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6 17:11:51

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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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희호 (李姬鎬)
출생 1922년 9월 21일
경기도 경성부 수송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사망 2019년 6월 10일(향년 9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가족 배우자 김대중, 아들 김홍걸
학력 서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 / 학사)
미국 램버스대학교 (사회학 / 학사)
미국 스카릿대학교 (사회학 / 석사)
본관 전주 이씨[1]
종교 개신교(감리회)[2]
약력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영부인
한국여성재단 명예이사장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1. 소개2. 생애3. 평가
3.1. 긍정3.2. 부정
4. 신앙5. 그 외6. 발언7. 이희호를 연기한 배우

1. 소개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김대중의 아내이자 영부인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 민주운동가 출신이다. 국내에서는 1세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다녔다. #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국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학위, 미국 스칼렛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당대 보기 드문 엘리트이다.

96세의 나이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의 역대 영부인들 중에서는 최장수 기록이다. 아울러 2004년에 홍기 여사가 사망한 지 15년 만에 고인이 된 영부인이다.

2. 생애

6남 2녀 중 장녀이자 넷째로 일제강점기 경성부 수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용기는 국내 '의사 면허 4호'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이때부터 세브란스 병원과의 운명이… 전북 남원 도립병원장, 경기도 포천 도립병원장을 지내는 등,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이순이는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실한 감리교 신자였기에[3], 그 영향에 따라 모태신앙을 갖게 된다. #

"여자도 공부 많이 해야 한다."라는 당시 보기 매우 드문 모친의 뜻에 따라,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1936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의 전신)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재학 당시 반장을 하는 등, 솔선수범의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18살 때 모친이 사망하여,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어떤 것이 여성인 나를 위한 길인지 생각한 뒤에,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 3가지가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첫 번째는 결혼하지 말자, 2번째는 건강하자, 3번째는 공부를 많이 하자였다고 한다.[4] 이 중에 첫 번째를 엄청난 남자와 함께 실패하는 바람에.... 40년간 고생한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이때 잠시 충남 예산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한다.# 1946년 9월, 이번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시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2학년 때 전공을 옮겨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으로는 정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축인데, 1943년도에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가 5,504명, 그중에 여학생은 고작 1,255명이었다. 1944년도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거주하는 여성들 약 1,260만명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약 3,600명 정도로, 0.02%에 해당한다.#

서울대 재학 시절, 당시 여학생이기에 편협한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희호는 총학생회 사범대학 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았다. 엄청나게 활발하고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기에, 교내에서 '다스'[5]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기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내가 히히호호하고 크게 웃어서 이름이 이'희호'에요."라고 붙임성 있고 재치있게 소개했다고 한다.[6] 또한, 사회참여운동에 관심이 많아 연극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Foolish>라는 연극을 공연할 때는 이희호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고, 연출도 다 했다고 한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뭐한 거죠? 항상 웃기는 역할까지 다 맡는 등, 활달한 타입이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피난길에서도 이태영[7],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적극적인 여성운동을 펼쳤다. 1950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1952년에는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하였다. 여성문제연구원은 훗날 여성문제연구회로 명칭을 바꿨고, 훗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8]을 맡기도 한다.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무렵, 미래 남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김대중과의 운명이 시작된다. 1.4 후퇴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던 해운회사 사장의 도움을 받는데, 바로 그 사장이 김대중이었다. 이후에 김대중이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기면서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지는데, 이때 처음으로 둘이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희호는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이 모임에 김대중이 간헐적으로 참석하면서 교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유학하는 동안 미국 감리교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여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스카릿대 대학원에서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 취득 후에 1958년 귀국한다.

귀국 후에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강사로 강단에 섰고, 이어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MCA 연합회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맡으며 국내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장식한다.

