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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중 | 김혜경 / 제21대 |
활동 시작일 | 2025년 6월 4일 |
소속 정당 |
1. 개요2. 역대 대통령 배우자
2.1. 프란체스카 도너 (배우자: 이승만)2.2. 공덕귀 (배우자: 윤보선)2.3. 육영수 (배우자: 박정희)2.4. 홍기 (배우자: 최규하)2.5. 이순자 (배우자: 전두환)2.6. 김옥숙 (배우자: 노태우)2.7. 손명순 (배우자: 김영삼)2.8. 이희호 (배우자: 김대중)2.9. 권양숙 (배우자: 노무현)2.10. 김윤옥 (배우자: 이명박)2.11. 미혼 (박근혜)2.12. 김정숙 (배우자: 문재인)2.13. 김건희 (배우자: 윤석열)2.14. 김혜경 (배우자: 이재명)
3. 대통령 권한대행 배우자4. 여담1. 개요
대한민국 대통령의 배우자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배우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배우자인 프란체스카 도너부터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인 이재명의 배우자 김혜경까지 총 13명이다.
대한민국의 언론에서는 배우자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이름 뒤에 씨를 붙여서 부르지만 공식적으로 대통령의 배우자가 된 후에는 다소 격을 높여서 여사(女史)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통령 배우자나 재벌 총수의 배우자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서 언론에서 특정 인물에게 여사라는 호칭을 붙이는 경우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영부인(令夫人)이라는 단어는 대통령의 부인만을 일컫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오랜 기간 사용됐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대중들이 대통령의 부인을 지칭할 때 쓰는 경우가 많으며 언론에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다만, 최근에는 영부인이라는 권위주의적 호칭보다는 민주주의 정부 시대에 걸맞게, 그냥 중립적으로 대통령 배우자라고 호칭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여성 대통령이 결혼했을 경우 남편을 부르는 단어로 부군(夫君)이 있지만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해당 표현이 사용된 적은 없다. 또 대통령의 아들은 영식(令息), 딸은 영애(令愛)로 부르기도 하는데 제3공화국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자녀를 두고 영식, 영애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해당 단어가 권위적인 표현이라 그런지 현재는 대통령의 아들, 딸, 자녀 정도로만 호칭한다.
영부인은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국가 의전 및 경호 대상이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부인은 대통령 개인의 사적인 관계(결혼)에 의해 규정된 것일 뿐 법적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영부인의 법적지위는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및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서 경호 및 예우 대상에 대통령 배우자를 포함시키고 있을 뿐 그 밖에 배우자의 지위 및 역할을 규정한 법률은 없다. 의전서열에 있어서도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내용은 정의되어 있지 않다. 단지 관례상 대통령 곁에서 대통령과 같이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2. 역대 대통령 배우자
2.1. 프란체스카 도너 (배우자: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Francesca Donner Rhee)[2] 1900. 6. 15. ~ 1992. 3. 19. (향년 91세)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후처이며[4] 프란체스카 도너 역시 이혼녀였다가 마찬가지로 이혼남이었던 이승만을 만나 재혼했다. 광복 이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유일한 외국계 배우자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대를 경험한 세대는 프란체스카를 두고 흔히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당시 프란체스카의 별명이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프란체스카 도너의 고국인 유럽 오스트리아와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혼동하여 생겨난 별명이다.
6.25 전쟁 당시 일명 쌕쌕이라고 부른 제트전투기를 호주 비행기라는 뜻의 호주기라고도 불렀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 호주기를 보고 사위를 도와주려고 날아온 전투기라고 혼동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주는 실제로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병한 참전국이지만 프란체스카 도너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의 분할 군정 통치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따라서 6.25 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가 아니다.
슬하에는 혈연 관계가 없는 이봉수와 이강석, 이인수 세 명의 아들이 있으며 도너 본인은 자녀를 낳지 못했다.[5]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허정 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이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는데 허정 대행의 아내 백귀란이 유일하게 대통령 권한대행의 배우자로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 행사에 참여한 사진이 있다.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들의 배우자는 남편이 바로 이어서 대통령이 되는 헌정 중단 시기의 박정희의 배우자 육영수나 최규하의 배우자 홍기를 제외하면 대통령 배우자 대행을 맡은 적이 없다.
