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01 16:42:18

노종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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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백운서(白雲瑞), 김동우(金東宇), 양동오(楊東五)
출생 1887년 9월 8일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판팔리
(현 황해남도 안악군 00리)
사망 1939년 6월(향년 52세)
해주형무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51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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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노종균은 1894년 7월 18일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판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동아일보 안악지국 판매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특파원 홍완기가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안악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오면직과 함께 그를 구출하려다가 실패하고 당국의 추적을 받자 그해 11월 20일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1922년 1월 13일 김구의 지시에 따라 오면직과 함께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임시정부 비서장 김립을 살해했다. 그러나 김립은 단순히 자금을 운반했을 뿐이었고, 이 일로 공산주의 계열과 임시정부 간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고 말았으며 소련 역시 임시정부를 더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1922년 10월, 김구, 신규식 등이 독립군 등 무력기반 확충을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발기총회를 개최하자, 노종균은 여기에 참여해 특별회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한국노병회의 중국 각급 군사학교로의 파견 수학계획에 따라 북경학병단(北京學兵團)으로 파견되어 1년 간 군사훈련교육을 이수한 뒤, 1924년 1월 상해로 돌아오다가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몇달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출옥 후 1926년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장(義警隊長) 및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간부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좌파 계열의 도전을 견제하며 김구를 후원했다. 이후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이봉창의 거사 등 특무공작 활동에 관여했으며, 1932년 외무장 조소앙과 함께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이라는 별개의 특무기구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김구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933년 봄, 김구는 중국 난징의 중국육군군관학교(中國陸軍軍官學校)에서 장제스와 회합하여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33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던 노종균은 김구의 지시에 따라 그해 11월 군관학교 입교희망생인 유형석 등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 2월 중국 하남성 낙양에 소재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내에 한인특별반이 조직되자, 그해 2월 한인특별반의 교육간부로 보호계를 맡아 학생들을 관장하는 한편 입교희망생을 계속 모집했다. 또한 그해 12월 하순에는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하여 중대장 및 조사부장에 선임되어 오면직, 안공근 등 한인애국단 간부들과 함께 국제정세 및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정식교육을 실시하는 등 항일 특무활동 공작원을 양성하는 데 실질적 담당자 역할을 수행했다.

1935년 2월 김구의 주도로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가 설치되자, 수용 대원들의 감독 책임을 맡아 군관학교 입교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실시했다. 그후 1935년 12월 한인애국단원인 김창근(金昌根)에게 상해 일본총영사관 등정(藤井) 경부를 암살 처단할 것을 지시했으며, 오면직과 함께 난징에서 수차례 회합을 갖고 1936년 1월 김창근 등을 가입시켰으며, 그해 7월 비밀결사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고 중국 상해를 근거로 군자금 모집을 결의했다. 또한 그해 8월에 난징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38년 1월 상하이에서 친일파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저격해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얼마 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고 황해도 해주형무소에서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1939년 6월에 옥사했다. 사후 노종균 독립투사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노종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