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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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용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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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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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colbgcolor=#ffffff> 출생 | 1900년 3월 18일 | ||
평안남도 용강군 (現 남포시 룡강군) | |||
사망 | 1967년 5월 16일 (향년 67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자택 |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 ||
본관 | 광주 노씨[1] | ||
호 | 용악(龍岳) | ||
재임기간 | 초대 선거위원회 위원장 | ||
1948년 5월 30일 ~ 1954년 4월 17일 | |||
제2대 감찰위원장 | |||
1949년 7월 22일 ~ 1952년 9월 21일 | |||
제3대 심계원장 | |||
1952년 9월 22일 ~ 1956년 9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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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미군정청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 제2대 감찰위원회 위원장 제3대 심계원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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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및 심계원장 출신 정치인.2. 생애
2.1. 해방 이전
1900년 3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現 남포시 룡강군)에서 아버지 노승규(盧昇奎)와 어머니 김능성(金能聲)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7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928년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귀국 후 1928년 평양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같은 해 7월 한근조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사건의 무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이후 1932년 평양에서 조만식·김동원·한근조 등과 함께 한민족의 생활권익을 옹호·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건중회(建中會)를 조직했고, 1934년 평양 거주 인사들로 조직된 해외학우회(海外學友會)[2] 평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6년 김동원 등 평양의 각계 인사 60명과 함께 평양제2인도교가설기성회(平壤第二人道橋架設期成會)를 조직하고 조선총독부에 인도교를 한국인이 거주하는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건설해줄 것을 청원하는 등 나름대로 평양 지역사회 내에서 한국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많이 전개했다.
1937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검거되었고 이에 변호사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 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는데, 1938년 6월 18일, 그는 직전에 같이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한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갈홍기·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현제명·홍난파 등 13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4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했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으로부터 출단 처분을 받았다.
이후 1938년 7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이 창설되자 본부 간사에 임명되었고[3], 이듬해 3월 친일 전향자 평양 대표로 선임되어 일본 가시하라 신궁을 참배했다[4].
1939년 조선변호사 인가를 다시 받아 본업인 변호사업에 복귀하였으며, 그렇게 광복을 맞이했다.
2.2.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판사로 활동했으며, 1946년 5월 26일 미군정에 의해 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1947년 11월 중앙선거위원이 되었고, 1948년 3월 선거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1948년 5월 30일부터 1954년 4월일까지 선거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5월 31일 '국회임시준칙결의안'에 의거하여 최연장자인 이승만을 국회 임시의장으로 추대했다. 같은 해 6월 8일 헌법 제정 전문위원 10인[5]에 선정되어 제헌 헌법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7월까지 대법원 대법관을 지냈으며, 1949년 1월부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의 제2부 부장재판관을 맡기도 했다. 그가 재판한 유명 인물로는 노기주가 있다.
대법관 임기가 끝난 1949년 7월부터 1952년까지 감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1950년 선거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이끌었으며 전라남도의 소록도와 전라북도의 익산군 한센인 정착촌에 투표소를 설치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심계원장을 지냈다. 임기가 끝난 후에는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63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했으나 민주당을 돌연탈당하고 신정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탈당하여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1966년 장면이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다.
1967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자택에서 향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여담
[1] #. 경평공파(敬平公派)-장령공파(掌令公派) 22세 진○(鎭○) 항렬.(족보(1)족보(2))[2] 1932년 9월 농촌구제좌담회를 개최하여 농촌구제책과 농촌진흥대책 등을 강구하였다.[3] 김지형(2003), 「 <반민특위 사람들> 연구 동향 /신간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으로 본 반민특위 사람들 - 반민특위에 스며든 부적격자들, 친일파 청산 좌절의 한 원인」,『민족21』. p. 132[4]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선변호사 인가를 다시 받고자 해서 신사참배를 한 것이며, 이는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오명이었음을 기술했다.[5] 유진오, 고병국, 임문환, 권승렬, 한근조, 노진설, 노용호, 차윤홍, 김용근, 윤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