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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룡

<colcolor=#373a3c><colbgcolor=#f5f5f5>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삼룡
金三龍
파일:김삼룡.jpg
출생 1910년 2월 9일
충청북도 청주
사망 1950년 6월 26일 (향년 40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경성부 중동학교(현 중동고등학교)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 학사)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정당

파일:조선공산당 글자.png


[[남조선로동당|
파일:남로당_노랑.png
]]

1. 개요2. 생애3. 가족4. 소속 정당

1. 개요

일제강점기에는 경성 트로이카에 참여하고 경성 콤그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였고 광복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남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박헌영과 리승엽이 월북한 뒤 김삼룡이 남로당의 사실상 총책으로 이주하가 그의 고문격[1]으로 남한 지하공작을 지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김삼룡을 체포했을 때 색안경 일곱 개가 나와서 대한민국에서는 '일곱 개의 얼굴'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조직 활동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하루에 야체이카 한 개씩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1910년 2월 9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이야기한 에피소드에 의하면 김삼룡은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아침 일찍 길거리의 눈을 쓸고, 일본인이 시비를 걸어와도 씩 웃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싸움이 나면 조선인끼리 왜 싸우냐고 차라리 자신을 때리라 했다고 한다. 또 권투가 취미였다고 한다.

26세가 되던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 이관술과 그의 동생인 이순금, 이현상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였다.[2]

그 후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체포되자 고향인 충주로 피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그를 임명하자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경성전기, 대창직물, 경성방직, 용산철도공작소, 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3]

계속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한다.

김삼룡이 조직책임자로서 반대파를 약화시키려고 한 행동들 때문에 영등포 지구당이 난장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영등포 지구의 참담한 분열도 주저하지 않는 동지 김삼룡"이라고 불렸다.

김삼룡은 패권주의적 행보를 보여 반박헌영파가 엄청나게 싫어했던 인물이다. 증언자들의 김삼룡에 대한 평은 다 나쁘다. 다른 박헌영파도 비판받지만 김삼룡이 가장 심하게 욕먹는 편이다. 그 외 공산당 연석회의 기록을 보면 박헌영파 중에서도 김삼룡이 독보적으로 욕먹는다.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 1946.2.19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통일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미군정이 1946년 9월 박헌영·리강국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4]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남조선로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조직부장을 맡게 되었다.

3당합당을 둘러싸고 공산당 내에서 박헌영·이주하와 김삼룡 사이에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다. 김삼룡은 북한 회의에서 박헌영 비판에 가담해서 북로당계의 신임을 얻었다.### 연합회의에서 "공산당 지도부 내의 섹트주의적이고 편협한 행동으로 인해 합당을 원만히 이끌 수 없었다"고 박헌영을 비판했다. 김삼룡은 진작부터 신탁통치 문제나 전향자 기용 문제에서 박헌영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남한에 남아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로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9년 5월,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된 후 49년 7월 전원회의에서 박헌영, 허헌, 리승엽, 리기석과 함께 남로당 출신으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주하와 함께 지하조직을 결성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5]

김삼룡보다 서열이 더 높았던 이주하를 제치고 김삼룡이 남로당 총책이 된 이유를 이주하는 북로당과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김삼룡은 북로당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주하, 이현상은 김일성을 싫어했는데 김삼룡은 김일성과 사이가 좋았다.

김삼룡 이주하 사건 재판 최후진술에서 김삼룡은 이주하와, 또 비슷한 시기 체포된 정태식에게 위장전향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뒤 남침을 준비하면서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에서 제의한 조만식과의 교환협상이 오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6일, 서울지구 헌병대장인 차약도에 의해 총살되었다.

북한 애국렬사릉에 남조선혁명가 직함으로 가묘가 조성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1993년 7월 15일에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부인 이옥숙도 북한에서 천수를 누렸다.

3. 가족

아내 이옥숙이 있다.
슬하에 세 딸 경애. 영애. 해산 이 있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경성 트로이카
1934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4 정당 해산

[[경성 콤그룹|
경성콤그룹
]]
1939 - 1941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1 - 1945 정당 해산


파일:조선공산당 글자.png
1945 - 1946 창당

[[남조선로동당|
파일:남로당_노랑.png
]]
1946 - 1949 합당[6]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949 - 1950 합당[7]
사망

[1] 조선공산당 시절에는 이주하가 더 높은 지위였는데 남로당 시절에 역전된다.[2] 김삼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 김삼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김삼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김삼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6]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신설 합당[7] 북조선로동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