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1:27:36

이인수(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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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4170><colcolor=#fff>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李仁秀 | Rhee In-Soo
파일:이인수 영정.png
출생 1931년 9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現 경기도 의정부시)
사망 2023년 11월 1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전주 이씨[1]
부모 생부 이승용
(1904년 ~ 1984년, 향년 80세)
생모 조은숙
(1907년 ~ 1989년, 향년 82세)
양부 이승만
(1875년 ~ 1965년, 향년 90세)
양모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00년 ~ 1992년, 향년 91세[2])
형제자매 친형 이건수
(1925년 ~ 1986년, 향년 61세)
친누이 4명
양형 이봉수[3]
(1898년 ~ 1904년, 향년 6세)
양형 이은수[4]
(1917년 ~ 1988년, 향년 71세)
양동생 이강석
(1937년 ~ 1960년, 향년 23세)
배우자 조혜자
(1942년 4월 14일 ~ 81세)[5]
자녀 장남 이병구
(1969년 ~ 55세)
차남 이병조
(1971년 ~ 53세)
친척 친할아버지 이경창
(1878년 ~ 1959년, 향년 81세)
친할머니 조시헌
(1879년 ~ 1947년, 향년 68세)
큰아버지 이승규
(1898년 ~ 1968년, 향년 70세)
큰어머니 조광원
(1893년 ~ 1972년, 향년 79세)
친종형 이욱수
(1920년 ~ 2006년, 향년 86세)
친종형 이치수
(1928년 ~ 1995년, 향년 67세)
친형수 조성순
(1924년 ~ 1994년, 향년 70세)
형수[6] 조제상
(1916년 ~ 1991년, 향년 75세)
손자 이우진
(1996년 ~ 28세)
손자 이원진
(1997년 ~ 27세)
손녀 이민지
(1997년 ~ 27세)
손자 이창형
(2000년 ~ 24세)
학력 보성중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6기)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 석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 석사)
뉴욕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 박사)
병역 대한민국 공군 대위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감리교)
묘소 국립괴산호국원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승만양자이다. 보통 이인수 ‘박사’라고 불린다.

2. 생애

1931년 9월 1일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출생했다. 생부 이승용(李承用)은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교육자였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수료한 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정치학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과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50년 4월부터 1955년 8월까지 5년 4개월 동안 공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공군대위로 전역하였다. 공군 장교 시절 정보작전 분야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데모에 직접 참가는 하지 않았지만 내심 지지했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다니고 있었는데, 4월 18일 고려대 후배들이 국회의사당 근처까지 와서 데모하는 것을 보고 뒤에 서서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고 어른의 속사정을 이해하고 내심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하와이로 간 뒤인 1961년 11월 13일에 이승만의 측근들과 전주 이씨 종친회의 소개로, 이인수가 만 30세의 나이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入籍)되었다.[7] 앞서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이 이승만의 눈에 들어 효령대군파임에도 양녕대군파인 이승만에게 입적되었다고 말이 많아서[8] 아예 양녕대군파에서 명망있는 청년으로 입적시켰다.

항렬도 딱 맞았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7대손 수(秀)자 항렬으로 이승만 바로 아래였다.[9] 게다가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영어에 능통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없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처음에 이인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라는) 그 책임이 너무 중해 보여,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을 택하라”고 했지만 주변에서 전주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고 해서 이승만의 양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생부 이승용은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지만 열심히 모셔라”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

이승만의 유일한 친아들인 이봉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다가 홍역에 걸려 10살 때 요절했다. 첫 번째 양아들 이은수[10]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자 이승만의 첫번째 부인 박승선[A]는 1949년 호적에서 말소되었고 두 번째 양아들 이강석은 1960년 4월 28일, 친와 동생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파일:Syngman_Rhee_and_Francesca_donner_with_their_adopted_son_In-soo_Lee.png
1962년 12월, 하와이에서 양자 이인수를 맞아 기뻐하고 있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내외.

이인수는 이승만의 양자가 된 후 모두 세 차례 하와이를 찾아 아버지 이승만을 모셨다. 1961년 12월 13일 ~ 1962년 3월 17일, 1964년 1월 28일 ~ 4월 2일, 마지막으로 1965년 7월 4일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으로 가서 7월 19일 이승만의 임종을 지켰다. #
파일:Francesca_Rhee_returned_to_Korea_(1).jpg 파일:Francesca_Rhee_weeping_at_Syngman_Rhee's_grave.jpg
1966년 3월 21일, 이승만 전 대통령 성묘. 맨 앞 줄 왼쪽부터 이인수 박사, 윤치영 서울시장, 프란체스카,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 1967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기일에 분향하고 있는 프란체스카와 아들 이인수.

