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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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부터 1966년까지 존재하였던 한국의 사립대학.캠퍼스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였다가 1962년 정릉으로 이전하였다. 현재의 고려대학교 메디사이언스파크가 옛 국학대학 자리이다.
2. 학가
학장에 취임한 위당 정인보가 지은 <국학대학가> 가사물이건 맛을 보고 흙이건 맛자 잘바더 키워 '물릴' 오늘 우리다 5천년 3천리가 '함빡' 안기니 짐크고 길이 멀다 국학대학아 '해동청' 매서운눈 찌저지도록 세계를 살피랄제 '나버텀'봐라 강서(江西)에 무친 그림 용(龍) 다시 살고 토함산 사길 나한(羅漢) 거러나온다 '호미'도 갈려니와 살손조니라 바다 밋 산호빗은 깁허야 곱다 우악재 저기노코 독립문예라 뜬 구름 나려서라 '얼'이 솟는다 |
3. 역사
국학대학은 1929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1] 에 있던 보명의숙(普明義塾)을 정봉현이 인수하여 1933년 화산보통학교(화산학원)를 설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해방 이후 정봉현의 자손인 정의채가 같은 정씨집안 사람인 국학자 위당 정인보에게 민족교육기관 설립을 의논하였고, 위당이 이에 응해 국학(國學)이라는 교명을 정하고, 정의채는 재산을 기부하여 1946년 국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대 이사장 정의채, 초대교장 정열모) 설치학과는 문학과와 사학과였다고 한다. 이후 초대 이사장 정의채가 세상을 떠나고 미망인 고대복이 2대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정인보를 2대 교장으로 초빙한다. 이후, 대학으로 승인받아 법학과와 경제학과를 추가하여 총 4개과를 갖추고 1947년 11월에 국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국학대학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외솔 최현배, 이극로, 양주동 등 당시 한국 국학 연구의 대가들이 강단에 섰다. 특기할만한 점은 초창기에 정인보, 최현배, 양주동 등 연세대학교와 주요 교강사진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인보는 직접 한국학 강의를 하는 한편, 영남과 호남의 유림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학교 재정에 도움을 요청하고 다녔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위당 정인보가 납북되면서 이후 국학대학은 동력을 크게 잃은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연세대 출신 교수들이 교강사진의 상당수를 차지했었지만 6.25 때 연세대가 부산으로 피난한 반면 국학대가 대전으로 피난하여 서로 제갈길을 가게 되면서 거의 연이 끊어져 버린 것으로 보인다.
피란 시기에는 대전 충남도청 부속건물에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으며[2] 1952년에는 문학부(문학과, 사학과)와 정경학부(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설치하였다.
1956년에는 정부가 당시 무분별하게 증원되던 대학 정원에 제동을 걸며 사학설치기준령을 공포하여 대학 정원을 감축하였는데, 이때 국학대학은 정치학과, 상학과, 영문과 1, 2부가 폐지되고, 국문학과, 법학과, 경제학과 각각 2부의 정원이 감축되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기사.
1960년대에는 학내분규와 입시비리로 학교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960년 학장 노재명이 이사진 양춘선 등을 제거하기 위해 학생 오십여명을 배후에서 선동, 공금을 제공하고 양씨에 대한 폭력을 사주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1961년 정부의 대학구조개혁 시기에 성균관대 총장을 포함한 12명의 취임인가 취소에 학장 노재명의 이름이 또 올라간다. 1961년 11월 문교부에서 발표한 '사립대학정비기준'에 의해 4년제가 폐지되고 2년제 초급대학으로만 재인가되었다. #
1961년 말 새로운 학장이 취임하고, 1962년에서 1963년에 걸쳐 정릉에 새로운 캠퍼스를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하지만 이 즈음 대학인가마저 정상적으로 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963년 9월 본관 신축기공식과 관련하여 '국학대학이 내년(1964년) 4월 단과대로 부활한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1963년 12월 국학대학이 문교부에 4년제 정규대학 부활을 신청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관련기사.
1963년 졸업식에서는 2백여명의 정식 졸업생 외의 1천여명에게 돈을 받고 졸업장을 발부했다는 의혹에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등 최악의 막장 학교로 전락했다. 1964년 신입생 모집요강을 보면 국문학, 영문학, 사학, 법률학, 경제학과 모집생을 각 20명 씩 4년제로 선발했고, 국문, 영문, 가정, 지역, 상, 행정, 원예, 체육, 관광과를 2년제로 선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12월, 시설을 갖추지 못한 초급대학에 대한 정부의 폐교, 폐과 조치에 의해 지역, 관광, 체육, 행정, 국문과 각 80명 총 400명의 인원이 감축, 과는 폐과되었다.
