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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7월 18일 | ||
경기도 이천군 | |||
사망 | 1978년 7월 29일 (향년 70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 |||
본관 | 경주 최씨 | ||
재임기간 | 제3대 심계원 차장 | ||
1952년 2월 ~ 1956년 10월 | |||
제4대 심계원장 | |||
1956년 10월 1일 ~ 1960년 6월 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deded><colcolor=#000000> 배우자 | 조영자 | |
자녀 | 슬하 5남 2녀 | ||
학력 | 히메지중학교 (졸업) 마쓰에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학사)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5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무관 후생국 사무관 사정국 사무관 서기관 겸 총무국 조사국장 총독관방 조사과장 조선중앙정보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운동연락위원회 위원 농상국 농상과장 농상국장 고문 천일제약주식회사 이사 심계원 사무총국장 제3대 심계원 차장 제4대 심계원장 제5대 민의원 동광운수주식회사 대표이사 한국정밀기공업주식회사 사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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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정치인. 본관은 경주(慶州).[1]2. 생애
1908년 경기도 이천군에서 태어났다. 효고현립 히메지(姬路) 중학교와 마쓰에(松江) 고등학교 문과,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가야마 가에이(香山夏永/향산하영)이었다.이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총독부에서 내무국 사무관, 후생국 사무관, 사정국 사무관, 서기관 겸 총무국 조사국장, 총독관방 조사과장[2], 조선중앙정보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운동연락위원회 위원, 농상국 농상과장 등으로 있으면서 태평양 전쟁 관련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하였으며,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5년 해방 직전 기준으로 학무국장 엄창섭과 함께 총독부의 유이한 고위직 조선인 관료였다.[3][4]
8.15 광복 후 미군정기 미군정청 농상국장 고문, 천일제약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6월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종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심계원(현 감사원) 사무총국장, 1952년 심계원 차장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1956년 10월부터 1960년 6월까지 제4대 심계원장을 역임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런데 당선은 당선인데 16.94%로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정당 신하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동광운수주식회사 대표이사, 한국정밀기공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둘러보기
경기도 제5대 민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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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 갑 강영훈 사망 (1960.8.15.) * 김포 정준 사퇴 (1960.12.5.) * 옹진 손치호 자격 상실 (1960.12.13.) * 이천 최하영 자격 상실 (1961.2.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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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8년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2대 회장에 취임했다.#[2] 총독 관방은 총독의 비서실로 인사/정보/문서/조사가 있었다. 굳이 따지면 경제통계수석 정도 된다.[3] 해방 23년 뒤인 1968년 월간중앙 8월호에 그가 서술한 것에 따르면, 일본의 패배가 극비회의를 통해 총독부 고위 관료들에게 처음 고지된 것은 1월 중순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런 내용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인정받은(?) 고위 협력자였다.[4] 1945년 8월 11일에 엔도 정무총감(국무총리 격에 해당)과 니시히로 경무국장(정보부장 겸 경찰장관 격에 해당)이 해방에 대비한 조선인 치안 담당자에 대한 자문을 주었다. 그는 최남선의 매제인 박석윤을 추천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