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3:46:43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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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비서실장
대한민국 제6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李厚洛 | Lee Hu-rak
파일:이후락부장.jpg
<colbgcolor=#06377a> 이명 이서봉(李瑞鳳)
출생 1924년 2월 23일[1]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2]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
사망 2009년 10월 31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
덕서(德瑞)
우석(又石)
본관 학성 이씨[3]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97호
재임기간 제3대 대통령비서실장
1963년 12월 17일 ~ 1969년 10월 20일
제6대 중앙정보부장
1970년 12월 21일 ~ 1973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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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이석승, 어머니 서내안
형제자매 4남 3녀 중 차남
남동생 이거락[4]
배우자 정윤희[5]
자녀 슬하 6남 1녀[6]
장남 이동진
차남 이동훈
장녀 이명신
그 외 아들들[7] 이동규, 이동익, 이진영, 이동욱[8]
친인척 사촌형 이윤락[9]
사촌남동생 이주락[10]
육촌남동생 이겸락
학력 울산공립농업학교 (졸업 / 3회)
도쿄육군항공학교 (졸업)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졸업)
국학대학 (법학 / 학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0
경력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
국무총리 안보담당 비서관
제2대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
제3대 대통령비서실장
제3대 주일본 대사
제6대 중앙정보부장
제2대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제10대 국회의원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울산장학회 회장
약칭 HR
별명 제갈조조
군사 경력
임관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43년 ~ 1944년
대한민국 육군
1945년 ~ 1961년
최종 계급 하사 (일본 제국 육군)
소장 (대한민국 육군)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6.25 전쟁
}}}}}}}}}
1. 개요2. 생애
2.1. 광복 이전2.2. 광복 이후2.3. 5.16 군사정변 ~ 주일대사2.4. 중앙정보부장 시절
2.4.1. 7.4 남북 공동 성명2.4.2. 김대중 납치 사건
2.5. 제10대 국회의원2.6. 10.26 사건 이후2.7. 말년과 사망
3. 선거 이력4. 소속 정당5. 가족관계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외교관, 정치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대통령비서실장, 주일대사, 중앙정보부장,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등의 직책을 역임하며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4~1969년 사이에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이후 1970~1973년 사이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그 기간 동안에 박정희의 3선 승리에 기여했고, 방북하여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하거나, 10월 유신과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는 등 유신정권의 책사 역할을 하며 각종 음험한 외교 ·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제갈조조"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후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눈 밖에 나면서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지자 잠시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제10대 국회의원[11]을 지내기도 했다. 제5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부정축재 문제로 정풍운동의 대상이 되어 공화당에서 제명당했고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자택에서 은거하며 조용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

군사정권 당시에는 여러 어록 덕분에 대중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방북했다 돌아온 후 기자회견에서 "실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남겨서 큰 유명세를 탔다. 또 한편으로는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라는 이른바 떡고물 발언 때문에 부패 정치인으로서의 악명도 높은 편이다.

2. 생애

2.1. 광복 이전

1924년 2월 23일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307번지에서 아버지 이석승(李錫丞, 1880.08.08 ~ 1942.07.01)과 어머니 달성 서씨 서내안(徐內安, 1888.03.08 ~ 1979.08.04)[12]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울산공립농업학교(3회 졸업생)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해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6개월 교육을 받고 중국 하얼빈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후 육군 하사관으로 임관하기에 이르렀다.

