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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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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경호실장
박종규
朴鐘圭 | Park Jong-gyu
파일:피스톨박.jpg
<colbgcolor=#083388><colcolor=#fff> 출생 1930년 5월 28일
경상남도 창원군 구산면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사망 1985년 12월 3일 (향년 55세)
서울특별시
본관 밀양 박씨[1][2][3]
마산(馬山), 산은(汕隱)
재임기간 제2대 대통령경호실장
1964년 5월 17일 ~ 1974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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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83388><colcolor=#ffffff> 형제자매 동생 박재규
배우자 이종원
자녀 슬하 2남
학력 일본도쿄육군항공학교 (수료)
육군보병학교 (수료)
정치대학교 (정치학 / 학사)
육군정훈학교 (수료)
미국육군포병학교 (수료)
미국육군보병학교 (수료)
미국육군공수학교 (수료)
육군고급부관학교 (수료)
육군기갑학교 (수료)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석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0
경력 제25회 대한체육회 KOC위원장
제25회 대한체육회 회장
제10대 국회의원(경남 제1선거구)
제2대 대통령경호실장
중국문화대학 명예철학박사
군사 경력
임관 육군종합학교 (5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5년 ~ 1964년
최종 계급 대령 (대한민국 육군)
참전 6.25 전쟁 }}}}}}}}}
1. 개요2. 생애3. 여담4. 선거 이력5. 소속 정당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체육행정가, 청와대 경호실장. 본관은 밀양(密陽).

2. 생애

1930년 경상남도 창원군 구산면(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교토시에서 성장하였다.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하사관으로 복무 중 육군종합학교 제5기로 입교해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파일:/image/001/2011/05/15/PYH2011051507040001300_P2.jpg
1961년 5월 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지켜보는 정변의 주도 세력.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10809004625c000c010-001.jpg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함께.
1961년 5.16 군사정변의 핵심 요원으로 참가하여 박정희의 경호, 공수특전단 출동, 국무총리 장면 체포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반도호텔 장면 집무실로 쳐들어왔을 때 걸려온 CIA 한국지부장 드 실바의 전화를 받고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미국측을 설득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의 경호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과 동시에 경호대장으로 근무했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1964년 5월 문교부 차관으로 이동한 홍종철의 후임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승진했다. 대통령경호실장 으로 재임하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를 후원했고, 암살사연구(1971)와 그 속편(1973)을 집필하였다.

1973년 12월 자신과 권력 다툼을 하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윤필용 사건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실각하자 2인자 노릇을 하였다.[4] 이 때 이후락을 몰아내고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윤필용 사건을 크게 키웠다는 설이 있다.

1973년 한 연회를 주최했는데 이때 대타로 피아노 반주를 하고 미소라 히바리 노래를 하나 불렀던 심수봉이 그의 눈에 띄어 그가 여는 비밀 사교 파티에 심수봉을 자주 불렀다. 그러다가 심수봉은 그가 대통령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후인 1975년 대통령 만찬 자리에 불려가기 시작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인하여 경호실장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휘하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과의 총격전을 벌이다가 실수로 합창단원인 장봉화 양[5]에게 총을 쏴 사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박종규는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권총을 떨어뜨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대응을 못해 더 까였다.
파일:u4VoBh2.png
파일:/image/108/2005/02/11/2005021119402128109_1.jpg
당시 송출된 방송 화면 캡쳐 장면.[6] 왼쪽 하단의 검은 형체는 문세광이다.
1978년 12월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산시-진해시-창원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영삼을 구속하려 하자 지역구 민심 때문에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같은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신민당황낙주와 자주 접촉하였다.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고 의원직 사퇴는 물론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이후 죽기 전까지 IOC 위원으로 지내다가 1985년 12월 3일 상오 0시 30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간암으로 인해 향년 55세로 사망했다.[7] 그러나 노스롭 스캔들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재산 헌납 후에도 다른 이의 명의로 이미 많은 재산과 회사를 소유하고 있던터라 정재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은 물론 전두환에게도 접근 가능했다.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이 점이 묘사되었는데 본인이 헌납 대상 명단에 포함된걸 이미 알고 대놓고 전두환에게 '날 밟고 가시오'라고 자폭해준다.

