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2:36:23

이재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인 전 법무부 공무원에 대한 내용은 이재유(1966)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이재유화질좋은.png
1933년 1월 19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박윤식(朴允植)·강성칠(姜成七)·김소수(金素洙)
윤기순(尹基淳)·김소성(金小成)·신용수(申龍洙)
본관 함평 이씨[1]
출생 1905년[2]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해면 선소리[3]
(現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
사망 1944년 10월 26일 (향년 39세)
청주보호교도소
묘소 함경남도 혜산군 별동면 선소리(매장 당시)[4]
(現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
직업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학력 보성고등보통학교 (1학년 / 중퇴)
송도고등보통학교 (4학년 / 제적)
니혼대학 전문부 (1학년 / 제적)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1.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2.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3.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4.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5.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6.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7.jpg
파일:attachment/이재유/이재유8.jpg
이재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5]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청소년기2.2. 일본에서의 생활2.3. 운동 방침의 모색2.4. 경성트로이카
2.4.1. 트로이카란 무엇인가?2.4.2. 제1기(1932.12.22~1934.1.22)2.4.3. 제2기(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 1934.4.14~1935.1.12)2.4.4. 제3기(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1935.1.12~1936.12.25)
3. 사후 평가4. 관련 자료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라고 불린다.#

2. 생애

2.1. 유년기·청소년기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해면 선소리(현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의 화전민 가정에서 아버지 이강범(李玒範, 1887. 11. 4 ~ 1924. 11. 26)[6]과 어머니 전주 이씨(1882. 5. 13 ~ 1910. 6. 4)[7]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6살이 되던 1910년 6월 4일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후 아버지는 후실로 밀양 박씨(1897. 5. 15 ~ )[8]를 들여 슬하에 이재록(李載祿, 1916. 12. 14 ~ ?), 이재표(李載杓, 1923. 5. 17 ~ ) 등 두 명의 아들을 더 두었다.[9]

아버지가 계모를 맞은 이후 이재유는 주로 할머니 선산 김씨(1861. 11. 4 ~ ?)[10]에게서 길러졌다. 이재유에겐 가정애가 없었으며 가족에 대한 애착심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정에 대한 특별한 불만도 없었으며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1916년까지 조부 이계남(李啓南, 1865. 4. 4 ~ ?)[11] 밑에서 한문을,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이경범(李瓊範, 1890. 2. 16 ~ ?)[12]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이후 고향 삼수군의 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보결 입학하였으나 이재유 자신의 표현으로 "과목이 너무 저급하고 배울 것이 없어서" 4개월 정도 다니다가 그만둔 뒤 독학했다.

이재유의 사상의 원초에는 고향에서의 체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독립사상이 이재유에게도 전해졌을 무렵, 삼수군 서기(書記)로 근무하던 박기춘(朴起春)[13]이라는 사람이 1921년 3월 3일 독립운동과 관계하여 사회운동에 종사한다는 혐의를 받아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된 뒤 총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재유의 집에서 4리 정도 떨어진 곳에 시체가 버려졌다. 누구든지 시체에 손을 댄 자는 동류로서 간주한다는 경찰의 방침에 의해 계속 버려져 있어 이재유는 그것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일제에 대한 이재유의 반항심은 이때부터 싹텄다.

1922년 무렵 "심부름 가는 돈을 노자삼아 그대로 서울로 올라" 왔다. 1924년 4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시험을 쳐서 합격했으나 6월에 월납금 미납과 부친의 사망으로 자퇴했다. 이듬해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1925년 9월 이재유를 중심으로 7명의 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동맹휴학을 결행했다. 주당 4시간의 종교교육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자는 요구를 내걸었다. 학교는 이들의 요구조건이 정당하였기 때문에 퇴학처분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급생 몇 명이 '기독교 학교의 교사가 술을 마셨다'며 일부 교사들을 매도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이유로 학교는 이재유를 포함한 7명의 학생들에게 1926년 11월 5일자로 퇴학 처분을 했다.

이재유는 "좌익서적만 읽고 학교의 수업은 듣지 않았다"(이재유의 표현). 그런데도 학교성적은 뛰어났으며 급우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2.2. 일본에서의 생활

1926년 12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 카토츠카(下戶塚)에 거주하면서 니혼대학 전문부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퇴학하고 막일을 했다. 국민신문 출장소 배달부로 일하면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인 김한경으로부터 공산주의 지도교양을 받았다. 1927년 봄 도쿄대에서 신인회 주최로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야학 노동학교가 설립되자 여기 등록하여 수개월 배웠다. 이후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계열의 합법적 노동조합인 동경합동노동조합(東京合同勞動組合), 전국무산자평의회 등 좌익단체에 가입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나중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가입하여 조직선전부원으로 활동하면서 동경조선노동조합 북부지회 중앙위원, 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동경지회 등의 위원으로서 조선인 노동단체와 사상단체 등의 합법 단체에서 활약했다.

