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2:31:29

최현배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현재 회원
인문사회 분과 자연 분과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철학, 윤리학, 논리학, 미학, 종교학, 교육학, 심리학
2분과: 언어학, 문학
3분과: 사학, 고고학, 민속학, 지리학, 문화인류학
4분과: 법학
5분과: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6분과: 경제학, 경영학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대기과학
2분과: 생물학, 지질과학, 스포츠과학, 영양학, 가정학
3분과: 건축공학, 금속공학, 기계공학, 섬유공학, 자원공학, 전기공학, 전자공학, 정보공학, 조선공학, 토목공학, 항공공학
4분과: 의학, 치의학, 한의학, 약학, 수의학
5분과: 농학, 임학, 축산학, 수산학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6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정진홍 장석진 차하순 고상룡 임희섭 이현재 안세희 이상만 김상주 이상섭 홍성각
차재호 조동일 이기석 김남진 강신택 곽수일 노재식 김수진 박중현 문국진 이병일
이돈희 홍재성 이기동 정동윤 안병준 정기준 박세희 이정우 김상용 김낙두 김현욱
소광희 김학주 김영한 박병호 김경동 김기영 권숙일 박상대 노오현 김병수 황병국
윤사순 이정민 이성규 김상용 김용구 유장희 기우항 맹원재 윤덕용 이순형 류순호
이한구 김수용 이태진 김효전 진덕규 이학용 김용해 임번장 현병구 김영중 장동석
박종현 조주관 한상복 임종률 백완기 이지순 이은 장호완 나정웅 고재승 이홍석
정찬섭 장경렬 최병현 권오승 이정복 조장옥 조성호 김상구 한송엽 심희섭 김윤수
- 남기심 임돈희 최병조 김홍우 한인구 이호인 정진하 최항순 이영순 박승우
- 김인환 박용운 신동운 신용하 - 김도한 조완규 이장무 이승규 최양도
- 이종호 김호동 - 임현진 - 박성현 이기화 이병기 이종호 홍성윤
- - 김영식 - 신명순 - 김진의 안진흥 황규영 박성회 김수일
- - 고동환 최진호 임정빈 유정열 이명식 고희종
- 박종욱 - 고규영 김용균
- 우경식 - 송진원 한재용
작고 회원
인문사회 분과 자연 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6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고형곤 권중휘 이병도 최태영 신기석 고승제 안동혁 손치무 이균상 한구동 정문기
안호상 이숭녕 김상기 유진오 이상백 최호진 김동일 강영선 원태상 윤일선 조백현
박종홍 이희승 신석호 고병국 신도성 신태환 이태규 정태현 최경열 이제구 현신규
김두헌 최현배 이선근 이근칠 민병태 유진순 전풍진 박동길 이종일 이종륜 우장춘
김기석 양주동 조의설 윤세창 김성희 조기준 최규남 김호직 이채호 박영진 김호식
김활란 이양하 김재원 이종극 고황경 김순식 권영대 이민재 최방진 이재춘 송재철
김계숙 이병기 류홍렬 김병노 김상협 김효록 최윤식 조복성 윤일중 이진기 이근태
이종우 김윤경 이홍직 이항녕 최문환 육지수 박철재 이병위 민한식 박호풍 박승만
이상은 손우성 홍이섭 박원선 정인흥 김준보 박하욱 김옥준 김기덕 김두종 심종섭
이인기 정인승 고병익 정광현 이만갑 이상구 조광화 최례석 최호영 이세규 지영인
김동화 조윤제 한우근 유기천 윤천주 권오익 이원철 김준민 김재근 김명선 이춘녕
김준섭 김형규 전해종 이한기 박동서 정수영 장기원 김창환 김종석 기용숙 박병희
오천석 차상원 이기백 이희봉 이용희 임원택 성좌경 김삼순 최형섭 한심석 윤상원
류승국 차주환 이광린 문홍주 김대환 박기혁 박정기 홍순우 김문상 우린근 이창구
이희철 여석기 김원용 서돈각 김운태 김옥근 박봉열 김봉균 신영기 나세진 김성원
서명원 조성식 김철준 손주찬 홍승직 오상락 최상업 윤석규 이량 이우주 이은웅
임한영 김동욱 이두현 남흥우 차기벽 정병휴 조순탁 주진순 장석윤 이문호 정후섭
최재희 정병욱 민석홍 황산덕 구영록 김동기 김치영 이대성 윤동석 김용관 강제원
김규영 강두식 이찬 김증한 박광순 이상수 정영호 한만춘 서병설 백운하
유형진 이기문 윤무병 김치선 조순 김정수 김훈수 강명순 이영소 김문협
백낙준 이능우 이우성 박일경 변형윤 최규원 이영록 윤장섭 권이혁 고재군
조요한 동완 황수영 김기두 윤기중 심정섭 김오중 오현위 이장락 최병희
김성태 장덕순 양병우 정영석 박을룡 김준호 최계근 김기홍 박영호
김태길 이가원 민영규 김현태 윤세원 하두봉 이승원 박수선 전세규
윤명로 김현창 김용섭 김정균 김태린 박희인 김재극 장신요 조재영
김종철 김용직 이성무 김홍규 박태원 정창희 우형주 이기영 오봉국
정양은 정명환 황적인 윤갑병 이택식 김주환
박영식 이경식 심헌섭 윤능민 황종흘 김용일
김충렬 김완진 김철수 이익춘 이만영 김정룡
조명한 김종원 송희성 조선휘 이호왕
오병남 이형국 고윤석 이리형
정범모 장세헌 이충웅
조대경
길희성
이성진
명예 회원
노요리 료지 얀 린드스텐 위르겐 코카 얀 아헨바흐 크리스티안 스타크
피터 드루스 시오노 히로시 로저 비치 해럴드 푸어
}}}}}}}}}}}}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현배
崔鉉培 | Čhoi Hyŏn-pai[1]
파일:external/www.iusm.co.kr/120697_16772_23_33.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외솔[2]
본관 경주 최씨[3]
출생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4]
(現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사망 1970년 3월 23일 (향년 75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부모 아버지 최병수
배우자 이장련[5]
자녀 최영해
친인척 손자 최동식
학력 일신학교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6] / 학사)
교토제국대학 대학원 (교육학 / 수료[7])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44호
상훈 건국공로훈장 단장 수훈 (1962년 수훈)[8]
종교 개신교[9]

