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7:47:06

수양동우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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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養同友會 事件

1. 수양동우회2. 수양동우회의 와해3. 사회에 끼친 영향4. 매체에서

1.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는 1926년 1월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가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 격으로 통합해 운영되었던 단체였다. 주로 안창호를 따르는 서북 지역(평안남도 일대)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지도이념은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이었다.

안창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 상하이에 머물렀을 때 상해 청년들이 1920년에 흥사단 원동 위원부를 조직했고 경성부에서는 이광수가 수양 동맹회를, 1923년에는 평양부에서는 김동원 등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 학교 졸업생들과 신민회 출신들이 동우 구락부를 조직했다. 주요 인물은 이광수와 주요한, 조병옥 등이 있었다.

회원의 다수가 기독교가 먼저 전파된 서북 지역에서 기독교를 통해 개화 문물을 접했거나 변호사, 의사, 교육인, 목회자와 같은 전문직을 가진 지식인들이었다. 수양동우회는 이상촌을 건설하는 농촌 운동을 전개하고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했다.

성격은 대체로 부르주아적 사회 운동을 추진하는 편이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한 입장은 이광수를 중심으로 자치론적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기독교계 내부의 오랜 서북 대 기호 출신들의 갈등 속에서 수양 동맹회에 대항하여 기호 지역 지식인 중심으로 결성된 이승만의 흥업 구락부와는 일종의 경쟁 관계였다. 1929년에 국외 조직인 흥사단과 국내 조직인 수양 동우회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되었다.

2. 수양동우회의 와해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동우회로 개칭한 뒤 눈에 띄는 활동을 별로 하지 않았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려고 했던 일본에게 양심적 지식인 및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하는 게 중요한 업무가 되었고 그 대상으로 일제는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를 표적 수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37년 6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서울 본부에서 55명, 11월 평안도 평양·선천지회에서 93명, 1938년 3월에는 황해도 안악지회에서 33명 등 모두 181명의 동우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고 1938년 8월 15일 최종적으로 42명이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결수로 투옥되었던 안창호는 1937년 12월 출옥했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이듬해 3월 순국하였고 최윤호(崔允鎬)도 1938년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39년 2월 순국하였다.

1940년 8월 21일 위 두 사람을 제외한 40명은 1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광수는 징역 5년(구류 통산 60일), 김종덕(金鍾悳)·박현환(朴賢煥)·김윤경·주요한 등은 징역 4년(구류 통산 280일), 김동원·김성업(金性業)·김병연(金炳淵)·조명식(趙明植) 등은 징역 3년(구류 통산 190일), 조병옥 징역 2년 6개월(구류 통산 280일), 오봉빈(吳鳳彬)·최능진·백영엽(白永燁)·김찬종(金燦鍾) 등은 징역 2년(구류 통산 190일), 송창근(宋昌根)·조종완(趙鍾完) 등은 징역 2년(구류 통산 60일), 김봉성(金鳳性)은 징역 2년(구류 통산 70일)을 선고받는 등 총 17명이 자유형을 선고받았으며 정인과(鄭仁果)·장이욱(張利郁)·이용설·유기준(劉基峻)·이영학(李英學)·김선량(金善亮)·신현모·이원규(李元奎=李大偉)·김하현(金夏鉉)·이윤재·김용장(金庸壯)·한승인(韓昇寅)·허용성(許龍成)·김항복(金恒福)·오정은(吳正殷)·오상은(吳翔殷)·주현칙(朱賢則)·오정수(吳楨洙)·백응현(白應賢)·석봉련(石鳳鍊)·오경숙(吳敬淑)·한승곤·김배혁(金培赫)·문명훤(文明煊) 등 24명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1년 5월 5일 2심 판결이 파기되었고 1941년 11월 17일 전원 무죄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많은 동우회원들이 일제의 회유와 협박으로 인해 친일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고 일부 인사들은 옥사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삶조차 영위하기 어렵게 되었다. 42명이 최종 기소되기 전인 1938년 6월 18일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갈홍기·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현제명·홍난파 등 13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8인이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 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 이들은 8월 18일 흥사단으로부터 출단 처분을 받았다.# 이어서 같은 해 11월 3일 예심 보석으로 풀려난 이광수·주요한·송창근 등이 전향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후 정인과·백낙준·이긍종·이용설·한석원(韓錫源)·윤하영(尹河英)·김동원·유억겸 등도 전향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을 보였다.#

동우회 자체도 1937년 해산되면서 보유 자금과 토지, 사무기구를 매각한 금액까지 긁어모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함에 따라 결국 와해되었다.

3. 사회에 끼친 영향

이 사건은 사회의 명망가와 지식인들을 친일로 전향시키기 위해 일제가 주도적으로 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사실상 한반도의 대형 독립운동 단체는 이 사건으로 분쇄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후 해외 독립활동과 좌익계의 경성콤그룹, 여운형이 세운 건국동맹만 명맥을 잇게 되었다. 이때부터 명망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대거 형성되어 사회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는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민족분열 통치의 기폭제라고 봐야 할 것이며 친일파 논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출옥[1]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4. 매체에서

4.1. 야인시대

야인시대 27화에서 짤막하게 이 사건이 나온다.


[1] 원래 1932년 5월 윤봉길의 홍커우 폭탄의거 사건(4월)을 교사했다는 말도 안 되는 누명(당연히 안창호는 윤봉길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 사건은 김구가 교사했다)을 쓰고 체포당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었는데 아무리 고문하고 조사해도 증거가 없자 일본 검찰이 치안유지법(한국의 국가보안법과 유사하다. 1920년대에 제정되어 독립운동을 한번이라도 한 사람이면 누군가를 죽이거나 해치지 않고 비폭력적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도 아무에게나 적용시켜 감옥에 넣을 수 있는 만능 구속법이었다. 법의 내용 자체가 천황을 부정하는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처벌대상에 넣는 것이라 독립에 대한 글만 써도 검사와 판사가 마음만 먹으면 감옥에 넣을 수 있다.)으로 작전을 바꾸고 이를 뒤집어 씌워 징역 4년을 선고(치안유지법치고도 과한 형량이었다. 조선의 비폭력적 독립운동가나 일본의 비폭력 성향 민주화 운동가들이면 징역 1년 6개월에서 2년쯤 선고받는 게 보통이었다.)했다. 하지만 심한 질병에 걸렸고 형집행정지로 1935년 2월에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