동시에 1927년 후반기 이래 비합법운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11월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이 되었으며, 1928년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여 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5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전일본 무산청년동맹 해산명령에 대한 항의문을 내무대신에게 발송하고 각지의 운동자들에게 배달하려고 인쇄하다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6월 요시찰인으로 편입되었다. 3년 동안의 도쿄생활에서 무려 70여 차례나 검속될 정도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경성부로 압송되었고,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미결구류 500일 통산)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2년 7월 7일 경성형무소로 이감됐다.

내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이 판결이 언도되고부터이다. 전과자의 전도는 암담한 것이다. 그것보다도 공산주의자의 일생을 마치고 혁명가로서의 미명을 후세에 남기려고 결심하였다.
이재유

2.3. 운동 방침의 모색

형무소 내에서 《유물사관》, 《자본론》등의 연구를 한 결과 현재의 사회와 대조하여 공산주의가 현 사회에 적합하다고 확신하여 출옥 후는 반드시 운동할 결심에 이르렀다.
이재유


이재유는 "당이 소부르주아적 인텔리겐치아에 의해 구성되어 있던 것, 노동자와의 결합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영구적 위기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는 12월 테제에 동의했다. 이재유는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은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적 이론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를 가지지 않는 바의 부동성, 무원칙성, 무규율적인 봉건시대의 전통인 파벌성에 의하여 여전히 깊이 침윤되어 있는 인텔리겐치아의 운동"이라고 비판했는데 이러한 비판은 화요파, 서울파, 상해파는 물론이고 이재유가 속했다고 할 수 있는 엠엘파도 면제되지 않았다. 따라서 파벌 투쟁의 결과는 당(해산 당시 조선공산당이 엠엘파)을 해체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이재유는 당 해제 후 1929년에서 33년까지의 운동을 두 시기로 구분했다. 첫 번째 시기는 다음과 같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은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진출한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비약적 분수령이었다. 반면 동시기 서울상해파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화요파 김단야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양명 한해 고광수의 엠엘파 운동은 모두 파벌을 청산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코민테른의 직접적 지시로 운동을 한 김단야 측의 경우 "국제적 지령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한 모스크바 공산대학 유학생단의 부동적 조직"이라고 비판했다.

두번째 시기는 그에 따르면 "대중적 기세에 눌려 파벌부대는 공장 내의 활동 등등을 주장"하며 노동대중을 지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함남의 태평양노동조합 운동, 상해에서 김단야 지도 하 김형선 김명시 등 단일재건위원회 사건, 엠엘계 고경흠 이종림 강진 등 공산주의자협의회가 그것이다. 이재유는 이들도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첫 유형의 오류는 국제공산당의 선과 연락이 있다고 하여 대중과 더불어 활동하지 않는 것, 다른 유형의 오류는 대중을 많이 얻었다고 하여 국제적 연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것만으로 당이 확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공산주의자협의회가 후자의 비판을 들었다).

이재유는 노동자와 농민은 혁명적 대중이라고 강조했다. 혁명적인 노동대중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 운동자의 임무라고 봤다.

한편 이재유도 경성지역 다른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벨기에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졌는데, 1931년 경성제대 반제동맹과 1932년에 가장 활발한 운동을 보였던 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이관술이 활동한 조직)의 영향을 이재유도 받았다. 이재유는 이러한 운동을 노동대중의 혁명성으로 인해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고질병인 파벌이 극복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상부 조직을 먼저 만들어서는 안 되고 운동은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등 방침을 세웠다. 헛되이 당조직을 서둘러서는 안 되고 공장이나 학교에서 일상 투쟁을 바탕으로 동지를 얻은 후 비로소 당을 조직한다는 것이다.

2.4. 경성트로이카

2.4.1. 트로이카란 무엇인가?

