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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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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을 필두로 한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자유민주연합이 공동 여당의 목표를 가지고 결성한 연합. 이 연합이 성공하면서 1997년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제6공화국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연립정부로 남아 있다.[1]대선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 김종필은 책임총리를 맡으며 임기 2년차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하여 임기 후반은 김종필이 내각제 하의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책임을 질 것이라고 공약했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2]
김대중의 이니셜인 'DJ'와 김종필의 이니셜인 'JP'를 합쳐서 생겨난 용어로 나중에는 세가 약하긴 했지만 박태준까지 이 연합에 합류하면서 호남의 김대중(DJ) + 충청의 김종필(JP) + TK의 박태준(TJ)을 의미하는 'DJT연합'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구도상 DJP연합이 정설이다.
불과 7년 전에는 김종필이 공화계를, 박태준이 노태우를 대신해 민정계를, 김영삼이 민주계를 대표하여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참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DJT연합은 당시 민주계가 장악한 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난 공화, 민정계 세력 일부가 평민당과 연합한 평민-공화-민정계 연합이자 PK 고립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DJ 측은 PK에도 아예 신경을 안 쓴 건 아니라 DJT 연합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꼬마민주당의 'PK 4인방' 영입에도 나섰다. 이중 노무현, 김정길은 국민회의에 합류했고 이철, 제정구는 한나라당 창당에 참여했다. 심지어 상도동계의 거물인 최형우 측에 접촉한 적도 있었다.[3]
하지만 DJP 연합 이후에도 TK는 보수정당 지지를 크게 버리지 않았고 충청도는 그나마 캐스팅보트 지역이 되었지만 텃밭화까진 실패해[4] 결과적으론 3당 합당의 영향이 상당 수준 지속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게 노무현의 부울경 공략과 세종특별자치시로 대표되는 충청도 민심 안기였다.
2002년에 있었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2022년 윤석열-안철수 단일화와 함께 성공한 단일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5]
2. 배경
2.1.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김대중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지만 1년 만에 귀국해서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면서 정계 복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정계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물론 김대중 자신이 속했던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 등 14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인사들까지 대놓고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1991년 평화민주당과 꼬마민주당의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당은 1992년 김대중의 정계 은퇴 선언 후 꼬마민주당 출신의 이기택이 총재로 선출되어 이끌어 왔으나 밖으로는 거대 여당에 눌리고 안으로는 당내 다수파인 동교동계와 마찰을 빚는 상황이었다.
특히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 공천과 김대중의 선거 지원 유세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간의 갈등이 공공연하게 불거졌다. 당시 승부처인 서울특별시장 후보를 둘러싸고 이기택 전 총재는 이회창 영입을 추진했지만 거절당했는데 동교동계가 영입한 조순 전 부총리가 후보로 나서서 김대중의 지원 유세를 등에 업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선 이기택 전 총재가 지원한 장경우 전 의원이 동교동계가 지원한 이종찬을 경선에서 물리치고 본선에 진출했지만 정작 본선에선 동교동계의 무시 속에서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에게 참패했다. 후보 공천과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이기택 전 총재와 동교동계 사이에 감정적인 설전이 오고 갔고 관계는 사실상 파탄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기택은 '김대중이 상왕처럼 굴면서 동교동계가 사사건건 총재의 지도력을 무시한다'고 불만을 표시했고 동교동계는 '총재가 무능하니 당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리고 이기택 전 총재와 일부 언론은 이런 동교동계의 강경한 자세를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위한 떡밥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자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그야말로 구름 관중을 동원하였고 이것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기택 총재는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언론들도 김대중의 지원 유세를 사실상의 정계 복귀라고 인식하였다.
당시 친김대중계 인사들은 정계 복귀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민주당 잔류와 신당 창당으로 갈렸다. 잔류파들은 어차피 우리가 숫자상 다수이니 전당대회 총재 경선에서 승리하고 당권을 쥐는 게 순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당파들은 총재 경선 승리야 당연하지만 그 뒤에 이기택을 중심으로 비주류들이 결집해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면서 당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 뻔하니 순간이야 욕을 먹겠지만 장기적으론 신당을 차려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일사불란한 지도 체제를 구축하는 게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이미 1995년 지방선거 공천 문제로 이기택에게 감정이 상했던 김대중은 신당파의 손을 들어줬다.[6]
결국 민주당이 약진한 지방선거 직후인 1995년 7월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 유권자들을 믿고 민주당을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했는데 그 결과 90명이 넘던 민주당 의원 중 65명[7] 정도가 새정치국민회의로 대거 이동했고 민주당에는 30여 명 정도가 잔류했다.
