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07 11:49:54

이인영(독립운동가)

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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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인영
李麟榮[1]永으로 기재된 문헌도 있다.]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401291522122331.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시영(李時榮), 이준영(李竣榮)
아호 중남(中南)
본관 경주 이씨[2]
출생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목 북면 교향동
(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다리목마을)
사망 1909년 9월 21일[3] (향년 40세)
한성부 경성감옥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68호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소개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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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구한말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목 북면 교향동(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다리목마을)에서 아버지 이현상(李顯商)과 어머니 한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여주목 북면 일대에 터를 잡고 넓은 농지를 가졌던 부유한 지방 양반가였다. 그는 오위도총부총관을 거친 고조부와 오위장을 지낸 증조부의 영향인지 주자학 외에 군사 분야에 나름대로 식견이 있었다. 이인영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고 임용을 기다리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바로 귀향해서 3년상을 치르고 다시 과거를 보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이후 정동현(鄭東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에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반일 기조가 높아지고 거사를 물색하던 재야 유림들은 고종과 그 측근들의 밀지나 창의 권고를 받고 의병 봉기를 촉구한다.[4] 이 때 밀지를 받고 일어난 의병장들이 유인석, 이소응, 김하락 등이고 이 사람들이 다시 각지에 밀지 사본과 창의 격문을 뿌려서 호응을 촉구해 뒤이어 봉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인영도 그 중 1명이다.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 지역 무대로 항일 운동을 하다가 1896년 2월 유인석의 격문을 보고 여주에서 봉기하는데, 이 때 여주에는 이미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의병장 김하락이 임명한 여주대장 심상희가 따로 있어서 부득이하게 강원도 원주로 가서 의병 활동을 한다. 원주에서 활동한 유일한 의병 부대였는데 크게 얻고 잃은 것도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일본군이나 관군과 큰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심상희 의진과 갈등을 빚는데 아관파천으로 고종 세력이 의진에서 이탈하기 시작하고 봉기가 길어져 군량도 부족해지자 심상희는 개화파와 타협하고 후사를 도모하자며 이인영 의병진 중군장이자 자기 친지인 한진국을 설득하다 여의치 않자 그를 죽여버린다. 의병장들의 출신 성분이 달라 생긴 사건이었는데, 심상희는 고종의 이종사촌인 심상훈의 일가로서 동도서기론적 입장을 가진 근황파에 속했다. 친일 개화 내각을 타도하고 신내각 설립을 위해 의진을 일으킨 근황파들은 척화 성향이 강하고 보수적인 유림들과 부딪히는 점이 너무 많았다. 오직 배일(背日)의 기치 하나로 서로 다른 성향의 집단이 손을 잡은 것이었는데 고종이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자 연대에 금이 간 것이다. 핵심 지휘관을 허무하게 잃은 이인영 의진은 한결 강력한 심상희 군세에 차마 덤벼들지는 못하고 일부만 남아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에 합류한다. 제천의병 내에서 이인영의 행보가 주목할만한데, 청일전쟁 때 참전했다 귀국 못하고 조선에 남아있던 청나라 병사 7명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배일 의식이 투철하고 정규군이라 훈련도도 충실해 수는 적지만 상당히 귀중한 전력이 되는데 훗날 제천의병이 관군과 제천성에서 결전을 벌일 때 의진 전투력의 중핵으로 활약했다. 이인영은 7명 외에 자기 집 농지를 싸그리 털어서 청나라 용병을 고용하고 무기를 구입했기 때문에 을미의병이 마무리될 무렵 그의 재산은 거의 녹아내려 1908년 중순 시점에는 밭 2두락, 화전 3두락에 현금 1,500냥이 전부였다.