1. 개요2. 생애3. 기타4.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국어학자, 문학인. '한글 보편화'에 가장 앞장선 인물이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다.

최진립 장군의 10대손이다.

큰 아들 정음사 대표 최영해 선생으로 정음사에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고, 최영해 선생 큰아들이 고려대 화학과 최동식 교수이다.

2. 생애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現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에서 아버지 최병수(崔炳壽)와 어머니 박순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산군 병영성 내부에 살았으며,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행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46-1번지에 거주했다.

출생 이후 병영성 내부에서 살면서 일신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10]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학국어문법 등을 이수하였다.[11]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를 거쳐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12]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이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경상남도 동래군[13]으로 내려가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보통학교[14]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교토(京都)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15][16]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지면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같은 주시경 학파인 권덕규, 신명균(申明均), 심의린(沈宜麟), 정열모(鄭烈模)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로써 교육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주시경 학파의 형태주의 맞춤법이 표준이 되었다. 일본 제국의 이 사업은 주시경 학파가 주장하는 형태주의 맞춤법이 박승빈 학파가 주장하는 표음주의 맞춤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1933년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하여 한글보급에 힘써 왔고, 미국인 학자 겸 선교사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한국어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들 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검거, 구금되었고, 1943년 9월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그 뒤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1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까지 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해당 판결문을 보면 창씨명이 쓰키나리 겐바이(月成鉉培)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씨만 새로 만들었고 이름은 그대로 둔 채 한자 읽는 방식만 바꾼 것이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광복 직후 최초 정치 여론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해방 이후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서 국어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던 조선교육심의회의 전체회의에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가로쓰기를 통과시켰다. 후에 한글학회 상무이사와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특히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공인 로마자 표기법인 '한글을 로오마자로 적는 법'과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기법'을 제정하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되었다.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한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군선거구[17]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택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휴전 후인 1954년 서울특별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연희대학교로 복직하여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했다.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출범하자 초대 부총장에 취임했다. 1958년에 학술원 부원장이 되었다. 1959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연세대학교2001년 문과대학 건물(구 인문관)을 그의 호를 딴 "외솔관"으로 명명하였다.[18]