허나 이는 사실상 야권 지지표를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야권 표심이 갈라지면서 여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에는 미달했지만 139석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지켜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사실상 패배했다.[8] 그리고 이 선거의 패배로 김대중은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는데 당시 김대중의 정치 참모였던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이 김종필과 손을 잡아야만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일명 'DJP 연합' 초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김대중에게 조언하였고 김대중이 이 조언을 수락하면서 김대중은 김종필과 1년이 넘는 협상 과정에 돌입했다.
2.2.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창당
신민주공화당을 이끌었던 김종필은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노태우 정부 - 문민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고 김영삼 이후 차기 대권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활동해 왔던 그에 대해 구원(舊怨)이 있었던 김영삼과 민주계는 김종필을 좋게 보지 않았고 당내 계파 투쟁에서 밀린 김종필은 민주자유당에서 사실상 철저한 비주류로 몰락하는 신세가 되었다.[9]그러자 김종필은 자신을 따르던 공화계와 마찬가지로 김영삼에게 피를 본 민정계 일부 세력을 이끌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1995년 1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1995년 1회 지방선거에서 대전-충청남도-충청북도-강원도 4곳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한 데 이어 다음해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김종필이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내세워 지역 민심에 불을 붙여 충청도 전체 선거구 28개 중 24개를 석권했고 그 외에도 문민정부 심판론을 내세워 경기도에서 5석, 경상북도에서 2석, 강원도에서 2석을 차지했으며 특히 TK 홀대론으로 반YS, 반신한국 바람이 불던 대구광역시에서는 13석 중 8석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50석을 확보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이는 한국에서 이른바 '제3당'이라고 불리는 정당들이 역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거둔 성적 중 가장 좋은 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종필은 이와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자신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대권을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3당 합당 시절처럼 누군가와 함께 공동 정권을 창출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야권에서 김영삼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김대중은 당연히 첫 번째 협상 대상이었다.
참고로 당시 자민련 안에는 김종필의 직계 세력인 충청 그룹, TK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 일부[10], 그 외 非김종필 세력, 이렇게 세 개의 계파가 있었는데 그 중 각 그룹의 중심 인물은 충청 그룹 김용환 전 부총재, 민정계 박철언 전 의원, 非김종필 세력 한영수 전 부총재였다.
당초에 충청 그룹과 非김종필 세력은 DJP연합에 부정적이었으나 의외로 5공화국 내내 김대중과 상극이었던 민정계는 이 연대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는 당시 박철언의 성향 덕분이기도 한데 3당 합당 문서에도 등장하지만 원래 노태우의 심복 박철언이 주도한 3당 합당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도 포함하는 4당 합당이 기본 구상이었지만 합당 제안을 김대중 총재가 거절하면서 3당 합당만 이뤄지게 된 것이니 JP와 마찬가지로 YS에 쫓겨나 권력과 멀어진 박철언 입장에선 재기를 노려 볼 만한 묘수였다. 그리고 충청 그룹이 김종필의 결단에 따라 찬성 쪽으로 기울면서 DJP연합은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3. 과정과 진통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조는 15대 총선 직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를 위해 무소속과 통합민주당 당선인들을 영입하자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국민의 뜻을 따르라'며 원 구성 협상에 불참했다. 이 여파는 상당히 커서 그 해 5월 26일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 자민련을 비롯한 야3당이 신한국당 규탄대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DJP간의 연대가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996년 재보궐선거에서 양당은 연합공천을 이루면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의 김용채 서울 노원구청장, 뒤이어 유관진 경기도 오산시장이 당선되었다. DJP가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대세가 되었고 연말 자민련 소속이던 최각규 전 강원도지사와 류종수, 황학수 전 의원이 신한국당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두 야당의 결속이 더욱 강화되었다. 양당은 계속해서 1997년에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후보 단일화를 통한 연대에 돌입했고 그 결과 수도권에서 치러진 3곳의 재보선[11]에서 모두 압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정치 성향도 영 맞지 않아 보이던 김대중과 김종필이 손을 잡는 일은 필연적으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군부 정권 시절엔 당연히 견원지간이었고 노태우 정부 시기에 평화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일시적으로 연합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때는 정권창출을 위한 목적보다는 그냥 야당간의 협력 정도의 수준이었다. 실제로 국민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시 모 여론조사에선 무려 70%가 넘는 국민들이 'DJP연합을 해선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김대중도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수도권 민심이 날아갈 것을 꽤나 우려해서 독일의 '신호등 연정'[12] 등을 거론하면서 DJP연합을 합리화하려고 노력했다.
