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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이원철 李源喆 | |
자 / 호 | 우경(禹卿) / 우남(羽南) |
본관 | 우계 이씨[1] |
출생 | 1896년 8월 19일[2] |
한성부 남서 광통방 다동계 (現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 | |
사망 | 1963년 3월 14일 (향년 66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 |
학력 |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선린상업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 졸업) 앨비언 칼리지 (학사)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 (천문학 / 박사) |
경력 |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 초대 관상대장 인하공과대학 초대 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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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천문학자.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우경(禹卿), 호는 우남(羽南).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이며, 연세대학교 (연희전문학교)교수, 인하공과대학 초대 학장, 초대 기상청장을 역임하며 한국 과학 발전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2. 일생
1896년 8월 19일 한성부 남서 광통방 다동계(現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에서 아버지 이중억(李重億, 1856. 8. 2 ~ 1901. 5. 22)과 어머니 경주 김씨(1866. 4. 19 ~ 1929. 12. 28)[3] 사이에서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연희전문학교 설립 첫 해에 수물과에 입학하여[4]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수물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당시 수물과 교수였던 아서 베커(Authur Lynn Becker)와 윌 루퍼스(Will Carl Rufus) 교수 등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과 조교로 가르치게 되었다. 하지만 조교로 썩히기에 너무 아깝게 여긴 미국인 교수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내어 미국 미시간주 앨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앨비언 칼리지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주위의 우려와 언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올 A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흥미를 느껴왔던 천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그는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대학원 진학 3년만에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별에는 원철성이라는 별명이 붙는다.그는 미국에 남아서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의 교수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 더이상 고성능의 장비를 이용할 수 없기에 세계적인 천문학자로 이름을 남길 기회가 사실상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암울한 조국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선진 과학을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연전 학교 강의 뿐만 아니라 YMCA 등에서 연희전문학생이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 천문학 강의도 자주 열었다. YMCA의 대중 강의에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지 나중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하면서 YMCA 재단 이사를 거쳐 이사장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중들에게 과학을 가르쳐 계몽하려는 그의 행보는 일제의 눈에 곱지 않게 비춰졌고 결국 1938년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연희전문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해임 이후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직원으로 학교에 복귀했다. 이후 1940년 창씨개명령이 내려졌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일제는 그가 조선어학회 요주의 인물이라면서 1942년 교직원에서도 그를 사임시켰다.
광복 이후에도 그는 한국의 과학 발전에 앞장섰는데, 해방 직후 미군정을 찾아가 한국에는 당장 현대적인 관상대(기상청)의 운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일제의 기상대를 인수하여 관상대장으로 부임, 현대적인 기상 관측이 가능하도록 발전시켰다. 이후 1948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중앙관상대의 초대 관상대장을 지냈다.
또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서는 공대의 설립 및 발전을 역설해왔는데, 당시 한국에서 공대가 몇 안되는 상황에서 인천에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주도하였고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광복 후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하여 학교를 재건하는데 일조했으며, 1955년 연희대 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통합 연세대가 출범하자 초대 연세대 동문회장을 맡았다. 또 연희대/연세대 재단 이사를 거쳐 1961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연세대 이사장을 맡았다.
3. 사후
1963년 작고한 후 그의 부인 김화순 여사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조의금 전액을 연세대학교 장학금으로 기부했고, 학술적 가치가 있는 도서 300여권을 건국대에, 양평군 임야 3만6천평과 갈월동 집은 YMCA에 기증하는 등 마지막까지 나라 발전을 위한 사회 환원을 베풀었으며 사후 선대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에 안장되었다.이후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과학관 앞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고,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이원철 하우스'가 생겼다. 또한 2002년 한국천문연구원에서는 발견한 소행성 2002DB1의 이름을 '이원철'로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