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07:14:08

유승민(탁구)

유승민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우승자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중국 국기.svg 쿵링후이
(200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유승민
(2004)
파일:중국 국기.svg 마린
(2008)

파일:오륜기(여백X).svg파일:오륜기(여백X)_흰색.svg IOC 선수 위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 2016 ~ 2024 브리타 하이데만
(독일, 펜싱)
유승민
(대한민국, 탁구)
주르터 다니엘
(헝가리, 수영)
옐레나 이신바예바
(러시아, 육상)
2018 ~ 2026 엠마 테르호
(핀란드, 아이스하키)
키컨 랜들
(미국, 크로스컨트리 스키)
2020 ~ 2028 파우 가솔
(스페인, 농구)
마야 블로츠초브스카
(폴란드, 사이클)
페데리카 펠레그리니
(이탈리아, 수영)
오타 유키
(일본, 펜싱)
2022 ~ 2030 마틴 푸어카드
(프랑스, 바이애슬론)
프리다 한스도터
(스웨덴, 알파인 스키)
}}}}}}}}}

{{{#!wiki style="margin:0 -10px -5px;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2C5ABB;"
<rowcolor=#FFF> 연도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골프 일반체육
2018년 정운찬 정몽규 유재학 김연경 박세리 김연아
2020년 류현진 정몽규 유재학 김연경 박세리 이기흥, 유승민
스포츠동아에서 스포츠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투표한 스포츠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파워피플’ 명단이다.
}}}}}}}}}||

파일:월드스타엔터테인먼트.pn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소속 아티스트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 -6px -1px -15px"
아티스트
유승민 남현희 eSNa 나다
강은일 유제이 유지니 }}}}}}}}}

}}} ||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유승민
柳承敏|Ryu Seung-min
파일:719C1669-A30E-4741-A956-CA28A5ECB795.jpg
출생 1982년 8월 5일 ([age(1982-08-05)]세)
인천광역시 강화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도화초등학교 (전학)
오정초등학교 (졸업)
내동중학교 (졸업)
동남고등학교 (졸업)
경기대학교 예술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경기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 / 석사[1])
경기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 / 명예 박사)
직업 탁구 선수 (오른손 펜홀더 드라이브 / 은퇴)
탁구 코치
행정가
교수
신체 178cm
현직 IOC 선수 위원
대한탁구협회 회장
경기대학교 석좌 교수
팀유승민 탁구클럽 단장
서울대학교 국제농업기술대학원 특임 교수
2018평창기념재단 이사장
종교 개신교
가족 아버지 유우형, 어머니 황감순
배우자 이윤희, 장남 유성혁, 차남 유성공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2]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플레이 스타일5. 수상 기록6.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탁구 선수 출신 코치, 행정가, 교수. 현역 시절에는 삼성생명 탁구단 소속이었다.

은퇴 후 삼성생명 여자 탁구단의 코치를 역임했으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IOC 선수 위원에 당선됨에 따라 2024년까지 직책을 맡게 됐다. 한때 한국에서 활동이 가능한 유일한 IOC 위원이었다가[3] 지금은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IOC 위원에 선출되어 해소됐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선수촌장을 거쳐 현재는 대한탁구협회의 회장과 팀유승민 탁구클럽의 단장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파일:유승민 내동중학교.jpg
어려서부터 재능을 일찍 피워 부천 내동중학교 시절에 이미 국가대표에 뽑혔을 정도의 탁구 신동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실업팀들 간의 스카우트 경쟁의 대상이 되어 삼성생명의 후원을 받았을 정도였다.[4] 16살 때 1997 아시아 주니어 탁구 선수권에 출전해 단식 4강에 진출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같이 출전한 주세혁과 함께 한국 탁구의 미래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1. 1999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에서 완성형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기대주 왕하오를 단식 결승에서 압도하고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복식에서도 김정훈과 함께 탕펑-왕하오 조를 꺾고 우승하며 2관왕을 달성했다. 이 시점에서 세계 최고 유망주인걸 입증한 셈이다. 단체전에서는 중국에 가로막혀 아쉽게 은메달을 차지하며 대회 2연패는 놓쳤다.

