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5:19:57

이동휘(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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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대 국무총리
이동휘
李東輝 | Yi Dong-hwi
파일:Yi Dong-hwi.jpg
출생 1873년 8월 29일
함경도 단천군 파도사 대성리[1]
(現 함경남도 단천시)
사망 1935년 1월 31일 (향년 61세)
소련 러시아 SFSR 극동 지방 프리모리예 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묘소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페르바야레치카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60호
재임기간 제2대 임시정부 국무총리
1919년 8월 27일[2] ~ 1921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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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0066><colcolor=#ffffff> 본관 하빈 이씨[3]
부모 아버지 이승교[4]
배우자 강정혜
자녀 아들 이영일[5]
딸 이인순, 이의순, 이경순
학력 한성무관학교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개신교 (감리회)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군사 경력
임관 육군무관학교
복무 대한제국 육군
1896년 ~ 1907년
최종 계급 참령 (대한제국 육군)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대한제국의 군인2.3. 기독교 입교 및 애국계몽운동2.4. 간도에서의 행적2.5.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2.6. 공산주의자가 되다2.7. 대한민국 임시정부2.8. 이후의 행적
3. 방법론
3.1. 조선인에 대한 테러와 강탈3.2. 과격 전쟁범죄단체와의 협력
4. 평가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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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혁신공보(革新公報)》, 1919년 12월 25일자 기사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고 마는 그의 진보적 행동성,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과 굴레를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년 12월 31일

1. 개요


조선대한제국군인이자 일제강점기 시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무장 투쟁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인사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서 지원을 받아 한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볼셰비키 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다른 요인들과의 의견 대립으로 탈퇴했으며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후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했다.

2. 생애

2.1. 초년기

1873년 6월 20일 함경도 단천군 파도사 대성리(현 함경남도 단천시)에서 아전 이승교[6]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河濱).[7] 호는 성재(誠齋)이며 대자유(大自由)라는 이름도 썼다.

참고로 이동휘의 아버지 이승교(=이발)도 한일합방 이후 자신의 아들처럼 독립운동가였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박은식,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와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노인동맹단에서 활동하였고, 1919년 5월 노인동맹단 경성 만세운동[8] 때 체포된 적도 있다.

당시 나이가 70살이 다 되었다는 이유[9]로, 75살이던 동료 노인동맹단원 정치윤과 함께 둘만 풀려나자[10], 일제에 굴욕을 당했다며 칼로 자살기도를 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후세 연구에서 당시 자살기도로 사망했다는 잘못된 조사가 있었으나, 이후 활동기록이 발견되어 아닌 것이 드러났다.

1935년 2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무용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하며 천부적으로 '호화로운 영웅의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그는 사숙(私塾)인 대성재(大成濟)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부친은 그의 아명을 독립(獨立)이라 짓고 장차 아들을 단천군수 휘하의 이방(吏房)으로 만들고자 '관노(官奴)의 도(道)'에 필요한 온갖 예의와 한학들을 가르쳤다.

부친 이승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했고 서북학회를 비롯한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신민일보> 1919년 7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1919년 5월 31일에 윤여옥, 정지윤, 차대경, 안태순 등 노인단 단원 4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경성으로 향한 뒤 자결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동휘는 이러한 부친으로부터 민족 의식과 항일 투쟁 정신을 물려받았다.

1890년 이동휘는 17세의 나이로 단천 네해진에 사는 18세의 강정혜와 결혼했다. 1891년 봄 그는 부친의 주선으로 단천군수의 통인(通引)[11]을 맡게 되어 단천읍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그는 단천군수에게 화로 또는 요강을 뒤엎는 사건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대한 여러 회고가 전해지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이동휘의 평생 동지였던 계봉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는 청년시대에 단천인 통인으로서 군수의 옳지 못한 행위에 격분하여 화로로 군수를 쳤으니, 그때의 그 처지로서는 비록 협긔가 있는 남아라도 저마다 못 할 일인데, 그에게는 그런 협긔가 있엇다. 그러나 그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죽고 남지 못할 일이엇다. 생각하면 도망하는 그 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엇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가서 단발하고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원인이 거기에 있엇다. 그때의 형편에는 용감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단발하는 그 일을 그리 쉽게 단행할 수 없는데 그에게는 그런 용감력이 있었다.”

이동휘의 외아들 이영일은 자신이 쓴 부친의 전기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단천군수는 지방 관리, 양반 지주, 토호들을 불러다가 자신의 생일 잔치를 벌였다. 이때 이동휘는 단천군수가 어린 딸과 같은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자 격분하여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집어들어 단천군수의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고 죽이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잔치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이동휘는 그 길로 도망갔다고 한다.

반면 반병률은 그가 요강으로 단천군수의 머리를 쳤다고 서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당시 중앙 조정에서는 함경도 일대의 잦은 민란을 고려하여 왕족인 이계선을 단천군수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계선은 매우 거만하며 신분이 낮은 사람을 멸시하기 일쑤였고 이동휘는 군수의 태도에 불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날 이동휘가 요강을 비우러 나가고 있을 때 군수가 매우 거슬리는 말을 하자 들고 있던 요강으로 군수의 머리를 쳤다고 한다.