2.2. 광복 이후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13][14] 1949년 남조선로동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15][16] 한번은 1950년 초에 박정희와 김종필이 다옥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금 시간을 넘기게 되어 마침 다옥여관에서 지내고 있던 이후락의 지프를 빌리기 위해 그를 만나려 했지만 이후락은 얼굴도 내밀지 않고 딸로 추정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잔다고 하라고 몹시 짜증냈다고 한다. 1951년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국방부에서 만들어진 79부대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이 되어[17] 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18]

1961년에는 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여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에서 신설한 정보 기관인 국무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3. 5.16 군사정변 ~ 주일대사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장면의 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에게 박정희와 김종필의 정보를 요구했는데, 이후락은 이때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이라서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부정적 정보를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걸리면서 장면의 정보부장이었다는 이유로 장면 충성파로 몰려서 체포되어 마포 형무소에서 한달간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갓 설립된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이병희가 이후락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게 건의하였다. 김종필의 주장으론 그때 자신이 이후락이 체포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병희의 건의를 옳게 여기고 이후락에게 자신들에게 합류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하였다. 이후락은 쾌히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하였고, 이에 김종필은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감안하여 국영 영자신문사인 코리아 리퍼블릭의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락은 코리아 리퍼블릭을 꽤 잘 운영하였고, 박정희나 주한 외교사절들도 만족을 표했다. 이에 김종필의 건의에 따라 1961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동원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이후락은 1964 ~ 1969년 사이에 박정희의 최고 책사로 활약했다. 제갈공명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책사가 되었으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서는 제갈공명은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까기도 했다.[19] 그러나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와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경질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이후 1970년 1월 지병으로 사망한 엄민영의 후임으로 주 일본 대사에 임명되었다.

주일대사로 있으면서도 박정희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초밥 에피소드이다.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부근에 있던 이즈미라는 유명한 초밥집의 단골이던 이후락은 이 집의 맛있는 초밥[20]을 특별 주문하여 잘 포장하고 간이 냉동 상태로 대사관 사무관을 시켜 외교행낭을 실어 보내는 비행기 편으로 청와대까지 직배송을 몇 차례나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스런 선물을 받은 박정희가 이후락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 일화를 소개한 책인《남산의 부장들》초판이 발행될 당시(1992년) 초밥 심부름을 하던 주일대사관 사무관은 외무부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외교관이 되었다고 한다.[21] 이는 황병태 전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교차검증된다.

2.4. 중앙정보부장 시절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박정희 정권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야당(신민당)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에 "남산골 샌님" 얘기나 듣던 김계원 대신 정치 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힘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락은 정치 공작의 달인답게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육군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막후에서 관리하며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22][23][24]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당시 내무부 장관의 해임 결의안을 저지시키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항명한 여당 국회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을 10.2 항명 파동이라고 한다.[25]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 작업 암호명은 '풍년 사업'.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 때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 바로 김기춘이다.[26]

2.4.1. 7.4 남북 공동 성명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 대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 평양을 방문하여 당시 주석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불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밤에 북한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냈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이 때 이후락은 엄청난 긴장감에 안절부절못했다.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44950_1.jpg
이후락과 김일성. 뒤의 인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이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만수대의 수상관저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자마자 김일성이 서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고 한다.[27]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평양까지 와준 것을 치켜세웠고, 이후락은 자신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라고 소개한 뒤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28] 이후 만찬을 함께 하는 와중에 1.21 사태에 대한 김일성의 사과 발언도 나왔다. 이 때 나눈 대화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 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고 대화 첫 마디에 농담삼아 어쩌면 기를 선제압하기 위하여 항의하자, 이후락은 아래와 같이 대답했고 김일성은 이를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입니까?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습니까?
1972년 5월 김일성과의 대담 中
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 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기자회견에서 소개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다.

