군수(관선) | [70] |
김윤환 | 구미시 | 국회의원 | |
송두봉 | 영천시 | 한국경제신문 대구경북지사장 | [71] |
김남경 | 상주시 | 현대직업전문학교 이사장 | |
정재학 | 경산시 청도군 | 경북도의원 | [72] |
이수성 | 칠곡군 | 국무총리 | |
이상도 |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 | 수도환경 대표이사 | [73] |
조청래 | 창원시 갑 |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 |
심태회 | 창원시 을 | 경상남도 교육위원 | |
이재희 | 마산시 합포구 | 경남도의원 | [74] |
강갑중 | 진주시 | 경상대 총학생회장 | 4회지선 경남도의원,6회지선 진주시의원 당선 |
이청수 | 통영시 고성군 | KBS해설위원장 | |
유홍재 | 사천시 | 삼천신보사 사장 | |
류신현 | 김해시 | 제일농장 대표 | |
이상천 | 밀양시 창녕군 | 동아대 겸임교수 | |
김한표 | 거제시 | 거제경찰서장 | 19대,20대총선 당선 |
김정희 | 양산시 | 지리정보학회 상임이사 | [75] |
남명우 | 남해군 하동군 | 경상대 총학생회장 | [76] |
이현출 | 산청군 합천군 | 건국대 강사 | |
김호민 | 북제주군 | 민국당 정책위 부의장 |
5.2. 지방선거
연도 | 선거명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2002년 | 3회 | 0 / 16 (0.05%) | 0 / 232 (0.0%) | 0 / 682 (0.0%) |
6. 유사정당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잠깐 있었던 국민생각이 이 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여당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급조한 정당이었고 결과가 참담했다는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생각은 2012년 총선 당시에 참패하여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의 한광옥 전 대표가 동교동계 일부를 긁어모아서 창당했던 정통민주당 역시 이 당과 행보가 거의 유사했는데, 결과는 역시 참패였고, 구민주계 인사이자 동교동계 중도보수 인사인 한광옥은 결국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합류 후에 박근혜 정부 말기에 입각했다.
- 2016년초 안철수-천정배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이 이 당과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으라는 예상이 있었으나[77] 결과는 민주국민당과 정반대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구민주계와 안철수계의 정치적 결합은 제3지대 열풍을 일으켰다. 20대 총선 항목 참조.
-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의원이 재창당한 국민의당의 행보도 이 당과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고 당선된 인물들이 대부분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거나 다른 당으로 입당한 점에서 이 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 22대 총선을 앞두고 나온 개혁신당의 행보도 보수주의 정당, 민주당계 정당, 진보계열 정당에서 갈라진 탈당파들이 합종해 만들어진 점에서 보수주의 정당, 민주당계 정당, 진보정당 출신 재야인사가 합류한 이 당의 출범 당시와 유사성을 띈다. 지역구 1석, 비례대표 2석으로 민국당보다는 좀 더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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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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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기표 등.[2] 허화평 등.[3] 장기표 등.[4] 아사히 신문발 보도 참조[5]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에 대선 직후 집권세력의 의원 빼가기, 1998년 지방선거 패배, 외환위기 책임론 등으로 극도로 위축돼있던 한나라당은 2000년 16대 총선도 패배가 유력했는데, 윤여준이 제시한 대규모 물갈이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기사회생하였고 윤여준은 이때부터 보수의 전략가, 보수의 장자방이란 칭호를 받으면서 급부상한다.[6] 임명직 당 대표와 정무장관을 지낸 TK의 대부였지만, 그의 계보와 같이 무려 1차로 컷오프 당했다.[7] 이기택 개인은 최형우 의원의 와병으로 인해 공석이 된 연제구 출마를 고수했으나 이회창 총재는 이를 반대하고 전국구 공천을 주려했고 이 문제로 틀어지면서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한다.[8] 당시 현역 의원이던 이수인 의원의 친형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수인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제명된 상황이었으며, 이때는 건강상 이유로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15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했다.