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01:41:55

김필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필순
金弼淳[1]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파일:김필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해사(海史)
본관 광산 김씨[2]
출생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3]
(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
사망 1919년[4] 9월 1일
중화민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학력 배재학당 졸업
제중원의학교 졸업
종교 기독교 (개신교, 감리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면허 의사[5], 독립유공자.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그의 조카이며, 셋째 누이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이다. 넷째 누이 김필례(金弼禮)는 김활란과 함께 YWCA를 설립하는 등 여성운동에 전념하였다. 첫째 누이 김구례(金求禮)는 독립유공자 서병호의 부인이다. 중국에서 활동한 영화배우 김염은 그의 셋째 아들이다.

2. 생애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 1844 ~ ?)[6]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의 5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7]

일찍이 배재학당을 졸업하였고,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가 1900년부터 올리버 R. 에이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일하면서 여러 의학 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한편으로 제중원의학교를 다녔다. 재학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번갈아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동하였는데, 평소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하여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가입,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하고, 제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협의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1911년 다른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청나라로 망명하여 이동녕·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 후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을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는 한편,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하고자 하였는데, 일제 특무요원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조수가 준 우유를 마신 후 귀가를 하던 도중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낙마사고가 일어나 1919년 9월 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2018년에 자랑스러운 배재인상을 수상하였다. 2021년에 연세대학교에서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수여하였다.


[1][2] 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 34세.[3] 이 마을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김규식의 부인인 김순애(金淳愛)를 비롯하여 김낙영(金洛永), 김순길(金順吉), 서재현(徐載賢), 서병호(徐丙浩), 윤익선(尹益善)등 도합 8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4] 광산김씨평장대보 36권 문숙공후 판도판서공파 364쪽에는 1920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의사 면허번호 1번이다.[6] 자는 성첨(聖瞻), 족보명은 김응기(金應淇).[7] 어머니 안성은 여사는 아버지 김성섬의 둘째 부인으로서 현재 광산김씨평장대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족보에는 첫째 부인인 현풍 곽씨 곽이복(郭履福)의 딸만이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