1962년 생존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노환으로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원래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었던 주시경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가 1981년 주시경의 묘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최현배의 묘는 2009년 9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기타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613번지에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 누리집, 운영 시간 안내 한 때 912번 지선 버스가 여기를 종점으로 삼기도 했지만, 2013년부로 한블럭 아래 병영초등학교 정류장을 거쳐 더 북쪽으로 연장되었다. 또한 우정혁신도시에는 그의 호를 딴 외솔초등학교와 외솔중학교[19]가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학자였다. 생전에 찍은 다른 사진들만 봐도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20] 나라와 나랏말을 외세에게 빼앗겼던 경험 때문인지 외솔이 국어학자로서 가지는 사명감은 남달랐으며, 평생토록 극히 엄격한 잣대를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후배인 문학박사 양주동 교수는 유머러스한 일화도 많았으며[21] 아들 최신해 박사는 가끔씩 해학적 면모를 보여주곤 했는데, 외솔은 그런 게 일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희전문에서 외솔의 지도편달을 받았던 교수들은 옆에서 누가 "최현배"나 "외솔"이란 말을 하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떴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순우리말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적으로 순우리말 쓰기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2] 또한 이승만 정부 시절 1955년 조선일보서울이란 이름은 수도 이름으로 맞지 않으므로[23][24] 바꿔야 한다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승만도 이것에 관심을 보여서 바꾸려고 논의는 했는데, 이승만 밑의 참모진들이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꾸자고 하는 통에 최현배 선생이 지금 장난치냐고 분노했으며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도 '서울'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대통령도 이런 억지스러운 아부에는 반대했기에 '서울'이란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건 서울특별시/역사 참고.

20세기에 연세대학교(연희전문의 후신)에 다닌 사람이라면 외솔의 영향으로 당시 학교 곳곳에 남아있던 순우리말 사용의 흔적을 보고 다소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의 주차장은 20세기 말까지도 “둠”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용어의 순우리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인혁 교수의 “의학용어집”이 대표적인 예.

우리말의 가로쓰기는 최현배 박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소위 식자들은 세로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가로쓰기를 강하게 반대하였다.[25] 최현배 박사가 아니면 이들의 반발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세로쓰기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글 풀어쓰기 및 이를 편하게 쓰기 위한 글씨체를 고안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풀어쓰기' 문서 참조.

사후에 그를 기리는 단체인 외솔회가 출범하였고 이 단체에서는 매년 그의 호를 딴 외솔상을 시상한다. 호인 외솔은 보기 드문 순우리말 호인 동시에 최현배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는 멋진 호로 이름높다.

