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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개정 헌법 | |
국회 | 제3대 국회 |
공포일 | 1954년 11월 29일 |
개헌유형 | 일부개정 |
국회표결 | 재적 203 재석 202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 |
국민투표 | 해당 없음 |
주요 내용 | |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 3선 연임 제한 철폐 주권 및 영토 변경 시 국민투표 도입 국무총리제 폐지 헌법개정의 국민발안제[1] 및 한계조항[2] 신설 군법회의의 헌법적 근거 명시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 지위승계제 | |
논란점 | |
초대 대통령 독재를 위한 포석 사사오입에 의한 절차적 법원리 무시 국회표결 의장의 표결 결과 선포 번복 | |
전문 | |
헌법 제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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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四捨五入改憲1954년 11월에 실행된 대한민국 헌법의 2차 개헌. 20세기 대한민국의 개헌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이 경우도 대통령의 연임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말은 0부터 4까지는 버리고 5부터 9까지는 올리는 방식의 어림이다. 예전에는 반올림을 사사오입이라 칭하기도 했기 때문에 문서명인 개헌 명칭은 따로 이름을 지은 게 아니고 그냥 반올림을 뜻하는 보통명사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현대식으로 바꿔 쓰자면 '반올림 개헌'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사사오입'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대에 와서는 공학이나 자연과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오사오입법과 구분짓기 위해서 설명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어화됨에 따라 이 사건을 칭하는 데만 사용된다.
2. 배경
6.25 전쟁 도중에 치러진 발췌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법을 개정한 이승만은 이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대한민국 헌법상 대통령과 대한민국 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원래 2회까지만 가능했던 대통령 연임 제한[3]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자신에 한해) 면제하려고 했다.제55조 ①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중임할 수 있다.
제헌 헌법 당시 존재했던 제55조 1항
제헌 헌법 당시 존재했던 제55조 1항
부칙 <단기 4287년 11월 27일 헌법개정> <제3호,1954. 11. 29.>
이 헌법공포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으로 추가된 부칙 내용
이 헌법공포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으로 추가된 부칙 내용
대놓고 '첫 대통령은 죽을 때까지 집권할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을 적나라하게 넣은 것은 아니고 나름의 꼼수를 썼다.[4] 헌법의 정규 조항이 아닌 부칙에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은 연임 제한 조항의 적용을 안 받는다고 끼워넣는 것이었다. 일종의 수정헌법인 셈이다. 이렇게 해 버리면 헌법상으로는 초대 대통령에 해당했던 이승만은 연임 제한과 관련된 규정이 없으므로 n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는 것.
문제는 대상이 되는 헌법이 '제헌헌법'이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선출이나 임기를 고쳤을 때 '현재 대통령은 예외다'라고 명시하는 것은 임기의 혼선을 막고 개헌 당시의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고자 비정상적인 개정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제헌헌법은 최초의 헌법이므로 그런 일이 발생할 리도 없었다. 게다가 해당 문구를 제헌 당시에 넣은 것도 아니고 상당한 시간이 흘러 끼워넣었다는 점에서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이승만은 '제헌헌법 공포'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제헌헌법을 공포한 날은 1948년 7월 17일이었고, 제1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날은 3일 뒤인 1948년 7월 20일이었기 때문.[5] 물론 사사오입 개헌 문구 자체가 대놓고 이승만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그냥 가져다 붙인 문구이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엄격히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연임 제한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진 미국 헌법은 처음에는 이런 제한이 없었다. 즉, 처음부터 헌법상 무제한 연임이 가능했는데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재선까지만 하고 물러났고,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초선 내지는 재선까지만 하고 물러나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된 것이다. 물론 연임 초과를 시도해 보려고 한 이들 역시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워싱턴이 재선까지만 하고 물러났으므로 3선 이상 연임하는 장기집권을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워싱턴보다 잘난 사람임을 대중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도 3연임은 포기하고 보통은 재선만 하고 물러났다가 나중에 대통령 돼 보려고 한 케이스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있었는데 이쪽은 결국 3선을 준비했으나 지지층이 분열된 상태라 대통령이 될 확률은 낮았고 그마저 중도에 사망한다.