이후 주위에서 이동휘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단천군수는 뜻밖에도 그를 용서하고 "네가 똑똑한 사람이여, 다른 놈 만났으면 너 죽었다. 그런데 앞으로만 잘 해라. 내가 네 뒤를 보아주마"하며 자신이 한양으로 가면 부르겠노라는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이계선은 중앙의 내직으로 영전된 후 약속한 대로 이동휘를 불렀고 이동휘는 관청의 노역 생활에서 벗어나 한양으로 향했다고 한다.

한양에 도착한 이동휘는 이용익의 추천으로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899년에 서울의 육군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령으로 진급하였다. 1902년에는 개혁당을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펼쳤으며, 같은 해부터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에는 강화도의 강화 진위대 참령으로 근무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그 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을 겪기도 했다.

2.2. 대한제국의 군인

1896년 한양에 상경한 그는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만에 졸업했다. 이후 그는 목영석 등 13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육군 참위에 임명되어 시위대(侍衛隊)로 발령받았다. 그 뒤 군부의 요직인 원수부(元帥府) 군무국원(軍務局員)으로 전임된 후 1899년 11월 8일에 부위(副尉), 1900년 12월 8일에 정위(正尉)로 승진했다. 다만 이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는데 참위 시절 을 마시고 영내에 들어와 해괴망측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2번이나 면관의 징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평소 좋아하던 술을 끊고 군직에 충실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동휘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게 평가했다. 1901년 고종은 이동휘를 지방 병대(兵隊)들의 재정을 검사하는 검사관에 임명했다. 이후 그가 평양 진위대를 조사했을 때 공금 횡령을 한 대대장이 뇌물을 제의하자 이를 거절하고 단호히 처벌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이동휘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후 전국 각지의 군대를 검사하는 검사관으로서 철저한 검사를 실시해 각 진위대 참령들의 두려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삼남 검사관으로서 약 6개월간 활약하면서 부정부패에 관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군수 14명을 파직하게 하였고 50만량의 엽전을 압수하여 고종에게 바쳤다. 이에 고종이 3만량의 하사금을 내렸으나 완강히 사양하였다.

1902년 민영환, 이준과 함께 개혁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당시 그는 이갑, 노백린과 함께 즉각 무력을 동원하여 수구 세력을 축출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개혁당 운동은 회원 간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던 이상재, 이원경, 홍재기, 이준이 체포되면서 무위로 그쳤다. 이동휘는 서울의 야학 강습소를 다니면서 계몽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는데 국민개병, 국민개학이라는 표어를 들고서 선전 및 선동 사업에 활약했다. 전주지방대대 검찰관으로 시무할 때 각처를 돌아다니며 국민의 의무 병역과 의무 교육은 보국안민의 유일한 방책이라는 제목으로 군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1903년 5월 이동휘는 참령(參領)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강화도의 진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부인 강정혜, 장녀 이인순, 차녀 이의순이 강화도로 내려와 이동휘와 합류했다. 그는 강화도에서 군무에 열성을 다했고 1904년 일본의 황무지 요구를 반대하기 위해 민영환, 이준, 이상설 등이 조직한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에서 평의장,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에서는 서무부장으로 활약했으며 일진회 반대를 위해 결성된 공진회(共進會)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강화부윤 윤철규가 주민들을 선동해 당시 강화도에서 신교육을 전개하고 있던 이동휘의 학회 조직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공금 횡령을 이동휘가 고소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동휘가 러시아 간첩을 하는 자'라는 내용의 기고문을 신문에 게재하는 등 이동휘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이동휘는 부하들을 이끌고 윤철규를 찾아가 무고에 항의하려 했지만 윤철규는 한성으로 도망친 뒤 다시 강화도로 내려가서 내부에 사건의 내용을 보고하고 처벌을 요구했다.
이동휘가 병졸들을 이끌고 동헌의 문짝을 파괴하고, 총과 검으로 날 죽이려 했으니 속히 그를 압송하여 조사하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

이에 이동휘는 자신의 억울함을 군부에 올리고 재판을 열어 유무죄를 판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05년 1월 초 이동휘와 부하 4명, 윤철규는 육군 법원의 명령으로 법원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이동휘와 윤철규를 석방하고 이동휘의 부하 4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동휘는 자신의 부하들은 자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부하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윤철규는 강화도로 귀환한 뒤 주민들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았고 주민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일본인들과 결탁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이동휘는 군무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1905년 3월 3일 강화진위대장직을 사임했다.