2.4.2.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법무부장관 등과 함께 유신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 가도를 달리게 되었지만, 해가 중천까지 오르면 언젠간 지는 법이다. 1973년 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또 다시 탄압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사건 발생 장소인 일본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과의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29]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 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주일대사인 김석규가 김대중을 납치하기 전에 박정희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1980년에는 전직 국회의원인 친구 최영근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 갑자기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출국했다가 종적을 감춘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전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처럼 해외 망명설이 파다하게 퍼졌으나,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영국을 거쳐 중남미 바하마로 날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숨어 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망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고, 평양에 다녀온 뒤 얻은 심장 질환 때문에 요양하며 겸사겸사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을 통해 "나는 박정희 정권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 나를 건드리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을 다물겠다."는 식으로 정치적 보복을 피하려 박정희와 모종의 협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숙청 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이후락은 실제로 입을 다물며 조용히 지냈고,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달리 숙청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만약 김형욱도 끈이 떨어진 이후 이후락처럼 입 다물고 조용히 살았다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2.5. 제10대 국회의원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인 울산시·울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투표율 1위로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30] 이후락은 당연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원했으나 김대중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던데다가 여러 불법적인 정치 공작에 관여한 것도 있어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 측에서 공천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락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각하께서 체면 때문에 공천을 안 주신거고 국회의원 당선 후 다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남북 대화를 맡는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선거 운동을 했고 이것이 먹혔다. 당시 울산지방공무원과 경찰 등도 모조리 이후락 편을 드는 바람에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았던 서영수는 명색이 여당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야당 취급을 받고 결국 선거에서 떨어졌다. 1979년 6월 최치환, 김진만,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 정휘동, 임호,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2.6. 10.26 사건 이후

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손에 묻는 법이다.
그러나 그해 10.26 사건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정풍 운동을 주도한 박찬종, 남재희, 오유방, 정동성에 의해 김진만과 함께 정풍 운동의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 신군부 측에서 김종필의 부정축재에 대해 증언해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고 김종필이 연행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 자금을 떡고물에 비유해 "떡고물 안 흘리고 을 주무를 수 있나"라는 항변으로 재산 형성을 자기 합리화해 대중들을 경악시키기도 했고, 당시의 '떡고물' 발언이 지금도 세간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이후락의 재산은 자기 명의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194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군인으로 전역한 사람이 20년 만에 저 돈을 모았다는 것이니, 당시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물가를 따질 때 흔히 나오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한보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1980년대 초반 당시 2,000만 원대로 지금은 20억 원대 매매가를 자랑한다.[31] 그것으로 계산하면 이후락의 재산은 현재 화폐 가치로 대략 조단위의 금액이고, 이 외에도 시가가 낮게 매겨져서 재산 계산에 미미하게 반영됐지만 현재 폭등한 경기도내 부동산의 가치만 해도 역시 조단위로 엄청나다.

결국 1980년 4월 7일 정풍 운동을 주도한 박찬종, 오유방, 임호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제명되었고, 그 해 7월 4일[32] 신군부의 압력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정치 규제를 당했다.

2.7. 말년과 사망

1985년 정치 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33] 2003년에는 생리 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고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09년 10월 31일, 뇌종양으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34] 그렇지만 박정희 밑에서 일하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끝이 좋지 못했다[35]는 것을 생각하면 천수를 누린 셈.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4[36]

[[무소속(정치)|
무소속
]]
97,393 (48.32%) 당선 (1위)[37] 초선 [38]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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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총선 (경남 4) }}}}}}}}}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8 - 1979 정계 입문


[[민주공화당|
파일:139.png
]]
1979 - 1980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0 - 1985 제명
정계 은퇴