이재유가 보기에 종래의 당재건운동은 대중적 기초 없이 전국적 조직을 가지고 당을 먼저 만든 다음 대중을 얻으려 하였기에 전위와 노동대중이 분리되는 폐단이 있었다. 이재유는 전위가 노동자가 되어 노동대중 속에 파고 들어 가 개인적으로 동지를 얻어 대중적 기반을 마련한 다음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선도 없고 누가 권력자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동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을 얻어 상당한 그룹이 결성된 때에 비로소 조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종래와 같이 사람을 지도한다거나 지도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것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제1보를 내딛어 스스로 최하층의 노동자들과 교유하면서 대중 층에서 동지를 얻어 서서히 상부조직으로 전개하려고 한 것이 나의 근본방침이었다.
이재유


트로이카는 이재유 그룹 1기 조직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트로이카는 운동 방침으로서, 1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재유 운동의 전체에 적용됐다.

트로이카는 정식 조직을 만들기 전 노동자농민의 의식을 고양하고 공동투쟁을 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적 계기적 조직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이후 제3기에서 중심인물인 이관술이 당재건조직(이것이 정식 조직)에 속하고 운동자로서 아직 한계가 있던 서구원이 경성트로이카(정식 조직을 만들기 전 일종의 예비 조직)에 소속되어 이재유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트로이카가 지닌 위와 같은 성격 때문이다.

다시 쉽게 설명하면, 이재유는 전국 조직 먼저 만든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 봤기 때문에 정식 조직을 만들지 않으려 했지만 공동투쟁을 위해서는 아예 아무 연결선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정식 조직을 만들기 전 예비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예비 조직 이름을 트로이카라고 지은 것은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자는 의미이다.

트로이카 조직에서도 지도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고 이재유의 주장에 따르면 지도하는 동시에 지도를 받는다. 지도자는 개별적으로 각 성원들과 접촉하여 각각의 부문운동에 관하여 개별적으로 협의한다.

트로이카 조직은 운동자들 사이에 종적 연결만 보장되고 횡적 연결이 불가능한 철저한 점조직 방식이다. 생명을 내건 비합법운동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는 하부 운동자를 일일이 접촉했다. 지도자와 조직을 쉽게 노출시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각 개인은 두 사람씩만 만나는 방식을 택했다. 1기 최고 트로이카가 되는 이재유-안병춘-변홍대-이현상-최소복으로 예를 들면 이재유는 안병춘과 이현상과만 만나 협의하고 안병춘은 변홍대에, 이현상은 최소복에게 각기 전달하여 의견을 들은 다음 결정했다. 2기와 3기 운동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더욱 강화되어 만나는 사람의 이름이나 신원도 밝히지 않고 만남이 이루어졌다.

최고 조직 아래에 각각의 하부 조직을 설정하고 다시 그 각각의 하부 조직 아래에 각기 조직들을 설정하는데 이들 각각의 조직을 트로이카라고 일컫는다.

다시 쉽게 설명하면, 트로이카는 엄밀하게는 전체 조직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몇 명씩으로 구성된 각각의 단위를 일컫는 것이다. 최상부 트로이카 밑에 트로이카들이 있고 그 아래 트로이카들 밑에 또다른 트로이카들이 있다. 보안을 위해 위-아래 트로이카끼리만 연락할 수 있고 횡적 연결은 금지.

2.4.2. 제1기(1932.12.22~1934.1.22)

이재유는 출감 후 연건동 35번지 김용식에 집에 사는 이인행의 방에 기숙했다. 이재유의 출감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그를 방문하였다. 옥중에서 만났다가 먼저 출소하여 출감일에 마중나왔던 이성출이 그를 자주 방문하였으며 이재유는 이성출을 통하여 변홍대를 소개받았다. 또한 고향 친구 안종호가 방문했다. 형무소에서 함께 복역하여 알고 있었던 김삼룡이 1933년 2월 방문했다. 이재유는 많은 운동자와 만났다. 안병춘, 이순금, 서창, 유진희, 남만희, 정백, 정의식, 이동천, 김칠성, 이송규, 양하석, 황태성, 정칠성, 유순희 등. 이재유는 안병춘의 친구들을 교양했고 안병춘은 용산공작소 영등포 공장 직공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33년 5월 이재유와 안병춘의 두 사람이 최초의 트로이카 성원이 되었다. 두 사람은 변홍대를 끌어들였다. 6월에 형무소에서 알고 지내던 이현상을 만나 끌어들이고 이현상을 통해 최소복을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이재유-안병춘-변홍대-이현상-최소복의 다섯 사람에 의해 상부 트로이카가 결성되었다. 성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안병춘, 이현상, 변홍대가 노동운동을 최소복이 학생운동을 맡고 이재유가 전체를 총괄하기로 했다.