2.2. 2000년

만 18세의 나이에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기존 탁구 최연소였던 유남규(만 20세)의 기록을 경신했으나, 이후 이중 등록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2.3.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복식 종목에 이철승과 함께 출전하여 우승했다. 그러나 단식에서는 4강에도 채 오르지 못했는데, 당시 한국은 오상은이 동메달을 건진 것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에 기대만큼 못 컸다는 이야기도 2000년대 초반에는 나왔었다.[5][6]

2.4. 2004년

그렇게 여전히 중국의 벽을 실감하며 세계랭킹 5위권을 맴돌다 이집트 오픈 등에서 우승하며 세계랭킹 3위까지 차지했다.[7]
파일:/image/001/2004/08/24/kp1_2040823w3389.jpg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 단식 결승에서 당시 세계랭킹 4위였던 왕하오를 세트 스코어 4-2로 꺾어,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유남규, 양영자, 현정화 이후로 16년 만에 금메달을 차지했다.[8][9] 주니어 시절 2승을 해본 이후 성인이 되고 나서 상대전적 6전 6패에, 중국식 이면타법을 완벽하게 받아들여 서브와 포핸드 vs 포핸드의 드라이브 맞대결 이외 모든 기술은 유승민보다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았던 왕하오를 압도했고, 아테네올림픽 모든 경기 중 가장 큰 업셋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충격을 중국 전역에 선포하며 금메달을 당당하게 목에 걸었다. 1세트 왕하오가 긴장한 탓에 스트레이트 백드라이브를 미스한 것을 재빠르게 캐치하고 리시브 커트를 집요하게 왕하오의 백사이드로 준 뒤 포핸드 랠리를 유도해내 힘으로 압살하는 전략이 주효했으며, 왕하오는 해당 경기 이후 2주간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었을 정도로 분해했다고 한다.

이 금메달로 세계 랭킹도 2위로 올라섰고, 이후로 한국 남자선수 중 유승민 랭킹에 근접한 선수는 없다. 비슷한 세대인 오상은주세혁[10]이 최고랭킹 5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후 중국 탁구가 2008, 2012, 2016 올림픽에서 메달을 싹쓸이하는[11] 넘사벽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2004년의 이 금메달은 한국 탁구가 보여준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사족으로 1999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이후 유승민과 왕하오의 당시 통산전적은 시니어 기준으로 0승 6패인 절대적인 열세였고, 금메달을 딴 아테네 올림픽 이후에는 다시 기량이 뒤처져 왕하오에게 전패해 통상 11전 전패, 결국 은퇴 전까지 최종 전적은 2승 18패로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 2승 중 1승이 결정적인 올림픽 결승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나게 하는 셈. 결승전 당시 유승민의 컨디션이 좋았던 것도 한몫했다.[12] 왕하오는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에서 3연속 은메달이라는 대기록 안타까운 결과를 받아들이며 현재는 은퇴했다. 다만 단체전까지 본다면 왕하오는 2008년 이후로 개인전 은메달 3번 단체전 금메달을 2번 딴것에 비해 유승민은 2004년 이후 개인전은 메달권에 들지 못했고, 단체전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동메달, 런던 올림픽에선 0-3으로 중국팀에게 패배해 단체전 은메달을 마지막으로 2014년에 은퇴했다.

2.5. 2007년

2007 바르셀로나 월드컵 단식 결승전에서 왕하오와 리매치를 하게 됐는데 패배하여 은메달을 들었다.

2.6.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하였으나 단체전에서는 동메달에 머물렀고, 단식에서는 1회전(32강전)에서 홍콩의 고라이착에게 세트 스코어 2-4로 패배하여[13] 2연속 금메달 획득에는 실패하였다.

2.7. 2012년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오상은, 주세혁과 함께 단체전에 나가며 결승에 올랐으나 중국에 0-3으로 패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3. 은퇴 이후

3.1. 2014년

파일:external/nimage.newsway.kr/2015022414031774708_20150224140421_1.jpg
6월에 현역에서 은퇴한 후, 7월부터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다.