2.2. 공덕귀 (배우자: 윤보선)
공덕귀 1911. 4. 21. ~ 1997. 11. 24. (향년 86세) |
최초의 한국인 영부인. 당시는 물론이며 현대의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늦은 나이인 38세에 결혼했다.[7] 공덕귀는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무너지면서 1년 6개월만에 대통령 배우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통령 배우자 직책에서 물러난 뒤로도 구속자 석방 운동, 기생관광 반대 운동,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 등을 전개하며 사회 운동가로 적극 활동했다.
슬하에는 혈연 관계가 없는 계녀 2명[8]과 본인이 직접 낳은 친아들 2명이 있다.
2.3. 육영수 (배우자: 박정희)
육영수 1925. 11. 29. ~ 1974. 8. 15. (향년 48세)[9] |
상당히 남성스러운 느낌의 이름인데 배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반대로 굉장히 여성스러운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식 당시 주례를 맡았던 허억 대구시장이[11] 엄숙한 목소리로 신랑 육영수, 신부 박정희라고 잘못 낭독하여 폭소가 터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후 박정희 전 육군 소장이 5.16 군사정변을 통해 장면 내각의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집권하며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12] 김종필 회고록에서는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가 집을 나서며 육영수에게 쿠데타 실패의 경우를 산정한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지만 결과적으로 군부 쿠데타는 성공했다.
슬하에는 장녀[13]인 박근혜, 차녀[14] 박근령, 장남[15] 박지만이 있다. 김호남이 낳은 의붓딸인 박재옥과는 같이 생활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지만 중매를 시켜 주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박재옥은 말이 의붓딸이지, 나이 차는 고작 12살에 불과해, 어머니와 딸보다는 큰언니와 막내동생에 더 가까웠다.
역대 대통령 배우자 가운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전현직 대통령 배우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선호도 조사 결과, 육영수가 과반수를 넘는 "65.4%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박정희 본인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다가 여기 야당 총재께서 계시니 다들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농담을 할 만큼 적극적이었는데 여기서 비롯된 별명이 청와대 안의 야당이다. 체계가 하나도 잡혀 있지 않던 청와대 내의 의전 체계를 처음으로 정립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외국 국빈 방문시에도 그때마다 임기 응변으로 의전하는 식이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때 재일교포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시해됐고 광복절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기념일은 육영수의 기일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 가장 단명한 대통령 배우자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피살당한 대통령 배우자이다.
모친 육영수가 문세광에게 살해당한 1974년부터 이후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으로 암살당하기 전까지 5년 간(1974년 8월 15일 ~ 1979년 10월 26일) 장녀 박근혜가 외국 정상 접견 등 통상 대통령 배우자가 담당하는 역할을 대행했다.[16] 대통령 배우자 직무 수행자로서는 당시 만 22세로 최연소이다.
170cm에 육박하는 신장을 가진 육영수는 당대는 물론 현재로서도 상당한 장신으로서[17] 역대 대통령 배우자들 중 가장 키가 크다. 배우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키가 164cm로 비교적 단신이었던 관계로 육영수의 장신이 더욱 부각됐다.
2.4. 홍기 (배우자: 최규하)
홍기 1916. 3. 3. ~ 2004. 7. 20. (향년 88세) |
1979년 10월 26일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에 취임하며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 얼마 가지 않아 일어난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식물 대통령이 된 최규하가 결국 사퇴하고 전두환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당시 취임식에 참석한 홍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앞에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내비쳤다.
대외 활동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대통령 배우자였다는 평을 받는다. 대통령 배우자가 되어서 청와대에 가야 한다는 기자의 말에 김장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라고 했다고. 하지만 권한대행 시절에도 위문 활동을 한 기록이 있다.[18]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2.5. 이순자 (배우자: 전두환)
이순자 1939. 3. 24. ~ 현재 ([age(1939-03-24)]세) |
재학 중 전두환과 결혼을 하기 위해 중퇴했으며 1958년에 결혼했다. 이는 이화여자대학교의 특수한 학칙 때문이다. 2003년까지 재학생이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금혼 학칙이 존재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강제 조혼의 악습으로부터 신체적·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여학생들을 보호하고 그녀들의 교육권을 확보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었다. (오늘날 중동 등에서 강제 조혼을 당하는 여아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금혼 학칙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되었고 결국 2003년 폐지되었다.
친인척의 비리 등 대통령 배우자 재임 시절에도 구설수에 올랐다.