한편 이재유는 본격적으로 비합법운동에 진출하기 위해 1933년 5월 이인행과 함께 동숭동 29번지로 주소를 옮겼다. 7월에 김형선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신설동에 있는 빈민촌으로 이주했다. 지하로 잠복한 것이다.

이재유는 전국적이라기보다는 일정 지역(이재유의 경우에는 경성)을 기초로, 파업이나 맹휴 등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 조직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운동방침을 세웠다.

1. 모든 대중투쟁은 반전•반파쇼•반제 투쟁으로 전화하자!
2. 섹트와 파벌 청산은 대중의 실천투쟁의 가운데에서!
3. 당의 저수지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산업별 원칙으로!
4. 당재건은 대경영 세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재건에서!
5. 선전선동 조직 지도자인 전국적 정치신문을 창간하자!
이재유가 세운 5대 슬로건


1) 자신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 공장이나 경영 내에서의 기초 공작 운동
2) 다른 독자적인 볼셰비키적 활동선과의 결합
3) 국제선과의 연락의 정립
3대 운동 방침


위와 같이 노동운동은 산별로 조직한다는 것이 방침이었기 때문에 안병춘은 금속 부문을 이현상은 섬유 부문을 변홍대가 화학 부문을 분담하기로 했다.

학생 부문은 최소복은 남자 중등학교를 담당했으며, 여자 중등학교 책임자는 1933년 이순금의 소개로 연결된 이경선이 되었다. 대학 담당은 김월옥을 통해 연결된 정태식이 되었다. 이경선과 정태식은 위에서 언급한 5인의 최고 트로이카와는 별개의 이재유-이경선-정태식 트로이카를 만들었다.

이재유 외 다른 성원도 또다른 트로이카를 만들면서 조직을 늘려 나갔다.[14] 그렇게 얻은 성원으로 다음 파업들을 일으켰다.
<rowcolor=#331B3F>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파업
<rowcolor=#ACC7B4> 공장 일시 참여자 배후 활동가 결과
편창제사 1933.6.1 364명의 여공 이재유, 김형선 운동선의 양하석 패배
중앙상공회사(일명 별표고무) 1933.8.17 150명의 여공, 유종희, 권오상 이순금, 이현상, 이재유 승리(청부제도 부활)
소화제사 1933.8.22 249명의 여공, 유순희 이순금,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일부 승리(교부장 퇴직/이재유 그룹 소속이었던 유해길 해고)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회사 1933.8. 40명의 여공,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승리(임금인하 취소)
조선견직주식회사 1933.9.7 20명의 여공, 김복금, 이정숙, 이순금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승리(불명)
서울고무회사 1933.9.19 120명의 여공,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유순희, 이종희, 권오상 이순금,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패배(연속적 파업으로 감시가 강화된 탓에 수모자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등 6명과 권오상 검거)
종연방적회사 경성제사공장 1933.9.21 500명의 여공, 이병희, 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이현상, 변홍대, 남만희, 안승락(기금 모집) 패배(이종희, 이병희, 이효정, 변홍대, 허마리아, 권오상 등이 검거되어 이재유는 빈민촌 아지트에서 탈출해야 했으며 이듬해 1934.1 이재유가 검거되는 계기가 됨.)
용상공작소 영등포 공장 1933.9.21 100명의 직공, 안병춘, 안삼원, 이순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전 직공을 망라하는 대회를 개최하는 이례적인 성과가 있었다.(보통은 주모자가 검거되면 불가능.) 안병춘, 안심원 검거되어 영등포 운동 불가능해짐.
<rowcolor=#331B3F> 평가 1933년 부산의 고무 제네스트 등 수개월에 걸쳐 전국에서 연속적 파업이 일어났는데, 서로에게 영향받은 파업들이었다. 식민지 시기 전체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투쟁 사례.
<rowcolor=#331B3F>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동맹휴업
<rowcolor=#ACC7B4> 학교 일시 재학 성원 배후 성원 결과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3.5. 김재선, 김영선 등 이경선, 최소복, 이재유, 변홍대, 이현상 승리(요구조건 승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교 1933.6. 최소복, 이현상, 변홍대 승리(요구조건 승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933.8.22 신진순, 김주원 등 이경선 실패
중앙고등보통학교 1933.11. 한동정 최소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실패(한동정 퇴학)
배제고등보통학교 1933.12. 변우식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실패(변우식 등 검거)
경성여자상업학교 1933.12 심계월, 이분성, 차소영, 박온 정태식, 최소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진정됨

1930년대 초에는 김형선 그룹과 권영태 그룹 등 국제선의 운동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는데, 상해에서 잡지 《코뮤니스트》를 만들던 국제선 김단야 박헌영의 노선인 김형선이 이재유와 접촉한다.