그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4선까지 하다 임기 중 사망한 후 현재의 연임 제한이 헌법에 명문화된 것이다. 결국 워싱턴 한 명의 결단이 200년 가까이 미국의 3선 이상 연임을, 나아가서는 미국의 독재자 출현 가능성을 사전 예방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에 나타난 독재정권들을 생각해 보면 첫 단추부터 이렇게나 대조적이었던 것.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사건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이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1954년 5월 20일 시행되는 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대해 찬동 혹은 추진한다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하여 114석의 찬성자를 확보했다. 이후에도 무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매수, 협박, 회유 등 이 수단 저 수단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어찌어찌 개헌 정족수보다 1석 많은 137석의 찬성자를 확보하고 현임 대통령 연임제한 면제 개헌안을 상정했다.
3. 부결, 그리고 사사오입
헌법개정의 의결은 양원[6]에서 각각 그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써 한다
1952년 대한민국헌법 98조
1952년 대한민국헌법 98조
1954년 11월 27일 개헌 의결 투표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무효 1명. 원래 확보한 찬성의원 가운데 최소 2표 이상의 반란표 혹은 무효표가 나왔다.
정족수 기준인 재적의원 203명의 2/3 이상인 135.333⋯명에서 불과 0.333⋯명이 모자라 부결이 선포된 것이다.
이렇게 개헌은 불발되었고 개헌을 저지하고자 했던 민주국민당(민국당)은 만세를 불렀으며 자유당은 좌절했다. 기관지(機關紙)를 제외한 신문들은 일제히 민주주의 승리라는 기사가 났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자유당은 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해서 개헌안 부결에 따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억지 논리를 내세워 표결을 번복하고 나섰다.
203의 수학적 2/3는 135.333⋯인데 0.333⋯은 0.5 미만으로서 수학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는 135.333⋯명이 아니라 135명이다.
이에 화답하듯 개헌안 투표 다음날 조용순 법무부 장관은 0.333⋯이라는 숫자는 독립된 주체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사오입의 논리로 버림하고 135표만으로도 개헌선인 정족수 2/3에 도달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를 위해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였던 인하공과대학장, 서울대학교 현직 수학 교수까지 대동하며 최순주 부의장의 사회로 개헌 정족수가 135.333⋯이 아닌 135이라고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부분은 야인시대에서 잘 묘사된다. 당시 동원된 교수로는 초대 인하공과대학장과 초대 관상대장을 겸임하고 있던 천문학자 이원철(1896~1963) 박사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최윤식(1899~1960) 교수의 이름이 언급되었다.[7] 최윤식은 초대 대한수학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 이 사건 이후 미국으로 가서 수학을 연구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문교부 고시위원을 지내기도 했다.다만 훗날 서울대 수학과 박세희 명예교수는 최윤식 교수는 제자들이 찾아와서 사사오입이 정당한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203의 2/3를 반올림 한 값을 물어서 그 해답을 말했을 뿐이라며 당시 법학적으로 보면 당연히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는 문제를 엉뚱한 질문으로 스승인 수학자가 기만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세희 명예교수의 증언을 보면 최 교수는 “그 날(즉 사사오입 개헌안이 부결된 1954년 11월 27일) 저녁 이익흥군과 손도심군이 찾아와서 지나가는 말로 203의 2/3가 얼마냐는 산술 문제를 물어서 계산을 해보니 135.333…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사사오입을 하면 얼마냐 물어서 근삿값으로 135가 된다고 해준 것이 전부다.”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최 교수에게 이 수학 문제(?)를 질문한 이익흥과 손도심은 모두 자유당 계열 인사였다.
