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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수(1896)

파일:external/rokps.or.kr/247.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약영(若嬰)
본관 광산 김씨[1]
출생 1896년 10월 10일[2]
전라남도 순천군 장평면 장명리
(현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동)[3]
사망 1971년 1월 1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자택
학력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형제 형 김계수[4]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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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독립유공자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양수는 1896년 10월 10일 전라남도 순천군 장평면 장명리(현 순천시 장천동)에서 아버지 김영묵(金永默)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다.

이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1923년부터 기독교 관련 서적을 출판·판매하는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5]에 감사로 취임하여 1942년까지 감사로 있었다[6]##2. 1925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서재필·김활란·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 성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1926년~1927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사 주필로 있었으며, 그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반제동맹회의(世界反帝國同盟會議)에 참석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났으며, 특히 김두봉과 교류하면서 한글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조선으로 귀국, 1934년 김도연과 함께 조선흥업주식회사(朝鮮興業株式會社)[7]를 창립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2년 9월 당시 이 회사에는 김양수·신현모·서민호·박창서(朴彰緖) 및 최순주·이인·김광수(金光洙)·등이 각각 이사와 감사로 취임해 있었으며[* 1941년 11월에는 이인 대신 설원식(薛元植)이 감사에 취임해 있었다.장현식(張鉉植)도 재정 지원에 참여하는 등 일본과 미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8], 자세히 살펴보면 대다수가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회사는 실상 조선어학회였다. 김양수는 표면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면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재정적 지원에 주력하였다.

그 밖에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주식회사 조선제사(朝鮮製絲)에 김종철(金鍾哲)[9]·김도연과 함께 감사로 있었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보인광업(輔仁鑛業) 이사로 재직했다[10]. 또 1939년에는 합동산업(合同産業) 감사, 1941년 김도연과 함께 합동산업 이사로 [11]재직했다.

그러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위로 기소되었다가 같이 기소된 53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석방되었다[12].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향하지는 않았으며 윗 문단에서처럼 표면적으로 실업가 노릇을 하면서 조선어 편찬 사업에 계속 매진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윤병호(尹炳浩)·서승효(徐承孝)·장현식·이인·이은상·정인섭·안재홍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후 2년 3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순천군수를 역임하는 한편, 전라남도 순천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재무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순천군 지부장, 한국민주당 중앙위원·상무위원 겸 순천군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황두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민회 황평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윤형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민주당 전라남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순천시 매곡동에 순일염색소(順日染色所)를 창립하여 경영을 시작했으며#, 1958년 민주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6월 원자력원[13]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신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71년 1월 1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90년 정부에서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10선거구(순천군 갑)) 한국민주당 11,508표 (41.46%) 낙선 (2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4선거구(순천시)) 민주국민당 9,927표 (47.06%) 당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4선거구) 민주국민당 2,882표 (13.16%) 낙선 (5위)

4. 둘러보기

파일:전라남도 휘장(~2000)_white.png 전라남도 제2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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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37세 수(洙) 항렬.[2] 음력 9월 4일.[3] #[4] 순천철도병원장을 역임했다.[5] 1939년경 창문인쇄(彰文印刷)로 상호를 변경하였다.[6] 미국 유학 시기 및 투옥된 시기 제외[7] 겉으로는 하나의 회사를 가장했으나, 참조 주석 68번을 보면, 조선어학회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8] 다만, 박창서(朴彰緖)와 최순주 등은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행적이 있는 인물들이다.[9]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불구속으로 심문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며, 공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10] 1939년 당시 허정(당시 허성수)가 이사지배인으로 있었으며, 1941년에는 허정이 상무이사에, 조병옥이 이사 직임을 맡고 있었다.[11] 당시 허정(허성수)는 상무이사로 있었다.[12] 당시 신흥우·유억겸·윤치영·안재홍·이갑성·오화영·정춘수·최두선·김준연·최현배·허정·윤치호·이기붕·서민호·신석구·장덕수·이강래 등 총 55명이 검거되었으며, 불기소처분을 받은 백남칠(白南七)을 제외한 54명은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2400원의 국방헌금을 지불하고서야 기소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위 사람들 중 신흥우·유억겸·윤치영·정춘수·장덕수 등은 이후 실질적으로 변절한다.[13] 原子力院. 1959년 1월 발족한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담당 정부 기관으로 1967년 3월에 원자력청으로 개편되었으나, 1973년 폐지되고 과학기술처 산하 원자력국으로 개편되었다.위키백과 이후 2011년 10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원자력안전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으나, 폐지되었고 관련 인력 및 그 업무는 원자력안전위원회로 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