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나정구(羅正龜) |
생몰 | 1885년 ~ ? |
출생지 | 평안북도 태천군 강서면 양후동 |
본관 | 나주 나씨 |
사망지 | 경성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나정구는 1885년경 평안북도 태천군 강서면 양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15년경 만주에서 김좌진 등이 조직한 독립단이 경영하는 군사교육기관인 사관학교에서 사무를 봤다. 3.1 운동이 벌어질 당시에 흥경현에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했으며, 김기선(金基善), 탁공(卓公), 강연수(康連洙) 등과 함께 안동현 소만류구에 있는 한인 동포들에게 호세를 징수하는 임무를 맡았다.1920년에는 호세 99원과 안동현 전창 일대에서 모집한 100원을 본부에 송금했으며, 그해 12월에는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금 100원을 모집하여 보냈다. 또한 1920년 7월에 만주 해룡, 통화, 흥경, 무순 등지에서 독립단원으로서 조대능(趙大能), 문창현(文昌賢), 김용보(金鎔甫), 전일록(全日祿), 권덕근(權德根), 김명봉(金鳴鳳)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는 친일기관인 보민회(保民會)을 공격하기도 했다.
1924년 3월, 나정구는 봉천성 흥경현에 본부를 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여 제2중대 제3소대 참사(參士)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하순에 소대장 손시형(孫始亨) 외 6명과 함께 국내로 출발해 8월 8일 오후 8시경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최창학(崔昌學)이 경영하는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습격하여 순사 김용정(金鎔楨)을 사살하고 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게 했다. 그리고 군자금 100원과 금 6량 8돈을 모금해 본부로 송금했다.
그러나 1924년 하순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나정구는 1925년 11월 20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8.15 해방 이전에 옥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망 일자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나정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