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07:32

이진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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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9년
황해도 평산도호부 신암방 장동리
사망 1918년 5월 1일
평양형무소
본관 서산 이씨
석대(錫大) 또는 운서(雲瑞)
기천(己千)
부모 아버지 이영배, 어머니 여흥 민씨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황해도 의병 활동2.3. 서간도에서의 무장 투쟁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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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79년경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 장동리에서 부친 이영배(李英培)와 모친 여흥 민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가문인 서산 이씨는 유림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정계에 진출한 이가 거의 없는 몰락 양반 집안이었다. 또한 그의 부인 우씨는 전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했고 훗날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우병렬의 딸이다.

이진룡은 유생 가문에 속했지만 일찍부터 무예를 연마했고, 천성이 강직하고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키는 6척에 기골이 장대했다고 한다. 1894년 15살의 나이로 경서를 통달했으며, 유인석의 문인인 우병렬의 사위가 된 이래 그의 밑에서 유학에 정진했으며, 나아가 유인석의 제자로서 위정척사사상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의식을 굳혔다.

2.2. 황해도 의병 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발표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사실상 넘어가자, 이진룡은 장인 우병렬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지만 호응하는 이가 적어 뜻대로 군대를 운용하지 못했다. 이후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그는 평산 일대의 유학자인 변석현(邊錫鉉), 채홍두(蔡洪斗), 박정빈과 교류하며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윽고 1907년 9월, 그는 박정빈, 조맹선, 신준빈(申俊彬), 신정희, 한정만 등과 함께 평산에서 거병했고 박정빈을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자신은 선봉장이 되었다.

이후 이진룡은 평산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특히 1907년 10월에 평산군 온정리, 고지면 대룡리, 세곡면 등지에서 유달수와 함께 일본군 토벌대를 격퇴해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1907년 12월 유격부대장 유달수가 전사하자, 이진룡은 중대장 또는 유격부대장을 맡아 평산군 세곡면과 산외면, 그리고 남산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이후 일제의 거센 공세로 의병 부대가 약화되고 병사들이 동요를 일으키자, 평산의병부대 의병대는 1908년 4월 19일에 그를 평산의병부대 부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진룡은 각 중대장이 각기 2개의 소대, 분대로 나뉜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 친일 부역배, 기관을 습격해 타격을 입히게 했다. 일본군은 <조선폭도토벌지>에서 이진룡의 의병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황해도에 있는 폭도는 4월 이후 점차 그 세력을 증가하여 주로 철도선 이서의 지역 일대에서 발호하였다. (중략) 그래서 비교적 짜임새 있게 배치된 수비대, 헌병, 경찰이 누차 준열한 토벌, 검거를 실시한 결과 그 집단은 대개 이산하였다. 그렇지만 황해도 고유의 초적과 악수, 관헌을 피하여 도처에 은현, 약탈을 자행하므로 그것을 영구히 근절시키지 못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토벌 공세를 강화하여 헌병분견소, 헌변분파소, 수비대를 증설하고 일본 순사를 증파하자, 이진룡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40, 50의 적은 병력으로 산간에 의거하여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타 지역의 의병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그의 의병대가 고립되자, 그는 국내에서는 더이상 항일 투쟁을 벌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스승인 유인석이 망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1909년 8월, 이진룡은 우병렬 중군장과 박기섭, 박양섭, 조맹선, 심노술, 김기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승 유인석과 합류했다. 이진룡은 이곳에서 군자금과 신무기를 모은 뒤 연해주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는 1개 중대 60여 명 모두에게 소총이나 권총을 지급했고 화약 역시 충실하게 갖추게 했으며, 서울에 강제수(姜濟洙)를 보내 단총 1정과 탄약 30발, 쌍안경 1개를 구입하게 하는 등 무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전령을 각 면, 이장에게 보내 군자금을 각출하게 했다. 만약 전령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2, 3인의 부하 의병을 파견해 의병의 취지를 설명, 설득하여 각출하게 했다. 평산군 신한포 시장상업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400원을 거두어 이진룡에게 제공했으며, 평산, 금천, 곡산의 농민들 또한 자발적으로 금곡을 제공했다. 이진룡은 근거지에서는 약탈을 하지 않고 제공 받은 군용물품에 대해서는 가능한 대가를 지불하려 노력해 주민의 지지를 받았다.