이후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9년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71년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옮기게 되었다. 명지대학교에서 법정대학 학장,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1970년부터 1992년까지 어머니 프란체스카와 한집에서 살면서 어머니 프란체스카를 봉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평생 아버지 이승만의 선양사업에 힘썼다. 이승만에 관한 사료와 기록을 수집하였고 이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였다.

2011년4.19 혁명 당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유족들에게 사죄했다. #

2023년 6월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 발족식 회의에 참가했다. 박정희ㆍ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등 5명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여야 원로 및 4ㆍ19 학생 시위 주도자까지 같이 발족했다고 한다.#

2023년 9월 1일, 4.19 혁명 관련 유족에게 한번 더 사죄했다. 참배 후 눈물을 글썽이며 “오늘 나의 (희생자 분들에 대한) 참배와 사과에 대해서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아버님(이승만)께서도 “참 잘하였노라, 무척 기뻐하실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1, #2

2023년 11월 1일 별세했다.# 이승만자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하였다.[12]

3. 여담

  • 1994년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 표현물이라며 작가 조정래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던 적이 있다. 참고로 조정래는 긴 공방 끝에 2005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또 KBS1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극장 - 대통령에 도전한다 최능진> 편에 대해서도 양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제작진과 KBS를 상대로 소송을 건 바 있다. 기사.
  • 2006년에 방송한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 여운형 암살 배후가 마치 이승만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음해이며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며 법적소송을 걸었지만, 2010년 대법원에서 패소했다.[13]
  • 4.3사건과 관련해서 "공산 무장병력 지휘관과 남로당 간부 등 63명이 희생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니 이들을 명단에서 제외 해달라"고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그는 사건과 관련된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 보호할 이익이 없다하여 각하했다. #
  • 2008년 인터뷰에서 그는 현재 김구가 이승만보다 높게 평가되는 것에 박정희 대통령의 영향이 크다고 이야기했다. #
  • 2022년 12월 5일, 부인과 함께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 호텔에서 열린 한미우호의밤에 참가하였다. #

[1] 양녕대군파 17대손, 시조 41세손 ○수(○秀) 항렬.[2] 92세 생일을 약 3달 앞두고 별세했다.[3] 양부 이승만과 박승선[A] 사이에서 난 아들. 이인수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양자이므로 법적으로 이복형제가 된다.[4] 박승선[A]의 양자. 원래 이인수의 친종형이다.[5] 2003년 KBS에서 했던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에서 이승만의 며느리로 소개된 적이 있다. 이승만은 폭주족이었다.[6] 원래 이인수의 종형수이다.[7] 소문으로는 이승만이 숨진 후 프란체스카에 의해 입적되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사실과 다르다. 입적 후,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 부부와 함께 짧게 나마 지내며 이승만을 보살폈으며, 이승만은 이인수를 입양하고 4년이 지난 1965년에 서거하였다. 이후 이인수는 평생 아버지 이승만의 기념사업에 힘 썼다.[8] 옛날에는 입양 시 파가 같은 일족 중에서 항렬을 맞추는 것이 고려 사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강석은 파가 달랐는데다 항렬상으로도 계대(系代)가 맞지 않았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17대손, 이강석이 19대손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다.[9] 양자 입적 전 촌수로는 무려 33촌.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5남 장평도정의 15대손이고, 이인수는 양녕대군의 적2남 함양군의 16대손이기 때문이다. 족보체계상 왕이 되지 못한 왕자가 분파하여 파의 중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같은 파일 뿐, 양녕대군의 서로 다른 아들의 후손으로서 진작에 갈라졌다.[10] 호적상으로만 이승만의 양아들이었지 사실상 이승만과 관계가 없었다.[A] [12] 양형 이봉수:1904년 미국에서 디프테리아병사.
양형이자 종형 이은수:1988년 대한민국에서 자연사.
양동생 이강석:1960년 경무대에서 일가족을 죽이고 23세의 나이로 자살.
[13] 참고로 이 소송은 장택상의 딸 장병혜와 함께 건 소송이다. 드라마 상에서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인물인 악질 친일경찰 출신의 박창주가 여운형의 암살을 사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자세한 것은 박창주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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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 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을 거부하였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박승선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었으며, 이승만 측이 소송을 제기하여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었다. 그런데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