3.2. 2016년

차기 IOC 선수 위원이 되기를 희망하여 2015년 하반기부터 장미란, 진종오와 한국 대표가 되기 위한 국내 경합을 벌였다. 일반적인 예상으로는 다른 두 후보가 인지도나 성적 면에서 압도적인 면모가 있어 유승민이 한국 대표가 되기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었는데, 영어 시험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며 두 후보를 물리치고 결국 한국 대표가 되었다.[14]

IOC선수위원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투표로 이루어지며, 총 23명의 후보 중 상위 4명만 당선된다. 이후 폐막식 날 열리는 IOC 총회에서 과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올림픽 시작 10일 전부터 브라질에 넘어가 세계 선수들에게 열심히 선거 유세를 펼친 끝에 2016년 8월 19일(리우 현지 시각 18일), 선수위원에 당선되었다. 선수 투표 순위는 2위기록했다. 용감한 기자들 178회에 따르면 출마 당시 인지도가 너무 없어서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선거운동 규정도 매우 까다로워서 발품을 팔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수촌 내를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선수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홍보책자를 보여주고 자신과 정책을 소개했다고 한다. 선거유세 첫날 선수촌 내에서 약 25km를 걷고 선거 유세 기간에 매일 5시 반에 일어나서 15시간 동안 발품팔기를 했다고 한다.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해가며 25일 간 열심히 활동한 결과 미국 기계체조 대표팀이 먼저 와서 인사를 하고 일본의 탁구 선수 후쿠하라 아이(福原 愛)는 자신이 챙겨온 주먹밥과 간식을 챙겨주며 고생했다고 응원을 하고 한 아프리카 선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네 모습에 감동받아 너를 투표했다"라고 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15]

2000년부터 스포츠외교에 관심을 가져왔다. IOC 선수위원은 16년간 준비한 결과라는 얘기다. 또한 2016년 대한체육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1월에 일어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박태환에게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당시 문체부차관 김종의 녹취록에서 유승민에 대해 "흠이 있어서 IOC 선수위원이 될지 모르겠다"며 비난했다는 것이 알려졌고, 유승민은 인터뷰에서 "김종의 발언은 황당하고 불쾌하며, 스포츠계의 폐단이 사라지고 선수의 인권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자신의 입장밝혔다.

3.3. 2018년

1월 17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수촌장으로 임명되었다. 4월 스웨덴의 할름스타트에서 열린 세계 팀선수권에 한국 팀 단장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마침 8강전에 남북한이 만났다.[16] 이에 ITTF 회장과 북한탁구협회장과 이런 저런 얘기로 출발하다가 일이 커지며 본격적으로 협의하고, 남북 선수 및 8강에 진출한 모든 타국 팀들의 동의를 받고, 본국과도 협의를 거쳐서 현장에서 8강전을 치르는 대신 남북단일팀을 구성해서 4강전에 자동 진출하기로 전격으로 합의하였다.[17] 즉, 유승민은 스포츠 외교가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다만 아무리 당시 팀들 간의 즉흥적 합의가 있었다고 할지언정 행사 전 협의 없이 경기 도중 어떤 두 팀이 만나서 시합을 치르지 않고 팀을 합쳐 둘다 차기 라운드로 진출하는 경우는 없었고, 추후 단일팀이 상대하는 팀들 간의 선수 숫자의 불균형 뿐만 아니라 선수들 개인에게 돌아가는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부작용도 있었으며 유튜브 등을 통해 비춰지는 세계인들의 반응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신랄한 비판들 중에 '대만이 홍콩을 준결승에서 만나 서로 합쳐 결승 진출하고 결승에서 중국과 만나면 또 합쳐서 3개국 공동 우승을 해도 되는거냐'라는 댓글도 있었다. 그 중 일본인들의 반응이 특히 안 좋았는데 심지어 단일팀이 하필 일본에게 3대 0으로 발려버리는 바람에 일본에게는 두고두고 씹을 거리를 제공한 결과가 돼 버렸다. 이후 2018 코리아 오픈에서는 한국 장우진 - 북한 차효심 혼합복식 조가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하는 등 결과적으로도 진일보한 성과를 내었다.

3.4. 2019년

5월 31일 조양호 前 회장의 별세로 공석이 된 대한탁구협회장 보궐 선거에 출마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20년 12월까지 임기를 역임했다. 이후 치러진 회장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해 다시 당선되었고, 2024년 12월까지 대한탁구협회를 이끌 예정이다.