변홍대의 주선으로 이재유와 접촉한 국제선 김형선은 이재유에게 함흥에 가서 운동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이재유는 일정한 방침을 줄 것을 요구했다. 이재유가 말하는 방침이란 이재유가 감옥에서 운동 방법 모색한 것 같은 것이다. 김형선은 자신만의 운동방침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했고 국제선의 권위만을 빌어 답했다. 김형선은 상해 국제당의 김단야 박헌영이 발간한 《코뮤니스트》등을 배포해 운동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재유는 《코뮤니스트》는 상해에서 발행된다면 2~3개월 걸려 조선에 도착할 때는 이미 구신문으로 되고 만다, 상해에서 발간하는 출판물 독자를 모집하라는 식의 운동방침은 있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재유는 당시 당재건운동에서 나타나는 해외중심주의와 국제노선에 대한 맹목적 추종, 운동방침 없이 국제선의 권위로 운동자들 앞에 군림하려는 태도, 대중적 기반 없이 소수의 운동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을 결성하려는 방식 등을 비판한 것이다. 대답이 궁해진 김형선은 이재유가 함남행을 서두를 필요가 없으며 이후 함남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김형선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동의 필요에 따라 갈 것이라는 이재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후 한 차례 더 만나 김형선은 출판기능을 가진 투사 소개를 부탁하고 이재유는 극동반제대회에 대한 김형선 그룹의 의견을 물었다. 이 만남을 끝으로 김형선이 검거되어 논의는 끝났다. 나중에 이재유는 검거 뒤 검사와 예심판사에게 김형선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한편 조직론은 달랐지만 상당수 이재유 그룹 활동가는 권영태 그룹에도 소속되어 있었고 김형선 그룹과 겹치기도 했다.

2.4.3. 제2기(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 1934.4.14~1935.1.12)

하지만 상술했듯이 이재유가 검거되어 제1기의 운동은 끝난다. 앞 파업 표에서 보았듯 1933년 9월 종연방직 파업 이후 대대적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남만희가 경찰에 검거되어 이재유와의 관계가 드러나고 서대문경찰서가 이재유를 수배했다. 이재유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2월 22일 이순금의 지원을 받아 내수동 정진근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1934년 1월 18일까지 은신했다. 같은 시기인 1933년 12월 중순에 이현상이 경찰에 검거되고 취조 결과 이재유에 대한 자금진술을 진술했다. 이때가 1933년 12월 25일 무렵으로 이것이 이재유가 검거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재유는 1934년 18일 익선동 이순금의 집에 들렸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경찰은 그가 이재유인 줄 모르고 있었다. 이재유는 용변을 본다고 하면서 시간을 끌어 천정의 창문을 깨고 탈출했다. 이재유는 이순금과 함께 내수동의 집으로 잠복했다. 이순금이 20일 밤 10시에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이재유는 간발의 차로 서대문 형사대의 습격에서 벗어난다. 안병춘의 집으로 갔지만 22일에 안병춘이 체포되었다. 이재유는 중림동 전차 정거장에서 내리는 형사대를 보고 방향을 바꿨는데 형사대는 이재유가 방향을 바꾼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이재유일 것이라 의심하여 추격하였고 결국 봉래교 위에서 검거되었다.

이재유가 검거될 때 이미 많은 운동자들이 경찰에 잡혀와 있었는데 이재유는 그 수를 서울에서 200여 명, 강원도에서 160여 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경찰은 이재유가 상해의 권오훈 등과 연락하여 전국적 조직을 건설하려 했다는 혐의를 두고 자백을 받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런데 이재유의 트로이카 이론을 이해했다면 상해 지시로 '전국적 조직'을 만들려 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경찰은 운동자들의 통방을 막기 위해 이재유를 유치장이 아니라 고등계 사무실 2층 분실에 두고 장기 취조하였다. 3월 중순의 비 오는 날 밤 이재유는 간수가 조는 틈을 타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밖으로 뛰었다.

