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파일:102항명파동.png1971년 10월 2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 내 일부 국회의원들이 규합하여 당시 내무부장관 오치성의 해임을 획책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사건이다.[1] 해임건의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주동자들은 모조리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정치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2. 상세
1971년 6월 박정희는 내각 개편을 단행하여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2] 오치성은 육군사관학교 8기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으며 역시 육사 8기였던 김종필과 매우 가까웠던 인물이다. 박정희가 김종필, 오치성을 정부에 불러들인 것은 3선 개헌에 앞장서면서 위세가 커진 공화당 4인방(김성곤[3], 길재호[4], 김진만[5], 백남억[6])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7][8]사실 박정희는 이전에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공화당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3선 개헌에 회의적이었던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4인방을 밀어주었다. 하지만 3선 개헌을 성사시키면서 김종필이 뒤로 밀려나고 4인방의 영향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4인방을 견제하기 위해서 김종필계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9] 그리고 박정희의 의도대로 오치성은 4인방 계열의 각료, 정부인사들[10][11]과 법관, 고위검사, 군 장성들, 그리고 4인방 계열 라인에 속해있는 도지사, 직할시장과 시장, 군수, 경찰서장을 정리하면서 4인방의 영향력을 점점 줄였다. 또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군대 내의 4인방계 인사들도 정리하면서 4인방의 영향력을 계속 최소화했다. 이에 4인방은 오치성을 거세할 기회를 엿봤다.
[080073] 국무위원(내무부장관오치성)해임건의의건(김원만의원 외 88인)
[080074] 국무위원(법무부장관신식수)해임건의의건(정헌주의원 외 89인)
[080072] 국무위원(경제기획원장관겸부총리김학렬)해임건의의건(권중돈의원 외 88인)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광주대단지사건과 실미도 사건을 이유로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국회에 건의하였다. 이에 4인방은 민주공화당에서 자기들 계보에 속한 국회의원들에게 해임 건의안을 찬성하도록 했다.[12] 그렇지만 오치성의 내무장관 임명 자체가 박정희의 뜻이기 때문에 이들 4인방의 움직임은 바로 박정희에 대한 항명을 뜻했다.[13] 이 때문에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9월 30일 김종필은 서울신문사로 찾아가서 마지막까지 오치성을 치는 것은 곧 대통령에 대한 반항이고 무력시위가 된다면서 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지만 김성곤은 자신은 오치성만 노리는 것이지 대통령을 노리는 것이 아니며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오치성에게 본때를 보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이에 김종필은 정 오치성과 일할 수 없다면 박정희에게 직접 해임안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새벽 2시까지 이어진 설득에도 김성곤은 민주공화당의 정치자금을 대는 것이 자신이니 박정희가 화나도 설령 자신을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요지부동이었다.
국무위원(내무부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의건 | |||||
(의안번호: 080073) (발의일: 1971년 9월 30일) (의결일: 1971년 10월 2일) | |||||
재적 | 재석 | 가(可) | 부(否) | 기권 | 무효 |
204 | 203 | 107 | 90 | 0 | 6 |
결과 | 재적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여 가결 | ||||
후속 절차 | ● 대통령 : 해임건의의건의결서 수령 및 국무위원 해임(헌법 제59조 제3항) |
결국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찬성 107표, 반대 90표, 무효 6표로 가결되었다[14]. 해임안 가결 직후 김성곤은 자신이 이겼다고 의기양양해져 골프를 치러 갔고 김종필이 이를 직접 박정희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격노하여 "이놈들 지금 나한테 덤비는 거야?"라고 호통을 치며 즉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호출하였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이후락이 격노한 박정희를 보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면서 나타났고[15] 박정희는 "김성곤 일당을 모조리 다 잡아들여서 무슨 마음을 가지고 항명했는지 밝히라"고 지시했다. 그날로 4인방을 포함, 공화당 의원 20여명이 중앙정보부로 끌려 들어갔다. 그 중 주동자급 인물이었던 김성곤과 길재호는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특별히 더 호되게 고문을 당했고, 김성곤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까지 뽑혔다. 이후 두 사람은 공화당에 탈당계를 내고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당했다.[16] 심지어 육영수의 오빠로 박정희에게는 손위처남인 육인수 의원도 정보부에 끌려가서 구타당했다. 이외에 김창근, 김진만, 김재순, 강성원, 문창탁 등 공화당 의원 23명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 다만 백남억과 김진만은 눈치 빠르게 표결에 참여하지 않아서 탈당까지는 가지 않았다.