허나 이 논리는 당시 헌법조항을 근거로 살펴보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당시 헌법조항에는 3분지 2이상의 찬성이라고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3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이보다 작은 135표는 3분의 2 미만이고, 136표부터 3분의 2 이상이다. 따라서 수학적으로는 '개헌정족수>=135.333⋯>135=득표수', 즉 '개헌정족수>득표수'이라는 명백한 결론이 나오고 법학적으로 반올림을 할 거면 국회의원 같은 자연인을 분리할 수 없으니 의결 정족수 136명이 논할 거리라도 있지[8] 135는 엄연히 135.333⋯보다 작은 수이므로 명백히 의결 정족수 미달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궤변으로 11월 29일 본의회에서 법이 억지로 가결되면서 결국 개헌이 선포되었다. 당연하지만 가결 직후 야당측인 무소속 곽상훈 부의장은 부결 선언을 하고 이철승 의원이 의장석으로 뛰어들어 최순주의 멱살을 잡는 등 국회 공성전이 발생했다.
이때 이정재와 휘하 깡패들까지 난입하여 야당 국회의원들을 위협하였다. 여기서 조병옥은 당시 자유당 감찰부 차장 이정재를 부장이라 잘못 불러 "저기 자유당 감찰부장 얼굴을 내가 알아!" 라고 소리쳤다. 당연히 그럴수밖에 없는게, 둘다 경찰 출신이고 이정재는 조병옥의 부하직원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 역시 야인시대에 잘 나온다. 국회 속기사들도 여기저기서 쉴새없이 쏟아지던 고성과 폭언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회의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자 결국 가결 선언을 한 지 몇십분도 가지 않아 산회를 선포했다.
4. 반응 및 영향
이런 국민학생에게도 안 먹힐 억지 논리를 법무부 장관과 몇몇 관변 학자들이 들이밀며 헌법을 위반하니 언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자유당의 행위를 깠다. 때문에 이 사건 이후 도시민, 특히 서울시민들은 이 유치한 행동을 보고 사람들끼리 모이면 "야, 그거 사사오입해버려!" 하며 이승만과 자유당을 비꼬았다고 한다.예를 들어 "15살도 사사오입 하면 20살이니 어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드립도 가능하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도 "임신 다섯 달이면 사사오입이므로 한 명으로 쳐야 하니 낳아야 한다"며 송강호가 분한 성한모가 그 말을 믿고 자기 아내에게 임신 5개월째니 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농으로 재촉하는 당시 정치 상황을 비꼬는 장면이 있다. 이후 성한모는 나중에 청와대 이발사가 된 후 박정희에게 이 얘기를 농담삼아 하다가 박정희가 "배운 놈들이 나라를 망친다니까!"라고 역정을 내는 바람에 오히려 갑분싸가 되었다. 물론 박정희는 성한모에게 화낸 게 아니라 사사오입 개헌 당시 되도 않는 주장을 늘어놓았던 어용학자들에게 화낸 것이지만 분노를 직접 본 건 성한모였던지라 결국 그는 그날 밤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죄로 총살당하는 꿈을 꾼다.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을 통하여 이걸 통렬하게 깠다. 절룩거리면서 가는 야당 의원을 보고 "아니? 어쩌다가 그리 다쳤습니까?"라고 말하는 고바우 영감에게 의원은 "푸른 제복을 입은 개에게 물렸다오."라고 대답했다. 이건 당시 이 억지스러운 결정에 따졌다가 동원된 경찰에게 강제 해산당한 것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 화백은 이 만화를 그린 후 불구속 입건과 벌금형을 당했다.
김영삼, 민관식 등 당시 자유당 소장파 국회의원 일부는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하며 자유당을 탈당했다.