또 김종필은 연대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갈지자(之字) 행보를 보이면서 김대중 측을 초조하게 했는데 이는 대권이 걸린 김대중 측이 연합에 더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급할 게 없는 김종필이 몽니를 부리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년 반이 넘도록 DJP연합이 큰 진척이 없던 상황에서 김대중은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태준[13] 영입에 공을 들였다. 김대중은 박태준이 합류한다면 김종필의 마음도 붙들어 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지지도 일부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을 관전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만난 박태준과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김대중에 대해 여전히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박태준의 태도가 이 만남 덕분에 누그러졌고 결국 연합에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14]
4. 연합 성사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전 의원의 청구동 자택에 직접 찾아와 사실상 DJP연합을 마무리지었고 다음 날 박태준 전 의원이 자민련에 입당해 총재로 추대되면서 연합 성사는 완료되었다.연합 성사 다음날, 연합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울 게 없다며 갈지자 행보를 보이던 김종필은 2인자를 자처하면서 김대중에게 매우 공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야기가 끝나고 김대중이 나갈 때 김종필이 90도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당시 DJ 비서실장 한광옥은 JP를 진정한 정치 고수라고 생각했다고 훗날 회상하기도 했다.[15]
당시 연합에서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 제16대 국회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개헌 시기는 1999년 12월 말 이전으로 한다.
- 경제 부처의 임명권은 국무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자치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연합에 반발한 자민련 소속 의원들[16]이 탈당해 신한국당으로 이적하는 일도 있었다. 그 중 안택수 전 의원은 현직이었던 당 대변인직을 버리고 탈당했기 때문에 당시 자민련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17]
5. 정권교체
결론만 놓고 보면 DJP연합은 성공적이었다. 1997년 15대 대선 결과 김대중 후보는 충청도에서만 무려 43만여 표 차이를 벌리면서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18] 또 김대중을 대놓고 빨갱이로 여겼던 경상도 전체에서도 평균 1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꽤 선전했고[19]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진 정책[20]을 펴는 데 자민련 측 인물들이 선봉장을 맡기도 했다. 지역주의가 많이 허물어진 21세기에는 민주당계 정당이 총선과 대선, 지선에서 TK에서는 20% 넘게 꾸준히 확보하고 PK에서는 당선자도 여럿 배출하지만 이전의 동서갈등은 서로 통혼도 교류도 거의 못 할 정도로 강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저 정도로 경상도의 지역감정이 완화된 것만 해도 놀라운 발전이었다.합의한 대로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도 김종필이 지명하였는데 이들은 IMF 사태를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고위관료들이나 엘리트라면 보수정당에 입당하는 경우가 다수였기 때문에 DJ계 야당의 인재풀은 상당히 취약했던 상황이었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보충했던것이었다. 또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 김대중을 괴롭혔던 색깔론에서도[21] 김종필과 자민련이 어느 정도 방파제가 되어 주어 국민의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부담을 덜게 해 주었다.
집권 직후 치러진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전국적인 후보 단일화를 통해서 광역자치단체장 16곳 중 10곳을 석권하는 승리를 거뒀는데 이에 따라 15대 국회에 당선된 주로 야당 의원들이 당시 여당에 입당하려는 이른바 철새의 시대가 한동안 유지되기도 했다.