비틀거리는 몸에 힘을 주어 광화문 쪽을 향해서 달음질쳐 정동 입구까지 이르니 벌써 경관들의 추적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정동 골목으로 들어서서 마침 지나가는 장작 구루마 뒤를 밀어주며 따라 가노라니 추적이 급한지라 어떤 담을 뛰어 넘었다.
금강산인, 민족해방투쟁의 영웅적 투사 이재유 탈출기, 1946


이재유는 어떤 담을 뛰어 넘고 고문 후유증으로 혼절하였다. 그런데 그가 담을 넘고 나서 혼절한 곳은 미국 영사관이었다. 미국 영사관은 발견 즉시 이재유를 서대문형무소에 인도했다. 이렇게 이재유의 1차 탈출은 실패했다.

다시 검거된 후 경찰은 "살려는 생각도 없이 오히려 자살하려고 생각"할 정도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이재유는 형사실에서 3층의 훈시실로 옮겨져 주야 구별 없이 두 사람의 순사에 의해 감시당하였다. "손에 자동식 수갑을 채우고 밤에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붙들어 매어 수족을 묶인 몸이 되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방울을 차서 몸을 움직이면 소리가 나서 간수의 졸음도 깨우도록 하여 두고, 문이란 문은 다 열쇠를 굳게 채운 뒤 그 열쇠는 요시노 고등계 주임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다.

결론적으로 1934년 4월 13일 밤 이재유는 이 상태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가? 4월 1일 이재유의 손에 채웠던 수갑을 풀어주었다. 이때부터 이재유는 기회를 보고 있다가 밥알을 짓이겨 족쇄 안에 넣어 형을 뜬 다음 우유통 뚜껑을 구부려 열쇠를 만들어 족쇄를 열었다. 입고 있는 옷의 안감을 도려내어 변장용 마스크도 만들었다.

이재유가 어떻게 감시 순사를 멀리했는지에 대해 담당 검사의 기록과 해방 이후 필명 금강산인이 쓴 <이재유 탈출기>가 있다.

검사에 따르면, 4월 13일 저녁을 일부러 남긴 이재유는 이를 같은 방에 있던 이질 환자 김찬규에게 주었다. 김찬규는 이를 먹고 밤 12시 경부터 김찬규는 순사에게 변소에 가고 싶다고 애원하였다. 거듭되는 애원에 할 수 없이 순사는 다음날 새벽 2시에 그를 데리고 변소에 간다. 이때 이재유는 재빨리 족쇄를 풀고 마스크를 쓴 다음 침대 밑의 겉옷을 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다음 당당하게 정문을 나선다. 문 앞에서 다른 순사가 변장한 그를 형사로 알았던지 "이제 퇴근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자 그렇다고 답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이재유는 겉옷의 깃 안에 도주용 돈을 감추어 두고 있었기에 택시비를 낼 수 있었다. 택시를 몇 번 바꿔 타고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집으로 가서 은신 생활에 들어갔다.

금강산인에 따르면 이재유는 모리타라는 일본 순사의 도움에 의해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리타는 이재유의 열정과 지성, 인간성에 감복하였다. 이재유가 족쇄를 풀고 창문을 넘어 탈출한 후 모리타는 약 30분 후에야 이 사실을 보고하고 비상경계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곧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제2강좌 교수이자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의 경성제국대학 관사 다다미 마룻바닥 밑에서 수 개월(정확히는 38일)간 은신했으며, 이 도움으로 이재유는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나 무사히 도주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일본 제국 경찰은 발칵 뒤집어졌으며, 미야케 교수는 이 사건으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석방 후 귀국해서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다시 교수직을 맡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미야케 교수가 이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재유의 행방을 묻는 고문 중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잡혀서 고문당하면서 '정신이 맑아진 후'에 진술서를 쓰겠다고 하여 그 사이 이재유가 도망칠 시간을 벌었던 것.[15]

이후 이재유는 조선의 절대 독립 및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재건그룹을 재차 조직하고 끊임없이 조선공산당 재건 및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조직의 정식 명칙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이며 상당한 조직적 성과를 거둔다. 경성재건그룹의 목표는 연말연시를 기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경성재건그룹은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여러 종류의 팸플릿을 발간해 경성과 인천 지역에 배포한다. 그러나 석 달 만인 1935년 1월 검거 선풍을 맞는다.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했지만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이재유는 박영출에게 박진홍을 구출해달라고 하다가 박영출까지 잡히게 한다. 이재유 본인은 유순희, 이종희 등을 구출한다.