2.3. 기독교 입교 및 애국계몽운동

군무에서 물러난 이동휘는 강화 지방 전도사 김우제의 설교를 받아들여 감리회에 입교했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는데 그가 을사조약 체결 후 발표한 <유고(遺告)>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愛國之心)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獨立之心)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強)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獨立團合)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이동휘는 미국인 선교사 D.A. 벙커와 박능일이 운영하던 사숙 잠무의숙(岑茂義熟)을 기반으로 1903년 11월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했다. 그 뒤 주민들을 상대로 기독교 포교 활동을 벌였고 그를 존경하던 강화 주민들 중 상당수가 기꺼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동휘는 1904년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한 뒤 이곳을 구국 인재 양성을 위한 모범 학교로 발전시키려 했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학생들을 인솔해 덕수궁으로 가서 고종을 알현하고 교명과 함께 왕실 보조금을 얻었으며 적석사(積石寺) 소유 토지와 농지를 보창학교 운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중국 고전, 한글, 일본어, 영어, 산수, 한국 역사, 한국 지리, 기초 과학, 웅변술 등을 가르쳤으며 매일 1시간씩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감리회 선교사 W. B 스크랜튼의 보고에 따르면 이동휘의 학교 설립 운동으로 1907년 6월 당시 강화도에는 14개 학교에 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으며 이동휘의 보창학교를 본떠 강화 각 면에 '보창학교'들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동휘는 개성에도 김기하, 공서학 등과 상의해 보창학교를 설립했으며 뒤이어 황해도 금천, 장단, 풍덕, 안악과 충청북도청주, 함경남도함흥에도 보창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면서 교육 계몽 운동을 벌였고 이로 인해 강화 일대에 72개 학교가 세워졌고 전국에는 170개 학교가 세워졌다. 이동휘는 기독교를 서양 문물의 전달자, 계몽 운동의 수단, 구국 운동의 방법으로 인식하였고 주로 서북 일대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주력했다. 그는 이종호와 함께 대표적인 교육가로 손꼽혔고 보창학교는 이종호가 설립한 보성학교(普成學校), 이준이 설립한 보광학교(普光學校)와 함께 “교육의 삼보(三寶)”라고 불렸다.

이 무렵 이동휘는 대한자강회에 가입한 뒤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 일대를 순회했으며 강화도에도 대한자강회 지부를 설치하고 부회장을 맡아 강화도 주민에 대한 계몽과 여론 형성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06년 6월 상동청년학원이 주관하던 순한글 월간 잡지 <가뎡잡지>의 통신원으로서 강화와 개성지국장을 맡아 활약했다. 1906년 10월 13일 이동휘는 이준이 주도하던 국민교육회에 가입했으며 1906년 10월 28일 이준,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한북학회(漢北學會)를 조직하고 평의원을 맡은 뒤 속성사범들과 학생들을 모집하러 지방 순회를 다녔다. 이어 1907년 초부터 김광제, 서상돈, 이준, 이도재, 양기탁, 장지연, 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양기탁, 안창호 등과 함께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義所)의 총무로 활동했다. 그는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에도 관여하여 함경도 총감 겸 최고위원을 맡았으며 1908년 1월 3일 한북학회를 서우학회와 합병시켜 서북학회를 창립했는데 서북학회의 부설학교로서 서북협성학교의 설립이 결정되었고 이종호가 교장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함경도 지역 담당자로 이동휘와 이종호, 황해도 지역은 노백린과 이달원, 평안도 지역은 이갑과 유동열이 선정되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 당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봉기를 당행하기로 작정하였으나 1907년 8월 13일 헤이그 특사 사건 모의 참여와 강화도 군민 봉기의 배후 선동 혐의로 지목되어 경시청에 체포되었다. 이후 4개월만에 석방된 그는 자신의 장기 구금으로 인해 침체된 강화와 개성의 보창학교 재건에 나섰다. 우선 개성으로 가서 교육총회를 개최하고 지방 유지들과 함께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해 보창학교의 재정 확보책을 마련했다. 이어 1908년 2월 강화도로 가서 2월 18일 개학식을 거행했고 학부형들과 지방 유지들을 모아 학무회(學務會)를 조직해 의무 교육의 긴급함과 신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강화도 16개면 114동을 56구역으로 나누어 보창학교 지교 21개와 진명, 계명, 창화, 공화의 4개교 외에 31개교를 증설해 강화도 전역에 걸쳐 아동의 의무 교육 실시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4월 15일 강화도 내에 100여 개 학교들이 보창학교에서 학생 2천 6백여 명과 외국인 손님, 도민 등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대운동회가 대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공립신보(共立新報)> 1908년 6월 17일자 기사에 따르면 운동회는 마치 전쟁 연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투적이었다고 한다. 이동휘는 자신이 부재할 때 보창학교를 운영할 이로 고성근을 선정했으며 이어 함경도 일대의 교육 부진을 개탄하고 이 지역에서의 학교 설립에 나섰다.