2.6. 김옥숙 (배우자: 노태우)
김옥숙 1935. 9. 8. ~ 현재 ([age(1935-09-08)]세) |
딸 노소영은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 박사를 수료[20]한 후 최태원 SK 회장과 결혼했다. 아들 노재헌은 조지타운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후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의 장녀인 신정화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생존한 대통령 배우자들 중 최고령이다.
2.7. 손명순 (배우자: 김영삼)
손명순 1929. 1. 16. ~ 2024. 3. 7. (향년 95세) |
러브 스토리
김영삼과 손명순은 선을 통해 만났다. 손명순 여사는 독실한 교회 신앙인이었다. 교회 어른들의 주선으로 김영삼과 손명순은 선을 보게 됐다. 김영삼의 집안이 결혼을 재촉하고 있어 여러 집안의 여성과 선을 보고 있었는데, 손명순 여사와의 만남은 3번째 맞선이었다.
첫 만남에 김영삼은 손명순에게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 영국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의 부인 이야기였다. "어느 날 디즈레일리 총리의 부인이 남편의 의회 연설을 듣기 위해 가던 중 마차 문을 닫다가 손을 다쳤다. 그러나 남편이 놀랄까봐 의회 연설이 끝날 때까지 아픔을 참고 있었다"는 일화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손명순은 속으로 '이 양반이 정치를 해도 단단히 할 사람이로구나'라고 생각했다.
김영삼은 손명순이 마음에 들었는지 선을 본 후 바로 다음 날 손명순의 집을 찾아와 애프터 신청을 했다. 김영삼은 대문 앞에서 손명순의 남동생을 보더니 그를 손짓으로 부르고는 누님을 만나러 왔다고 전해달라며 부탁한다. 김영삼과 손명순은 얼마간 이야기를 나눴다. 손명순은 남동생을 포함해 셋이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둘이서 보는게 좋겠다며 남동생이 거절했지만 손명순이 쑥스러웠는지 남동생을 어떻게든 함께 데리고 가려 하자 결국 세 사람은 함께 마산극장에 간다. 마산극장에서 서부극 할리우드 영화 '광야천리'를 본 일이 두 사람의 첫 데이트였다. #
2.8. 이희호 (배우자: 김대중)
이희호 1922. 9. 21. ~ 2019. 6. 10. (향년 96세) |
향년 96세로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자 역대 최고령 대통령 배우자다. 홍기 다음으로 나이가 많고 육영수보다 연배가 3년이나 앞선다.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도 2살 연상이다.[23]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대통령 배우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도 김정일 사망 당시 방북하여 조의를 표하는 등[24] 민주당계에서는 강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슬하에는 김대중을 기준으로는 셋째인 김홍걸이 있으며 김대중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김홍일과 김홍업에 대해서도 새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였다.
러브 스토리
1959년 별 명성 없던 정치 재수생 김대중은 노모와 두 아들을 키워야 했음에도 직업이 없어 고초를 겪고 있었다. 백수생활을 하던 김대중은 종로 화신백화점 5층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백수처럼 시간을 보냈다. 돈이 없던 김대중은 후배의 대학등록금을 빌려 쓰기도 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대중은 용기를 내 명동 대한YWCA연합회를 찾아갔다. 당시 대한YWCA연합회 총무가 이희호였다. 아무래도 금전적 어려움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김대중이 그 날 대한YWCA연합회를 방문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1959년, 김대중과 이희호 두 사람은 첫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첫 인상에 대해 '핸섬한 멋쟁이', 김대중은 이희호의 첫 인상을 '이지적 눈매를 가진 활달한 여성'으로 기억했다.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 하지만 만남은 잠시,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이희호는 이후 신문을 통해 초라한 정치인 김대중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두 사람은 1961년에 다시 만났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낭인이 된 김대중은 그 해 가을 이희호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말이 엄청 잘 통했으며 매일같이 열띤 정치 이야기를 했다. 서로 생각이 잘 통하고 정치사상도 같아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이희호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김대중이 찾아와 사무실 근처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가끔 밥도 함께 먹었다. 물론 김대중은 직업이 없어서 데이트 비용은 모두 이희호가 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커플들의 대화라기 보단 지식인들의 정치토론에 가까웠다.
