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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염

<colbgcolor=#000000><colcolor=#fff> 김염
金焰 | Jin Ya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JinYan.jpg
본명 김덕린(金德麟)
출생 1910년 4월 7일
대한제국 한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1983년 12월 27일 (향년 73세)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국적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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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대한제국인
본관 광산 김씨 (光山 金氏)[1]
직업 영화배우
활동 1928년 ~ 1957년
가족 아버지 김필순, 어머니 연일 정씨
셋째 고모부 김규식, 셋째 고모 김순애
사촌누나 김마리아
첫째 고모 김구례, 첫째 고모부 서병호, 고종사촌 서재현
넷째 고모 김필례
배우자 왕런메이(王人美)(1934년 결혼~1945년 이혼)
친이(秦怡)(1947년 결혼~1983년 사별)[2]
자녀 아들(1934년생)[3], 아들 진지에(金捷)(1948년 7월 28일생)[4], 딸 진페이헝(金斐姮)(1944년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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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한 배우, 독립운동가.

2. 생애


1910년[6] 4월 7일 한성부에서 의사이자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김필순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7]

아버지 김필순 지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의해 수배되자 1912년에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에 그의 국적은 1912년부터 중화민국이었다. 이후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첩자에 의해 살해되었고, 김염은 혼자 남아 고아가 되었다.

1927년에 김염은 상하이로 갔고 영화사에서 기록원으로 일하다가 출연한 게 인연이 되어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김염이 배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가 되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해왔던 사람이었다. 배우로 성공한 그는 1930년대에 상하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외모도 수려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상해의 루돌프 발렌티노'였다.[8]

그러나 그는 성공한 후 갑작스런 발표를 하게 된다. 유명한 배우로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만들어준 멜로 영화를 그만두고, 앞으로 항일 영화만 찍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버지가 일본 첩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어린 시절부터 결심했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배우가 된 이유도, 영화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항일 영화 출연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 수는 40편에 이르렀다. 중국을 점령한 일본에 의해 김염은 제국주의 영화 출연을 강요받지만, 그는 그 순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엔 중일전쟁으로 인해서 중국의 국토가 초토화가 되면서 영화 활동이 뜸해졌으며 194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국적도 바뀌었다. 이후에도 순수 예술가이기를 고집하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배우 생활의 말기때인 1950년대 부터는 위 관련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6년에 벌어진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자본주의 예술가라는 죄목으로 인해서 투옥되어서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러다가 무려 8년간에 걸친 옥고 끝에 1973년에 석방된후 약 10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위암으로 1983년 12월 27일에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3. 가족


아내는 중국의 배우인 친이(秦怡, 1922.01.31~2022.05.09)이며 2022년 5월 9일 10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친이는 1947년에 재혼한 2번째 부인으로[9], 첫 번째 부인은 역시 같은 배우인 왕런메이(王人美, 1914.12.24~1987.04.12)이다. 왕런메이 사이에서 1934년에 아들도 봤으나 얼마 못 가 일찍 잃는 아픔을 겪었고 당시 중국 상황이 1931년 만주사변을 필두로 일본의 침입이 잦아지고 주 활동지인 상해도 점령된 당시에는 혼란 그 자체였다. 게다가 김염 본인, 아버지, 친척들 다수가 항일 독립 운동에 몸 담은 사람인 만큼 당연히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일테니 피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왕런메이는 당대의 여성들과 달리 활발하고 솔직하고 굽히지 않는 당찬 성격으로 김염과의 성격차이, 당시 중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맞물려 결국 1945년 이혼했다. 다만 이혼할 때 왕런메이는 훗날 회고집에서 김염에 대해 비난, 원망 등 큰 악감정은 없었다며 회고했고,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이후 방황 끝에 1947년 친이와 재혼 후 1948년에 아들 진지에(金捷)를 봤으나 불과 16세의 나이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해 어머니 친이의 도움 없이 제 몸을 못 가누는 지경까지 왔으며 결국 2007년에 폐렴, 요독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여성 독립운동가김마리아는 그의 사촌 누나이며, 셋째 고모는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으로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한 김순애이다. 다른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이자 고종사촌 형인 서재현 또한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 즉, 집안이 독립운동가 가문인 셈이다.

4. 출연작

  • 연애여의무(戀愛與義務, Love and Duty):1929년작. 아래 사진의 함께 출연한 여배우는 루안링위(阮玲玉, 완령옥, 1910~1935)이다. 중국 영화사를 논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우로, 1930년대 상하이 영화의 황금기 당시 당대의 최고 인기 여배우였다.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배우로도 유명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LoveandDuty.jpg
  • 일전매(一剪梅, A Spray of Plum Blossoms): 1931년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A_Spray_of_Plum_Blossoms.jpg
  • 도화읍루기(桃花泣血記, Peach Blossom Weeps Tears of Blood): 1931년작.
  • 삼개마등여성(三個摩登女性, Three Modern Women): 1933년작.
  • 성시지야(城市之夜, Night in the City): 1933년작.
  •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4년작.


[1] 문숙공파-판도판서공파 35세 현(鉉) 항렬. 족보명은 김인현(金麟鉉).()[2] 친이 그녀 또한 재혼이었다. 前 남편 역시 배우였던 첸 티앙궈(陈天国, 1912~1967.12.21)였다.[3] 왕런메이 소생. 첫 자식이나 요절했다.[4] 친이 소생. 16세 때 정신질환 앓아 평생을 어머니 친이의 보살핌을 받다가 폐렴에 따른 요독증으로 2007년 3월 7일에 사망했다.[5] 친이와 전 남편 첸 티앙궈 소생인 의붓딸.[6] 광산김씨평장대보 36권 문숙공후 판도판서공파 365쪽에는 190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7] 본인 포함 7남매이며 여동생도 있었다.[8] 둘 다 외국인 출신(조선, 이탈리아)임에도 타국(중국, 미국)에서 자잘한 엑스트라, 단역을 맡다가 눈에 띄며 영화로 유명한 지역(상하이, 할리우드)에 진출해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로 명성을 떨친데다 두 번의 결혼을 겪은 것도 같다. 다만 겨우 31세에 요절한 루돌프와 달리 김염은 73세 까지 살았다.[9] 김염 본인도 친이의 2번째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