이진룡은 민심의 지지를 토대로 한층 강화된 평산 유격부대를 이끌고 평산, 금천, 곡산 등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에서 일제 헌병분견소, 분파소, 수비대 및 순사와 일진회 등 매국 단체들을 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1909년 4월, 일제는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이진룡 의병대의 이같은 활약상에 우려를 표했다.
가장 세력있는 수괴(의병장)로서 출몰이 가장 성한 곳은 금천·평산·곡산 군내이요, 인민들은 피해를 입고도 하등 굴출(屈出)을 하지 않음은 다소 폭도(의병)들을 동정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폭도토벌지>에서는 "우려대로 연말(1909년 12월)에 가서도 완전히 평정을 못했다"며 이진룡 의병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의 행동은 연월을 경과함에 따라 더욱 더 교모함을 극하였다. 또한 그들의 첩보 근무 및 경계법 등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그 행동도 더욱더 민첩하며, 때로는 우리 토벌대를 우롱하는 듯한 태도로 나올 때도 있어, 그 세력에 때로 약하다 하여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니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이 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우려하게 되었다.

이진룡은 1910년으로 접어든 뒤에도 의병활동을 벌였다. 일본군은 1910년 3월 11일 <폭도에 대한 편책>에서 황해도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황해도는 1910년에 이르러서도 아직 폭도의 횡포가 적지 않았다. 물론 그 세력이 왕년같이 크지는 못하였으나 수비대와 경무기관의 눈을 피하여 양민에게 해독을 끼치는 자가 있었다. 그 수괴의 주된 자로서는 이진룡으로서 그 근거를 인적이 없는 심산에 두고 때때로 평지로 나와 흉포를 자행하였다.