1961년이 다 가기 전에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에 청혼은 남자가 하는 것이었으므로, 김대중이 프러포즈를 하길 기다렸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솔직히 김대중이 잘생기고 멋있어서였다. 둘째, 독서광 김대중은 해박한 지식을 뽐내 초고학력 신여성인 이희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셋째,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김대중이란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지요"라고 이희호 여사는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김대중 자신은 가난뱅이 백수였고 이희호는 이미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한국 여성계의 차세대 리더였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김대중은 청혼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 해 겨울 김대중은 앓아누워 겨울 내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병 때문에 집에 갇혀 오랫동안 이희호를 보지 못하자 김대중은 이희호가 너무 그리워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된 다음 해 3월 바로 이희호를 찾아가 그간 있던 일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사랑과 그리움을 속삭이며 파고다공원에서 저녁 늦도록 이야기했다.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김대중의 프러포즈 멘트였다. 그렇게 나이 40을 앞둔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2.9. 권양숙 (배우자: 노무현)
권양숙 1948. 2. 2. ~ 현재 ([age(1948-02-02)]세)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이전에 결혼하여 뒷바라지를 했다. 노무현이 제5공화국 청문회를 거쳐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2009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어 남편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러브 스토리
노무현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양복점집 딸이었다. 하지만 첫사랑이 그렇듯 실패(아마도 짝사랑)로 끝났다.
노무현의 두번째 사랑은 건설노동자 일을 하다 다친 자신을 병 간호한 간호조무사였다. 하지만 병문안 온 자신의 친구를 그녀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무현은 결국 마음을 접었다.
노무현의 구애는 언제나 공격적이었다. 권양숙은 노무현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 노무현이 입대를 앞두고 고향에 설 쇠러 온 권양숙을 보자 "저녁때 통샘골에서 보재이"라는 말을 툭 던졌다. 노무현은 그날 밤 권양숙의 집을 찾아가 "사람 기다리게 하고 와 코빼기도 안보이노"라고 소리쳤다. 놀란 권양숙이 노무현을 따라 나서면서 "공부나 하지 사람 왜 불러내노"라고 따졌다. 노무현은 "집 지을 때 기둥도 있고, 서까래나 장식물도 필요한 거 아이가"라고 하자 권양숙은 "그럼 여자는 장식물 같은 거라 말이가"라고 말했다. 노무현이 오히려 권양숙에게 한방 먹었다.
노무현은 고등학교 때부터 권양숙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노무현은 "알면서도 딴청부리는, 딱 제 타입의 여자"라면서 권양숙이 이상형에 부합하던 여자라고 회상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지적이고 자존심 강한 여성을 좋아했는데, 아내는 그런 저의 이상형에 딱 맞는 사람입니다.
본격적인 연애는 권양숙이 25살 때 귀향하며 재개됐다. 권양숙은 할아버지 병 간호와 어머니가 맡은 생계를 거들러 고향에 왔다. 제대를 한 노무현은 본격적으로 예전부터 관심있었던 권양숙 꼬시기 작업에 들어간다. 권양숙은 말벗이 없고 숫기도 없어 길에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고 한다. 노무현은 그런 권양숙을 자주 흠잡고 다녔다. 노무현은 심심하면 권양숙 욕을 하고 다녔다. 사실 이는 권양숙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노무현의 고단수 여자 공략법이었다.
처음에는 책을 빌려주고 받는 평범한 사이로 시작해 나중에는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관계를 발전시켰다. 권양숙은 1년이 다 되어서야 겨우 노무현에게 마음을 열었다.
두 사람은 2년 가까이 커피 한잔 값 안들이고 그저 밤길과 둑길을 오래 걸으며 수다떨기로만 데이트를 계속해갔다. 노무현은 권양숙이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를 하던 문학소녀였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 어울려 다녔다. 고시생 노무현이 밤에 집에 들러 새 담요로 바꿔들고 돌아가던 중 권양숙과 둑길 데이트를 했는데, 누군가 그걸 보고 "쟤들은 담요 갖고 다니며 데이트한다"고 소문을 냈다.
두 사람의 집안은 각자의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고시생 노무현이 판사가 못 되면 어떡하냐, 북한 부역 혐의로 옥사한 권양숙 집안의 장인은 어떡하냐는 등의 갈등으로 다투면서 두 사람 앞엔 험난한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하지만 혼전임신이라는 과속을 해서였을까 두 사람은 결국 1973년 1월에 결혼했다. # #
2.10. 김윤옥 (배우자: 이명박)
김윤옥 1947. 3. 26. ~ 현재 ([age(1947-03-26)]세) |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77년 현대건설 사장을 역임했으며 1988년 현대건설 회장이 되었는데 이때 이명박의 뒷바라지를 했다. 슬하에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이시형은 막내아들이고 2014년 10월 9일 결혼했다.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윤옥의 막내 사위이다.