역대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안 가결 사례 | |||
<rowcolor=#ffffff> 연도 | 정부 | 해임대상 | 해임여부 |
1955년 | 이승만 정부 | 임철호 농림부장관 | 사퇴 |
1969년 | 박정희 정부 | 권오병 문교부장관 | |
1971년 | 오치성 내무부장관 | ||
2001년 | 국민의 정부 | 임동원 통일부장관 | |
2003년 | 참여정부 |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 |
2016년 | 박근혜 정부 |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 대통령 거부 |
2022년 | 윤석열 정부 | 박진 외교부장관 | |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 | |||
2023년 | 한덕수 국무총리 | ||
<rowcolor=#ffffff> |
즉 장관 임명에 불만을 품은 국회의원이 해임 건의안을 통하여 민주적 절차로 장관을 해임하자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움직여 불법으로 집권 여당 소속의 국회의원을 납치하고 감금 및 고문한 사건이다.
당초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4인방을 친위대로 내세워서 개헌에 회의적인 김종필 세력을 박살내고 강제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형욱과 4인방의 권력이 커지자 다시 김종필계를 중용해서 4인방을 뭉갰다.[17]
더불어 2년 전인 1969년 3선 개헌 통과 직후 김형욱도 하루 아침에 내치고 비교적 온건한 충성파인 김계원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혔다.
오치성 본인은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지 이틀 후인 10월 4일에 사표를 제출하였고 10월 7일
1971년 10월 23일 1971년도 제1회 추가경정 예산안을 심의하기 위한 제78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신민당 김한수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는데 김충식 기자의 남산의 부장들에 인용되어 유명해졌으나 남산의 부장들에 인용된 발언은 실제 속기록과는 차이가 좀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김한수: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엊그제까지만 해도 조석으로 얼굴을 맞대고 그리고 우리들과 친숙한 벗이였으며 또 이 나라 정계의 대원로였던 김성곤, 길재호 두 선배의 체취가 아직도 넘치는 저 의석은 비록 아무 말도 없지만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을 한없이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정치인 김성곤, 길재호 두 선배는 바로 20여일전 중앙정보부의 철권에 의해서 아주 타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뽑아준 3천만 국민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의원직을 상실당했읍니다. (...) 어느 실력자는 한밤중에 십수명의 정보요원들이 몰려와가지고 연행을 강요하길래 너희들 부장이 오면은 가겠다하고 거역을 했다가 CIA로 끌려가 얼마나 고문을 당했든지 생으로 무엇을 쌌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읍니다. 이분도 이 자리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비통한 눈물을 머금고 탈당서에 날인을 했다는 얘기가 있읍니다. 본 위원은 본 위원이 들은 이 정보들이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나의 귀가 나의 청각이 잘못되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3. 결과
10.2 항명 이후 공화당 내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따라서 10.2 항명 파동은 1972년의 10월 유신을 추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1969년의 3선 개헌 때도 개헌에 반대하는 항명세력을 찍어누른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비슷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입장에서도 1971년 대선과 제8대 총선에서 야당의 잇다른 약진이 정권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해였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가 1975년까지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반대파를 내칠 조치를 취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해서 종신집권제로 변환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나름 반대파를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유신은 남아 있던 공화당 내의 충성파들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무리수였다.민주공화당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여파는 10.26 사태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박정희 사후의 정국에서 김종필을 비롯한 민주공화당 세력은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 공화당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불법 장악한 신군부와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민당이 양분되어 주도하는 정국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채 공화당 출신 정치인들은 신군부가 결성한 5공의 관제야당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치생명을 이어나갔고 나머지 인원들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김성곤은 정계 은퇴 후 도미하여 보스턴에서 지내던 중 1973년 1월 트루먼 대통령 장례식 참석차 방미한 김종필과 만나게 되었는데 김성곤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자 김종필이 중재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1973년 9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임명되었지만 1975년 2월에 61세로 뇌출혈로 급사하였다.