이렇게 여성운동가로 잘나가고 있었는데, 1962년 5월 10일 김대중결혼한다.[9] 그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2번째 부인이다. 첫 부인인 차용애[10]는 1959년에 병사했다.[11][12]. 이후에 이희호가 2살 연하의 김대중과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초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며 통탄했다고. 모든 YMCA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며 왜 (이희호의) 소중한 인생을 (김대중의) 초라한 삶(…)에 맡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후일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과 결혼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잘 생겼잖아요." 그러나 김대중 친누나 김안례 여사는 가족 중 김대중이 제일 안 잘생긴 축이라고...(…)
파일:김대중과 이희호의 결혼식.jpg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사실 이희호의 자서전이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는 본래는 계훈제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단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인 계훈제는 재야의 유명인사로 반탁운동, 4.19 혁명,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 유신헌법 반대 등에 앞장섰다. 하지만 잦은 투옥 생활을 하게 되며 폐결핵이 심해지자 이희호는 해외 유학을 결정하였고,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하였다.

남편이었던 당시 재야인사 김대중이 군부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여성운동 활동도 접어야 했다. 대신 남편의 기나긴 옥바라지와 내조, 민주화투쟁의 동지로 일생을 보냈으며,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비판자이자 조언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70대 후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외계층 복지와 정책감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여성권익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젊었을 적 초심을 잃지 않고, 부군의 정책공약에 정치적 관심에서 소외되기 쉬운 여성들을 위한 대책이 들어가게끔 도왔으며, 이는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여성가족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조문을 위해 방북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당시 북측의 조문단 파견에 대한 답방 차원이라고 한다. 당시 이희호와 함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동행했는데, 둘 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북한에서 조문을 왔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3남[13] 김홍걸을 두었다.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한 뒤 문재인 대통령을 방문해 덕담을 전하며 "노벨상을 꼭 받으시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에게 넘기고 우리는 평화만 얻으면 된다"라 말했다고 한다.

이후 2019년 6월 10일 오후 11시 37분부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96세. 사인에 대해서는 한때 간암 투병설이 돌았으나, 어떤 병이 아닌 노환 때문이라고 유족 측은 밝혔다.

이희호 여사는 유언으로 "하늘나라에서 국민들과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
지금까지 남편 김대중과 자신을 사랑해준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하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또한 동교동 사저는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고, 노벨평화상 기금은 대통령 추모 사업 기금으로 사용해달라.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 합장된다.

3. 평가

3.1. 긍정

  • 1차례의 출마 불발, 3차례의 낙선으로 살림이 망가진 데다 아이까지 2명이나 딸린 남자가 열렬한 웅변조로 구애하는 걸[14] 승낙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 남편의 투옥, 자식들에게까지 미치는 시찰 및 탄압을 감내하며 일생 동안 동반자이자 좋은 도반[15] 같은 역할을 하는 덕을 쌓았다. 물론, 이렇게만 언급한다면 애 딸려 있고 무직이고 변변찮은 남자에게 단순하게 헌신하기 위해 시집 간 앨리트 여성으로 보이겠지만, 1962년 결혼 당시 김대중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던 때였다. 즉, 미래가 기대 되는 전도유망한 초선 정치인이었다. 실제로도 이후 계속 당선된다. 또한, 김대중은 남녀차별이 심각하던 때에조차 여성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꽤나 올바른 여성관을 갖고 있기로 유명했다. 1960년대에 자신보다 아내가 똑똑하고 스펙이 좋다고 열등감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한다."라고 말하는 남성이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도 잘 없을 듯 분명 당시 앨리트 여성에게는 있기 힘든 결정이었음이 맞지만, 단순하게 일반 사람들처럼 선상에 두고 볼 일은 아니다. 실제로 김대중이 청혼했을 당시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16]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했던 김대중은 제14대 전 대통령 김영삼처럼 달리기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따금 수영이나 조금 하는 수준으로, 옥고에 사고까지 겪으며 고초를 겪은 몸으로 86세까지 장수하였다. 옆에서 헌신적으로 음식 대접, 덕담이나 격려, 세세한 조언 등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결과.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후 재기를 노리는 DJ가 정계복귀를 결심했을 당시에는, 재택근무비서 장성민에게 "왜 애 아빠를 말리지 않느냐?"고 꾸짖었을 만큼 크게 반대하였지만, 남편울타리 밖에서 여권과 언론의 예리한 비판에 직면했을 때는, "군인들이 헌법을 고칠 때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해도 너무한다."는 대외발언으로 옹호, 내부 분위기를 다잡는 한편, 자신이 단순 배우자가 아닌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3.2. 부정