이재유와 이관술이 유순희, 이종희 등 동지들을 구출하고 잠적시키는 과정은 인력거를 6차례나 바꿔 탈 정도의 숨가쁜 추격전이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을 잠적시키고 이재유와 이관술은 비밀 서류들을 땅에 묻어 두고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경기도 경계를 넘은 두 사람은 강원도 수성을 지나 홍천과 춘천까지 도보로 배회한다. 두 사람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맞는 복장으로 변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구실을 짜냈다. 이 때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변장법을 알려주었다.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식당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밥을 사먹는가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드러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두 사람은 수해민 형제로 위장하고 버려진 임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는데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한 기자에 따르면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장정 둘이 지냈을까 놀랄 만큼 협착했다고 한다.
파일:이관술이재유아지트.png
이재유와 이관술이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2.4.4. 제3기(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1935.1.12~1936.12.25)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이들은 조직명을 경성재건그룹에서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이라고 바꾸었다. 적기 제1호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명의로 1936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상당한 명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적기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이 현대적이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16].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17].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이재유와 이관술이 만든 《적기》의 슬로건[18]


식민지 조선의 노동환경은 다음과 같이 매우 열악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19]

* <적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받으면 이전에 읽은 사람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모든 면을 쓸어 자기 지문만 찍어놓을 것
  • 읽은 후에는 반드시 소각하고 적기를 들고 타인을 방문하거나 배회, 산책하지 않도록 할 것

<적기>의 보안 수칙


이들은 적기 제2호를 11월, 제3호를 12월에 완성했고 모두 두꺼운 분량이었다. 적기는 여러 운동가와 신문기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왔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관술은 1936년 12월 24일까지 적기 인쇄를 계속했다.

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재유는 잡혔고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파일:이재유이관술악수로이별.jpg
1937.4.30 <매일신보> 이재유와 이관술…악수로 이별에 / 문제되는 이관술 행방

이재유가 체포당한 곳은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경춘선 신공덕역 근처이다. 이재유는 체포될 때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이후 이재유는 24시간 동안 고문을 버티며 아지트 위치를 말하지 않아 이관술이 도주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주었다.

이재유를 검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형사만 60여 명. 어찌나 기뻤던지 이들은 잠복하면서 했던 복장을 갈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파일:/image/028/2005/09/08/02686707_20050909.jpg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추격개시 이래 4년여, 원흉 이재유 드디어 잡혀 묶이다
일체의 국제 루트와의 절연, 붉은 독재자를 꿈꾼 암약
이재유 체포를 다뤘던 경성일보 기사. 당시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다뤘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40331095706726.jpg
이재유 체포 당시 일본 제국 경찰들이 기념사진 찍은 모습. 앞줄 왼쪽에서 2번째로 두 손을 앞에 모은 인물이 체포된 이재유이다('X'자 표시). 일본 형사들은 체포 성공을 기념한다고 변장한 복장 그대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재유를 체포했던 담당 경찰서였던 당시 서대문경찰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관제언론이었던 매일신보에서 하루 날짜 지면 전체가 '이재유 특집'으로 도배되었을 정도였다.
1937년 4월 30일자 1면
1937년 4월 30일자 2면
1937년 4월 30일자 3면
1937년 4월 30일자 4면

그는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다 채워졌음에도 이재유는 비전향자라는 이유로 출옥하지 못했고, 전향을 끝까지 거부하여 너무나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20]

이렇게 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청주보호교도소로[21]옮겨져 지내게 되고,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끝내 광복 10개월 전인 1944년 10월 26일 옥사했다. 묘는 고향인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에 있다.

이재유가 죽음을 앞둔 모습을 독립운동가 이병희가 봤다. 그녀는 남자 옥사 앞을 지나가다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수용실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봤다. 그런데 안면이 전혀 없는 그가 눈짓을 하며 “병희야, 나 이재유다”라고 하더란다. “이재유가 왜 그렇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악랄한 고문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며 "날 열 번은 죽였다가 살려놨다"고 했다고 한다. 동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변형될 때까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단 것.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 핏물이 고일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서도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 이름을 부르며 격려했다"는 증언도 있다.

3. 사후 평가

당대 공산주의자 중 거물급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죽하면 일본제국 경찰이 이재유를 검거하고 "조선 내 사회주의 운동계는 이제 궤멸되었다"하고 한숨 돌릴 정도였다. 그만큼 이재유가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음에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묻혔다.