[9] 다만 이수성은 미묘한게 1997년 대선 무렵에 탈당하여 민화협 상임의장을 거쳐서 돌아온 상황이었다. 한나라당 당적을 가졌음에도 국민의 정부에 유화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이후 17대 대선 때는 독자세력을 구축하여 출마했다가 사퇴하고 민주당계 정당 후보인 정동영을 지원했다.[10] 강릉시 갑과 강릉시 을이 합구가 이뤄지고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 공천을 받았으나 반납.[11] 해운대구-기장군 갑 출마를 희망했으나 이기택계인 손태인에게 밀려 을구로 공천받았다. 이 때 을구 지구당위원장인 안경률은 그와 같은 YS계 출신이어서 공천을 반납했다.[12] 당시 김상현은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고 호언장담했다.[13] 대선 당시에 보인 독자행보로 DJ에게 찍혔다는 것이 정설. 사실 독자행보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정대철을 대통령 후보로 밀며, 김대중이 또 대선에 나가면 안된다고 "대통령도 하고 총재도 하겠다니, 국민회의가 무슨 다 김대중 총재 겁니까?"라면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문제는 김상현은 당대 모든 정치인 중에 김대중과 가장 오래 친분을 쌓다 못해 친동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의 핵심 후배였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젊었을 때 김대중에게 직접 연설을 배웠고, 박정희 정부 시대만 해도 사석에서 남들이 다 선생님이라 부를때 김대중을 선생님이나 의원님도 아닌 그냥 "대중이 형님"이라고 유일하게 불렀을 정도로 엄청나게 친했었다. 김상현의 원 지역구인 서대문구 갑에서는 정치 신인인 우상호가 출마했고, 결국 한나라당 이성헌에게 패했다. 김상현의 아들이 2022년 현재 서대문구 을 국회의원인 김영호 의원이다.[14] 다만 1996년에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한나라당 당적을 가지고는 있었다.[15] 이 사람은 당시 무소속의 홍사덕 의원과 신당창당을 시도했지만 홍사덕이 전국구 2번 공천을 받고 한나라당으로 가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16] 본래 자민련을 탈당한 김용환과 손을 잡고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했으나 당을 옮겼다.[17] 또한 제 3당인 자민련이 있었기 때문에, 공천에 떨어져서 원 소속당에 잔류하던가, 아니면 탈당을 해서 당을 옮기더라도 그나마 기반이 있는 자민련으로 들어가지, 구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신생정당인 민국당으로 가는 모험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18] 거제에서 김기춘에게 밀려서 한나라당 공천탈락해 민국당으로 온 총경 출신 김한표도 이 중 한 사람이다. 이후 19대 국회에서는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19] 여담으로 당시 김윤환 의원를 꺾은 김성조 후보와 이수성 후보를 격침시킨 이인기 후보는 그 후 연달아 같은 지역구에서 18대 국회까지 내리 3선에 성공하지만, 둘 다 19대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 공천에서 떨어지거나 불출마 선언을 했고 뒤에는 사실상 정계 은퇴 상태이다.[20] 이 부분에 대해 이미 1997년 가을 당시에도 거의 모든 여론조사들이 이회창과 이인제가 막판까지 단일화 하지 않으면 이미 김종필과 단일화를 마친 상태였던 김대중에게 무조건 패한다고 예측했는데 이게 맞기나 한 논리인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1997년 당시의 대한민국은 지금처럼 여론조사 기관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여론조사가 대부분 정확하다는 인식이 아직 매우 희미한 상황이었다.[21] 당시는 1인2표제 도입이전으로, 각 정당 후보들이 지역구에서 얻은 표를 모두 합쳐서 전국구 의원을 배분했다. 헌법재판소가 2002년 지역구 후보자 득표로 전국구 후보자 당선을 결정하는 것은 '이중투표'에 해당한다면서 위헌판정을 내리자, 여야 합의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였다.[22] 사실 이 사람도 문제가 많았는데,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를 30억원의 특별당비를 내고 공천을 받았다는 설이 파다했다. 사실상 국회의원 뱃지를 돈 주고 산 것.[23] 막상 장기표는 2002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들어가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나 권영세에게 져서 또 탈당한다. 다만 2002년 당시의 민주당은 DJ의 힘이 약해진지라, 장기표가 들어가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24]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승수의 입각 덕분에 차관 자리에서 경질된 반기문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으니 좋은 결과였다.