여러 친인척들이 구설수에 올라 야권의 대정부 공세의 빌미가 되었다.
  • 먼저 이희호의 남동생 민주사랑회 회장 이상호는 알선수재 및 미성년자 원조교제 혐의로 법정구속되었다.
  • 이어 이희호의 조카[17] 이형택은 수십조원을 관리하는 공공금융기관인 예금보험공사의 전무로 있으면서 기록한 공적자금 실적이 환수율이 15%에 불과해,[18][19] 방만한 관리를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고, 이용호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산업은행에게 부실 건설사를 250억에 인수하도록 압박 + 국정원의 보물탐사 + 벤처기업 주가조작의 혐의로 구속돼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 셋째로 이희호의 조카 이형작은 경기은행 퇴출 관련 수사가 이루어질 당시, 해외도피의혹을 받았고, 이희호의 처조카 사위 이윤복은, 국민의 정부 시절 생긴 강원랜드 서울지사 사장으로 임명되는 특혜를 받기도 하였다.
  • 넷째로 강원랜드 메인시스템 입찰에서는 이희호의 친아들인 김홍걸의 후견인이자, 김대중 일가의 재산관리자으로 주목받은 조풍언이 대주주로 있는 대우정보시스템이 승리하였다. 조풍언은 김대중 정권 동안 26건의 군납을 따냈으며, 김홍걸의 미국 저택의 주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위 긍정적 평가에 언급되는 부분의 반대 급부로 정말 내조를 잘 한 만큼 대통령의 정책에 악영향을 준 부분이 함께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성가족부이다. 물론 해당 부처가 문제없이 본연의 업무만 잘 수행했다면 비판받을 일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여성가족부의 여러 삽질이 있었음에도 그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의사 표현도 없었기에 문제로 지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라는 자원을 사장시켜 놓고 그 사회가 발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희호가 국회에서 연설한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물인 여성가족부는 국민의 절반을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희호가 여성부 창설 문제로 국회에서 연설한 것은 1999년이었고, 이 당시만 해도 여성부의 출범에 대해 반응도 긍정적이었고 실제 여성부 창설 이 후 초기 몇 년동안은 부처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하며 일을 잘했다. 이희호도 이런 상황을 예상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여성가족부가 본격적으로 삽질을 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에 이희호는 이미 고령에 여성운동계에서 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이 없었을 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다.

이와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 임기중 군 복무를 수행한 경우 해군 박정성 제독[20]처럼 국민의 정부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 사례도 있다. 이는 사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지만 정치적 동지였던 이희호가 깔아놓은 여성우대정책이 묘하게 맞물려 같이 비판의 화살이 온 것.[21][22]

4. 신앙

맨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종교개신교이며, 교파는 감리회이다. 애초에 집안 자체가 개신교 집안에 이희호 본인모태신앙으로써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을 키워왔고, 한 때는 주일예배수요예배는 물론 평일예배 전체에 참석한 적도 있을 만큼 매우 독실했다고 한다. 세례는 1937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웃해 있는 정동교회에서 받았다. 애초에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미국 북감리회의 추천과 지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여성운동가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활동이 바빠져 그 정도까지 열성적으로 나가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교회 사업,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등에 관심을 가지는 등 꾸준히 교회 관련 일을 해왔다. 이후 1962년, 김대중과 결혼하여 동교동으로 자리를 잡아 온 이후부터는 창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별세 직전까지도 창천교회의 장로였다. 다만, 고령의 나이 때문에 시무장로에서는 은퇴한 상태였다. 창천교회는 이 여사와 꽤 인연이 깊어서, 1998년 서명회와 2008년 <동행> 자서전 출판 당시 책 싸인회도 창천교회에서 진행했을 정도다. 창천교회는 이 여사와의 인연으로 김 전 대통령의 4주기까지는 추모예배를 드렸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대중천주교 신자였고, 이희호가 낳은 김홍걸만은 어머니와 같이 창천교회에 출석하는 크리스천이다. 이복형들은 아버지처럼 천주교 신자들이다. 혼인성사 당시 관면을 본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은 이희호와 막내아들에게 각자의 신앙 생활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였고, 이는 가정 내 그리스도교 일치와 이해의 좋은 예로 평가받는다.