5. 가족관계

  • 4남 3녀 중 차남이였으며, 알려진 형제자매는 남동생 이거락이 유일하다. 조카로 이동휘[39] 등이 있다.
  • 슬하에 6남 1녀를 뒀는데 자식들이 국내외에 막대한 양의 부동산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후락의 자녀가 3남 1녀로 표기되는가 하면 4남 1녀, 5남 1녀 등 자녀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다.(...)
  • 장남 이동진(李東鎭, 1946. 11. 11 ~ )은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서정귀의 차녀 서옥로(徐玉露, 1946~)와 혼인하였기에 이후락과 서정귀는 사돈지간이 된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 차남 이동훈(李東勳, 1948. 4. 28 ~ )은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의 고명딸 김영혜(金英惠, 1948. 10. 16 ~ )와 결혼했다. 이후 제일화재를 물려받았으나 경영난으로 2008년에 본가였던 한화그룹으로 도로 넘기고 2009년에 한익스프레스를 인수했다. 슬하에 4남을 두었다.
  • 장녀 이명신(1949~)은 정화섭(1937~)와 결혼했다. 자녀는 불명이다.
  • 그 외 이동규, 이동익, 이진영, 이동욱이라는 아들들이 있는데 이동욱을 제외한 세 아들들은 출생순서와 생년월일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동욱이 삼남으로 알려졌지만 1949년생인 장녀 이명신과의 나이차가 많아서 정확하지 않다.
    • 아들 이동욱(李東昱, 1962. 8. 20 ~ )은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의 막내딸 최예정(崔藝瀞, 1962. 8. 25 ~ )과 정략결혼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 친손자 중 한 명인 이석환(李碩煥, 1973. 7. 1 ~ )[40] 한익스프레스 대표이사이며 과거 흑역사가 있는데 미국 유학생 시절이던 1994년 한국에 들어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신동학[41]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를 달리던 중 다른 차의 운전자와 시비가 붙어[42] 운전자를 집단 폭행했다. 그리고 2020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건이 발생하자 이석환 대표의 이름이 또 다시 등장했다.
  • 또 다른 친손자인 이승환은 이동욱 - 최예정 부부의 자녀로, 현재 돌고도네이션이라는 사회적 협동조합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사회 공헌 사업을 하고 있다.