러브 스토리
이명박과 김윤옥은 선을 통해 만났다. 김윤옥의 오빠와 이명박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는 친분이 있던 사이였는데, 당시 현대건설 이사로 재직 중이었던 이명박에게 고등학교 은사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김윤옥과의 선을 주선했다.
대학 시절 퀸카였던 김윤옥이 너무 예뻐서 그녀를 놓치기 싫었던 이명박은 김윤옥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현대건설 이사였던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일로 너무 바빠 데이트 때마다 지각이 잦았다. 데이트 약속을 잡고도 혼자 저녁을 먹게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자기가 아닌 수행 운전기사를 보내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일쑤였다.
결국 하루는 열 받은 김윤옥이 오늘은 자신이 2시간 늦게 데이트 장소에 나가 복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데이트 장소에 김윤옥이 지각하자 이명박은 '저 여자가 날 차려나보다'라고 눈치를 채고선 바로 김윤옥의 손목을 잡고 자기 어머니 묘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명박은 어머니 산소 앞에서 "셋째 며느리 될 사람 데려왔습니다"라고 말한 뒤 절을 시켰다. 이것이 이명박의 프러포즈였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까지 나아갔다.##
2.11. 미혼 (박근혜)
박근혜가 당선되어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여성 대통령의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대통령의 배우자를 칭하는 말은 부군(夫君)이라고 하며[25][26] 영어로는 First Gentleman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역사상 첫 독신 대통령이기도 했던 탓에 이 호칭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혼을 했다면 헌정 사상 최초의 대한민국 대통령 부군이 나왔을 것이다.때문에 외국 정상 방문 시 의전으로서의 퍼스트 레이디 대행을 누가 할 것인가로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국무총리 부인이 맡을 확률이 거론되었으며 정홍원 총리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도 이런 질문이 나왔다. 외교부장관 부인이나 조윤선 전 여성가족부장관이 맡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
결국 배우자 대행을 따로 두지 않기로 했다. # 외국 정상이 방문하더라도 정상과 배우자의 짝을 꼭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니고 배우자의 일정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따로 조정할 수 있으니 꼭 배우자를 대행할 인물을 내세워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14년 7월 3일 중국의 시진핑 주석 방한 때는 조윤선 전 정무수석비서관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2.12. 김정숙 (배우자: 문재인)
김정숙 1954. 11. 15. ~ 현재 ([age(1954-11-15)]세) |
문재인 정부가 시작된 이후에는 '영부인' 호칭보다 '여사'라는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당부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 이 때를 기점으로 '영부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문어체가 되었고, 대통령 배우자를 '여사'로 부르는 비중이 높아졌다.
러브 스토리
문재인과 김정숙은 김정숙 친구 오빠의 소개로 학교 축제에서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다. 새내기 시절 알랭 들롱을 닮은 남자가 있으니 만나보라고 해서 소개팅을 나갔는데 김정숙은 "알랭 들롱을 닮았다고 해서 나갔는데 아니어서 눈을 내리깔았다"며 실망했다고 한다. 문재인이 촌스러운 점퍼를 입고 나온 것도 이유였다.
축제 이후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인사만 나누던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은 이듬해인 1975년 유신반대시위 현장에서 시작됐다. 학생운동을 하던 문재인이 1m 앞에서 쏜 응축된 최루탄 연기를 직격으로 맞아 실신을 했는데, 마침 우연히 그 옆을 김정숙이 지나갔다. 선배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김정숙은 놀라 손수건을 적셔 문재인의 얼굴을 닦았다. 마치 동화 속 왕자처럼 문재인의 의식이 돌아왔다고 한다. 시위현장의 문재인을 보곤 그가 정의로운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김정숙은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그를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이후 문재인은 학생운동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다. 김정숙은 자주 문재인의 면회를 가며 두 사람 사이는 급속도로 진전된다.