이희호 여사가 일본에서 연설했을 때는 기독교적인 표현이 60차례 넘게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장례 역시 개신교식 장례로 엄수되었다.

헌데, 이 와중에 일베 성향의 네티즌들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표현으로 상을 치르는 기간에 고인 부부를 비하하고 조롱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5. 그 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와도 생전 매우 가까웠다. 아무래도 민주 정부 10년의 영부인인 데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사이가 매우 가까웠고, 비슷한 시기에 남편이 서거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희호 여사는 이 인연으로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 김대중이 노무현의 서거를 전해듣고 한 말인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를 직접 친필로 적어 보냈다. 현재도 이 여사의 친필은 국민박석 끝 부분에 다른 정치인들이 적어놓은 친필 박석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때는 무안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이 후에도 봉하마을을 자주 찾았다. 권 여사도 동교동을 자주 방문했으며, 이 여사 별세 몇 시간 전 병실을 찾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아들 노건호와 함께 조문과 사회장에도 참석하였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새 당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옛 동교동계 출신인 박지원 후보를 적극 지지하였다. 2015년 8월 5일,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 지원 등을 목적으로, 4일짜리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2016년 1월 4일, 안철수 의원이 이희호 여사를 방문해 약 20여 분 동안 비공개 면담을 했다.

이 면담을 취재하였던 중앙일보는 이희호 여사가 안철수 의원에게 "정권 교체의 주축이 되어 보아라"라는 말로 안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며 대서특필을 했으며, 안 의원 측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희호 측[23]에서 이 보도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중앙일보 쪽에 정정 보도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는 일이 일어났다. 이 기사를 본 김홍걸 교수가 어머니 이희호에게 사실 관계를 물어보았고, 기사를 본 이희호는 "아이구 맙소사"라며 몹시 당황해 했다는 것이다.

논란이 일자, 안철수 의원은 그간의 입장을 뒤집고 "이희호에게 폐가 될 수 있으니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며 즉답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희호 측은 중앙일보에게도 정정보도 요청을 끝내 거부할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해 진실을 밝혀내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월간중앙이 안철수 측으로부터 받았다는 녹취록을 공개하였는데, 비공개 면담에서 이희호는 대개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고 안철수 의원이 "꼭 건강하셔서,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꼭 정권을 교체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에 "그렇게 하세요"라고 화답만 한 게 전부라는 것이 드러났다.

중앙일보와 안 의원 측이 이희호의 당연한 화답을 좀 과도하게 부풀렸던 것도 그렇고, "왜 비공개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서 함부로 녹음을 하였으며, 왜 그걸 또 언론에 흘리기까지 했느냐"는 질타가 안철수 의원과 국민의당 쪽에 쏟아지자, 안 의원 측은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무심코 녹음을 한 것 같다"며 이희호 측에 공식 사죄하고 문제의 수행원을 해임하였다. 다만, 녹취자와 유출자는 별개 인물로 보인다. 유출자는 결국 찾지 못한 것 같다.

뜬금없이 닥터 드레와의 재혼 소식이 터졌다. 물론 가짜 뉴스. 링크. 정치부회의에서도 다룬 내용인데, 의외로 믿는 사람들이 있는 듯. 이 가짜 뉴스를 퍼트린 70대 유포자는 벌금형에 처해졌다.