4. 여담
- 이 사건 당시 묘한 태도를 취한 인물은 바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었다. 당초 박정희는 공화당 내에서 오치성 장관을 해임시키려는 기미가 보이자 이후락에게 이를 막으라고 지시했지만 이후락은 이상하리만치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고 어떻게든 해임 건의안 통과를 막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공화당 원내총무 김재순이 이후락을 직접 찾아가 "지금 (공화당)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건 국회의원 김재순이 묻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에게 공화당 원내총무 김재순이 묻는 것이오! 반란표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라고 다그치자 이후락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김재순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공화당 원내총무님께 보고 드립니다. (해임 건의안은) 절대로 부결됩니다. 공화당 내 반란표는 절대 없습니다!" 라며 군대식 어투로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후락은 이미 4인방의 반란이 기정 사실인 것으로 보고 일부러 그들의 행동을 방조한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이었다. 만에 하나 오치성의 해임 건의안이 부결된다면 그것은 중정의 공작이 먹힌 셈이고 설령 건의안이 가결되더라도 박정희에게 욕은 먹을지언정 공화당을 쥐고 흔들던 4인방이 거세되면 자신의 입지가 훨씬 넓어질 것이므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 이후락에겐 절대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공화당 4인방이 일을 저질러 놓았지만 박정희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는
아마도있었다.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킨 그날 오후 김성곤과 길재호 등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골프를 치러 능동의 서울컨트리클럽(현 서울어린이대공원)에 갔는데 공교롭게도 박정희 또한 오치성 장관 해임 소식을 듣고 불쾌해진 마음을 풀고자 박종규 경호실장과 함께 골프장에 와 있었다. 4인방은 박정희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자 라운딩은 시작하지도 않은 채 바로 내빼 버렸고 이를 클럽하우스에서 지켜보면서 더 격노한 박정희는 9홀을 돈 후 청와대로 돌아와 이후락 중정부장을 불러 "이번 내무장관 해임에 관여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엄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후일 4인방의 한 명인 김진만은 "만약 (오치성 장관)해임안이 통과된 후 골프장이 아닌 바로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각하께서 앞으로 만사를 순조롭게 풀어갈 수 있도록 한 결단이었다' 라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사건은 의외로 잘 풀렸을 지도 모른다. 그 때 골프장에서 도망간 것이 일을 더 악화시켰다"며 회고하였다.[20]
- 김성곤은 자신의 재력과 인맥 등을 바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내각책임제로 개헌하여 국무총리를 한번 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과소평가 한 김성곤은 결국 그 댓가를 호되게 치르고 처참한 모습[21]으로 정계에서 쫓겨나다시피 은퇴하고 말았다. 사실 박정희는 7대 대선을 치를 때 김성곤의 돈을 많이 썼다고 실토할 정도로 김성곤의 신세를 많이 진 것은 인정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자에게는 냉혹하리 만치 가차없었다.
[1] 기사 제목에 朴총재라고 나와 있는데, 당시에는 당정분리가 이뤄지기 전이라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했다.[2] 국무총리가 백두진에서 김종필로 바뀌었고 외무부장관이 최규하에서 김용식으로, 내무부장관이 박경원에서 오치성으로, 법무부장관이 배영호에서 신직수로, 문교부장관이 홍종철에서 민관식으로, 건설부장관이 이한림에서 태완선으로, 보건사회부장관이 김태동에서 이경호로, 문화공보부장관이 신범식에서 윤주영으로, 과학기술처장관이 김기형에서 최형섭으로 바뀌었다. 이 중에서 국무총리와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이 김종필 쪽 인사이거나 박정희 친위대였다. 8월에는 국방부장관도 정래혁에서 유재흥으로 바뀌었다. 새로 국방부장관이 된 유재흥도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고 범 김종필계에 속했다. 민관식도 민간인 출신이지만 김종필 라인이었다. 다만 민관식은 4인방과도 나름 친했다.[3] 당시 중앙위의장[4] 당시 정책위의장[5] 당시 재정위원장[6] 당시 당 의장[7] 4인방은 재계에도 힘이 상당했는데 김성곤은 알다시피 쌍용그룹 창업주에 동양통신 회장이었고 김진만 또한 북성화학을 설립했고 강원일보 사장을 지낸 데다 아들이 동부그룹 창업주인 김준기였다. 뿐만 아니라 백남억도 나중에 한국자동차보험 회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도 인척으로 연결되어 있고 길재호도 나중에 삼정펄프 사장을 지냈다.