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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11월 16일 |
충청도 충주목 (현 충청북도 충주시)[1] | |
사망 | 1967년 2월 19일 (향년 75세) |
서울특별시 | |
본관 | 광주 이씨 |
자 | 화여(和汝) |
호 | 추정(秋汀) |
학력 | 공립안성보통학교 (4학년 / 중퇴)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 / 중퇴) |
가족 | 배우자 안상익, 차남 이용익 손녀 이희영[2]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2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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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어학자이다.2. 생애
1891년 11월 16일 충청도 충주목(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아버지 이병무와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3월 공립안성보통학교[3] 4학년을 중퇴한 뒤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본적을 두었으며, 누상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에 살기도 했다.1910년 12월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중퇴하고 1911년 중화민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부터 3년간 지린성 옌지다오(延吉道) 옌지현(延吉縣)[4]에서 대종교 초대 교주 나철과 함께, 그리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이상설과 함께 각각 조선 동포들에게 한글 순회교육을 실시하였다. 1915년 4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일본 제국 고등사범학교[5] 본과에서 수학하는 한편, 마찬가지로 이주 동포에 대한 한글 순회교육을 실시하여 문화운동을 통해 한민족의 언어와 글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미 일본 제국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고, 이로써 귀국 후에도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자주 구금되었다.
귀국 후 개성정화여자보통학교[6]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뒤 1920년 10월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7]로 옮겨 6년간 근무하다가 1927년 3월 사직하였다. 1927년 4월에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8] 교원으로 취임하였다. 이 동안 한글 계몽에 힘쓰고 방언을 수집하는 등 한글의 문법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1927년 12월 20일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1932년에는 《한글》 창간호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황해도 신천군·안악군, 경기도 개성부 등지를 순회하며 한글강연회와 강습회의 강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3년 3월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임용되어 재단법인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5년 1월 1일 조선어학회 산하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표준어사정위원(査定委員)으로 선출되어 3년여간의 표준어사정을 통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확정하는데 힘썼다. 1936년 4월에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임용되었다.
1937년 신흥우 등이 조직한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12월 사상범 보호관찰대상자로 선정되어 매달 남산 순화 교육대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고, 1938년 6월에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고, 9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때 일본 제국 경찰의 강요로 교사 사직서를 썼으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배려해주어 임시 습자(習字) 강사로 출근하기도 하였다.
1942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게 되자 간사(幹事)로 선임되어 모든 준비와 실무를 추진하였는데, 사전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1개월 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43년 9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현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 박달재 근처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다시 상경하여 배화여자고등학교 교장, 경복고등학교 교감 등으로 봉직하다 정년퇴직하였다. 이후에는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다.
1956년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로부터 교육 공로 표창을 수훈하였고, 1967년 2월 19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