한국 정신건강의학과의 원로 의사이자 수필가로도 유명했던 최신해 박사(崔臣海, 1919-1991)가 그의 아들이다. 외솔의 아들답게 글솜씨가 뛰어났다. 말년에 역사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여러 성문화를 다룬 책을 집필했는데, 근엄한 노교수답지 않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속하다 느낄 정도로 해학적이고 맛깔나는 문체가 일품이다. 최신해 박사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인데, 전공을 살려 한글과 인간 발성기관 구조 간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 스승으로, 윤동주는 외솔을 매우 존경하여 강의를 수강하고 그의 저서를[26] 탐독했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는 거의 전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죽을 때까지 맡았고, 이후 제자였던 허웅이 32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게 된다.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를 통해 최현배 선생을 기리고 있으며 그의 고향인 울산광역시에서는 매년 그와 관련된 글짓기 행사가 열리는 등 울산광역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그를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군 을) 무소속 6,346표 (16.57%) 낙선 (2위)


[1] 로마자 이름 출처[2] "외따로 서 있는 소나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3] 사성공파(司成公派)-현곡2파(見谷二派, 서파西派) 17세 석(錫) 현(鉉) 종(鍾) 항렬. 아버지 최병수(崔炳壽)는 16세 수(壽) 만(晩) 항렬.[4] #[5] 외솔보다 4살 연상이었다. 외솔이 작고하고 20일도 안 된 1970년 4월 9일에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당뇨로 별세했다. 가족들이 외솔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항상 문병을 오던 외솔이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외솔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나라사랑 창간호(1971년) 307~311쪽 참고할 것.[6] 교육학 전공[7] 오랫동안 석사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일본 제국에는 석사 학위가 없었고 학사 다음이 바로 박사였다. 그리고 교토제대 문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서 수학만 했지 졸업은 하지 않았다.[8] 1967년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현재는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개칭되었다.[9] 출처는 나라사랑 창간호(1971년) 310쪽[10]경기고등학교[11] 이곳에서 받은 '익힘글'(중등과정 수료증)과 풀어쓰기로 적힌 '맞힌보람'(고등과정 졸업장)의 영인본들이 외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12]히로시마대학[13] 현재의 부산광역시 일대에 해당한다.[14]동래고등학교[15] 석사학위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 제국 시절에는 석사 학위의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1922년에 교토제대에 입학해 1925년에 졸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6] 그리고 일본이 석사학위가 없었던 1950년대 이전에는 학사학위가 석사학위를 대체하는 학위였다.지금은 학사 학위가 흔하지만 그 시대에는 학사 학위 가지고 교사나 대학교수가 될 정도로 석사와 비슷한 학위였고 1920년대 이전까지 박사학위는 문부성에서 수여하였지만 1920년대 학위법 제정으로 일반 대학에서도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 석사학위가 도입된 것은 1950년대였으며 석사 학위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잔재가 아직도 남아 석사 대신 '박사 전기과정'이라는 표현을 쓰는 대학들도 많다.[17] 울산군 농소면, 강동면, 온양면, 웅촌면, 범서면, 두동면, 두서면, 언양면, 상북면, 삼남면[18] 참고로 신관인 제2인문관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연희전문을 한국학의 메카로 이끈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으로 명명했다.[19] 본래는 울산동중학교로 약사동에서 혁신도시로 이전한 학교이며, 2016년부터 현재의 교명으로 바꿨다.[20] 일설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경상북도 안동군에서 발견되었을 때 큰 소리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한다.[21] 일화가 참 다양하지만 특히 "어이쿠 국보가 넘어진다!"와 "내가 모르는 건 학생들도 몰라도 돼", "(택시기사에게) 국보가 탔으니 안전운전 부탁하오"가 유명.[22] 그녀라는 낱말 사용을 강하게 비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 항목 참조.[23] 서울이란 말 자체가 수도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수도 이름이 '수도'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게 이 주장의 근거다. 원문은 1955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 논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24] 수도의 이름의 뜻이 그냥 '수도'인 국가가 존재하기는 한다. 가령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와 현 수도인 도쿄는 각각 '수도', '동쪽 수도'라는 뜻이며,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도 '북쪽 수도'라는 뜻이고,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아스타나도 그냥 '수도'라는 뜻이다.[25] 세로쓰기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법조문이나 공문에서 흔히 보는 낫표(「」,『』)가 바로 세로쓰기용 문장부호이다.[26] <우리말본>, 193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