3. 여담

  • 사격을 무척 좋아했으며 별명이 "피스톨 박"이었다. 1970년부터 1985년 사망할 때까지 대한사격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1978년 세계 사격 선수권 대회를 유치했는데 대한민국이 최초로 개최한 세계구급 스포츠 대회이고 이 대회를 위해서 태릉 국제사격장을 만들었다. IOC 위원과 대한사격연맹 회장으로 당시 국제 스포츠계에서 말빨이 통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8]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막후에서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별명이 붙은 까닭이 좀 지저분한 것이, 그가 과잉 충성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을 겨누면서 안하무인으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기 때문이다.[9] 박정희가 전라북도 현지 시찰을 갔을 때 이춘성 전북도지사[10]가 박정희에게 담뱃불을 붙였는데 라이터가 고물이었는지 불이 높게 치솟아 박정희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박정희가 다치지도 않았고 큰 소동이 없었는데 박종규는 박정희가 안보는 틈을 타서 전북도지사를 골목으로 데려가서 때렸다. 나중에 이춘성 지사가 박정희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했는데 박정희는 그 말을 듣고 "임자 나한테 몇대 맞은 셈 치세."라고 달래서 유야무야되었다. 물론 이 일이 있은 후 박종규에게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때려 치우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 박정희가 시찰 중에 대구사범 출신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는 무의식적으로 "야 박정희 오랜만이다!"라고 했으며 박정희도 반갑다고 인사했다. 둘이 헤어진 뒤에 박종규가 손을 써서 그 사람을 직장에서 해고되게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박정희를 다시 만나서 "아무리 대통령이라지만 명색이 우리 둘이 친구 사이인데 반말 한번 했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항의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결국 박정희는 친구를 직장에 복직시키고 박종규를 불러다가 일을 뭐 이따위로 하느냐고 질책했지만[11] 끝내 그의 과잉충성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 자기 부하한테도 그런 폭행은 얄짤없었던 모양인지 채명신 장군은 본인의 회고록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 밝히기를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대구 2군사령부에 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에 지방 순시를 나오자 채명신 장군은 대통령의 마중을 나갔었다. 이 때 경호원이 경상북도 경찰국장인 서재근 경무관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고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있는 자리에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자 즉시 경호원을 반쯤 두들겨패고 다시 자리에 합석했다고 한다.
  •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영남대학교 근처를 지나가면서 "여기선 대학이 안보이네"라고 한마디 하자 즉시 거대한 탑[12]을 세워서 그곳을 지날 때마다 영남대학교가 보이게 했다고 한다.
  • 육영수와는 영 좋지 못한 사이였다. 경호실에서 박정희의 술 시중 돕는 여성들을 섭외하는 이른바 채홍사 역할을 할때마다 육영수는 박종규를 불러 "각하를 망칠 작정인가"라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육영수의 호출이 떨어질 때마다 박종규는 부하 직원들에게 "도살장 끌려간다"며 푸념을 했다고 한다. 때문에 박종규는 청와대를 나갈 수 있으면서도 요직이기도 한 주미대사[13]중정부장을 하고 싶어했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 박정희가 경상남도 저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도중 낮에는 저도에 가서 쉬다가 저녁에 진해해군공관으로 돌아오고는 하였다. 며칠 동안 아침과 저녁으로 대통령 일행이 이동을 하게 되니까 자연히 해군의 경호가 따르는 등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을 보고 저도의 목조 주택을 수리해서 그곳에서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지시를 내리자 정주영과 함께 목조 주택을 석조 주택으로 바꾼 전력도 있어 다음 해에 온 박정희가 격노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새로 만든 석조 주택보다 원래의 목조 주택을 더 좋아했기 때문. 이 건은 정주영이 자기가 사재를 털어서 한 일이고, 돈도 별로 안 들었으니 그냥 쓰시라고 설득하여 어찌어찌 잘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만든 이 석조주택이 지금의 청해대 본관이다.
  •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술에 만취하면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박정희 나오라며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튿날 가볍게 꾸짖었다고 한다. 박종규가 사용하던 권총이 현재 목동 사격장에 있다.[14]
  • 동양고속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인물인데 동양고속 주식을 갖고 있었다. 노스롭 스캔들에 연관된 기업 중에 동양고속이 있었으며 동양고속의 실 소유주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 정도였다. 노스롭 스캔들 당시 동양고속 사장 이민하는 박종규의 처남이었다. 박종규의 동양고속 지분은 이후 친동생인 박재규 전 통일부장관한테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영삼의 사돈이었던 김웅세 롯데월드 사장은 원래 철도청 공무원이었는데 박종규가 청와대 경호실 직원 아파트를 짓기 위해 철도청 소유 토지를 헐값에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담당 공무원이었던 김웅세가 거부를 하자 전화를 걸어 쌍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김웅세를 소신있는 공무원이라고 높이 평가했는지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 돈욕심이 매우 많았다. 오죽하면 이후락과 함께 박정희 정권 부패의 상징으로 거론될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권력의 흐름을 잘 읽는 편이라서 이후락처럼 고생한 적은 없다.
  • 이후락과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둘 사이를 지켜봤던 강창성 같은 사람들에 따르면 실상은 머리 좋은 이후락이 단순하고 불같은 박종규를 갖고 노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박종규도 이후락에 대해 자격지심이 있어서 사석에서는 이후락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경호실장은 포도대장이고 비서실장은 내시 우두머리"라고 허세를 떨거나 뭔가 섭섭한게 있어 일부러 이후락의 전화도 안받고 삐진 티를 내면 이후락이 경호실장 방에 찾아와 박종규를 달래줬다고 한다.[15]
  • 1978년 10대 총선에 출마하였을때 합동유세장에서 야당 후보였던 황낙주로 부터 이름을 한자로 쓸 줄도 모르는 무식한 군출신이라는 비난을 듣고 화가 나 손을 떨 정도였지만 막상 황낙주와 동반으로 당선되고는[16]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위의 김영삼 사돈과 관련된 일화도 그렇고 대통령의 권위에 관련된 문제만 아니면 꽤 너그럽고 그릇도 컸던듯 하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1[17]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63,069 (37.97%) 당선 (1위)[18] 초선[19]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78 - 1980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0 - 1985 탈당
정계 은퇴
사망