5. 기타
학교 수업 시간 중 국사 전공이 아닌 일부 교사들이 이 사건을 득표수를 반올림하여 조작한 사건이라고 가르치는 경우[9]도 있다. 그러나 사사오입 사건은 정확하게 말하면 득표수를 바꾼 것이 아니라 가결에 필요한 인원수 커트라인을 낮춘 것이다. 개표를 하고 보니 가결에 필요한 득표 수가 딱 한 명 모자라기 때문에 가결 커트라인을 소수점부터 반올림해서 한 명 더 없어도 가결이라고 우긴 것이다. 물론 이거나 저거나 당시 여당의 황당무계한 궤변이라는 큰 줄기는 비슷하긴 하다만.사사오입 개헌 당시 무효표가 나오게 된 썰이 있는데 당시 여당 국회의원 중 한 명[10]이 한자를 전혀 못 읽었던 탓에[11] 어느 쪽이 가(可)고 부(不)인지 헷갈려서 자유당 원내부총무단에서 문제의 의원에게 '네모꼴이 있는 글자 밑에 찍으라'고 했는데 문제는 그 네모꼴이 가(可)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否)에도 있었던 탓에 양쪽에 모두 찍어 무효표가 되었다고 한다. 이 투표 이후 개헌 관련 투표는 기명으로 하도록 법이 바뀌었는데 그게 이 사건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상기되어 있듯 당시에는 자유당 소속 젊은 소장파 민의원이었던 김영삼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사실 김영삼은 3선 개헌 보도가 나올 당시 이승만을 직접 만나 박사님을 위해서라도 개헌하면 안 된다고 진정 어린 조언을 했으나 이승만은 화가 난 듯 손을 떨더니 말없이 나가 버렸다고 2009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또 김영삼은 이승만이 종신집권제 추구 등 비판받을 점이 많긴 하나 어찌되었든 정부 수립이라는 국부 비스무리한 역할을 했으니 일단 그것은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이런 모습으로 인해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주의에 어긋나고 독재로 치달았다는 걸 비판하며 자유당을 탈당했다.
한편 당시의 개헌 내용 가운데는 1948년 제헌 당시 주요 기업과 광물의 국영화, 무역에 대한 정부 통제 등 경제 부문 사항들을 '시장경제'로 대체하는 것도[12]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경제적 부문이 주된 개헌이었는데 은근슬쩍 정치적 내용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 이를 들어 일부 이승만 찬양론자들은[13] 사사오입 개헌을 "진정한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을 이룬 성과"라고 애써 예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사사오입 개헌의 진짜 목적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에 있었고 이게 야당 등이 반대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으므로 이승만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 별로 공감받지 못한다. 설령 해당 내용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다고 해도 결국 본질이 아니다 보니 겉치레로 전락해 되레 명분만 퇴색되었다.
6.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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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주: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오늘 이렇게 다시 국회가 속개되었습니다. 의원 여러분! 이틀 전 저 최순주는, 국회부의장으로서 이 자리의 사회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참으로 송구스럽고… 죄송한 말씀을 아니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김두한: 아니, 도대체 뭐가 송구스럽고 죄송하다는 거야?
유진산: 그러게 말입니다. 저 도대체 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죠?
조병옥: 한번 들어보세.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기붕이 클로즈업된다.)
최순주: 오늘 무엇이 죄송한고 하니, 이틀 전에 우리 의원들이 투표를 했던 그 개헌안 표결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회를 잘못 봐서 결과를 제대로 알려드리질 못했습니다.
조병옥: 저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신익희: 참…
조병옥: 이보시오, 최 부의장! 빙빙 돌리지 말고 말을 제대로 해보쇼!
신익희: 음!
최순주: 지난번 저는 개헌안 표결을 부결로 선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결이 아니었습니다!
조병옥: 뭐… 뭐야?
(이기붕이 눈치를 보다 거만히 의자에 기댄다.)
신익희: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지금 부결이 아니라는 게 뭐야!
유진산: 거 무슨 얘기야⁈ 부결이 아니면, 가결이란 말이야⁈
김두한: 아, 빨리 얘기를 해봐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최순주: 어… 그게… 그러니까….
이기붕: 부의장! 발표를 허세요!