[8] 4인방은 옛 이기붕계의 후원도 받고 있었는데 김성곤, 김진만이 자유당 출신으로 이기붕과 친분이 깊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4인방은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에도 자유당 및 이승만 정부 인사들과도 상당히 친분을 다졌으며 그 외에도 백남억을 통해서 민주당 출신인 박준규, 민관식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 외에도 그걸 통해서 김준태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를 통해서 4인방은 구 자유당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은 것은 물론, 재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었고 언론계, 사학계와도 친분이 깊었다. 그 외에도 원로 법조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야당인 신민당 정치인들과도 나름 친분이 있었다. 그 외에도 대법원 판사들 중에서도 4인방계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 제법 많았다.[9]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부터 끊임없이 '2인자 박치기'를 유도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용인술을 보여주었다. 다만 말년에 가면 박정희가 차지철 경호실장을 일방적으로 편애하면서 이런 측근들간의 권력투쟁 구도가 무너졌다. 결국 차지철에게 과도하게 힘이 쏠리면서 청와대 내부의 견제와 균형은 무너졌고 10.26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10] 김종필이 총리가 되기 이전에 총리였던 백두진은 4인방과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고 최규하, 박경원, 배영호, 홍종철, 이한림, 김태동, 신범식 도 어느 정도 범 4인방계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백두진, 최규하, 배영호, 이한림, 김태동 등은 이승만 정부 시절 군부, 사법부, 행정부에서 공직에 종사했고 신범식, 홍종철, 박경원은 박정희의 최측근이면서 5.16 군사정변에 같이 가담하거나 4인방과 같이 민주공화당 창당에 관여했다. 다만 교체 이후에도 각료로 내각에 들어온 김용식, 태완선, 이경호 등은 나름 4인방과 가까운 사이였다. 민관식 역시 김종필계지만 4인방과도 어느 정도 절친했다.[11] 치안국장도 정상천에서 장동식으로 바뀌었다.[12] 이때 신직수 법무부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도 제출되었지만 부결되었다.[13] 당시 공화당 내에서 박정희의 의도에 반하는 움직임은 곧 박정희에 대한 배신, 항명이었다. 4인방이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당내 지분을 상당부분 차지했지만 그것만을 믿고 당을 장악하고 박정희를 견제하기에는 너무 벅찼다.[14] 현 제6공화국에서는 해임건의안 거부가 가능하지만, 제3공화국 당시에는 헌법에 의해 무조건 수용이었다.[15] 이후락은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16] 당시 국회의원은 당적을 잃으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17] 다만 김형욱 역시 4인방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18] 다만 김계원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지 1년만에 물러난다.[19] 김현옥 도 박정희 친위대에 속했으며 동시에 역시 범 김종필계에도 속했다.[20] 실제로 1965년 고다마 사건 때에 그러한 예시가 있다. 고다마 사건이란 일본의 극우 정치 브로커 코다마 요시오가 방한했을 때 그를 만난 김용태와 석정선이 한국의 진짜 실세는 김종필이며, 박정희도 김종필 없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발언했다가 경호실장 박종규의 정보팀에게 죄다 도청당한 사건을 말한다. 중정 수사과장 이용택이 김용태에게 녹음테이프를 들려주자 김용태는 대경실색 했고, 그를 살려주고 싶었던 이용택의 조언에 따라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하겠다는 쇼를 벌였다. 이후 박정희에게 김용태가 죄책감으로 죽어버리겠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박종규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자살할수도 있다며 거들었고, 박정희가 "그래? 두목(김용태의 별명)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라며 눈감고 넘어가면서 유야무야 된 바 있다.[21] 항명 파동으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트레이드 마크이던 콧수염을 뽑히는 것은 물론 심한 구타 끝에 배설물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김성곤이 심하게 당한 것에 대하여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도 "일국의 국회의원을 생으로 무엇을 쌀 정도로 두들겨 패도 되는가?" 라고 치를 떨며 성토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