1908년 8월 서북학회는 함경도 지역의 교육 진흥과 지회⋅지교 설립을 위하여 이동휘를 함경도 모금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이후 1909년 5월까지에 이르는 10개월 동안 이동휘는 함경도 전 지역을 순행⋅연설하며 서북학회의 지회와 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지방 유지들을 자극하여 학교들을 설립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함경도 각지에 수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909년 5월 말 한성으로 귀환한 그는 이어 평양, 의주, 순천 등 평안도 일대의 교육 시찰에 나섰다. 그가 들르는 지방의 연도에는 각 학교 학생과 남녀노소가 다퉈서 그를 환영했다. 특히 6월 22일 평양 서북학회가 주최하고 6~7천 명의 청중이 참여한 평양 만수대 송림에서의 대강연에서 당대의 명연설가인 윤치호안창호와 함께 참석하여 “오늘의 평양”이란 주제의 연설을 해 청중을 크게 감동시켰다. 6월 23일 3천여 명이 참석한 평양의 대성학교 하기 방학식장에서 전덕기⋅최병헌과 함께 교육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고 6월 30일 순천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남녀 학생 4백여 명이 나와서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금일지교육(今日之敎育)”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박한영은 이러한 그의 활동에 대해 <서북학회월보>에 기고한 '경고관북일로(警告關北一路)'에서 당시에 “그(이동휘)의 말 한 마듸에 학교 하나가 되어지고 그의 눈물 한 고치에 학교 하나가 되엇섯다”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서술했다.

2.4. 간도에서의 행적

1910년 4월 7일, 신민회는 국내 최후의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망명할 인사와 국내에 남을 인사를 결정하여 국내외에서 민족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안창호와 이갑은 청도(靑島)를 거쳐 구미 지역으로, 이동녕은 연해주로, 이동휘는 북간도로,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최석하는 서간도로,조성환은 북경지역에서 각각 동포사회를 단합⋅조직하여 민족운동의 근거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들의 해외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이종호가 맡기로 하였다. 또한 한성은 전덕기, 평양은 안태국, 평북 일원은 이승훈, 황해도는 김구 등이 맡기로 했다.

하지만 이동녕은 바로 북간도로 가지 않고 국내에 남아 사태의 추이를 지켜봤다. 그러다 1910년 8월 3일, 성진에서 “배일론의 선두자이며 일한합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일제 경찰에 의해 제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되어 총감부에 수감되었다. 8월 29일 한일병합이 정식 공포된 뒤 석방된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전도사로서 각지를 순회했다. 한일병합 10여 일 후 평북 선천에서 개최된 예수교 장로교회 평북노회에 참여했는데, 당시 그를 만난 곽림대는 이동휘가 "2년 후에 우리가 독립 전쟁을 할 터이니 그동안 청년들을 연락하여 가지고 기다리라"고 하였다고 회고했다.[12]

이후 그는 원산에 있는 영국인의 예수교회로부터 1개월에 150원의 수당 지급을 제의받았으나 사양하고 간도 포교를 자원했다. 그는 간도에서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던 로버트 그리어슨 선교사를 찾아가 자신에게 교직을 달라고 청원했다. 그리어슨은 그를 성서 매서인(賣書人)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조사(助事)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일제가 ‘이동휘의 교육생’이라고 불렀던 계봉우⋅오영선⋅도용호⋅김하구⋅정창빈 등 추종자 30여 명을 “기독교 포교”라는 표면적인 목적으로 내세우고 북간도 각 지역으로 망명시켰다.

1911년 1월, 이동휘는 조수인 김철, 오상언 등을 대동하고 성진을 떠나 회령에서 5일간 전도 활동을 한 뒤 1월 26일에 회령을 출발해 간도에 도착했다. 그는 북간도 교회를 방문하여 조국애와 기독교 입교, 그리고 한인들 간의 일치단결을 역설했다. 특히 1911년 2월 12일에는 용정의 명동교회에서 대사경회를 열어 200여 명을 상대로 설교했다. 이 전도회 총회에서는 김약연정재면⋅박태환 3인이 중심이 되어, 1909년에 조직하여 중국 교인들과 함께 전도에 힘써온 길동기독전도회(吉洞基督傳道會)를 한국⋅중국⋅러시아 3국에서의 목표로 한 '한아청삼국전도회'에 편입시켰다. 삼국전도회는 이루 3년간 열광적인 활동을 통하여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그 수가 36개에 달했다.

이후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꾀한 뒤 국내로 복귀한 이동휘는 1911년 3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성진에서 체포된 뒤 한성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정식 기소되지는 않았으나 일종의 행정 처분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인천부 대무의도(大舞衣島)에 1년간 원도안치(遠島安置) 처분을 당했다. 1년 후 석방된 그는 신민회 함경도 책임자 일을 다시 맡았으며, 원산, 명천 등 함경도 각지를 순방하여 기독교 전도를 지속했다. 1912년 8월 15일 함흥에서 개최된 제2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함경노회에서 그의 평양신학교 입학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13년 봄 성진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이동휘는 혜산진에서의 부흥사경회를 틈타 농부로 변장하고 압록강 상류 건너편의 백두산 일대에 속한 장백현으로 탈출했다. 장백현에 도착한 뒤 이 지역을 순회하면서 이동녕, 김필순, 김병현 등 신민회 회원들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을 만나 연락기관과 통신원을 설치하고 이 지역의 동포들을 위한 농업, 상업 활동과 교육 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순회를 마친 뒤, 3개월 후엔 6월 10일 북간도 연길현의 국자가로 이동했다.

