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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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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만의 행적을 평가하는 문서다.

2. 재평가 논란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부터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기를 이끌었으며 6.25 전쟁이라는 국난을 겪고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까지 수많은 업적과 실책을 남긴 인물로, 그는 대한민국 역사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단순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그의 재임 시절부터 간단 명료하였는데, <외교에는 귀신, 정치는 등신> 이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이는 이승만 시대부터 군부 독재 시절[1]까지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으며, 귀신같은 외교로 나라를 세우고 전쟁통의 나라를 구했으나, 등신같은 인사와 통치로 나라를 망쳤다는 뜻이다.[2] 이런 평가는 비록 극단적 반공주의를 추구한 이승만과 군사정권의 독재 치하를 거쳤음에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민들에게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미국에 대해 국민들의 전반적인 우호 분위기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평가가 뒤집어진 사건은 1979년 발행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운동권과 진보 진영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발생하였는데, 베트남 전쟁,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등의 영향으로 반미사상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면서, 이승만의 국가 건설의 공마저 완전히 부정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된다.[3] 이들은 이승만과 미국 때문에 반민특위가 해산되며 친일파가 국내에 득세하여 국가 건설의 첫 단추마저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을 공유하였으며, 이승만의 독립 활동마저 격하하였고 이승만이 종미파, 친일파였다는 주장까지 발전한다.

추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발간되고, 이들 저자 가운데 일부가 현재 이승만 미화에 앞장서는[4] 뉴라이트로 분열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뉴라이트가 보수 세력 내에서 성장하게 되었다.[5] 이들 중 일부는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아니라, 독재와 학살을 정당화, 왜곡을 통한 무리수를 남발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학술적인 것이 아닌, 사상 대결 및 정치 대결까지 확대되게 하였다. 덕분에 이승만에 대한 온갖 왜곡, 미화, 격하가 수없이 교차되게 되어 평가가 극과 극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중립적으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시도조차 어렵게 되었다.[6]

보수 진영의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는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태동하였다. 군부 독재 정권이 몰락한 뒤 운동권이 주축이 된 역사 인식이 유행하며 일부 보수 언론들은 이승만 재평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조선일보의 방우영 회장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라는 특별전을 기획하였는데 당시 김영삼[7] 대통령이 여기에 방문하면서 당시 역사학계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 ###
●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를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한 후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
* 초대 대통령이 나라를 세운 발자취를 14대 대통령으로 둘러본 것은 여러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현대사를 너무 부정적 측면에서 보는 시각들이 많으나, 이 박사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북한의 침략을 받고도 나라를 지키고 한미안보조약으로 오늘날 안보의 초석을 마련하는 등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을 김대통령(김영삼)도 인지하고 있다.
당시 관계자의 이러한 발언은, 운동권 이전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8] <외교는 귀신, 정치는 등신> 이라는 평가를 계승하는 성격으로 국가 형성의 공적은 인지한다는 의미였으나, 당시의 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에 대한 토론회를 열고, 다음을 이유로써 이승만 재평가가 발생했다고 격하하였다.
● <'이승만 재평가' 에 대한 기동성 있는 응전> 발췌. 1995년 3월 한국역사연구회
분단 덕에 부와 권세를 누린 자들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하여 분단 50주년의 해에 민족 배신자 이승만을 해방, 독립 투사로 둔갑시켜보겠다고 설치고 있으니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9]
토론회를 통해 드러났듯이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이유는 다음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된다.
1. 남북대결을 지양하여 화해, 협력으로 나아가는 탈냉전을 거부하고 다시금 냉전구도로 나가겠다는 회귀음모를 꾸미는 세력이 있다.
2. 역대 독재자들로부터 막강한 혜택 누려온 보수 언론사들의 자기방어에 기인한다.
3. 통일 과정에서 남쪽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겠다는 표현이다.[10]
4. 현 정부 (*당시 김영삼)의 개혁노선에 반발하는 보수세력의 반동적 형태 때문이다.
5.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몇몇 언론인들과 인맥들의 부추김, 대재벌 언론들의 오만과 불손 탓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 자체를 보수세력의 준동과 친일적, 반민족적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마찬가지로 반대급부에 있던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 또한 순수한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었는데, 이들 중에는 운동권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과 뉴라이트로 발전하는 세력이 있었고, 이들은 <역사의 기승전결론>을 주장했다. 이승만이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박정희가 이를 계승 및 발전시켜 5, 6공을 통해 전개되다 김영삼에 이르러 문민정부로 꽃피어 완성된다는 단계발전론이 핵심 사상이다. 자세한 내용과 비판점은 뉴라이트 문서 참조.