또한 이진룡의 의병대의 무장 수준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무기는 정예인 모젤 또는 미국식 연발총 등 약 40정을 갖고 기타는 화승총을 가진 자로서 다른 폭도에 비교하여 다소 저항력을 가진 자이다. 이진룡이 지난해 11월 하순 간도 방면으로부터 귀래 후 약간 활기를 띠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일제가 <한국 폭도 봉기의 건>과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기록한 이진룡 의병대의 1910년도 활약상이다.
1. 1월 31일 47명의 이진룡 부대가 재령군 상성면 청석두리 부근에서 청석두리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2. 2월 1일 24명의 평산 의병부대가 재령군 신원 헌병분견소를 습격했다.
3. 2월 1일 오후 1시경, 40명의 이진룡 부대가 해주군 금산면 동일리에서 신원분견소 헌병 7명과 교전하여 격퇴시켰다.
4. 2월 18일, 27명의 최순거 평산의병부대가 평산군 주암동 누천에서 누천헌병분견소 토벌대와 2시간의 교전 끝에 격퇴시켰다.
5. 2월 23일, 이진룡의 부하 지관석(池寬錫)이 지휘하는 23명의 의병이 해주군 순사출장소를 습격해 소각시켰으며, 해주경찰서 순사와 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면서 교묘히 철수했다. 그러나 지관석은 3월 7일 오후 6시 30분 해주 대덕면에서 부하 8명과 함께 재령순사, 헌병으로 편성된 토벌대에게 포위되어 전원 전사했다.
6. 3월 3일 오전 11시, 이진룡, 한정만이 지휘하는 80여 평산의병은 계정역 서북의 당동리에서 온정원분견소 헌병 토벌대를 포위 공격해 계정으로 몰아냈고, 계정과 잠성간의 선로에 돌덩이를 쌓아 열차를 전복시켰다.
7. 3월 3일 오후 3시경, 이진룡은 경의선의 계정역과 금성역 사이의 철로를 장악하고 그곳에 돌을 쌓아 북행 열차를 전복시켰다. 이후 출동한 일본군 평산, 개성 연합수색대와 교전해 격퇴함으로써 열차 운행을 8시간 동안 저지했다. 이후 이진룡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3월 4일 오전과 오후, 그리고 7일 오전에도 잠성 철로 파괴를 기도했다. 이에 일제는 주재헌병들로 하여금 철도 경비를 전담하게 했다.
8, 4월 11일, 이진룡 휘하 의병 21명은 서홍군 상덕방 북방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격퇴했다.
9. 4월 12일, 평산 의병부대 19명은 재령 상성면 청석두리 부근에서 백천동 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10. 금천 북면 조포에서 한정만, 최순거가 지휘하는 의병대가 금천의 순사, 헌병으로 편성된 토벌대와 교전한 후 천지산(天地山)으로 철수했다.
11. 4월 24일, 최순거가 지휘하는 22명의 의병대가 해상동 해상동에서 평산헌병, 순사로 편성된 토벌대와 40분간 교전한 후 철봉산을 넘어 철수했다.
12. 5월 7일, 평산 의병대는 용산면 탁영대에서 금천 및 온정원 헌병대와 교전했으나 패했다.
13. 5월 24일, 최순거 휘하 20명의 의병은 평산, 누천간에서 평산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14. 5월 27일 오전, 이진룡 휘하 의병 30명이 재령군 상류면에서 청석두 헌병분견소 헌병을 습격하여 격퇴했다.
15. 5월 29일 오전, 최순거 휘하 의병 15명이 고지면 원촌에서 평산일한순사대를 습격하여 격퇴했다.
16. 6월 2일, 정보 수집차 평복으로 변장한 이진룡이 평산 주암면 퇴탄동에서 평산 백천동 헌병분견소 헌병보조원과 총격전을 벌인 뒤 솔숲으로 은신했다.
17. 6월 12일, 한정만 휘하 의병 43명이 해주 부근에서 해주수비대와 약 30분간 교전한 뒤 철수했다.
18. 6월 19일, 평산의병부대 20명이 누천 지역에서 평산분견소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19. 6월 20일, 평산의병부대 10여 명이 봉암동 서방 무명산에서 수안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20. 6월 19일, 한정만 휘하 의병 20명이 누천 남쪽에서 평산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21. 6월 20일, 평산 의병대 10여 명이 수안 북쪽 약 20리 지점에서 수안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22. 6월 26일, 평산의병부대 의병 50명이 소라면 흑미동을 습격해 해주 순사, 수비대를 몰아냈다.
23. 7월 17~20일 사이, 이진룡, 한정만 휘하 55명이 해주 서북방에서 해주수비대 70명, 재령, 송화, 양수비 및 해주 헌병분대, 경찰 합동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 퇴각했다.
24. 10월 28일, 평산의병부대 16명이 덕우와 장대 서쪽 약 10리 되는 지점에 덕우, 장대 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25. 11월 10일, 평산의병부대 20명이 온전원 동남쪽 약 20리 되는 곳에서 온정원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하여 격퇴했다.

이렇듯 이진룡이 한일병합 이후에도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지속해 일제를 괴롭히자, 일제는 병력을 총동원해 1910년 11월 하순부터 1911년 4월 중순까지 약 4개월간 '황해도 토벌'을 감행했다. 이 토벌 작전에 동원된 일본군 부대는 보병 제29연대, 제65연대 보병 7중대, 기병, 공병대였다. 이들은 개성, 남천점 이서, 서홍, 재령, 해주, 탁영대, 연안 및 배천 일대에서 황해도 전역을 향한 토벌을 개시했다. 그 결과 의병 190명이 사로잡혔고 다수의 총기들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이진룡은 가까스로 몸을 피한 뒤 1911년 10월에 잔여 부대의 지휘권을 중대장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서간도로 망명했다. 한정만은 이후에도 일본군과 맞섰지만 1912년 4월에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최순거는 병사했다. 이후 김정환 중대장이 최후의 평산의병대를 이끌고 저항을 지속했다가 1914년 5월 중순 서홍군 율리면 류정리에서 일본군과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모든 부대원과 함께 전사했다.