7년의 연애 끝에 프러포즈를 한 사람은 김정숙이었다. 문재인이 친구들과 있는데 아내가 와서 갑자기 '재인이 너 나랑 결혼 할거야 말거야? 빨리 말해!'라고 해서 문재인이 깜짝 놀라 '알았어'라고 답해버려 청혼을 승낙해버렸다. 김정숙이 청혼을 결심한 이유로는 일단 문재인과 가치관이 맞았고, 전통적 여성상을 강요하지 않을 거 같아서라고 답했다. #
2.13. 김건희 (배우자: 윤석열)
김건희 1972. 9. 2. ~ 현재 ([age(1972-09-02)]세) |
대통령 배우자가 되기 전 다양한 스캔들에 휘말렸으며, 녹취록 사건 당시 직설적인 발언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조용한 내조를 약속했으나, 대통령 배우자가 된 이후에는 이를 뒤집고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펼쳤다.
2025년 1월 19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속됨에 따라,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된 현직 대통령의 배우자가 되었다. 또한 2025년 4월 4일, 배우자 윤석열이 탄핵 심판에서 8명의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에 따라 파면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파면된 대통령의 배우자로 기록되었다.[27] 또한 이로 인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무궁화대훈장 수여 대상에서 제외된 대통령의 배우자로 기록되었다. #
2025년 6월, 김건희에 대한 각종 비위사실을 진상규명 하기 위한 특검이 출범했다. 그리고 8월 12일, 김건희 게이트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구속된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러브 스토리
윤석열은 53세, 김건희는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초혼이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그냥 아는 아저씨, 아줌마로 알고 지내고 있었는데 한 스님이 나서 연을 맺어준 끝에 결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모여든 정보에 따르면 그 스님은 무정스님이며, 강릉 출신인 윤석열의 외할머니와 모친을 통해 윤석열은 고시생 시절부터 스님과 알고 지냈다고 알려졌다. 무정스님은 조남욱 삼부토건 회장과 친분이 있었는데, 조 회장을 통해 김건희를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윤석열을 김 여사 쪽에 소개해줬다는 이야기가 떠돌지만 무정스님이 윤 대통령 부부 결혼까지 주선했는지를 놓고는 지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윤석열은 대부분 차이긴 했으나 그래도 연애를 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정말 몇 사람하고만 한 두 달 정도 짧게 사귄 것이 다였다. 이에 대해 본인은 아무래도 자신이 인물이 부실해서 그런 거 아니었겠느냐고 답했다. 그러면서 가장 길게 연애한 사람이 김건희였다고 답했다.
윤석열은 첫 만남에서 바로 김건희가 마음에 들었지만, 12살의 나이 차이 때문에 연애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건희가 준 명함도 일부러 버렸다. 하지만 명함을 버리기 전에 김건희의 이메일 주소를 통째로 외웠는데 윤석열은 망설임 끝에 김건희에게 이메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다.
윤석열은 과거 지방 근무할 때 열차나 비행기 안에서 미술 책을 좀 읽었다면서 시간이 조금씩 나면 주말에 서울 시내 미술관을 다니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솔직히 자신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처음 김건희를 만났을 때엔 결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김건희와 미술 이야기를 하다보니 미술 일을 하던 김건희가 보기에 자신이 좀 기특했던 모양이라며 자신이 나름 괜찮은 인상을 보여준 게 아니었나 싶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김건희는 윤석열이 검사라고 하기에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니고 자신감이 넘치고 후배들에게 마음껏 베푸는 사람이었다면서 생각과 현실이 다른 사람이었다고 윤석열을 평가했다. 윤석열에게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말은 '평생 집밥 해줄게'를 꼽았다. 결혼한 이후로도 그 약속을 계속 지키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주말에 시간나면 극장도 가고 공연도 보고 문화생활을 하면서 데이트를 했다.
결혼할 때 윤석열은 전재산이 2000만원 밖에 없을 정도로 가진 것이 없었고, 결혼 후 재산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기만 했다고 김건희는 회상했다. 윤석열에 대해 김건희는 "가진 돈도 없고 자신이 아니면 영 결혼을 못 할 것 같았다"고 밝혔다. # #
2.14. 김혜경 (배우자: 이재명)
김혜경 1966. 9. 12. ~ 현재 ([age(1966-09-12)]세) |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학과 재학 시절,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 유학을 준비하던 중 1989년경 이재명 대통령을 소개팅으로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하였고, 졸업 후 약 3년간의 연애 끝에 1991년에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이후 성남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며, 슬하에 이동호와 이윤호 2남을 두고 있다.