1913년 8월 중한연합전도회(中韓聯合傳道會)를 조직하고 중국인 김형두를 회장으로, 자신은 부회장을 맡았으며, 같은 수의 한인과 중국인들이 간부직을 나누어갖게 했다. 중한연합전도회는 북간도 각지 교회와 긴밀한 연락관계를 갖기로 결정하는 한편, 일본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인교회를 표면상 중국전도회에 속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간민회(墾民會)는 이동휘, 이동춘, 정재면, 박찬익 등 4명의 대표를 베이징으로 파견했다. 이들 네 명은 중화민국 건국을 축하했으며, 총통으로 선출된 위안스카이에게 한인들의 자치권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3년 9월 10일, 이동휘는 북간도를 떠나 혼춘으로 순행을 떠났다. 그는 혼춘의 각 지방을 1개월 동안 순행하면서 종교, 교육, 실업을 권면했으며, 독립군 지도자들과의 단합을 강구했다. 이렇듯 그는 망명 직후부터 장백현, 북간도를 비롯해 만주 전역을 순회했고, 그 목적은 종교, 교육, 실업을 장려하고 통신원과 연락기관 설치 등 각지 애국지사들과의 연락망을 확립하고, 항일 무장단체 간의 분쟁을 해소시키는 데 있었다.

2.5.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

이동휘는 일제 관헌들과 한인 첩자들이 만주 각지에서 활동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던 중 연해주에 설립된 권업회(勸業會)가 각 계파간의 대립으로 붕괴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연해주 망명을 결심했다. 1913년 9월 말, 그는 연해주로 들어가기 직전에 안창호에게 편지를 보내 고질적인 연해주 한인들간의 파쟁을 '장담코 조화'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 연해주로 이동한 그는 10월 12일 오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환영식에 참석한 뒤 200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시간 동안 연설했다. 이때 그는 국내동포들의 참상, 일본의 현상, 우리민족의 신성한 역사, 해외 동포의 의무, 해외에서 나온 회포 등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였다. <권업신문(勸業新聞)> 1913년 10월 19일, 10월 26일, 11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청중은 그의 연설을 듣고 눈물과 박장으로 뒤섞인 반응을 보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동휘는 권업회 총대로 선출되어 권업회 총무 정재관과 함께 연해주 일대의 권업회 지회 설립과 지방시찰 임무를 맡았다. 그는 하바로브스크 지회를 재건했으며, 뒤이어 이만지회, 파스케 분사무소를 재건 또는 조직했다. 1914년에는 도비허에 가서 지회를 설립하였고, 고로데고보, 수청 다우지미, 수청큰영에도 지회를 조직했고, 신혈놉크에 분사무소를 설립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고 각지의 여호인(餘戶人)촌에 한인학교를 세웠다.

이 시기, 이동휘는 제2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면 한국의 독립이 성사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민족운동가들과 함께 새로운 군사지휘부 건설을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비밀군사지휘부인 '대한광복군정부'가 1913년 10월 말에 창립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에서는 이동휘를 비롯하여, 이상설이동녕이종호⋅정재관 등 노령에 있는 주요한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앞으로 있을 군사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에 군대를 비밀 편성했다.

이동휘는 김립, 이종호, 장기영, 김하석(金夏錫), 오영선 등과 함께 한인촌에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와 기숙사 건축은 주민들이 담당하고, 학교 유지 경비는 이종호가 맡았으며, 장기영이 교관의 모집과 교과서 수집, 김규면, 전일, 조응순이 학생 모집을 맡았다. 그 결과 나자구에 있던 태흥서숙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남북만주와 훈춘 연해주에서 집결한 학생 수는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러시아가 일본과 동맹을 맺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는 강제 해산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러시아 당국에게 20명의 한인 지도자들을 추방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이동휘는 다른 지사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대로 이동해 왕청현 나주구 지역의 한인촌에 도착했다.

그는 나주구 지역에서 광복단을 재조직하고 권업회의 활동을 이어받고 비밀리에 교육 사업을 지속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관헌들의 압력이 이어지자, 다시 러시아-중국 국경지대의 오지인 왕청현 하마탕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우수리강 연안의 동포들을 순방하며 기독교 전도를 수행했다. 그러나 1916년 가을 일본 간도영사관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형사들을 보내자, 그는 이를 피해 탈출하다가 병을 얻어 몇달 동안 신병을 치료해야 했다.