2.3. 서간도에서의 무장 투쟁

이진룡은 서간도에 도착한 뒤 조맹선, 박장호, 윤세복, 차도선 등과 함께 장백현 무송에서 포수단을 조직하고, 한인 교포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국내와 연락하여 애국지사를 소집,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요녕성 관전현 청산구 은광자촌을 거점으로 삼고 전술을 익히며 권토중래를 노렸다. 그는 때때로 국내에 진입해 일제 주재소를 습격했다. 당시 서간도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은 그가 하루에 백리를 날듯이 민첩하게 주행한다며 그를 ‘번개다리(飛毛腿)’라고 불렀다고 한다.

1916년 10월 5일, 이진룡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맹선과 더불어 황봉운, 황봉신, 김원섭, 김일, 김효선, 한치현 등 여섯 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평북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평양으로부터 운산, 북진으로 돌아오던 송금마차를 기습 공격했다. 이들은 송금마차가 2번에 서고 경비차가 그 전후에 따르는 것으로 짐작하고 2번 마차를 공격했지만 불행히도 현금마차가 아니었다. 일제가 사전에 습격 계획을 감지하고 배치 순서를 바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습격대는 이진룡의 인솔하에 전원 무사히 빠져나왔다.

2.4. 최후

일제는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진룡을 체포하기 위해 임곡(林谷)을 매수하여 독립 운동가로 가장해 이진룡의 거처를 탐지하게 했다. 결국 1917년 5월 25일, 이진룡은 관전현 청산구에서 임곡의 밀고로 인해 일본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매일신보> 1917년 6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일찍이 그를 세차례나 체포했지만 중도에서 탈출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철사로 그의 쇄골을 꿰어매고 호송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진룡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일본 경찰 한 명을 쓰러뜨렸지만 탈출에 실패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황봉신, 황봉운 등 10여 명의 동지들이 요동 여순으로 압송되는 그를 구하고자 호송대를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황봉신과 황봉운까지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이진룡은 창성헌병대를 거쳐 평양형무소에 갇혔다가 1917년 12월 2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18년 5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매일신보> 1918년 5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진룡은 자신에게 교회(敎誨)[1]를 하는 전옥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은 즉 얼른 사형이나 집행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옥이 유언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유언이라고 지금 새삼스러운 말은 하기 싫으나 장남에 대하여 나 죽은 뒤에 나에게 큰 은혜 있는 선생(유인석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의 사당에 참례하여 아비 죽은 것을 고하라고 전하여 달라.

이후 그는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니, 향년 40세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평산군 신암면 장동리에 안장되었다. <서산이씨제보>에 따르면, 그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부인 우씨는 자결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관전현 청산구의 중국인 주민들은 이진룡과 우씨를 기리기 위해 소아하 언덕에 의열비를 세웠다.
조선의사 이진룡은(朝鮮義士 李公鎭龍)
열부 우씨와 곰(한민족)을 택했노라.(烈婦禹氏 倂同取熊)
남편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문산의 충성이며(夫爲國死 文山之忠)
부인은 남편을 따라 순절했으니 홍실의 가풍일세.(婦爲夫殉 洪室之風)
해는 지고 달은 떠오르는데 봉황은 하늘에 날고(日沈月開 鳳翔凰翔)
부부가 서로 충열을 이해하니 이것이 우리 청산의 빛이네(忠烈相資 吾道之光)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진룡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형무소, 구치소 등 형사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자의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고, 심정을 안정시키고, 규범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민간의 독지가인 종교가가 시설 내에서 행하는 종교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