6. 대중매체에서


파일:ParkJK-4.jpg

7. 둘러보기

파일:경상남도 도기(1974-1999).svg 경상남도 제1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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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
하대돈
김택수
신상우
신동관
최치환
노인환
김동영
* 마산·진해·창원 박종규 사퇴 (1980.7.4.)
* 울산·울주 이후락 사퇴 (1980.7.4.)
* 진주·삼천포·진양·사천 구태회 사퇴 (1980.8.27.)
* 울산·울주 최형우 사퇴 (1980.8.27.)
* 거창·산청·함양 김동영 사퇴 (19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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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정공파 25세손 혁거세 69세손 ○규(圭), ○신(信), ○재(在) 항렬.[2] 동일항렬 유명인으로는 가수 박완규 등이 있다.[3] 다른 가문 이긴 하지만 자신이 평생 모시던 상관인 박정희 대통령의 증손자뻘 이다.[4] 그 보다 4년전인 1969년 비서실장 자리에서 3선 개헌 여파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함께 물러나 두어달 뒤, 주 일본 대사로 좌천될 때인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시절도 포함. 한두번의 임시적 2인자[5]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6] 두 번째 총성이 울리자 귀빈석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난 박종규 경호실장이 단상 중앙으로 달려 나오며 허리춤의 권총을 뽑다가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당시 중계영상에 담겨 있다. 박실장의 다른 쪽 손에는 행사 기록부가 들려 있다.[7] 10.26 사태주군을 잃은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연신 폭음했다고 전해진다.[8] 김운용은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나서 국내외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9]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박정희가 정주영(작중 천태산, 배우 최불암이 연기)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친구가 되자고 제안하자 정주영이 그를 수락했는데 죽고 싶냐면서 정주영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마구 협박하는 매우 무례한 짓을 저지르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했다.[10] 1923~1984. 후일 시에라리온/뉴질랜드 대사, 문공부차관 직을 역임했다.[11] 비단 이때만 그랬던 건 아니고 박종규가 사람 팰 때마다 질책했다.[12] 넓디넓은 영남대학교 캠퍼스 가운데 유난히 멀리서 봐도 우뚝 솟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건물이 영남대 중앙도서관이다. 3~5층 정도의 고만고만한 건물 중에서 유독 22층이라는 초고층을 자랑하는데 2005년에 1번 리노베이션을 하여 현재는 당시 세워진 건물 그대로는 아니다.[13] 밑에 서술되어 있지만 박종규는 영어를 위시한 다개국어에 능통했었고 미국 정치권에 발도 넓었다.[14] 사격장과 박종규의 인연은 또 있는데 사격장의 운영자인 박종길 (국가대표 사격 선수 출신,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박종규가 발탁해 국가대표가 되었던 인물이기 때문. 박종길 씨는 '리틀 피스톨 박'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15] 이 비유에는 문제가 있는데, 포도대장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오늘날 서울특별시경찰청장에 대응하고, 내시 우두머리(상선)는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 쯤으로 볼 수 있다. 내금위 수장인 금군별장(정2품)-승정원 도승지(정3품)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16] 당시는 중대선거구제였다.[17] 마산시,창원시,진해시 일대[18] 신민당 황낙주 후보와 동반 당선[19] 80.5.13: 민주공화당 탈당
80.7.4: 의원직 사퇴
[20] 제4공화국에서 김재규 역할을 맡았다.[21] 1992년 SBS 공채 탤런트 2기이며 드라마 원 더 우먼에서 왕필규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