2.6. 공산주의자가 되다

1917년 3월 북만주에 숨어지내던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 소식을 접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아갔다. 그러나 러시아 헌병대 정탐자인 구덕성(具德成)의 밀고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뒤 수감되었다. 혐의는 '독일 정탐', ‘동중철도(東中鐵道)파괴공작’의 주도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이동휘의 석방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신한촌 한인군인회는 최고려와 박셰몬을 총대로 선출해 러시아 군인회 및 기타 관청을 방문하여 이동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각지의 동포들이 청원서와 전보를 제출하고, 총대를 선출하여 러시아 관청에 청원하고, 변호사를 선정하는 등 대대적인 이동휘 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로 불리는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이동휘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이동휘가 당대에 한인들의 추앙을 받는 인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를 포섭한다면 자신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다. 1917년 11월 하순, 이동휘는 이들의 노력 덕분에 아무르 주의 알렉세예프스크 시에서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된 직후 곧바로 하바롭스크로 가서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석방을 위해 힘써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가 언제 공산주의자로 변모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17년 10월 4일자 <신한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투옥 중에도 성경과 기도로 생활을 하며 충실한 기독교인으로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한인 볼셰비키들에게 구출되면서 그들에게 호의를 느꼈을 것이고, 마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공산주의가 세간의 이목을 끌자 이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 정치 망명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합의 목적은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조직적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동휘는 대회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서기인 김립과 함께 대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은 신민회⋅광복단⋅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 등의 단체들에서 이동휘와 함께한 동지들이었다. 이동휘는 이 자리에서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같은 조선의 무산계급정당을 조직하여 조선 민족 해방운동을 볼셰비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자고 제안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이동휘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것을 보고 두 개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한 그룹은 그동안 민족운동을 이끌며 일제에 맞섰던 그의 뜻에 따라 조선에도 러시아식 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그룹은 이동휘가 본래의 뜻을 잃었다고 비판하며 공산주의보다는 민족 독립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동녕, 양기탁신민회 출신 간부들은 이 시점에서 이동휘와 갈라섰다. 이로 인해 신민회 동지들을 규합하여 한인사회당 조직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이동휘의 계획은 어긋났다.

결국 옛 동지들의 질타를 받고 회의장을 떠난 그는 김알렉산드라, 박애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신민회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고 여전히 그를 따르기로 한 유동열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발기식을 거행했다. 이후 1918년 4월 28일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하고 중앙간부를 선출했다. 그는 이때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김립을 총서기로 임명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자유종>을 발행하고, 장교훈련을 위한 군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김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 주둔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동휘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처하기 위해 동료들과 논의한 뒤 독일인 포로 장교들과 중국의 맹사원(孟思遠) 장군 등과 힘을 합쳐 일본군에 맞서기로 협의하고 각지에 간부를 파견하여 적위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1918년 6월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키면서 원동과 시베리아 각 지역의 볼셰비키 정권들이 연이어 무너졌다. 이어 8월 초부터 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 열강이 무력 개입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한인사회당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에 이동휘 등의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대책을 논의하여 전일⋅유동열 등 100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이끌고 적군과 함께 우수리 전투에 참가하여 연합군과 합세한 카르미코프 백군과 싸웠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한인적위대원들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한인사회당은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과 함께 농촌이나 지하로 숨어들었고, 이동휘는 하바롭스크에서 목선을 타고 한인 촌락 '하이강'에 숨어 있다가 북만주의 요하현 토산제 마을로 이동했다. 이때 대표적인 한인 볼셰비키였던 김알렉산드라가 카르미코프 백군에게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한인사회당은 붕괴되었다.

이동휘는 그 뒤 한동안 숨어지내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선전부장(宣戰部長)에 추대되었으나 거부했다. 대한국민의회가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체 민족운동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단체여서 특정 지역 출신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 민족적 단합을 추구하던 그의 뜻에 어긋난데다, 일본이 승전국 자격으로 참여한 파리 강화 회의에 경도되어 친서방, 반볼셰비키적 노선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블라디보스트코 신한촌에서 개최된 대한국민의회 상설의회에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통합 협정의 위반 여부를 둘러싸고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 ‘승인 개조 분쟁’이 발생했다. 급기야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총장 취임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동휘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무총리에 부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승낙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2.7.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8월 상하이에 도착한 이동휘는 초대 국무총리로서 임시정부 내의 동조 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한인사회당을 재건한 뒤 임시정부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삼음으로써 임시정부를 친 소련 성향의 '고려혁명위원회'로 개편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임시정부 내의 다수 민족주의 인사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동휘는 개인적으로 김구와 만나 조선에도 소련처럼 공산 혁명이 필요하니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구에게 거부당했다고 한다. 특히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과의 갈등은 임시정부의 운영에 장애가 될 정도로 심각했다.