최순주: 아, 예. 의장님. 에또 그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전일 개헌안 부결을 선포한 것은 정족수 계산상의 착오로서, 그 잘못 부결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아, 부결 선포를 취소하고 그 본 개헌 건의 표결이 가결되어, 통과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선포합니다!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무섭게 난리가 나는 국회)
조병옥: 부결된 걸 가결이라고 번복하다니! 이런 만행이 있나! 이건 엉터리야! 이건 자유당의 음모야!
유진산: 잘못된 거야! 뭐가 정족수 계산 착오라는 거야?
김두한: 계산 착오라니⁈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
이철승: 야, 최순주! 이 나쁜 놈아!! (의장석에 뛰어올라 최순주의 멱살을 잡으며) 야, 최순주! 넌 민주주의의 반역자야! 어떻게 부결이 가결되나! 어! 이런 날치기가 어딨어! 당신이 도대체 국회부의장이 맞아? 여러분! (국회의원들을 향해) 이건 엉터립니다! 엉터리예요! 이건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입니다, 여러분! 이건 엉터립니다! 엉터리예요! (다시 최순주의 멱살을 잡으며) 야 최순주! 누가 [해석 불가][14]야⁈ 어!
(야당 의원들이 명패를 날리고 일제히 단상을 향해 달려나온다.)
김두한: 부의장! 엉터리같은 소리하지 말고, (명패를 집어던지며) 내려와! 빨리 내려오란 말이야!
(이기붕과 장경근을 비롯한 자유당 의원들이 흡족해하는 반면, 같은 자유당 의원인 김영삼은 예외적으로 결과에 대해 항의한다. 이후 최순주는 국회경비대의 경호를 받으며 빠져나가는데, 이철승 등 야당 의원들이 던진 명패를 맞는 등 곤욕을 치른다.)
장경근: 의장님! 잘됐습니다.
이기붕: (고개를 끄덕인다.)
(방청석에 있는 최동열, 정대발, 채원기와 건너편 방청객석에 있는 멸치, 이석재, 이억일, 이정재, 임화수, 조열승, 쪽박 등 동대문패들이 클로즈업된다.)
조병옥: 어설픈 음모는 집어치워! 여긴 신성한 국회야!
신익희: 날치기다! 날치기! 이건 용납할 수가 없다!
유진산: 민주주의를 모욕하지 마라! 자유당!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수용하라!
김두한: 이런 세상에! 아니 이렇게 눈을 뻔히 뜨고 있는데, 거짓말과 사기를 친단 말이야? 어? 아 그래, 안 그래⁈ (감정에 받쳐 옆 야당 의원의 멱살을 잡는다) 어? 사기지! 사기야, 사기!
한 야당 국회의원: (멱살 잡는 김두한을 옆에서 말리며) 아, 김 의원, 김 의원! 아, 여당 아니야, 김 의원!
(이기붕이 상황을 지켜보며 회의장을 떠나려 한다)
조병옥: (이기붕을 붙잡으며)이보시오, 이 의장! 하늘이 두렵지 않소? 백주대낮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대답해 봐! 어허, 대답해 봐⋯!
(이기붕이 조병옥을 뿌리친다.)
유진산: (다시 이기붕을 붙잡으며) 이봐요! 이보세요! 진실을 말하세요! 이건 음모예요, 음모!
장경근: 이거 왜 이러세요, 정말!
조병옥: 대답해!
신익희: 이건 인정할 수가 없어!
유진산: 진실을 말하세요!
(이기붕이 이정재를 쳐다본다.)
조병옥: 대답하란 말이야!
유진산: 이봐 의장! 어딜 도망가!
조병옥: 역사에 부끄럽지 않나!
신익희: 말해 임마!
(이석재가 부하에게 신호를 보낸다.)
동대문 조직원: 야, 조병옥!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니가 언제부터 야당이야!
깡패들: 옳소!
쪽박: 야! 개헌을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이 바로 매국노야! 알어, 조병옥!