6. 기타

  • 고향인 울산광역시에는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가 많다. 현재 신정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우석고등학교는 이후락의 호를 딴 학교였고 학성고등학교는 이후락의 본관인 울산의 옛 별호를 딴 학교다.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도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43] 그리고 영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진 중 1명이었다.
  • 제9대 국회의원 김원규는 그의 6촌 처남이었다.
  • 중앙정보부장 시절 유태인 차관 중개인 메나도[44]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차관을 많이 들여왔다. 간혹 상공부에서 "그런 돈은 쓸 수 없다."고 하면 이후락이 다그쳐서 차관을 들여오게 했고 이렇게 유입된 차관 자금의 5~6%는 이후락 측 정치 자금으로, 다시 일정 %를 메나도 측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메나도는 이렇게 차관 브로커 노릇을 하며 모은 돈으로[45] 프랑스 해군 함정을 사들여[46] 고철로 분해해 두었다가 6일 전쟁 발발 후 다시 조립하여 이스라엘 해군에 제공해 이집트 해군을 격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훗날 메나도는 "한국 관료들은 10만불만 쥐어주면 국가에 1,000만불 손해가 나도 도장을 찍어준다."는 회고담을 남겼다고 한다.
  • 울산광역시(울주군 포함), 경주시, 포항시(영일 포함) 등을 합쳐 경상동도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행정구역 개편이 이슈가 되었을 때도 비슷하게 경포울 통합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경상도가 다른 도들보다 면적이 너무 넓기도 하고 인구면에서도 3개 도시만 합치더라도 수도권 제외한 전국 평균급은 찍으며 울산 같은 경우 창원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중심부와는 생활권이 다르고 오히려 인접한 경주시 및 포항시와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다.
  • 생전 육영수 여사와는 굉장히 껄끄러운 사이였는데, 육영수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을 1973년 중앙정보부의 가짜 요원 구타사건을 계기로 박정희에게 이후락 해임을 재촉했을 정도.
  • 작별, 흰 구름 먹 구름, 난 못난이, 또 만나요 등의 히트곡을 남긴 1970년대 포크 그룹 딕패밀리의 멤버 김후락의 본명은 홍수진인데 그룹 결성 초반에 우연히 MBC 방송국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만나 예명을 김후락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락이 홍수진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이름으로 예명을 쓰라고 했는데 성씨까지 쓰지는 말고 김박최에서 돌 던지면 맞는 성으로 쓰라고 해서 예명이 김후락이 되었다고 한다.링크
  •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낙선시키고, 납치했던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같은 해 태어나서, 역시 같은 해에 죽었다.
  • 안장식은 현충원에서 매우 조촐하게 치러졌다. 당시 군악대원으로 장례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10명도 오지 않았던 듯하다.
  •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 강제 전역한 황진기 전 육군 대령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한 원심이 파기됐다.대법원 선고 2019다241455 손해배상(기) 사건에 관한 보도자료
  • 문명자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후락은 미국 정보기관 CIA의 끄나풀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후락과 CIA의 관계는 박정희를 감시하기 위한 스파이였다는 중앙일보 기사까지 나올 정도로 자세하지만# 애초에 문명자는 친북반한 활동에 매진한 왜곡된 정세관을 가진 인물로, 그의 주장은 그닥 신빙성이 높지 않다. 백무현이 만화화해서 악명높은 "요시 토바츠다" 드립도 문명자의 주장이지만 정운현의 심층 취재 결과 구라로 밝혀졌다. 당연하지만 김종필 증언록 등에서 교차검증되지 않는 이야기다. 다만 김충식의 취재에 따르면 CIA와 이후락과 관계가 있던 것은 사실인데, 이후락은 주미 대사관 무관을 지낸 미국통이었고, 장면 정부 때 그가 기용된 것이 다름아닌 CIA의 입김이었단 것이다.
  • 이예가 이후락의 조상이다.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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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의 이후락 제5공화국의 이후락
  • 1994년 영화 증발에선 '오상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이일웅이 연기했다.
  • 2003년 영화 실미도에서 후반부에 교체된 중앙정보부장으로 등장한다. 반란을 일으킨 북파공작원들이 군경이 설치한 방어선을 계속해서 돌파하고 있음에도 태평하게 신문이나 읽는다. 그러다가 사안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부하의 입에 각하가 언급되자 그때서야 표정이 바뀌며, 이번 일 덕에 전임 부장인 김형욱을 지지하던 중정인사들을 발본색원할 수 있게 되었고 684부대 처리 책임소재에 대해 공군측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한다.[47]
  • 2011년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는 배우 김병기가 연기했다. 제5공화국 이후 사업가로 변신한 이후락과 가장 가깝다.
  • 2022년 영화 킹메이커에서는 조우진이 연기했다. 본명은 언급되지 않고 '이 실장'이라는 직함만 언급된다.