2019년 4월에 이복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이 타계하였는데, 이희호 여사도 그 전부터 지병이 악화되어 위험한 상황이라 이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24]

기사(중앙일보 190609)에 따르면 병세가 위중해져서 그 '금귀월래'[25]를 철저하게 지킨다는 박지원 의원이 8일(토요일) 밤에 급히 서울로 복귀했다고 한다.

기사(한국일보 190610)에 따르면 가족 측에서는 권노갑 前 의원(現 민주평화당 상임고문), 장상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민주당 대표를 공동장례위원장으로 한 사회장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가 사망한 지 하루 만에 북한에서 김정은이 조의문을 보냈다고 한다. 조문단을 파견하지는 않고 김여정을 통해 판문점에서 조화와 조의문을 전달했다.

6. 발언

노태우 부총재가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좋은 결정을 내린 것을 환영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의 결정을 수용해야 합니다.
6월 항쟁 당시 외신과의 인터뷰.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라는 자원을 사장시켜 놓고 그 사회가 발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99년 10월 국회 연설
모든 인간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고통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1998년 여성 장애인의 날 기념식
남편이 평생 추구해 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2009년 8월 23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국민추모문화제에서.
저는 늦게 결혼했어도 참 좋은 분을 만나서, 제 인생은 값있고 뜻 있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김대중 대통령 2주기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서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대화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남아도는 도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회담을 해야만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8월 동아일보 인터뷰.
다음 세대에 분단의 아픔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국민 여러분도 뜻을 모으셔서 6.15가 선포한 화해와 협력, 사랑과 평화의 하나됨의 역사를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5년 8월 방북 기자회견에서.
미투 운동 여성들, 용기를 가지고 목소리를 내라.
2018년 3월 인터뷰.