3.5. 2021년

7월 18일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백신 2차 접종을 마쳤고, 일본에 출국하기 직전에도 음성이 나왔는데, 돌파감염이 된 것으로 보인다.

3.6. 2022년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m 계주[18] 메달 시상 위원으로 참여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선수 시절의 유승민은 탁구 역사상 최강의 포핸드를 가릴 때 쉬신, 마린, 왕리친, 마룽과 함께 그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굉장히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선수였다. 포핸드 한 방 드라이브의 위력은 쉬신, 왕리친보다도 강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중국에서도 유승민의 포핸드 능력은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또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직접 득점률이 높은 편인 강렬하고 변화무쌍한 서브[19]일본식 펜홀더를 사용하는 드라이브 공격전형을 구사했다. 테크닉적인 부분에서 극찬을 받았던 스승이자 같은 펜홀더 선배들인 유남규나 김택수와 비교하면 유승민은 기술적인 이점보다는 본인의 파워 드라이브에 의존하는 탁구를 구사했다.[20]

최전성기의 유승민을 보면 엄청나게 빠른 풋워크로 포어 사이드와 백사이드를 빠르게 이동하며,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모습과 랠리를 길게 가져가지 않고 빠르게 끝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유승민 선수의 명장면 모음집들에 다음을 완전히 버린, 온몸을 날리는 한 방 드라이브가 많은 이유.

펜홀더라는 전형 특징상 수비 선수 상대로는 매우 상성이 좋은 편이었다. 또한 탁구 선수로서는 매우 귀중한 신체적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점. 하지만, 스피드 글루[21] 사용 금지 조치로 인한 한 방 드라이브의 파워가 약화되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특유의 풋웍을 잃게 되면서 점차 하향세를 걸었다.

펜홀더의 이점인 강렬한 서브와 김택수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워 드라이브를 계승, 한 방 파워는 더욱 강해진 반면 또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인 완강한 방어는 마이너 판이라는 말도 있으나 세계 탁구의 백핸드를 비롯한 기술의 빠른 발전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 올림픽 이후로도 꾸준히 일정 이상의 성적을 냈으며 뚜렷한 약점을 공략당하면서도[22] 빠른 풋웍과 돌아서기, 좋은 서브와 리시브, 끈질긴 쇼트 방어, 불편한 자세임에도 때로는 백핸드 드라이브로 역습을 하는 등 저력을 보여 주었다. 이런 스타일의 희소성으로 인한 어드밴티지도 없진 않았겠지만 포핸드 파괴력의 이점에 비해 백핸드 약점의 페널티로 인한 한계가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롱런하며 많은 활약을 했다. 하지만 전형의 한계와 신체적 부상 속에서 중국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상 일본식 펜홀더로 성적을 낸 마지막 선수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23] 프로급에선 이미 사용자조차 많지 않은 일본식 펜홀더로 2004년 시점에서 올림픽 우승을 하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고, 어쩌면 그가 마지막 일펜 금메달리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승민이 보여줬던 바람 같은 풋워크와 이어지는 불꽃 같은 포핸드 드라이브는 세계의 많은 탁구 애호가들에게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5. 수상 기록

대회
올림픽 1 1 1
세계선수권 0 0 2
세계 팀선수권 0 2 3
아시안 게임 1 3 1
아시아 선수권 0 1 2
월드컵(단식) 0 1 0
월드컵(단체전) 0 1 1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3 1 1
합계 5 10 10
올림픽
금메달 2004 아테네 단식
은메달 2012 런던 단체전
동메달 2008 베이징 단체전
세계선수권
동메달 2001 오사카 단체전
동메달 2007 자그레브 단식
세계 팀선수권
은메달 2006 브레멘 단체전
은메달 2008 베이징 단체전
동메달 2004 도하 단체전
동메달 2010 모스크바 단체전
동메달 2012 도르트문드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2 부산 남자 복식
은메달 2002 부산 단체전
은메달 2002 부산 혼합 복식
은메달 2006 도하 단체전
동메달 2006 도하 단식
아시아선수권
은메달 2005 제주 단체전
동메달 2003 방콕 단식
동메달 2005 제주 남자 복식
월드컵(단식)
은메달 2007 바르셀로나 단식
월드컵(단체전)
은메달 2009 린츠 단체전
동메달 2007 마그데부르크 단체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7 파나지 단체전
금메달 1999 첸나이 남자 복식
금메달 1999 첸나이 단식
은메달 1999 첸나이 단체전
동메달 1997 파나지 단식