결국 1966년 3월 수도의과대학을 운영하던 학교법인 우석학원(友石學院)에 인수되어 1967년 2월 제17회 졸업생 배출을 끝으로 수도의과대학과 통합, 우석대학교(友石大學校)가 되었다. 학교법인 우석학원 또한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1971년 고려대학교에 합병되어, 국학대학의 역사는 최종적으로 고려대학교와 이어지게 되었다.
4. 초대학장 위당 정인보
실질적 설립자와 같은 위당 정인보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국학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시대 때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며, 당시 같이 교편을 잡고 있던 외솔 최현배, 용재 백낙준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말살 위기에 처해 있던 국학 연구를 주도하며 민족의 얼과 혼을 지켰다. 연세대학교의 제2 인문관 건물이 위당 정인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위당관'으로 명명되었다.[3]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초대 감찰위원장[4][5]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학대학을 설립한 후에는 최현배, 양주동 등 연세대 교수진을 적극적으로 국학대에 출강시켰고, 이는 초기 국학대가 자리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될 때 피란을 가지 않았는데 그해 7월 납북되었으며 얼마 안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국민들을 남겨놓고 도망가느니 같이 고초를 겪겠다고 했다 한다. 북한에서는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납북자들의 죽음을 미국 탓으로 돌리려는 북한 측의 조작으로 보여 신빙성은 떨어진다. 벽초 홍명희와 막역한 친구이자 사돈[6]이었기 때문에 월북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북에서 반동으로 몰렸다고 하며, 그의 아들은 6.25 전쟁 중 한국군 제5사단의 일원으로 철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민주화 시기 이전에도 정인보의 시조 등의 작품은 교과서에도 여러번 실렸다.
위당은 워낙 대쪽같은 성품에 고지식해서 국학대학장 시절에 학교에서 개인 자가용을 내준다고 했는데도 흑석동 집에서 서대문 학교까지 전차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5. 대종교 관련 재단
초대 이사장 집안부터 초대교장, 위당 정인보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홍익대학교, 단국대학교, 신흥초급대학(경희대학교의 전신)과 함께 각각 설립과정에서 대종교와의 연관성이 있다. 물론 대종교 교단차원의 설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종교측 자료에는 홍익대학과 함께 교단내의 대표적 교육기관 설립이라고 되어 있다. 국학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지니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5.1. 설립과정에서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대학교
- 홍익대학교: 학교명부터가 단군의 홍익인간에 따온 것이다. 설립과정에 대종교 재단으로 출발하였다. 지금의 재단은 대종교와 관련성이 없다고 한다. 5.16 이후 미술대학으로 격하되었다가 환원되고, 1971년 수도공과대학을 인수해서 종합대가 되는 과정 등 엎치락뒤치락하며 재단도 바뀌었다고.
- 단국대학교: 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장형이 1914년 대종교에 입교,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를 지낸 교단의 원로급 인사. 단국이라는 교명도 단군과 애국을 뜻함.
- 신흥초급대학: 경희대학교의 전신.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이어 설립된 신흥대학의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7]이 역시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 으로도 선출되었던 대종교 원로급 인사였다.
6. 기타
- 국학대학 축구부가 당시 대학축구에서 이름을 날렸던 시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1954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 1960년 대학축구리그 우승
- 매일경제신문의 창립자인 정진기가 이 대학 출신이다.
7. 관련 문서
[1] 현재의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인근이다. 이이화의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에서는 국학대학이 현 현저초등학교 자리라고 하는데, 현저초등학교는 없다(...). 이이화 클라쓰 국학대학의 신입생 모집공고에 현저동 64번지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캠퍼스가 현저동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2]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연령대가 높은 학자 등의 약력에 대전국학대학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대전에 2년 이상 꽤 오랫동안 있었던 모양. 실제로 국학대학 1956년 경 졸업앨범을 보면 충청도 출신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특히 대전, 공주, 부여, 조치원 출신이 눈에 띈다. 후술할 이유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는 국학대학의 잊혀진 자료가 약간량 존재하는데, 열람가능한 자료 중 하나가 이 졸업앨범이다.[3] 연세대 제1인문관 건물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호를 따 외솔관으로 명명되었다.[4] 감사원의 전신[5] 이승만이 삼고초려할 정도로 부탁을 해서 취임했는데, 워낙 대쪽같은 위당이 이승만의 측근인 임영신(중앙대 설립자이자 초대 상공부 장관)이 관용차로 개인선거 운동을 하고, 부정을 저지른다며 독직사건을 파헤치는 바람에 도리어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어 1년여 만에 사임하게 된다.[6] 정인보의 딸이 홍명희의 아들과 결혼. 그의 외손도 북에서 문인, 학자로 성장했다.[7] 우당 이회영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