한편, 이동휘는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의 힘겨운 정쟁을 벌여야 했다. 그러던 중 코민테른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원조받게 되었으나 이르쿠츠파 공산주의자들이 이동휘의 비서부장 김립이 그 자금을 중도에서 빼돌렸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자세한 내용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참조.)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우파 인사들은 이동휘에게 자금관계의 경과보고를 요구했지만, 이동휘는 불응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안창호 등 우파 인사들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되자, 이동휘는 결국 1921년 1월 국무총리 직을 사임한 뒤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이후 그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에 나섰다. 그는 1925년 1월 18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것은 '민족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전환한 것이며, 그 방향은 정당하고 필연적으로 최후 승리의 경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동지들 간에 호상분규(互相紛糾)가 있었음에는 무심자괴(撫心自愧)”라며 자신의 실책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2.8. 이후의 행적

1921년 5월 상하이 공산당 사무소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를 개최한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창당을 공표하고 중앙 총간부를 조직했다. 이 대회에서는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서 이동휘, 박진순, 홍도 등 3명을 선정했다. 이들에게는 고려공산당의 창립에 대한 보고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아내는 임무가 주어졌다. 1921년 6월 19일 상하이를 떠난 그는 인도양, 수에즈 운하, 지중해, 알프스 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 만인 10월 말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자유시 참변을 비롯하여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불법적 활동과 전횡을 설명했다. 이에 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 검사위원회는 상해·이르쿠츠크 양파의 주장을 검토하고 11월 15일자로 결정서를 발표해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인정하고 이르쿠츠크 군감옥(軍監獄)에 갇혀 있던 상해파 당간부들과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된 장교와 병사 80여 명을 전격 석방시키게 했다.

1921년 12월,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자격으로 홍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당국자들과 파쟁의 중단과 연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합의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여할 조선대표단의 집행위원회 간부들과도 회합을 갖고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 구성안에 합의하였다. 합의된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는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5개 민족그룹인 조선대표단, 고려공산당중앙위원회, 상해의 국민대표회준비회, 상해임시정부, 국민의회의 대표 20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는 이르쿠츠크파 인사들이 장악해버렸다. 그들은 이동휘의 대리인으로서 모스크바에 남아있던 박진순의 대회 참여를 저지하고 숙소인 룩스 호텔로부터 축출해버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로 귀환한 뒤 이 일을 보고받자 크게 분노하여 대회의 선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고 이르쿠츠크에서의 모든 합의 사항을 백지화했다. 이로 인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파와의 연합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1923년 초 코민테른이 고려공산당을 해산시킨 뒤 꼬르뷰로(Korbureau)를 새로 조직시켰다. 이때 이동휘는 이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회파의 한명세와 대립하다가 한명세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그해 말 꼬르뷰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25년 4월 이르쿠츠크계열의 화요파가 단독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신청하자, 코민테른은 이동휘에게 승인 여부를 물었다. 이때 이동휘는 국내에 있던 김철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승인 의사를 밝혔다. 이리하여 1926년 초 2차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연합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두 정파간의 대립은 심각했다. 1926년 가을 새로운 파벌로 등장한 ML파의 3차 조선공산당에 대항하여 1926년 말 서울·상해파 연합의 조선공산당(춘경원당)이 성립되자, 이동휘는 서울‧상해파의 대표로서 6차 코민테른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반, 이동휘는 일본 통치하의 국내 감옥에 수감된 항일투사와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을 후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의 원동지역 한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1932년 10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원동변강모플열성자대회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던 1935년 1월, MOPR의 모금을 위해 수청(현 파르티잔스크) 지방을 방문한 그는 얄촘 탄광으로 나오던 길에 거센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쓰러졌다.

이후 급히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옮겨졌고, 한인 의사들이 전력구호에 나섰으나, 1935년 1월 31일 오후 7시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이동휘의 사망 소식은 <선봉> 1935년 2월 2일자 4면에 각기 다른 명의의 부고를 통해 알려졌다. 첫 번째 부고는 박동희, 한용헌, 이문헌, 박우, 김하석, 최길만, 정한립, 채동순, 최의수, 황동흡, 최중천 등 11명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부고는 MOPR 연해주위원회와 장례위원회 명의, 세 번째는 블라디보스토크 빨치산코미씨야(위원회) 명의였다.

이후 장례식은 2월 4일 오후 4시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신한촌에서 가까운 다친거우재에서 치러졌다. 한인 공산주의자 김아파나시, 김미하일, 그리고 당시 연해주 한인 사회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장례식을 주도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한 인사들은 1938년 스탈린대숙청을 감행했을 때 상해파 인사로 간주되어 대부분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처형되었다.

이동휘의 사망 소식은 일본영사관을 출입하던 기자가 이동휘가 “고령과 피로”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했다는 프라우다지의 기사를 전함으로써 국내에도 알려졌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에 이동휘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고, 설태희(薛泰熙)와 안창호의 소감이 실렸다. 다음날 삼천리사에서 이동휘 추도준비회가 조직되어 각 신문사, 사상단체, 교회 관계 인사들이 기독청년회관에서 연합추도회를 추진하고, 윤치호가 일제 당국과 절충을 시도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다. 이동휘와 인연이 깊었던 강화도의 친지들이 유경근을 중심으로 추도회를 가지려 했으나 역시 일제 당국이 불허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의 유해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페르바야 레치카(Первая Речка)에 안장되었으나, 현재는 주변 환경의 변화로 어디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2007년 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이동휘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다.