김영삼 정부 이후에 출범된 김대중 정부는 역사 화해의 명분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나섰으며 1992년 12월 국회에서도 이승만 동상 건립 안건이 통과되는 등 관대한 움직임을 이어나가지만[11], 당시 이 안건에 반대한 의원 중 한 명은 노무현 으로, 재임 당시 보도연맹학살사건에 관련한 국가의 사과 및 조사가 벌어지는 등 이승만 재평가 움직임은 노무현 시절 움츠러들고 이후 재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이어서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이승만 기념관 논란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치적인 움직임과 별개로 1990년대 이후 이승만에 대한 학문적인 긍정적/부정적 재평가의 움직임도 자연스레 발생하였다.[12] 대표적인 사례가 남침유도론 폐지인데, 정병준 교수는 2006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을 집필하며 북한 노획 문서, 소련 문서, 남한 문서를 참조하여 전쟁 형성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였으며, 이는 해방정국과 이승만에 대한 여러 평가가 뒤바뀌게 된 사례 중 하나이다.
정진아- <이승만 정권의 자립경제론, 그 지향과 현실>
*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과 정책론을 연구합니다"
"그 당시에도 경제 정책이라는 게 있었습니까?"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을 연구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어떤 정권이라도 집권하면 당연히 정책의 논리를 세우고 그에 바탕한 경제 정책을 수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같은 당연한 전제가 이승만 정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2008년 현재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 진행 중이다. '건국의 아버지' 평가부터 '분단의 주역' 이라는 평가까지, '친미 사대주의자' 평가부터 '자주적 내셔널리스트' 라는 평가까지, 박정희와 더불어 그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넘나드는 정치인도 드물다.
경제정책에 대한 이미지는 박정희 정권이 5.16 쿠데타의 명분중 하나로 이승만정부의 경제적무능, 무계획 등을 내세운 뒤 뉴스, 신문, 학교, 지방정부 등을 통한 대대적인 선전을통해 그러한 인식을 심었고 그 영향이 컸던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이후에도 학계에서는 이승만 시대에 대한 연구 및 재평가[13]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나, 사상적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에 역사학자들이 선뜻 긍정적/부정적 재평가 논란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을 억누르고, 이미 발견된 사실, 사료를 왜곡/조작/미화/격하 하는 등 소모성 논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평가는 방대한 행적과 인물의 복잡성 탓에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데도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제대로 평가되기 힘든 상황이다.

3.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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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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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란이 있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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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를 까야 본인 쿠데타의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더 비판적이었다.[2] 즉, 당시에도 이승만의 정치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3] 자세한 내용은 NL(정파) 참조.[4] 재평가와 미화는 다르다.[5] 이승만에 관련한 왜곡 논란이 있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건국전쟁의 대립은 이 당시 사건의 연장선이다.[6] 단 여기서 중립적이란 사실관계를 재확인시키고 각 주장들을 재 확인하는 시점을 말한다.[7] 원래 자유당 출신이었으나 사사오입 개헌에 분노하여 탈당, 민주당에 입당했다.[8] 일반 대중 및 역사학계 등[9] 이승만은 분명히 독립운동가이며, 현재는 역사학계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즉 저 발언은 당시 역사학계 주류가 가진 인식을, 그리고 이들 또한 역사관의 편향 문제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10] 이 말은 결국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발언이므로 당시 학계를 NL(정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 하지만 김대중 본인은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12] 한 인물의 역사적 평가는 후대로 갈 수록 새로운 해석과 사료가 발굴되면서 조금씩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13] 긍정/부정 전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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