대체로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김대중이 독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과 연합했던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DJP연합이 없었다면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은 인정하는 편이다.
6. 갈등과 해체
집권 2년 이내 의원내각제 개헌을 내걸고 시작했던 DJP연합은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집권 2년차인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22]의외로 무시되는 측면은 1999년 초만 해도 양당은 표면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합당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소선거구제 구도 내에서는 합당 없이는 선거에서 불리하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지분율은 당연히 1:1로, 당세를 고려하면 자민련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 그 증거로 국민회의는 국회 총 의석을 273석, 특히 지역구를 253석에서 227석으로 줄이기 위한 한나라당과의 지역구 협상에서도 자민련과의 합당을 전제로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7월에 김대중과 김종필이 의원내각제 개헌 유보에 합의하자 자민련 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터져나왔고 9월로 예정되었던 국민회의의 재창당도 합당을 고려해 뒤로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자민련의 일탈은 가속되었다. 심지어 12월에는 김종필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성사의 일등공신[23]이었던 김용환 부총재가 고성이 오가는 면담 끝에 탈당하는 상황[24]까지 벌어졌다.
양당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1999년 말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은 완전히 무산되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독자적으로 재창당에 나서서 새천년민주당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갈등은 점점 더 커져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후보 연합 공천이 무산되었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구에 두 정당이 동시에 후보를 내보내는 사태가 벌어졌다.[25]
이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수도권과 호남, 강원도, 제주도에서 승리하고 자민련의 텃밭이었던 충청도에서도 어느 정도 선전하면서 의석을 늘렸다. 반면 자민련은 非충청도 지역에선 보수표를 모조리 한나라당에 뺏기면서 사실상 충남 지역 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될 만한 선거구도 새천년민주당과의 연합 공천 무산으로 인해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에게 빼앗겼다. 심지어 본거지였던 충청도에서도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과 박빙의 승부를 보이면서 기존 50석에서 1/3 수준으로 줄어든 단 17석 확보에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다. 사실 대전광역시, 충청남도과 달리 충청북도는 애초부터 자민련이 큰 힘을 못 쓰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DJP연합의 복원과 유지를 희망했던 김대중은 2000년 5월 22일 직전 연말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한 이한동 총재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며 연정의 가능성을 재타진했고, 그해 12월 30일에는 민주당 의원들을 자민련으로 보내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까지 하면서 자민련이 다시 원내교섭단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26] 이에 자민련도 김종필 명예총재가 2001년 1월 8일 청와대 단독만찬에 참여하면서 공식적으로 연정에 복귀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을 합쳐도 원내 과반수를 충족하지 못했던 터라 2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에까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였고 민국당 한승수 의원을 외교부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민주국민당 3당 연합과 무소속 정몽준 전 의원으로 138석을 확보하여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과반수만 채웠을 뿐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저지선을 딱 차지하고 버틴 탓에 김종필과 자민련의 숙원이었던 의원내각제 개헌은 끝내 무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이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대북 유화책과 관련해 시각차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자민련이 2001년 9월 3일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해임안에 가담해 DJP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졌다. 막 입당해 잠깐 자민련의 바지총재로 있었던 이한동은 아예 자민련에서 제명당하고[27] 무소속으로 남은 총리 임기를 채웠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자민련으로 넘어갔던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은 DJP연합이 끝나자 자민련을 탈당해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하면서 자민련은 다시 원내 비교섭단체로 내려앉았다. 이후 제16대 대통령 선거 시즌이 다가왔을 때, 한나라당은 JP를 포섭하기 위해 애썼지만 과거 국무총리 시절 인준안 거부와 의원 빼가기로 한나라당에 큰 반감을 가졌던 JP는 끝내 중립을 선언하며 이회창을 외면하였다.[28]