3. 방법론

3.1. 조선인에 대한 테러와 강탈

이동휘와 김립의 독립운동 방법론 중 하나는 조선인이 대한 테러와 강탈이었다. 그들의 활동자금을 위해선 조선인들을 습격해서 강탈하는 강도짓도 서슴치 않았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동휘는 강직한 무사였다...1905년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은 그의 성격에 변함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김립, 장기영과 함께 북간도 라지구에서 이종호가 낸 1,000원을 가지고 대순학교를 설립했는데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로 출자를 요구했는데 이종호가 이를 거절하자 이동휘는 휘하 20명을 동원하여 이종호의 집을 습격했고 이종호는 국권회복운동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정식(2008),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199쪽

3.2. 과격 전쟁범죄단체와의 협력

독립운동을 위해선 도를 넘는 과격 테러리스트 단체와 손잡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자세한 건 사할린부대 문서 참고.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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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인 공산주의자김알렉산드라에 이어 2번째로 공산주의자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13] 그는 1917년 전까지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가장 먼저 공산주의에 귀의했고 이후 한인 공산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했던 골수 공산주의자는 알렉산드라 김이였으며 이동휘는 그녀에 비해 체계적으로 공산주의를 접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이동휘보다 알렉산드라 김이 초기 한인 공산당 활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이며 알렉산드라 김이 독립운동가로서 인지도가 있던 이동휘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측면이 있었다. 다만 알렉산드라 김이 1918년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이후 이동휘가 완전히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14]

이동휘와는 별도로 러시아 한인 2세를 중심으로 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동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이들 러시아 한인 2세들처럼 소련코민테른에 철저히 종속되려는 생각에는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한때 통합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통합에 실패하고 제 갈길을 가게 되었고 이르쿠츠크파는 이후 소련 영내에서 철저히 소련의 하수 조직이 되면서 이동휘 측과는 더이상 엮이지 않게 되었다.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승만, 김구 등 임시정부 주류들과 의견 대립으로 탈퇴한 후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며 독립운동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와 임시정부 해체에 뜻을 같이 했던 요인들에 의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당시 창조파를 이끌었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소련과 직접 연계된 인물들이 많았고 이들은 임시정부 해체 후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동휘는 소련의 직접 지령까지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파에서 개조파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해방되기 십수년 전에 이미 공산혁명을 전제로 한 독립운동을 유도하기 위해 김구를 포섭하려 했고 민주주의로 갈 경우 민족간에 피를 흘리는 것을 전제로 했다는 내용과 공산혁명시 코민테른의 지휘와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것을 인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의 시각에서는 이동휘를 저렇게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이동휘는 오히려 소련에 충성하는 이르쿠츠크파와 대립하며 민족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김구, 백범일지[15]

5. 기타

  • 가족사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2002년 김알렉산드라를 조명한 KBS 방송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동휘의 손녀가 출연했다.
  • 2021년 3월 1일 이동휘 기념비 앞에서 3·1절 기념행사가 처음으로 열렸다.#


[1] #[2] 1919년 8월 27일부터 1919년 9월 11일까지는 임시정부 수반으로 재임함.[3] 28대손 동(東)○ 항렬.[4] 아들처럼 독립운동가였다. 1851년생. 1928년 사망.[5] 개명 전 이름은 이우석.[6] 이후 이발(李發)로 개명한다.[7]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시조 이거(李琚)가 조위총서경 유수군을 토벌한 공으로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하빈(河濱)을 본관으로 삼았다.[8]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노인동맹단원들이 "우리 노인동맹단이 일제의 압제에 맞서 대한의 독립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쓰여진 종이를 수백장 가져다가 경성 종로에서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결국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상당수가 구속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9] 1851년생이라 한국나이 69세이자 만 68세였다.[10] 당시는 50대는 물론 40대 후반조차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던 시대라 70살이면 지금의 80대보다 더 고령의 어른 대우를 하였다. 당시 노인동맹단 단원도 한국나이 46세부터 가입하게 하여서 이름의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대부분 50대 위주였고, 60대 초반까지가 지도부였다. 70대 초중반이면 지금의 90살 대우를 받았던 터라 그 나이까지 살아있는 사람 자체가 적어서, 일본정부도 그들이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힘들거라고 생각했기에 40대나 50대는 구속시키고, 그들 두명만 기소유예로 풀어주라고 지시한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이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사건의 강우규도 60대라는 나이하나 때문에 사건 당시 용의자에서 쉽게 제외된 적이 있다. 물론 이승교는 일본의 생각보다 오래 살아서 한국나이 78세에 사망했었다.[11] 군수의 온갖 심부름과 시중을 도맡아 하는 잡역[12] 곽림대, <안도산> p 208~209, 1968.[13] 김알렉산드라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볼셰비키 당원이었다.[14] 정상진 등의 증언에서도 이동휘는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1937년까지 살아있었다면 대숙청 때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 또한 나온다.[15] 백범일지 범우사, 2002.8.5, 3판3쇄 306~308P 발췌 칼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