[25] 이와 같이 새천년민주당이 단독 집권을 하지 못하여 민주국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처럼 당론에서 대놓고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과 연립정권을 꾸렸다는 점으로 인해 2001년 연말 즈음이면 새천년민주당을 대신할 신당 창당론이 제시되기 시작한다. 결국 이 때의 신당 창당론이 1년여 뒤에 귀결된 형태가 바로 그 열린우리당.[26] 이기택도 과거의 인연 때문에 대선 당시에는 노무현을 지지했지만, 참여정부의 실정에 실망했는지 17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인터뷰에서 노무현 지지를 후회한다고 했다.[27] 당시 광주 북 지역구의 국회의원인 박광태가 광주시장 출마로 사퇴하면서 김상현이 들어간 것이다.[28] 장기표는 민중당(1990년) 창당에 참여한 이후로 입당(혹은 창당)-선거출마-낙선-탈당-또다른 정당 입당(혹은 창당)-선거출마-낙선-탈당의 무한루프를 타고 있다. 당선이 안돼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뿐 거쳐간 정당을 보면 이인제 뺨칠 정도의 철새다.[29] 한편 김윤환 대표는 그 해 12월 15일에 작고한다.[30] 그나마도 전국구 의원은 탈당시에 자동으로 의원직 상실인지라 당 잔류.[31] 2014년 헌법재판소가 이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32] 다만 이한정의 경우 2008년 18대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자마자 허위 경력을 기재한 것과 공천헌금을 낸 혐의로 인해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여기에 후보 등록 과정에서 전과를 누락한 채 범죄경력 증명서류를 제출된 사실로 인해 정당이 낸 등록무효 소송에서 패소하여 얼마 못 가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전부터 사기, 공갈 등의 전과가 있었으며, 2000년 16대 총선 당시 민주국민당 후보로 나왔을 때도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고... 기막힌 것은 이때 공보물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빌 클린턴과 장쩌민과 찍은 사진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게재했는데, 지금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33] 18대총선 자유선진당 출마[34] 4회지선 민주당 은평구청장 출마[35] 3회지선 민국당 성동구청장 출마 17대총선 자민련 출마 19대총선 정통민주당 출마 20대총선 친반통일당 출마[36] 17대총선 녹색사민당 출마[37] 18대총선 무소속 출마[38] 17대총선 자민련 출마[39] 18대총선 한나라당 출마[40] 17대총선 자민련 출마[41] 17대총선 무소속 출마[42] 18대총선 무소속 출마[43] 17대총선 열린우리당 출마[44] 20대총선 국민의당 출마[45] 17대총선 무소속 출마[46] 17대총선 새천년민주당 출마[47] 17대총선 새천년민주당 출마[48] 19대총선 자유선진당 출마[49] 5회지선 무소속 계양구청장 출마[50] 17대총선 자민련 출마[51] 17대총선 자민련 출마[52] 17대총선 새천년민주당 출마 4회지선 민주당 수원시장 출마 18대총선 통합민주당 출마 19대총선 정통민주당 출마 20대총선 국민의당 출마[53] 17대총선 무소속 출마 6회지선 영등포구의원 출마 20대총선 무소속 출마 21대총선 우리공화당 출마[54] 3회지선 민국당 성남시장 출마 17대총선 민주국민당 출마 18대총선 직능엽합당 출마 19대총선 국민행복당 출마[55] 17대총선 녹색사민당 출마[56] 17대총선 자민련 출마 4회지선 국민중심당 의왕시장 출마[57] 18대총선 한나라당 출마[58] 3회지선 고양시의원 출마[59] 19대총선 정통민주당 출마 8회지선 무소속 구리시장 출마[60] 17대총선 민주국민당 출마 7회지선 바른미래당 서울시의원 출마[61] 17대총선 무소속 출마 21대총선 민생당 출마[62] 19대총선 미래연합 출마 21대총선 한나라당 출마[63] 17대총선 민주국민당 출마 2018재보궐 대한애국당 출마[64] 17대총선 새천년민주당 출마 19대총선 무소속 출마[65] 17대총선 녹색사민당 출마 5회지선 무소속 전남도의원 출마[66] 3회지선 한나라당 전남도의원 출마 17대총선 자민련 출마 4회지선 한나라당 전남도의원 출마 18대총선 한나라당 출마[67] 3회지선 민국당 진도군수 출마 5회지선 한나라당 진도군수 출마 6회지선 새누리당 진도군의원 출마[68] 17대총선 민주국민당 출마[69] 17대총선 무소속 출마[70] 17대총선 무소속 출마[71] 17대총선 민주국민당 출마 18대총선 자유선진당 출마[72] 7회지선 바른미래당 경산시장 출마[73] 5회지선 미래연합 영덕군수 출마[74] 5회지선 무소속 고성군수 출마[75] 17대총선 무소속 출마[76] 17대총선 새천년민주당 출마 4,5,6회 지선 무소속 경남도의원 출마 20대총선 더불어민주당 출마[77] 당내 주도권 갈등으로 인해 탈당한 거대 정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주도해 창당한 정당이라는 것과 선거를 앞두고 거대정당을 탈당했거나 무소속이었던 의원들을 영입해 세를 불렸던 것, 당시 제1야당의 텃밭에서 선거 전 지지율 돌풍을 일으켰던 것,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존재했던 정당명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 등 닮은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