러브 스토리
이재명과 김혜경은 소개팅을 통해 만났다. 이재명의 셋째 형수[29]와 김혜경의 어머니가 같은 교회를 다녔던 것이 인연이 됐다. 이재명 앞으로 다섯 번의 소개팅이 잡히고 세 번째 소개팅에서 이재명은 김혜경을 만났다.[30]
그날부터 성남의 동료들과 단골술집은 머리에서 싹 지워졌다. 매일 저녁 그녀를 만나러 쫓아갔다. 잠시라도 안 보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정작 김혜경은 이재명의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혜경의 마음이 움직인 건 첫 드라이브와 이재명의 일기장이었다. 소개팅 바로 다음 날 이재명은 바다를 보러 가자며 차를 끌고 김혜경을 찾아왔다. 김혜경은 '바다 보러 갑시다'라고 말하며 자동차 핸들을 틀던 이재명의 모습을 보고 연애 감정이 싹텄다고 한다.이재명은 첫눈에 김혜경에 반해 오전만 일하고 오후엔 땡땡이치면서 거의 매일 김혜경과 만나 데이트 했다. 만난 지 4일 만에 결혼하자고 급발진을 했는데 김혜경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재명은 김혜경이 웃는 걸 보니 차인 건 아니구나 싶었다고 안도했다.
이재명은 뒤에 잡힌 두 번의 소개팅을 어찌해야 할까를 두고 솔직하게 김혜경에게 그 사실을 자백했다. 김혜경은 소개해준 사람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만나라고 허락했고, 이재명은 두 번의 소개팅을 더 나갔다. 이후 다섯 번째 소개팅에서 만난 아가씨가 괜찮았다고 농담조로 고백했다가 김혜경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이재명은 김혜경을 만난 것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만난 지 고작 몇 달만에 이재명은 다시 김혜경에게 청혼했다. 이재명은 노동 사건 변호를 맡느라 수입이 없어 김혜경에게 프러포즈와 함께 300만원을 꿔달라 했다가 결혼사기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이재명은 김혜경이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죽을 것 같아 "내 내면의 전부다"라면서 자신의 일기장을 주고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그 전략이 김혜경에게 먹혔다. 이재명은 반지 대신 일기장을 김혜경에게 건네며 청혼했다. 10년 치 일기장 6권으로, 김혜경은 이재명의 솔직함과 당당함이 마음에 들어 청혼을 승낙했다. 두 사람은 첫만남을 가진지 고작 7개월만에 결혼에 골인한다. ##
3. 대통령 권한대행 배우자
대한민국 대통령이 직무정지되거나 파면, 하야, 임기 중 사망 등으로 공석이 되어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행할 경우 권한대행의 배우자도 대통령 배우자를 대행한다. 역대 대통령 권한대행 배우자는 다음과 같다.차후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가 된 경우는 볼트체 처리.
- 백귀란 (배우자: 허정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 장혜경 (배우자: 곽상훈 민의원의장)
- 최이권 (배우자: 백낙준 참의원의장)
- 육영수 (배우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홍기 (배우자: 최규하 국무총리)
- 정경숙 (배우자: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 조현숙 (배우자: 고건 국무총리)
- 최지영 (배우자: 황교안 국무총리)
- 최아영 (배우자: 한덕수 국무총리)
- 최정선 (배우자: 최상목 기획재정부장관)
- 박은진 (배우자: 이주호 교육부장관)
4. 여담
-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의 사진은 청와대 무궁화실에 걸려 있다. 윤석열 정부 기준으로 초대 대통령 배우자 프란체스카 여사부터 19대 대통령 배우자 김정숙 여사까지의 사진이 걸렸다.
청와대 무궁화실의 역대 대통령 배우자 사진 - 현재까지 대통령의 남성 배우자는 없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는 미혼 상태에서 취임하였으며, 해외 순방 시에는 혼자 가거나 여성가족부장관이었던 조윤선이 대행하였다.
- 대통령 배우자의 출생 지역은 경상남도 출생이 가장 많다.[31] 그 다음으로 많은 지역은 충청북도이다.[32] 종로구와 충주시는 전국에서 유이하게 대통령 배우자를 두 명 배출한 기초자치단체다.
<rowcolor=#ffc224> 국명 시도 시군구 이름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공덕귀 김해시 손명순 창원시 권양숙 진주시 김윤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희호 김정숙 경기도 양평군 김건희 충청북도 옥천군 육영수 충주시 홍기 김혜경 경상북도 청송군 김옥숙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위징 구 프란체스카 도너 만주국 길림성 신경특별시 이순자
이 중 손명순과 권양숙 두 명은 유년기 같은 진영읍에 거주했고 진영대창초등학교 출신이다.