  • 2020년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다른 캐릭터에 합병되어 이후락'만'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는 없다. 다만 원작은 논픽션이니만큼 당연히 비중있게 등장한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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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월 19일.[2] # 학성 이씨 집성촌이다.[3] 서면파(西面派)-석천계(石川系) 17세 락(洛) 항렬.[4] 李居洛. 1925.06.29 ~ 2013. 경찰공무원 출신이다.[5] 1928.08.22 ~ 2002.03.26. 연일 정씨 정선태(鄭善太)의 딸이다.[6] 언론사에 따라 3남 1녀나 4남 1녀, 5남 1녀로 표기하는 곳도 있어서 헷갈리지만 구글링 결과 7명인걸 봐서 6남 1녀가 맞는 듯 하다.[7] 1962년생인 이동욱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의 출생 순서와 생년월일이 알려지지 않았다.[8] 삼남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하지 않다.[9] 李允洛. 1923.09.29 ~ 1992.08.23. 육군사관학교 3기 출신으로 부산진구 제2선거구에서 제1, 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이후락의 아버지 이석승(李錫丞, 1880.08.08 ~ 1942.07.01)의 둘째 형 이석병(李錫炳, 1875.03.11 ~ 1936.04.04)의 넷째 아들이다.[10] 李周洛. 1931년 11월 20일생. 육군 준위로 예편한 뒤 서울특별시 용산구 제3선거구에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이후락의 아버지 이석승(李錫丞, 1880.08.08 ~ 1942.07.01)의 둘째 형 이석병(李錫炳, 1875.03.11 ~ 1936.04.04)의 여섯째 아들이다.[11] 울산시·울주군(무소속)[12] 서도민(徐度玟)의 딸이다.[13] 하지만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대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미군이 일본군에서의 계급을 고려해서 계급을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일.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라고 하는 김정렬의 증언도 참조[14] 반면 두산백과에서는 소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다. 군사영어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대위 임관자는 군번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4번 장석륜, 5번 정일권 등 단 5명 뿐이다. 이중에서 채병덕은 일본군 소좌, 이형근, 유재흥, 정일권은 일본군 대위, 장석륜은 중위 출신이나 대한제국시절 유학갔던 일본육사 대선배이다. 참고로 일본군내 조선인 장교들은 오직 일본 육사출신 밖에 없다.(학병 출신들의 경우 간부후보생 교육중 일제가 패망하여 가라로 소위 계급장 달아 준 후 군 해산함.) 그렇기 때문에 몽땅 일본 육사 선후배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락이 구라를 치는지 아닌지 모를 수가 없다.[15]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16]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17] 당시 이후락 실장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부대' 혹은 '79호실'이라고 불렸다.[18] 라오스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19] 이 시기 박정희의 주요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도 꼽을 수 있다. 다만 이들은 관료에 가까운 계열이었다.[20] 이즈미의 주인이 회고하기를 이후락은 이즈미의 초밥을 아주 좋아해서 대사관이나 외부 연회 시에 이즈미의 초밥을 별도로 시켜서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락이 식당에서 초밥을 먹고 나서 같이 온 사람들과 종종 화투를 치고는 했는데, 사람이 모자라면 이즈미 주인도 끼어서 같이 화투를 칠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로는 일본에 올 일이 있어도 이즈미에는 1번도 오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21] 출처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22] 1960 ~ 19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중앙정보부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야당 당사, 언론사, 주요 정부 기관, 대학 등에 상주하면서 정보 활동을 하기도 했다.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며, 이들의 선거 개입을 총괄하는 것은 중앙정보부였다.[23] 물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관변 조직을 총동원하고 정부와 여당이 당시 금액으로 무려 600억~700억이라는 거금을 선거에 쏟아부었음에도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겨우 이기는 데 그쳤다. 박정희는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뿐이냐"고 주변을 닥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4] 당시 김대중의 선거 전략가 참모 엄창록을 잠시 며칠 동안 실종되게 하기도 했다. 초대 김종필부터 5대 김계원까지 역대 전임 중앙정보부장들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25] 이들 중에는 박정희의 처남이자 영부인 육영수의 친오빠인 육인수도 있었고,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김성곤도 있었으며, 특히 김성곤은 고문 후유증으로 4년 뒤 사망했다.[26]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27] 당시 이후락은 여차하면 삼키려고 청산가리 알약을 주머니 속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자 손을 주머니에 빼려 했는데 청산가리 알약이 에 붙어서 잘 안 떨어지는 바람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두고 '이후락이의 기를 선제압하기 위한 수령님의 신묘한 술수'라고 자화자찬하는데, 사람을 한밤중에 갑자기 불러내는 것이 공산권 국가에서는 상대를 당황하게 하여 허점을 포착하려는 고전적인 수법이기는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소련스탈린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밤중에 불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협상에서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마오쩌둥의 힘을 한껏 뺀 것은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찾아가서 먹고 자고 싸기만 하고 왔다고 할 정도였다.