유진산: 아니, 저, 저! 저 불온한 방청객들은 저거 뭐야, 저거! 아니, 국회 경위들 어디갔어?
이석재: 야, 유진산! 너 주둥아리 닥치지 않으면 죽어! 당장 한 번 죽어볼래? 설치는 놈은 누구야? 다 나와! 거기 조병옥, 유진산, 신익희! 조용히들 못해? 어!
조병옥: (놀라는 표정으로) 아니, 이런 국회가 어디 있나? 저런 불한당 놈들이 국회에 들어와서 겁을 줘?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어, 저기 저놈! 내가 잘 알아. 자유당 감찰부장이지⁈ 저놈 끌어내! 당장 끌어내!!!
조열승: 아따, 거 아가리 닥쳐부러라잉! 시끄럽게 하면 콱 죽여불랑께!
김두한: 웬 놈들이야, 너희들⁈ 나 김두한이야! 너희들 누구야! 뭐하는 놈들이야!
(김두한과 이정재의 눈이 마주친다.)
나레이션: 이정재의 방청석 난동. 당시 자유당 중앙당 감찰부 차장이었던 이정재를, 이때 조병옥은 잘못 불러 감찰부 부장이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도 국회 속기록에 생생한 협박의 증거로 남아있다. 주먹들이 의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국회를 위협하는 이 있을 수 없는 현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유진산이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던 것처럼, 초기 헌정의 어두운 종말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야인시대에서는 103화~104화에 걸쳐 나온다. 103화에서는 부결되는 장면, 104화 초반에서는 사사오입 선포로 야당 의원들이 반발하고 이정재가 개입하는 장면이 나온다.김두한: 아니, 도대체 뭐가 송구스럽고 죄송하다는 거야?
유진산: 그러게 말입니다. 저 도대체 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죠?
조병옥: 한번 들어보세.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기붕이 클로즈업된다.)
최순주: 오늘 무엇이 죄송한고 하니, 이틀 전에 우리 의원들이 투표를 했던 그 개헌안 표결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회를 잘못 봐서 결과를 제대로 알려드리질 못했습니다.
조병옥: 저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신익희: 참…
조병옥: 이보시오, 최 부의장! 빙빙 돌리지 말고 말을 제대로 해보쇼!
신익희: 음!
최순주: 지난번 저는 개헌안 표결을 부결로 선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결이 아니었습니다!
조병옥: 뭐… 뭐야?
(이기붕이 눈치를 보다 거만히 의자에 기댄다.)
신익희: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지금 부결이 아니라는 게 뭐야!
유진산: 거 무슨 얘기야⁈ 부결이 아니면, 가결이란 말이야⁈
김두한: 아, 빨리 얘기를 해봐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최순주: 어… 그게… 그러니까….
이기붕: 부의장! 발표를 허세요!
최순주: 아, 예. 의장님. 에또 그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전일 개헌안 부결을 선포한 것은 정족수 계산상의 착오로서, 그 잘못 부결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아, 부결 선포를 취소하고 그 본 개헌 건의 표결이 가결되어, 통과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선포합니다!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무섭게 난리가 나는 국회)
조병옥: 부결된 걸 가결이라고 번복하다니! 이런 만행이 있나! 이건 엉터리야! 이건 자유당의 음모야!
유진산: 잘못된 거야! 뭐가 정족수 계산 착오라는 거야?
김두한: 계산 착오라니⁈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
이철승: 야, 최순주! 이 나쁜 놈아!! (의장석에 뛰어올라 최순주의 멱살을 잡으며) 야, 최순주! 넌 민주주의의 반역자야! 어떻게 부결이 가결되나! 어! 이런 날치기가 어딨어! 당신이 도대체 국회부의장이 맞아? 여러분! (국회의원들을 향해) 이건 엉터립니다! 엉터리예요! 이건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입니다, 여러분! 이건 엉터립니다! 엉터리예요! (다시 최순주의 멱살을 잡으며) 야 최순주! 누가 [해석 불가][14]야⁈ 어!
