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55251><colcolor=#fff> 이순금 李順今 | |
1936년 6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출생 | 1912년 6월 3일 |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 |
사망 | 몰년 미상 |
북한 | |
본관 | 학성 이씨 |
신체 | 154cm |
가족 | 오빠 이관술 |
학력 |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 서울 실천여학교 (전학)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직업 |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정치인 |
경력 |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조선부녀자총동맹 조직부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직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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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여성운동가, 정치인.2. 생애
2.1. 생애 초기
1912년 6월 3일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4월 서울 실천여학교에 입학하고 1년 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1]2.2. 이재유 그룹 참가
반제동맹 동덕여고보 책임자를 지냈다. 1932년 3월 졸업했다. 5월 경성학생알에스(RS) 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1933년 1월 오르그연구회에 참여했다. 2월경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3월 경성지법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 후 이재유와 비밀리에 결혼했고 경성고무공장 여공들을 동지로 획득하여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4년 1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5년 1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7년 7월 만기출옥했다. 출옥 후 운동자금 조달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1938년 6월 경성지법에서 예심 면소되었다.
2.3. 경성 콤그룹 활동
1939년 경성 콤그룹에 참여했다. 1941년 9월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소재불명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이후 박헌영과 함께 전남 광주로 피신하여 은둔하면서 경성 콤그룹 조직원간의 연락활동에 종사했다.2.4. 남조선로동당 중앙당원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했다. 9월 조공 중앙 서기국원이 되었고 조선인민공화국 노동부원으로 선정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참석했다. 8월 조선부녀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에 소속되었다. 11월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부녀부에 소속되었다.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에 가입하여 조직부원을 지냈다. 1955년 박헌영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1]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강만길, 성대경.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