가족으로는 아내 박진홍(朴鎭洪)[22]이 있었는데, 박진홍도 이재유와 같이 노동운동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나중에 풀려나 박진홍은 1944년 김태준(金台俊)[23]과 함께 중국 옌안으로 망명하여 결혼한다. 부부로 위장해 함께 살았던 이순금도 이재유를 연모했었다고 했는데, 이재유는 박진홍, 이순금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파일:박진홍(1914).jpg
이재유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박진홍
좌측 상단부터 각각 1932년 3월 24일, 서대문형무소 / 1934년 5월 25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
/ 1935년 4월 11일, 서대문형무소 / 1938년 4월 8일,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이재유의 자손들은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도 못하고 거의 존재감없이 묻혀져 갔었다. 박진홍이 감옥에서 낳은 아들 이철한(李鐵恨)이 있었지만 기형이었고 3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24]

그러다가 2006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이재유는 기존의 소련 코민테른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른 국제주의 운동자들의 운동 방식을 거부하고, 구체적 삶에 뿌리박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실천운동을 주장해왔었다. 그는 국제주의자들이 경시 내지는 무시하였던 민족문제를 운동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로 평가받는다.

1946년 4월 쓴 금강산인이라는 필자의 이재유에 대한 글을 쓴다.

이 기록을 쓰자면 이관술 동무와 박진홍 동무의 많은 교시가 있어야 될 것인데 지금 두 동무가 퍽 분망한 중이라 친히 그 지시를 받을 기회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앞으로 두 동무의 지시 아래 이재유 동무의 전기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바이다.

4. 관련 자료

○ 김경일, 『이재유 나의시대 나의혁명: 1930년대 서울의 혁명운동』(푸른역사, 2007).

5. 대중매체

  •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에 등장한다.
  • 야인시대에도 등장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러 면에서 고증이 개판인데, 우선 이재유가 미야케 교수 집에 토굴 같은 것을 만들고 숨어있었던 건 사실이나, 미야케 교수가 모종의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을 견디며 증언거부를 하는 사이에 이재유가 도망가버리고 나서야 저런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 드라마처럼 미와 패거리에게 실실 쪼개며 여유있게 시치미 떼고 오리발 내밀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백발의 노교수로 나오면서 미와에게 늙은이 소리를 듣지만 실제로는 미와보다 15세 정도 어린 30대 중반의 젊은 교수였다.
  • KBS 1TV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2019년 7월 21일 방송에 언급되었다. 1934년 서대문경찰서 탈출 스토리를 시작점으로 해서 이재유의 삶과 사상을 다루었다. 중요한 점은 해당 방송의 제목인데, '사라진 남자, 1급 사상범 이재유'.


[1] 함성군파(咸城君派) 29세 재(載) 항렬.[2]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함평 이씨 집성촌이다.[4] 1914년 별해면과 하동면, 상동면을 병합해 별동면을 신설하였으며 1942년 혜산군이 신설되면서 별동면이 혜산군에 편입되었다.[5]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이재유#[6] 자는 인화(仁和).[7] 이종운(李鍾運)의 딸이다.[8] 박주병(朴柱秉)의 딸이다.[9] 새어머니인 밀양 박씨는 1897년 5월 15일생으로 이재유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10] 김득상(金得相)의 딸이다.[11] 자는 성극(星極).[12] 자는 형화(亨和).[13] 조선총독부 직원록 참조. 다른 자료에는 朴春으로 기재되어 있다.[14] 다른 성원 활동내역은《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참고.[15]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 부분이 나왔다. 물론 아래 언급된 것처럼 사실과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들도 많았다.[16]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17]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하다.[18]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19]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20] 당시 감옥에 갇혔던 정치범들은 풀려나고 싶으면 총독부 당국에서 일괄적으로 요구하는 '전향서'를 쓰게 했다. '전향서'를 안 쓰면 절대 내보내주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을 막론하고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출옥하고자 전향서를 많이 썼던, 암흑기 그 자체였다.(심지어 일본의 대표 공산주의자인 사노 마나부 같은 유명인사조차도 전향했던 그런 광기의 시대였으니..)[21] 이재유의 마지막 수형자 카드 기록 뒷면을 보면 '1945 공주교도소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부분은 다시 한 번 구체적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22] 사실혼 관계로, 정식으로 혼인한 것은 아니다.[23] 공산주의자로 동시에 한글학자, 대학교수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많았다. 경성 콤그룹에 연루되어 구속 수감되었는데 그 사이에 어머니와 아내와 막내아들이 차례로 사망했다. 이 도피자금은 이용준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전형필에게 판 돈으로 얻었다.[24] 심각한 안면 기형으로 살아생전에 단 한번도 부친을 만나지 못하였으며 외조모의 손에 양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