(야당 의원들이 명패를 날리고 일제히 단상을 향해 달려나온다.)
김두한: 부의장! 엉터리같은 소리하지 말고, (명패를 집어던지며) 내려와! 빨리 내려오란 말이야!
(이기붕과 장경근을 비롯한 자유당 의원들이 흡족해하는 반면, 같은 자유당 의원인 김영삼은 예외적으로 결과에 대해 항의한다. 이후 최순주는 국회경비대의 경호를 받으며 빠져나가는데, 이철승 등 야당 의원들이 던진 명패를 맞는 등 곤욕을 치른다.)
장경근: 의장님! 잘됐습니다.
이기붕: (고개를 끄덕인다.)
(방청석에 있는 최동열, 정대발, 채원기와 건너편 방청객석에 있는 멸치, 이석재, 이억일, 이정재, 임화수, 조열승, 쪽박 등 동대문패들이 클로즈업된다.)
조병옥: 어설픈 음모는 집어치워! 여긴 신성한 국회야!
신익희: 날치기다! 날치기! 이건 용납할 수가 없다!
유진산: 민주주의를 모욕하지 마라! 자유당!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수용하라!
김두한: 이런 세상에! 아니 이렇게 눈을 뻔히 뜨고 있는데, 거짓말과 사기를 친단 말이야? 어? 아 그래, 안 그래⁈ (감정에 받쳐 옆 야당 의원의 멱살을 잡는다) 어? 사기지! 사기야, 사기!
한 야당 국회의원: (멱살 잡는 김두한을 옆에서 말리며) 아, 김 의원, 김 의원! 아, 여당 아니야, 김 의원!
(이기붕이 상황을 지켜보며 회의장을 떠나려 한다)
조병옥: (이기붕을 붙잡으며)이보시오, 이 의장! 하늘이 두렵지 않소? 백주대낮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대답해 봐! 어허, 대답해 봐⋯!
(이기붕이 조병옥을 뿌리친다.)
유진산: (다시 이기붕을 붙잡으며) 이봐요! 이보세요! 진실을 말하세요! 이건 음모예요, 음모!
장경근: 이거 왜 이러세요, 정말!
조병옥: 대답해!
신익희: 이건 인정할 수가 없어!
유진산: 진실을 말하세요!
(이기붕이 이정재를 쳐다본다.)
조병옥: 대답하란 말이야!
유진산: 이봐 의장! 어딜 도망가!
조병옥: 역사에 부끄럽지 않나!
신익희: 말해 임마!
(이석재가 부하에게 신호를 보낸다.)
동대문 조직원: 야, 조병옥!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니가 언제부터 야당이야!
깡패들: 옳소!
쪽박: 야! 개헌을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이 바로 매국노야! 알어, 조병옥!
유진산: 아니, 저, 저! 저 불온한 방청객들은 저거 뭐야, 저거! 아니, 국회 경위들 어디갔어?
이석재: 야, 유진산! 너 주둥아리 닥치지 않으면 죽어! 당장 한 번 죽어볼래? 설치는 놈은 누구야? 다 나와! 거기 조병옥, 유진산, 신익희! 조용히들 못해? 어!
조병옥: (놀라는 표정으로) 아니, 이런 국회가 어디 있나? 저런 불한당 놈들이 국회에 들어와서 겁을 줘?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어, 저기 저놈! 내가 잘 알아. 자유당 감찰부장이지⁈ 저놈 끌어내! 당장 끌어내!!!
조열승: 아따, 거 아가리 닥쳐부러라잉! 시끄럽게 하면 콱 죽여불랑께!
김두한: 웬 놈들이야, 너희들⁈ 나 김두한이야! 너희들 누구야! 뭐하는 놈들이야!
(김두한과 이정재의 눈이 마주친다.)
