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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 이씨

학성 이씨
鶴城 李氏
관향 <colbgcolor=#fff,#191919>울산광역시
시조 이예(李藝)
집성촌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웅촌면
울산광역시 남구
울산광역시 북구
경상남도 양산시 주남동
부산광역시 기장군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경기도 포천시
인구 16,460명(2015년)
사이트 학성이씨곡강파문중

1. 개요2. 역사
2.1. 여담
3. 집성촌4. 분파5. 유명 인물6. 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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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성 이씨는 조선 시대초의 문신(文臣)이자 최초의 조선 통신사(通信使)이며 대일 외교 전문 외교관이었던 충숙공 이예가 시조로서, '학성'은 오늘날의 울산의 옛 지명이다.

2. 역사

시조 이예(李藝, 1373년 ~ 1445년 3월 31일(음력 2월 23일) 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일본류큐국과의 외교를 전담한 대표적 통신사였다.

원래 그의 선대는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향리의 역을 맡은 집안으로 울산 유력 토착 9개 성(姓)씨 중 하나였다.[1][2]
그러던 중 이예는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역되고 벼슬을 하사 받으며 사대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401년(태종 1)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찾아오고, 정 4품 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1422·1424·1428년·1432년에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고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자 얼마 뒤에는 그의 벼슬이 정2품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1443년에는 이예가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대마도와 일본에 갈것을 자청하였다. 이에 세종은 이예를 종1품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3]에 봉하여 대마도와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이예는 마지막 사행길 올라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사후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조 이예의 공로로 학성이씨 가문 일원들은 조선 개국시기에 향리층에서 빠르게 이탈하여 사족(士族)[4]으로 전환하였으나 일부 일원들은 향리층으로 활동하였다.

이예(李藝)의 차남인 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조선초에 무관들을 배출해내며 울산의 사족이 되었고, 이예(李藝)의 장남인 양근군수 이종근(李宗根)의 후손들 역시 임진왜란에서 여러 전공들을 세워서 사족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을 하며 향리층에서 빠르게 이탈하였다.[5]

임진왜란 시기에는 가문의 많은 일원들이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의 6의사를 배출하거나 관군에 종사하며 군공을 세운 무관들을 다수 배출하였다.[6]

임진왜란 이후 학성이씨의 가문원들은 남인계열 유림으로 활동하며 울산에서 국왕의 사액을 받은 서원건립을 주도하는 등[7] 울산에서 영향력이 강한 재지사족(在地士族)[8]으로 자리잡았다.

문과 2인, 무과 16인, 생원 7인, 진사 2인을 배출하였다.

2.1. 여담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를 2명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16명의 무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7명의 생원 2명의 진사를 배출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남 지역의 의병을 여럿 배출했다. 임진왜란때 선무공신을 배출하였고 군공을 세운 무관들이 많았다. 또한 충의 6의사를 배출하여 충의의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3. 집성촌

집성촌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 서창, 웅촌과 북구 달천, 가대, 천곡, 약수, 차일, 화봉동이고 현재도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 마을에 살아가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전국의 학성 이씨는 16,000명정도이며 그들 중 대다수가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양산시등에 거주하고 있다.

4. 분파

봉사공파(서면파)
참봉공파(월진파)
판사공파(곡강파)
부정공파(농소파)
현령공파(청량파)

5. 유명 인물

학성 이씨 집안 중 가장 유명함과 동시에, 유일하게 국제적 인지도가 있는 인물로는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주 일본 대사, 중앙정보부장, 국회의원등을 역임한 이후락[9]이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로는 이관술, 이순금, 유림 계열 독립운동가 이재락과 이우락 등을 배출했다.

노무현 정권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한호, 이명박 정권 당시 고용노동부장관을 역임한 이채필, 울산광역시의회 부의장 이미영, 울주군수 이선호, 국민의힘 국회의원 이채익, 연예인 이예은 축구선수 이근호, 교수 이수건 등이 있다.