6. 기타

  • 2020년 8월 4일에는 "포털 스포츠뉴스 댓글 서비스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 달라"고 국회에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이후 포털 스포츠뉴스 댓글 서비스가 폐지되었다.
  • 어떤 시합에 출전하면 상대 선수가 누구든 본인이 무조건 이긴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출전한다고 한다. 유승민을 지도했던 유남규 감독도 인터뷰에서 일단 무조건 "자기가 이긴다"고 말하는 유승민의 성격이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상대에 대해 계산적으로 생각하거나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실제로 2004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전술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기세 싸움에서도 왕하오를 압도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
    • 라이벌로 알려진 왕하오와는 사적으로 매우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본인은 딱히 왕하오를 라이벌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중국 선수들은 누가 상대로 나오든 똑같다고 생각하고 경기한다고 한다.
  • 은퇴 이후 굉장히 생활체육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추어 탁구인들을 상대로도 원 포인트 레슨을 자주 진행하며, 특히 같은 펜홀더 전형의 동호인들에게는 각별하다.
  • 생활 체육인들에게 탁구를 알려주는 시간이 있으면 "고정관념을 버려라" 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한다. 대표적으로 몸을 쓰고 큰 스윙을 반복하는 노가다 탁구 드라이브만 드라이브인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작은 스윙으로 치는 드라이브도 드라이브라고 강조한다.
  • 2021년 6·11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이준석 前 최고 위원의 도전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냈다.[24]
  • 슬하에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축구를 좋아하며 축구 선수를 꿈꾸고 있다.
  • 이천수 선수가 유튜브 채널에서 밝히기를 체력이 엄청나게 좋다고 한다. 태릉선수촌에서 권투, 레슬링, 유도, 사이클과 같이 엄청난 체력이 중요한 선수를 제외하고 축구 선수보다 더 체력이 좋았어서 이천수 선수 또한 매우 놀랐다고 한다. 댓글에 곽윤기가 참가해서 본인이 인증까지 해줬다. #