7. 이희호를 연기한 배우



[1] 분파는 계성군파. 계성군은 성종서자이며, 연산군이복동생이자 중종의 이복형이다.[2] 살아생전 창천교회 장로였다. 더 자세한 것은 아래의 신앙 부분에 후술.[3] 참고로, 잘 안 알려졌지만, 아버지도 개신교였다.[4] 이희호 자서전 <동행>에 나온다.[5] 독일어로 'das'라고 쓰며, '중성관사' 역할을 한다.[6] 강원룡 목사의 <내가 만난 이희호>[7]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8] 1대 회장은 황신덕이었다.[9] 참고로 결혼식 장소는 그녀의 외삼촌이자 대한민국의 IOC 가입 절차 마무리 및 1948 런던 올림픽 고문 등을 지냈던 사업가 이원순의 집 대청마루라고 한다.[10] 호적상 이름은 차용수.[11] 김대중 대통령은 사망하기 전 완성된 자서전(2009년 판)에서 "과로사에 가까운 병사"라고 구술하였다. 연이은 낙선으로 궁핍해진 살림을 보태고자, 집에 미용도구를 갖춰놓고 미용실까지 운영하면서 독한 약품에 많이 노출되던 게 쌓여서 탈이 났다는 것이다. 생모가 작은댁이었다는 사실까지 솔직하게 구술해 놓은 2009년 판 자서전 내용인 만큼, 신빙성 있는 출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12] 차용애는 약을 복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혼수 상태에 빠졌으며, 김대중이 부른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급사하였다. 1980년, 당시 어용 언론이었던 경향신문은 차용애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선동, 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기사를 실어 김대중이 차용수를 음독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제5공화국 시절 경향신문의 대표적인 흑역사.[13] 김대중 대통령의 자녀 3남 중 장남차남은 전처 소생.[14] 실제로는 결혼 전부터 잘생긴 용모에 언론인 출신다운 예리한 시야와 통찰력을 보였던 김대중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15] 불교에서 같이 수행을 하는 동행자를 뜻하는 말.[16] 이희호 자선의 <동행>에 나온다.#[17] 오빠의 아들이라고 한다.[18] 회수불가능액수는 81조 원. 이 중 대우그룹 사태로 인해 떼일 뻔한 돈이 29조 원이었다. 이후 관계자들이 회수에 나섰지만, 15년이 넘어가는 소걸음으로 진행되면서,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사실상 부채탕감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나마 7조 원은 대우 측에서 갚지 않아도 되는 자금이라 주장하며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19]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당시 "추가 대출을 받으면 위기 극복가능"이라는 낙관론으로 일관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선친들 간에 인연이 닿은 (김 회장 선친이 박정희 전 대통령 은사)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는 호재가 생겼음에도, 아직 복귀할만한 명분이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20] 송영무와 더불어 제1연평해전 승전을 이끈 지휘관.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김대중 정부 시절 해군 NO.3 보직인 해군 군수본부장(중장)으로 영전하였지만,ㅡ 같이 싸운 송영무 준장이 이후 해군 참모총장, 국방부장관으로 진급, 영전을 거듭한 것에 비해, 군수본부장을 끝으로 참여정부 출범 후 군 경력을 마무리하였다. 이후 북한의 눈치 때문에 본인을 홀대하여 전역하게 됐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박 제독이 전역한 건 차기 정권 출범 후이며, 김대중 정부 시절 영전한 사실이 있고, 같이 참전한 송영무 제독이 있고, 연평해전 당시 해군 수뇌부 역시 영상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simulation game을 하듯 작전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박정성 제독 단독의 공적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21] 해군은 과거 김영삼이 일망타진한 하나회같은 군벌조직도 없고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하거나 이를 시도한 적도 없으며 아무리 병역의무가 있다지만 말단 수병조차 징집이 아닌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군대이다. 잘만 대해준다면 프로파간다 같은거 안해도 얼마든지 나라에 목숨걸고 충성할 조직이라는 의미다. 거기에 육방부에게 억압받은 과거도 있어 오랜기간 육군 출신의 군부정권에 맞서 싸우고 해군도 잘 챙겨준(예산문제로 취소되었으나,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구축함 사업을 필두로 전임자들이 세운 이 계획들이 다시 하나씩 추진된다)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거는 기대가 컸던 관계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오게 된 측면이 있다. 사실 김대중 정부 관계자들은 전몰장병 법정 보상금의 한계(3,000만원)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성금이라는 우회로를 거쳐 02년 제2연평해전 전몰장병 유가족분들께 1가구당 (3,000만원 + 4억원)을 지급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지만, 정권 末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은 묻혔다.[22]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발생한 천안함 사건의 전몰장병들을 임기 후에도 꾸준히 참배해 화제가 되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4년(참여정부) 개정된 전몰장병 보상법(3,000만원 -> 2억원)의 소급 적용 요청건을 대통령 후보시절 연평해전 유가족분들께 약속하고 정부 사정상 지키지 못한 과실이 있다. 아니, 자기가 말한 말을 뒤집어서 소위 말해서 유가족들의 뒷통수를 쳐버렸다. 당연히 유가족들은 분노했고, 고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는 "나라를 지킨 사람에게 국가가 예를 다 하지 못 하면 어느 누가 나라를 지키겠느냐"며 훈장을 반납한다. 이 문제는 2018년 문재인 정부 때 비로소 해결된다. 굳이 공동선언의 날짜까지(제1연평해전 교전 날짜가 99년 6월 15일) 끌어와 해군 장병의 정서가 부정적이라며 연관짓는 건, 큰 선거를 앞두고 흔히 일어나는 프로파간다 측면이 있는 무리수이다.[23] 엄밀히 따지자면 김대중의 3남인 김홍걸의 주장이었다. 김홍걸은 안철수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문재인을 지지하였다.[24] 안타깝게도 김홍일이 사망하고 2개월 뒤에 이희호 본인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의 타계 소식을 끝까지 알리지 못했다.[25] 비수도권(지방)에 지역구를 둔 의원이 금요일에 지역구로 내려가서 주말 내내 지역구민을 만나는 등 지역구를 챙기고서 월요일에 서울로 돌아온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