자민련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에 가담했다가 17대 총선에서 4석으로 폭망했고, 그나마 남은 의원들도 새로 창당한 국민중심당으로 옮기면서 대표였던 김학원만 남았으며, 이후 해산을 선언하면서 남은 사람들은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자민련이 몰락하면서 지역정당이 사라진 충청도는 이후 본격적인 캐스팅보트 지역이 되었고 전라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역이었던 시절보다는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지지세가 약해졌다.[29]
7. 관련 항목
[1] 여당의 위성정당이 출현한 21대, 22대 총선에서도 연립정부가 등장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독일 CDU/CSU와 같은 사례로 취급된다. 한편으로 동거정부의 형태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2] 그래도 김대중이 김종필에 어느 정도 실권을 주어 자율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3] '이젠 PK와 접속' DJP 여세몰이. 경향신문. 1997.10.30.[4] 애초에 충북은 이전부터도 캐스팅보트 지역이어서 충청지역정당은 주로 충남에서만 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5] 다만 노-정 단일화는 대선 전날 정몽준이 갑작스럽게 지지를 철회하면서 흐지부지됐다. 물론 단일화를 통한 지지율 흡수 효과는 나타났지만 말이다.[6] 동교동계 내에서는 지지자들이 모은 돈으로 마련한 당사가 아깝지 않냐는 여론도 있었으나 끝내 당사까지 버려 가면서 분당했다. 그 정도로 양자 간의 사이가 나빴다. 문제의 당사는 이후 통합민주당 - 신한국당 합당 과정에서 한나라당 소유가 되어 버렸고(...)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추징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매각되었다.[7] 이 중 13명은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민주당을 탈당하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당적은 민주당이지만 사실상 새정치국민회의를 위하여 활동했다. 훗날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박주현, 장정숙 전 의원을 가르키는 말인데 이 둘은 공식적으로는 바른미래당 소속 비례대표 의원이었지만 사실상 민주평화당 소속 의원들이었다.[8] 당시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후보가 3000표 이내의 박빙승부를 보인 지역구가 전국적으로 58개에 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야권표 분산이 패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당은 아예 15석에 그쳐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해 몰락했는데 이들은 훗날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이 됐다.[9] 김영삼과 민주계가 박정희 정권 시절 당한 초산 테러나 야당 의원 고문 등을 생각해 보면 미워할 법도 했다. 다만 김종필도 억울한 부분은 있는데 종신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에게 김종필은 언제 자기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눈엣가시였고 덕분에 조카 사위임에도 세 차례나 가택 수사를 당하는 등 엄청난 견제를 받고 사실상 정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종필은 박근혜와도 소원했다. 사실 5공 시절 양김이 각종 탄압을 받으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지속했을 때 김영삼이 김종필에 사람을 보내서 같이 전두환 정권과 싸우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김종필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국면이 도래했을 때 김종필이 전격 귀국해서 정계 복귀와 신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하자 "남들이 피흘리며 싸울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무임승차하느냐"는 비판도 상당했다.[10]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던 김복동, 박준병도 있었다.[11] 인천 서구(국민회의 조한천), 수원시 장안구(자민련 이태섭), 안양시 만안구(자민련 김일주).[12] 독일의 사회민주당(중도좌파), 녹색당(환경주의), 자유민주당(자유주의 우파)의 연정을 말하는 것으로, 각 정당의 테마색이 사회민주당은 빨간색, 녹색당은 녹색, 자유민주당은 노랑색이라서 신호등 연정이라고 부른다. 90년대 이후 독일 녹색당이 급성장하면서 좌파 진영의 안정적 집권을 위해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이지만 자유민주당은 신호등 연정보다는 기독교민주연합(보수 우파)과의 연정을 선호하기 때문에 보통 적녹 연정으로 끝났으나 2021년 총선에서 실현되었다.[13] 1997년 7월 포항시 북구 선거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이기택을 꺾었다.[14] 한겨레신문 김대중 집권비사 월드컵정치[15] 다만 김종필 문서나 14대 대선 문서 등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당시 김종필과 자민련은 독자적으로 대권에 도전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고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려 해도 김대중 및 새정치국민회의와 손잡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처지였다. 