[28] 당시엔 북한에서 주석제가 실시되기 이전이라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일본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총리 퇴임 이후, 마찬가지로 정계 은퇴한 이후락을 "각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이야 각하가 대통령 전용 경칭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일본 제국 시절처럼 고관대작의 경칭이란 인식이 강해서 각하 경칭 독점을 시작한 박정희도 다른 고관대작들을 관례상 각하라고 부르기도 했다.[29] 여기서 진짜 재미 있는 점은 김대중이 자신의 선거 전략참모 엄창록의 활약으로 최종 승리했던 1970년 9월 29일 신민당의 7대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후락은 주 일본 대사였다.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주 일본 대사에서 곧바로 중앙정보부장으로 들어왔는데, 그 김대중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하필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다. 이것은 완전 나라 망신을 제대로 저지른 셈이다.[30]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후락과 악연이 있던 신민당 최형우 후보도 동반 당선되었다(...).[31] 당시 은마아파트는 고분양가 논란으로 미분양된 아파트였고, 보통 서울 중심부 아파트는 1,000만원 선이었다.[32] 여담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이 일어난 지 8년이 되는 날이다.[33] 그나마 1987년 7.4 남북 공동 성명 15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하고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민주공화당을 방문해 낙선한 김종필위로하면서 잠깐이나마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적도 있다. 이후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34] 이후락이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시키고 2년 뒤인 1973년 8월에 무리하게 납치했던 김대중이 자기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35] 박정희 본인은 말 할 것도 없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박정희와 함께 사망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10.26 사태 이후 1980년 5월 처형되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에서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박종규는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강탈 당한 뒤 간암으로 인해 전두환이 집권 중이던 시절 1985년 12월 만 55세에 사망했다. 그나마 박정희와 친인척 지간인 김종필이 제일 천수를 누리고 떠났다.[36] 울산시, 울주군[37] 신민당 최형우 후보와 동반 당선[38] 79.6.7: 민주공화당 입당
80.4.7: 민주공화당 제명
80.7.4: 의원직 사퇴
[39] 남동생 이거락의 아들. 과거 이후락의 보좌관이였다.[40] 이후락의 차남 이동훈(李東勳, 1948. 4. 28 ~ )의 차남이다.[41] 신준호 푸르밀 회장(당시 롯데그룹 부회장)의 장남.[42] 이들은 당시 상류층들이 주로 몰던 각그랜저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형 프라이드 승용차가 그랜저 앞으로 끼어들었고 이에 격분해 프라이드 운전자를 벽돌과 화분으로 두들겨 팼다. 이들이 격분한 이유는 "건방지게 싸구려 프라이드 따위가 어딜 감히 그랜저를 쳐다보냐"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얼마 안 가서 모두 풀려났고 피해자와도 합의를 치르고 사실을 숨겼다는 점이다.[43] 이들 학교들은 모두 남구에 있는 공업탑 로터리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세 학교 모두 공립화되었고 울산의 일반계 고등학교 입시도 평준화되었지만 담벼락 하나를 두고 붙어있는 신정고등학교와 학성고등학교 간의 라이벌 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44] 형수가 한국인인 인연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금융 브로커. 메나도가 아닌 메리도라고도 불렸으며 훗날 이스라엘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인터뷰집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86년, 삼성출판사),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도 등장한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인터뷰에서 그를 일컬어 "대단한 수완과 정보력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경제 차관도 많이 주선했지만 반면에 (빚을) 크게 씌우기도 한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45] F-4 팬텀 II 25대 분량의 자금을 동북아시아 차관 중개로 확보했다는 후문(後聞)이 있다.[46] 당시 메나도가 소유한 노르웨이 아카 조선소 이름으로 사들였다고 한다.[47] 사태가 종료된 이후 보고서들을 살펴보는데 남북정상회담에만 관심을 보이며 실미도 사건을 포함한 기타 사안들을 제쳐놓는 모습을 보이며 당시 사건에 대한 정부 당국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48] 개명 후 홍성훈으로 활동 중이며 1999년 MBC 드라마 <허준>, 2001년 MBC 드라마 <상도>에도 출연한 이력이 있다.[A] 울산시·울주군·동래군의 제9대 국회의원이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