나레이션: 이정재의 방청석 난동. 당시 자유당 중앙당 감찰부 차장이었던 이정재를, 이때 조병옥은 잘못 불러 감찰부 부장이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도 국회 속기록에 생생한 협박의 증거로 남아있다. 주먹들이 의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국회를 위협하는 이 있을 수 없는 현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유진산이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던 것처럼, 초기 헌정의 어두운 종말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철승 의원이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는 그 유명한 장면이 여기서 나온다. 단상으로 달려들기 직전 최순주를 향해 "야! 최순주! 이 나쁜 놈아!" 라고 소리치는 건 덤이다.
작중 사사오입 개헌은 김기홍이 이정재와 결별하게 된 원인이 된다. 그동안 김기홍은 권력에 의지하기를 권했으나 무리수를 두는 자유당을 보며 그들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예상한다. 허나 이정재는 '개인적 야망+이제 와서 자유당과 결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김기홍의 간언을 물리쳤고 결국 스스로 조직에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김기홍은 동대문 사단을 떠난다.
야인시대 합성물이 유튜브를 통해 유행하면서 이 사건을 다룬 장면의 합성물까지 등장했는데 주로 최순주가 교수 역할을 하면서 조별과제를 내거나 사이버 강의를 하는 설정으로 나온다. 수근거리는 장면이나 호통치는 국회의원들은 합성하기 딱 좋은 재료들. 예시 이외에 신익희의 경우 '날치기' 부분이 '마, 지랄'이라고 들려서 뒤의 '없다' 부분과 이어서 '지랄한다' 라고 조교하기도 한다.
[1] 제7차 개헌에서 폐지[2]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중요사항에 대한 국민투표 규정은 개폐할 수 없음[3] 이것은 미국 수정 헌법 제22조에서 따 온 것이다.[4] 의외로 독재자들이 처음 취하는 방식은 이런 경우가 많다. 대놓고 죽을 때까지 집권할 수 있다고 하기에는 속이 보이니까 형식상 임기와 제한을 만들거나 기존에 있던 걸 인정하고 집권한 뒤 서서히 제한을 없애는 식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5] 즉, 제헌헌법 공포 당시에는 대한민국 자체에 대통령이 없었기 때문에 사사오입 개헌 자체가 앞뒤가 안맞는 엉터리 조항 추가에 지나지 않았다.[6] 여기서 양원은 참의원과 민의원을 말하는 것으로 1952년 헌법에도 양원제는 규정되어 있었지만 상원인 참의원은 선출되지 않았다.[7] 출처: 1973년 1월 16일자 「동아일보」 5면, '비화 제1공화국<183> 제7화 - 사사오입 개헌(22)').[8] 후술할 안분표 문제 등 아주 넓게 보면 논란거리가 있다. 만약 일본식 안분표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1개의 무효표를 찬반비율에 따라 0.665표 정도로 정족수를 136명으로 볼건가 135.333으로 볼 건가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었을수도 있었을거다.[9] 가령 99표를 얻었는데 100표로 반올림했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등. 혹은 3.15 부정선거 당시에 있었던 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10] 혹은 무소속이었는데 여당에 포섭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1] 당시 한국의 평균 학력은 공민학교나 야간학교, 군대에서 단시간 수업으로 한글과 숫자 정도를 깨친 정도가 다수여서, 엘리트 출신이 아닌 지역 유지로서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글밖에 모르고 한자를 읽을 줄 몰랐다. 물론 그 당시에도 보통의 정치인들은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국회의원 피선거권에 학력 제한 같은 건 없으니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김두한도 한자를 읽고 쓸 줄 모르는 무식한 깡패 두목에서 국회의원으로 출세했다.[12]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시장경제와는 딴판인 계획경제적 요소도 많이 있었다.[13] 이들은 발췌 개헌 조차 '대통령 직선제 도입으로 민주주의를 진일보시켰다'고 치켜세우기도 한다.[14] 장내 소란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