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07:17:56

성익현

성명 성익현(成益鉉)
이명 성익현(成益顯, 成益賢)
생몰 ? ~ ?
출생지 강원도 춘천군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성익현은 강원도 춘천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춘천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성익현은 춘천진어영의 초관(哨官)을 맡다가 을미사변이 터지자 관직을 그만두고 이소응의 춘천의진에 참여해 실질적인 의병장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이후 춘천의진이 해산되자 민용호의 관동의진에서 선봉장을 맡아 강원 삼척, 울진, 평해, 봉화 등지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관동의진이 해산된 후 자택으로 귀가한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정경태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켜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1907년 음력 7월 25일, 성익현은 의병 30명을 이끌고 경북 평해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권총 2정과 도검 2자루 등 무기, 그리고 군복 등 군수품을 노획했다. 그리고 같은해 음력 7월 하순에는 부하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정,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화력을 증강했다. 또한 음력 9월 12일에는 이강년 의병장의 중군장 정정진(鄭正眞)과 합세하면서 수백 명의 의병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그는 이들을 이끌고 울진군 읍내를 재차 공격해 경찰들을 몰아내고 군청, 경무서, 우체국과 그 부속관사, 일본인 및 부일배의 가택 10여 호 등을 소각했다.

1907년 10월 하순, 성익현은 울진군 원남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5일에도 울진군 서면에서 군자금품을 징발했다. 이후 이강년, 김상태(金相泰) 의진과 연합하여 천여 명의 연합의진을 결성한 뒤 의진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경북 봉화군 내성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5월 16일 연합의병부내는 내성을 점령하러 가던 중 봉화군 서벽리에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하여 이를 공격하여 하사 1명과 순사 3명 및 통역 1명을 사살했다. 영천경찰서 소속 순사부장은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08년 5월 16일, 영천수비대에서 하사 이하 통역을 합쳐 모두 7명, 경찰서에서 순사부장 이하 6명이 정찰을 강행하기 위해 출장하였는데, 봉화군 신양면(현 춘양면) 서벽리에서 폭도의 중첩된 포위망에 빠져 영천경찰서 배속 순사, 봉화주재소 배속 순사, 영천수비대의 오장 외에 한인 순사, 통역 등이 전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돼 다른 곳으로 간신히 험로를 더듬어 도망해 귀대하였다."

이후 의병대는 성익현, 이강년, 김상태의 지휘하에 내성을 포위 공격했다. 일본군 비밀문서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5월 17일 오전 4시20분, 고갯마루에서 동쪽으로 약 2천500m를 내려왔을 때, 약 400m 동쪽 좌전방에서 백·흑의의 폭도 40~50명이 우리 일행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래서 왼쪽으로 전개해 응전했는데, 폭도들이 점차 북쪽 고지에 나타나더니 잠깐 사이에 갑자기 일행을 포위했다. 그곳에서 완전히 포위당한다면 위험치고는 가장 심한 것으로 천천히 사격하면서 철수하기로 하고 폭도의 전력을 확인한 즉, 폭도의 실제 수는 알 수가 없으나 그 우세함은 종전에 보지 못한 바이고, 또 무기도 총이 많은 것을 보았다."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내성리)에 폭도가 무려 1천500명이 나타나 교전했으나 병사의 수가 적고, 탄약이 결핍하였으므로 일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아침부터 폭도들에 의해 봉화군 내성면 순사주재소와 그곳 헌병분견소가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지만, 응원군을 파견할 여유가 없고 연락을 취할 길이 없어 상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폭도의 세력이 매우 창궐하고 있다."

그러나 연합의병대는 일본군 수비대의 반격과 탄약 부족으로 끝내 내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펼쳐지자, 그는 강원도 태백산, 경상도 일월산 등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9년 일본군이 남한 대토벌 작전을 감행한 이후에는 종적을 감췄다. 이후 그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성익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