[1] 석사 학위 논문: 남자 중·고 및 실업 탁구선수들의 스포츠상해 연구(2012).[2] 현재 비공개 계정이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을 더 많이 활용한다.[3] 이건희 삼성 회장은 IOC 위원직을 사퇴했고 IOC 선수 위원이었던 문대성은 불명예 퇴직과 다름없는 처지로 위원 생활을 마감했다.[4] 이후 몇 년이 흘러 유승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상황이 바뀌어버려 신생팀 참가 규정에 의해 제주 삼다수가 유승민의 지명권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유승민은 이를 거부하고 삼성생명 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중등록 파문으로 법정 공방까지 벌이기도 했다.[5]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어린 나이부터 동나이는 적수가 없는 수준에 중학생일 때 이미 국가대표에 뽑혔을 정도였다. 물론 탁구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 절대 강세를 보이는 종목이지만, 이미 유남규와 김택수가 중국을 넘어 올림픽 및 아시안 게임 등에서 금메달을 따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승민에 대한 기대는 그 수준을 넘어 세계선수권 등을 쓸어버리는 당대 톱급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남자 단식에는 김택수오상은이 출전해서 유승민은 후보였다.[6] 중국과의 단체전에서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쿵링후이와 맞붙었었는데 좋은 경기력을 보이다 쿵링후이의 노련미에 밀려 패배했다.[7] 이 세계랭킹 3위는 김택수가 1991년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고 오른 걸 제외하면 한국선수 중 찍어본 적이 없는 랭킹이다.[8] 21세기 올림픽 유일무이한 비(非)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래도 유일무이 단식이나 최초 타이틀은 유지된다.[9] 이때의 금메달로 중국에서 열린 중국 올스타 vs 세계 올스타 대회에 세계 올스타 선수로 참여하기도 하였다.[10] 비슷한 세대라곤 하지만 둘 다 유승민 보다 나이가 많다.[11]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남녀 개인 단식에서 금은동을 중국이 모두 석권하고, 남녀 모두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2012, 2016 올림픽에서도 남녀 개인단식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석권한 데다 단체전까지 남녀 모두 금메달을 땄다. 2012년부터 단식 선수로는 2명까지만 출전하게끔 규정이 바뀐 것을 고려하면 그냥 중국이 다 해먹는다고 보면 된다.[12] 유승민은 같은 모델을 사용했음에도 굳이 코치였던 김택수를 졸라 그의 라켓을 빌려들고 올림픽에 임했다. 또한 준결승이 끝나고 나서부터 유승민은 자신이 결승에서 승리할 것임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준결승이 끝난 직후 호텔에서 김택수에게 전화를 걸어 앞뒤없이 결승전에서 자신이 이길 것임을 확신한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13] 1~3세트를 연속으로 내준 뒤 4, 5세트를 따내며 추격했으나, 6세트에서 매치포인트를 먼저 내고도 상대방의 노련한 플레이에 범실이 나오며 무너졌다.[14] 또한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어필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15] 다만 이는 그가 처음 한 것은 아니고 이미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문대성이 똑같이 인지도 바닥일 때 했던 방법을 따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따라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것이, 문대성이야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매일같이 흰색 태권도복을 차려입고 나서서 선거 운동을 했으므로 선수들 눈에 확 띄는 무기라도 있었지만, 유승민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발품을 팔기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16] 예선전에서 북한이 불의의 1패를 당하면서 조2위로 밀려 한국과 만나는 행운이 따랐다.[17] 게다가 일본이 이기면서 4강전이 또 한일전이 되었다.[18] 대한민국이 이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다.[19] 아테네 올림픽 결승 vs 왕하오 전을 보면 중국 중계진의 해설이 유승민의 서브가 회전도 매우 강하며 서브 에이스(서브 자체로 득점하는 것) 확률이 높은 편임을 언급한다. 왕하오 역시 서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직접 실점하거나 회전을 잘못 읽어 리시브가 뜬 바람에 3구 공격을 제대로 얻어맞는 경우가 자주 나왔다.[20] 간과하면 안 되는 점은 유승민이 매우 영리한 선수였다는 점이다. 파워 드라이브로 유명한 유승민이긴 하나, 탑급의 서브&리시브 기술과 그 기술들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선택해 사용하는 판단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만의 넘치는 자신감이 없었다면 파워만으로 세계급 강자들을 꺾고 올림픽 우승까지 이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유승민은 파워 드라이브 뿐만이 아니라 기술력, 연속 공격도 이미 탑급인 선수였다. 포핸드 파워 드라이브로 많이 알려져 있을 뿐 사실 유승민은 주니어 시절부터 기술적으로 보나 신체능력으로 보나 그냥 기량 자체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21] 벤젠, 솔벤트 등이 함유된 러버 접착제. 러버 내부에 장력을 주어, 스피드와 스핀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지만 유해성으로 인해 ITTF에서 금지시켰다.[22] 백핸드를 드라이브로 선제공격을 당하면 쇼트로 방어하든지 기회를 봐서 백핸드 쪽으로 돌아서서 포핸드 대결을 해야 하는데, 프로 급에서 여유있게 돌아설 수 있게 만만한 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어렵사리 돌아서더라도 이번엔 포핸드 쪽이 뻥 뚫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백핸드 드라이브를 연속으로 당하면서도 쇼트로 계속 밀어주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23] 현재 일본식 펜홀더는 백핸드 수비등의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사장되고 있으며, 사실상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한국마저 셰이크핸드로 전환되는 추세다. 그나마 일본의 Yoshida Kaii 선수가 단면 펜홀더(중국계 귀화선수로 엄밀히 말하면 이면에 러버를 붙이지 않은 중국식 펜홀드를 사용한다)로서 아직까지 활동 중이다. 이정우가 왼손 일펜으로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는 등 최근까지 활동했으나 현재는 세계 무대에선 볼 수 없다.[24] 그래서인지 일각에서 22대 총선을 앞두고 부천 을(옛 원미구 을) 지역구의 국민의힘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유승민 본인은 부천 정 지역구인 오정구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