신한국당과 연합하기에는 거기서 사실상 쫒겨난 다음 YS 정권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도약한 케이스라 모양새도 이상한데다가 이후 태도를 바꾸면 신의없는 행태로 찍혀서 매장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즉 자신들의 대권이 걸린 문제라 절박한 것이 김대중측의 상황이었다면 어차피 자기들 손에 대권은 쥐지 못할 것이지만 반짝 뜨고 만 비 수권정당의 처지로 남느냐, 자신들이 쥐고 있는 확실한 우위(김대중 측에 부재하다시피했던 전문 관료들을 설득)를 활용해 수권세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을 기회를 얻느냐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더 아쉬운 것이 김종필측의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협상 과정에서는 '그쪽 판돈이 더 크니 엎어지면 아쉬운 것은 그쪽 아니냐'고 배짱을 튕기면서 몸값과 지분을 올렸지만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는 관계를 주도할 수 없는 자기측의 입장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라 처신했다는 점에서 노련한 정치인답다는 감탄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16] 이의익, 안택수, 박종근.[17] 재미있는 것은 안택수 전 의원은 당 대변인이었다 보니 당시 신한국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선두에 나서서 까던 사람이었는데 신한국당에 입당한 후에는 이회창 후보를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며 극찬한 것이다. 또 이의익 전 의원은 이듬해 대구광역시장 후보 선출 과정에서 현직이었던 문희갑 전 시장에게 밀려나자 자민련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지만 이후 선거에서 낙선했다.[18] 당시 이회창 후보와의 총 득표차는 39만여 표 차였다. 즉 충청도에서 못 이겼다면 김대중의 당선은 어려웠을 것이다.[19] 대구: 12.53% / 경북: 13.66% / 경남: 11.04% / 부산: 15.28% / 울산: 15.41%의 득표를 기록했는데 DJP연합의 효과도 있겠지만 당시 경남보다 대구경북이 김대중의 득표율이 더 높았던 이유는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에 꽤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참고로 직전 대선인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대구에선 7.82%, 경북에선 9.6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김대중과 견원지간이었던 박정희의 아들인 박지만과 큰딸 박재옥, 그리고 조카들이 김대중지지를 선언한 게 매우 컸고 당시 민정당 민자당출신 TK인사인 엄삼탁, 박철언, 김중권을 김대중캠프에 영입한 것이 TK의 김대중득표율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박근혜와 박근령 자매만 이회창을 지지했다.[20] 경상도 민심을 공략하는 정책.[21] 당시 고령층 보수진영 지지자들에게 김대중은 민주주의만 실현할 수 있다면 북한과도 손을 잡을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었다. 이것 때문에 김대중은 젊었을 적 민주화 운동을 할 때에도 빨갱이몰이에 시달려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반면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면서도 철저히 반공 노선을 어필해왔기 때문에 이런 빨갱이몰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당연히 운신의 폭도 김대중보다 훨씬 넓었다.[22] 이전에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기초자치단체장 후보 및 광역의회의원 후보의 연합 공천 여부로 인한 신경전, 각료 배분 신경전 등은 있었으나 DJP연합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건 1999년부터였다.[23] 애초에 DJP연합은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성사된 연합이었다.[24] 이때 김용환은 탈당하여 희망의한국신당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하였고 총선에서 당선된 후에는 한나라당에 합류한다.[25] 하물며 DJP연합이 화기애애했던 정권 초기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기초자치단체장 및 광역의원 선거에서 일부 지역의 연합 공천을 둘러싸고 신경전이 있었지만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전부 연합 공천을 했기 때문에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진 않았다. 그때의 상처가 곪아서 터진 격인 셈이었다.[26] 다만 그 과정 속에서 강창희 전 부총재가 제명되었다.[27] 이후 이한동은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하여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츨마했으나 낙선하였고, 이후 자민련으로 복귀했다.[28] 여기에는 DJP 단일화 당시 단일화 협상을 맡았던 한광옥의 설득이 있었다고 한다. 대선 일주일 전 한광옥이 직접 JP를 찾아가 공동정권이었으니 민주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 순리라고 설득했고, JP는 이를 받아들여 대선 중립을 발표하고 당 내에서 이회창을 지지하는 개별의원들의 행동을 만류했다. 이 중립에는 사실상 JP가 노무현을 지지하는 의미가 담겨있었다고 한다.[29]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을 때는 민주당계 정당 95% : 5% 보수 정당 비율이었으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시점엔 80% : 9%로 약화되더니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기준으로 민주당계 정당 85% : 15% 보수 정당 비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