6. 역사적 인물

이예(李藝,1373~1445) 호는 학파(鶴坡),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하사 받았다. 1401년(태종 1)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찾아오고, 정 4품 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1422·1424·1428년·1432년에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얼마뒤에는 정2품인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1443년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했고, 이에 세종은 이예를 종1품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에 봉해 일본에 다녀오게 하였다. 사후 이예는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종실(李宗實,?~1459)은 이예의 아들로 조선초의 외교관이자 무관이었고 관직으로는 대호군(大護軍)과 수사(水使)를 지냈다. 이종실은 1459년(세조 5)에 일본 통신사 행렬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향하였으나 대마도에서 일본으로 가던 중 큰 풍랑을 만나 이종실은 정사 송처검과 서장관 이근 등과 함께 행방불명 되었고 이때에 통신사 행렬의 대부분이 실종되었다. 세조는 조관(朝官)을 보내어 시체를 수색하고, 겸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바닷가에 있는 여러 고을 여러 포구(浦口)로 하여금 후망(候望) 하게 하여, 만약 표류(漂流)하는 사람이 있거든 곡진히 구휼(救恤)을 더하고, 시체를 발견하거든 간수(看守)하고 소홀히 하지말라 하였다. 1463년(세조9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토물을 바치며 이르기를 '표류한 시체를 장사지내고 천룡선사에 명하여 제사를 지내고 명복을 빌었다.'하였다.
이겸수(李謙受,1555~1598) 수사 이종실의 5세손으로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하였다. 1594년 무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서생포왜성강화회담(西生浦倭城講和會談)이 진행될 때 적정을 탐지하고 회담 대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안내하는 일을 하였고, 양 군사의 대표 사이에서 서신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강화 회담에서 1차, 2차는 유정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3차는 이겸수가 단독으로 회담에 임하였다. 비변사의 명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사이에 내분을 불러일으키는 이간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세를 탐지하는 실력을 인정받아 이후에도 조정에서 정보원으로 추천하였다. 기장현감을 거쳐 1597년 정주판관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의 공훈으로 원종훈삼등공신(原從勳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남강사(南岡祠)에 제향되었다.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겸수의 장검을 후손들이 문중에서 소장하다가 2013년 양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겸익(李謙益,1575~1645) 자는 자부(子裒), 호는 매헌(梅軒). 조부는 훈련원정(訓鍊院正) 이변림(李變林)이고, 부는 직장(直長) 이우춘(李遇春)이며 어머니는 어모장군(禦侮將軍) 박자공(朴自恭)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장현감을 지낸 이겸수(李謙受)가 첫째 형이며, 둘째 형 이겸록(李謙祿), 셋째 형 이겸광(李謙光), 넷째 형 이겸복(李謙福)이 있다. 부인은 일직손씨(一直孫氏)이며 슬하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18세 때인 1592년(선조 25) 범어사(梵魚寺)에서 학습을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형 이겸수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올렸다. 이때 공으로 관직이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봉사직까지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후 형 이겸복과 함께 나주의 관해(觀海) 임회(林檜)[1562~1624]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9년 당시 울산도호부 서면 웅촌리[현 울주군 웅촌면]에 거주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매헌정사(梅軒精舍)를 짓고 배움을 계속하였으며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1680년(숙종 6)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으로 추증되었다.

이한남(李翰南,1565~1629) 자는 여일(汝逸), 호는 난은(難隱). 고조는 수사 이종실(李宗實)이고, 부는 증호조참의 이대배(李大培)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4월 23일 울산 지역의 의병들이 모인 함월산성 의병 부대에 참여하였다. 박봉수(朴鳳壽)를 대장으로 한 이 회동에서 이한남은 경상좌병영 탈환 계획의 종사관을 맡아 적을 물리치고 경상좌도병영성을 수복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같은 해 5월 27일 경주 계연전투에서 이경연(李景淵), 전응충(全應忠) 등 울산 지역 의병들과 함께 적을 무찔렀다. 6월 9일 울산과 경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 의병들이 모여 결의한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가하였다. 1594년(선조 27) 1월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에도 경주와 울산 지역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다.훈련원부정에 제수되었으며, 1605년 4월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경양(李景洋,1563~?) 자는 여숙(汝叔). 고조는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이고 증조 이종실(李宗實)이며, 조부는 내금위(內禁衛) 이세형(李世衡)이다.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이경용(李景溶)의 동생이며,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이경연(李景淵)과는 사촌지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이경용, 사촌동생 이경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함월산성에서 의병 부대를 편성할 때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1594년 이경용과 함께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효력부위수문장(効力副尉守門將)에 제수되었다. 『울산부호적대장(蔚山府戶籍大帳)』에 따르면 1609년 당시 울산도호부 동면 농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경용(李景溶,1554~1654) 자는 여원(汝源). 고조는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 증조 이종실(李宗實), 조부는 내금위(內禁衛) 이세형(李世衡)이고,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이경양(李景洋)의 형이며,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이경연(李景淵)과는 사촌지간이다. 부인 울산박씨(蔚山朴氏) 사이에 아들 이득배(李得培)가 있으며, 후손들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3동에 세거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이경양, 사촌 동생 이경연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동생들과 함께 임진왜란 발발 초기 함월산성에서 울산 지역의 의병 부대를 편성할 때부터 참가하였으며, 울산의 경상좌병영을 탈환할 때 공을 세웠다. 1594년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무과 급제 교지가 내려졌는데, 이때 이경용도 동생 이경양과 함께 교지를 받았으며 어모장군 훈련원정에 제수되었다. 향촌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경연(李景淵 1565~1643) 자는 여징(汝澄)이며,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다.이예(李藝)의 5세손으로 부는 이학이다. 이경연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의병 활동을 했고, 1594년(선조 27) 단독별시에 급제했다. 1596년 팔공산회맹과 1597년 화왕산회맹에 참여했으며,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하면서 적군 을 최다로 참획하였다. 전탄(箭灘)전투에서적의 장검을 탈취했으며, 안골현(安骨峴) 전투에서는 적을 8 3급(級)이나 베었다. 판관(判官)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행적을 담은 『제월당실기(霽月堂實紀)』가 전한다.