- 대통령 배우자의 성씨는 김씨가 5명으로 가장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 1위가 김씨인데, 대통령은 아직까지 겨우 2명만 나온 데 비해 영부인은 가장 수가 많다.[33]
[1] 퍼스트 레이디는 성 중립적인 표현이 못 되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여자 대통령의 남편인 부군이 등장한 적이 없기에 지금까지 퍼스트 레이디라고 영어로 표기해 왔다. 영어 위키백과 국가 지도자 배우자를 뜻하는 First Mate라는 표현이 있으나 잘 안 쓴다. 배우자 자체는 Spouse라고 부른다. 참고로 부군은 영어로 First Gentleman(퍼스트 젠틀맨)이라고 한다.[2] 본명은 Franziska Donner이다.[3] 당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국제연맹 총회에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방문했다. 이승만은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4] 전처 박승선과는 이혼했다.[5] 이 중 이봉수만 이승만의 전처 박승선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식이며 이강석과 이인수는 입양한 자식들이다. 이강석과 이인수를 들이기 전에 입양한 이은수라는 또 다른 양자도 있었지만 이은수와는 파양하였다. 참고로 이봉수는 이승만이 재혼하기 한참 전에 요절해서 도너와 이봉수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6] 윤보선은 전처와 사별했다.[7] 때문에 친정에서는 윤보선이 재혼인 데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딸과의 결혼을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오히려 공덕귀 본인이 결혼이라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었던지라 집안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8] 윤보선의 전처 민경숙이 낳은 딸들이다.[9] 역대 영부인 중에 가장 단명하였다.[10] 박정희의 첫 번째 부인은 김호남이다. 이현란이라는 여성이 두 번째 부인이 될 뻔했으나, 파경을 맞았다.[11] 공교롭게도 허억 시장의 이름도 범상치 않다.[12] 헌정중단기에도 대통령 배우자 직무를 수행한 기록이 있다.[13] 박정희를 기준으로는 차녀이다.[14] 박정희에게는 3녀.[15] 박정희가 육영수와 재혼하기 전, 동거했던 이현란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전해진다.[16] 5년 단임제 대통령 배우자보다도 2개월 더 길게 했다.[17] 2021년 기준 한국 여성 평균 키는 159.6cm이고 육영수가 사망한 지 5년 뒤인 1979년 기준 한국 여성의 평균 키는 154.3cm에 불과했다. 관련 자료. 따라서 육영수가 살아 있을 당시에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 키는 아마도 153cm 내외였을 것이고 결론적으로 육영수는 당시 여성 평균 키보다 약 17cm 정도가 더 큰 것이 된다.[18] 관련 기사.[19] 신 안동 김씨 집성촌이다.[20] 졸업은 하지 못했다.[21]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지병을 앓다가 약물 쇼크로 사망하였다. 김대중의 자서전에 따르면 사망 직후부터 이런 소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 연이은 낙선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이런 소문이 퍼진 듯하다.[22] 흥미로운 점은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와 차용애는 친인척 관계라는 것이다.[23] 이희호 1922년생, 김대중 1924년생.[24] 전직 대통령 배우자이나, 정부 특사 자격은 아니었다. 김정일 사망 직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전 탓에 개인 자격 방북이었다.[25] 보통 '영부군(令夫君)'이라는 명칭이 퍼져 있으나 부인과 달리 부군은 그 자체로 높이는 의미(君)가 있기 때문에 영(令)자를 붙인 영부군은 이중 높임에 해당하는 오류를 내포한 용어이다.[26]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임하룡이 부군으로 나왔었다. 배우자인 여성 대통령으로는 고두심이 나왔다.[27] 앞서 보듯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인 박근혜는 배우자가 없었다.[28] 최규하 전 대통령의 아내 홍기 여사에 이은 두 번째 충주 출신 영부인이다.[29] 먼 훗날 악연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이재명은 셋째 형 부부와 사이가 좋았다.[30] 이를 놓고 김혜경이 이재명과 고정 출연했던 동상이몽2에서는 "기호 3번 김혜경"이라는 자막을 달았다.[31] 공덕귀, 손명순, 권양숙, 김윤옥 이상 4명.[32] 육영수, 홍기, 김혜경.[33] 반면 대통령들 중 가장 많은 성씨를 배출한 쪽은 3명을 탄생시킨 이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