이길(李吉,1541~1601) 자는 근여(謹汝), 호는 부령(府呤).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의 후손이며 양근군수 이종근(李宗根)의 6세손이다. 울주군 청량읍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가친척들과 의병을 일으켰다. 함월산성의 의병 부대에 참여하였으며, 울산과 경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 의병들이 결전을 맹세한 경주 문천회맹(蚊川會盟)과 울산의 반구정에서 열린 구강회맹(鷗江會盟)에 참여하였다. 이후 남산전투, 계연전투, 태화강구전투 등 경주·울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통정대부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가자(加資)되었다.

이질백(李質白,1567~1642) 자는 자순(子純), 호는 정강(貞康).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의 후손으로, 증조는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 이윤손(李允孫), 조부는 이명필(李明弼), 부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이수신(李守信)이다. 울주군 청량읍 상남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지역의 일가친척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울산뿐만 아니라 경주와 영천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도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1609년 당시 울산부 남면 청량리(靑良里)에 거주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이르렀다.

이인상(李仁常,1577~1598) 자는 춘신(春信), 호는 신암(愼庵).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의 후손이다. 증조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곤(李鯤)이고, 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이연중(李連重)이다. ‘이인상(李仁祥)’으로도 쓴다.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달천동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종조[할아버지의 사촌 형제로 6촌 관계]인 이경연(李景淵)과 함께 집 안에 비축되어 있는 식량을 가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울산의 동대산(東大山)과 동해안 연안으로 침입하여 오는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그해 7월에는 울산 염포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을 2척이나 불사르고, 이어서 영천성 및 경주성의 탈환전에도 참전하였다. 그후에도 울산과 경주 지역 전역에서 공을 세워 좌부장(左部將)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명나라의 장수인 마귀(麻貴)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1598년 9월의 제2차 도산성전투에 선봉장으로 출전하였다가 22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초혼제를 지내고 장례를 치렀다. 울산광역시 중구 교동 산43-2번지에 안장하였다가 울산 지역 혁신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인하여 2008년 울산광역시 북구 달천동 망제산으로 이장하였다.1605년(선조 38) 4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통덕랑 호조정랑(通德郞戶曹正郞)에 추증되었다

이근오(李覲吾,1760~1834) 아명은 이중오(李中吾), 자는 성응(聖應), 호는 죽오(竹塢). 아버지는 이의창(李宜昌)이고,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다. 부인은 정하유(鄭夏游)의 딸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1788년(정조 12) 향시, 178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790년 증광시 문과에서 급제하였다. 무신 관료를 많이 배출하였던 울산 지역에서 드물게 문과에서 급제하여 1791년(정조 15)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봉상시참봉과 성균관박사, 교서관박사,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정6품) 병조좌랑 올랐으나 얼마 후에 고향인 울산으로 낙향하였다. 이근오는 선친의 묘소가 있는 인근에 대나무집을 지어 거처하며 ‘죽오’를 자호로 삼았고,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경치를 즐기며 학문을 하였다. 또한 당시 울산도호부사 박종민(朴宗民) 및 여러 지역 사림들과 협력하여 양사재(養士齋)를 짓고 울산 지역의 후진 양성에도 힘썼는데, 이때 양사재의 상량문을 직접 작성하였다
[1] 세종실록지리지.[2]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학성이씨는 고려시기에 항리층이었다. 고려조 상급향리인 장리층은 고려중후반 향리역에서 벗어나 중앙정계에 진출해 신진사대부의 한 부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들은 중앙 양반과 신분이 동등하였으나 갈수록 위상이 하락함에 따라 대거 중앙관직을 얻거나 과거에 급제 하는 방법으로 향리직을 벗어나 향후 사림의 주축이 되었다.[3] 종1품 전시직[4] 사대부(士大夫)가 될 수 있는 혈족(血族)이란 의미로 향촌 사회에서 농민을 지배했던 계층이었고 조선에서는 주로 효율적인 토지경영을 위해 거주지를 중심으로 토지를 한곳에 모아서 살던 지주 양반들을 가리켰다.[5] 이종근의 후손들의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학성이씨 가문의 일부 인원들은 역이 면제된 이후에도 울산지역의 향리직을 맡아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양반 사족들과 동등했던 향리에 대한 처우가 지속적으로 하락하자 향리계층으로 활동하던 학성이씨 일원들도 사족으로 전환하게된다.[6] 이인상(李仁常,1577~1598) 이경연(李景淵 1565~1643) 이질백(李質白,1567~1642) 이경용(李景溶,1554~1654) 이한남(李翰南,1565~1629) 이겸익(李謙益,1575~1645) 이길(李吉,1541~1601) 이겸익(李謙益,1575~1645) 이경양(李景洋,1563~?) 등 선무원종공신에 책록[7] 1694년에 숙종의 사액을 받은 남인계 서원인 구강서원(鷗江書院)과 1737년에 영조의 사액을 받은 석계서원 (石溪書院) 등[8] 조선시대 지방에서 활동하던 지배 계층 집단이다.[9] 7.4 남북 공동 성명, 김대중 납치 사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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