1896년 5월 하순 제천성 전투가 의병의 패배로 끝나자 이인영은 계속 남아서 의병들이 재정비할 때 병력과 물자를 모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고종의 해산 권유가 내려오자 의병진을 떠나 낙향한 후 충청남도 덕산에 내려가 국가에서 금지한 홍삼 재배를 통해 무기 조달 자금을 마련하다가 적발되어 일본 헌병과 조선인 보조원 20여 명에게 체포될 뻔하다 기습해서 뿌리치고 겨우 도주했는데, 뒷날 전말을 전달받은 고종이 특사를 내려 묵인해준다. 곤궁한 처지로 경상북도 문경에 은거하며 아버지 병수발들던 1907년 8월 원주에서 거병해 여주, 지평, 원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서울 출신 선비 이구채와 원주 출신 유생 의병장 이은찬이 병력 500명을 거느리고 이인영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이인영에게 거의하여 원주에 원수부를 세우라는 고종의 밀칙을 내보이며 이인영을 설득한다. 부친 병환 탓에 고민하는 이인영에게 아버지가 직접 "이 때처럼 나라와 백성이 너를 필요로 할 때가 또 있겠느냐"고 권하고 이구채와 이은찬이 "국가 존망의 시기에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우니 공을 먼저 하고 사를 나중에 함이 마땅하다."고 거듭 설득하자 1907년 9월 2일 원주에서 거의한다. 전국 8도에 격문을 보내 봉기를 독려하고 자기가 밀지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호응을 얻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군량 부족으로 의진에 참여한 포군들이 민가에서 식량을 약탈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인영은 충청도이강년 의진과 주로 협력했는데 이들과의 연계도 마냥 잘 되지는 않았다. 계속 원주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이인영은 관동 지역의 의병부대 통합 작업을 시작해 13도 창의군의 모태가 되는 관동창의군을 결성한다. 관동창의군은 원주에서 지평으로 이동해 1달간 머무르며 일본군과 수 차례 교전을 벌이는 한편 서울 진격을 위한 군사력 보강에 주력한다. 이렇게 해서 수 천 규모의 의병이 모였고 13도 창의대장에 오를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 이인영은 일본과 친일 세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려면 서울진공작전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연합 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1907년 10월 전국 각지 의병장들에게 통합 의병부대를 조직해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전하고 경기도 양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데 이 모든건 고종의 밀지가 준 권위가 있어 가능했다. 흔히 알려진 만국공법에 의거해 언론사와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뿌린건 이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다. 의병진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다 지평 일대에서 다시 일본군과 대규모 교전을 벌이는데, 1907년 11월 7~9일 삼산전투와 마전전투가 그것이다. 우선 삼산전투는 관동창의군 1천명에 합류한 의병들을 합해 2천명이 연발소총과 산포를 앞세운 일본군 2개 중대와 교전해 이틀간 혈전을 벌인 끝에 200~300명의 사상자 내고 퇴각하고 다음 11월 8일 밤에 시작된 마전전투는 연합 의병 1천이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마전의 일본군 수비대, 긴급파송된 금화수비대, 철원수비대와 교전해 이튿날 새벽까지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무기와 훈련의 열세 속에 다른 창의군과 합류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된다. 그리하여 1907년 12월 초순 양주에 도착해 그 과정에서 춘천양구 사이에서 의병 정예 400명과 일본군 60~70명이 맞붙어 2차례 격전을 벌인다. 여기서 이인영은 13도 창의군 총대장에 오르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인영은 허위보다 11세 연하고 관력에서도 비교적 고위직을 역임한 허위에 비해 이인영은 하급 무임직을 잠시 맡아본 적이 있을 뿐이었으며, 직할 병력도 을미년에 가산을 전부 소진한 이인영보다 허위가 훨씬 많았다. 양주 집결시 허위에게 자금 지원을 받았을 정도로 군자금도 열악했고 13도 창의대장에 오른 뒤에도 재정권은 군량관 김병화가 쥐고 있어 재무 처리에 일체 관여하지 못했으며 중군장이자 관동창의군 내부 살림을 책임졌던 이은찬의 발언권이 이인영 못잖게 컸다. 결국 바지사장에 가까웠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된 이유는 먼 조상이 보부상 출신인 허위와 달리 뼈대있는 양반 집안 소생이었고 을미년에 가산을 털어 적극적으로 창의에 힘쓰며 공정한 행실로 인심을 얻고 있었고 무엇보다 고종의 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합류하지 못한 이강년, 신돌석 등을 편제에서 제외하는 조직 개편을 거쳤는데 이 때 허위가 군사장으로 공식적인 창의군의 2인자가 되면서 직할 부대가 적은 이인영의 발언권은 더욱 줄어든다. 이후 허위는 선봉대 300명이 우선 진격하나 무장, 조직력, 훈련에서 모두 앞서는 일본군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창의군의 사기는 크게 꺾인다. 당초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은 경상도의 정용기와 신돌석, 전라도의 안규홍, 충청도의 이강년 등 삼남 지역 의진들 다수가 일본군 수비대 혹은 친일 민병대와의 교전으로 합류하지 못한 상태에서 1907년 10월부터 교전을 지속해온 탓에 탄약마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부족한 병력,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탄약, 떨어지는 훈련도와 무장같은 악조건이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창의군의 명령 체계였으며 이인영 밑으로 명령 체계가 단일화되어 있지 못했다. 관력, 연배, 발언권에서 이인영보다 앞서는 허위, 이은찬, 민긍호같은 인사들이 여럿이었고 총대장 신분에 부대 금전 업무에 관여를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자연히 창의군의 명령 체계는 느리고 복잡해졌는데 이는 의병장들 개개인 문제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병대를 끌어모은 조직 자체의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 와중에 부친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오자 이인영은 허위에게 대장직을 넘기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귀향한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거의 다 된 일을 상 치른다고 파토내고 무턱대고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귀향하기 이전부터 돌아가는 판세를 보고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내용의 통문을 작전에 참여한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고, 마무리 과정을 허위가 맡게 했다.

을미의병 때 인연을 맺었던 유인석은 해외 도피를 권했으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이인영은 거부하고 남기를 택했다. 1909년 6월 문경에서 체포되는데, 이인영에게서 고종과 한국 황실에 남아있는 항일 세력을 뽑아낼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조차 그의 처분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이인영은 일체의 권유는 없었으며 망국의 길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거의했다며 고종을 끝까지 보호한다. 일본인들조차 의사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던 이인영은 그 해 7월 29일 소위 내란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9년 9월 21일, 생일을 단 이틀 앞두고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이인영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국가를 위하여 창의하여 충군애국의 정신은 물론 나의 성의로 이를 발기시킨 것이다. 세사는 뜻때로 되지 않았고, 또 부친상을 당하여 얼굴도 배견치 못하고 충효 공히 죄인으로 천지에 몸 둘 바가 없게 되었다. 이 이상은 죽을 수밖에 없다.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사후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이인영을 도와 13도 창의군에 참여했던 동생 이은영(李殷榮)은 1909년 6월까지 경기와 강원 일대에서 항전을 이어갔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에 들어가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 오늘날 그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든 충효의 선후 문제는 당대 일본인들도 거론했다. 이인영은 뒷날 사로잡힌 다음 일본측이 한 심문 내용이 남아있다.[5]
문: 과연 너의 창의의 목적이 네가 말하는 바와 같다면 어째서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맹자의 이른바 대의멸친, 너는 유자인데 동양도덕과 너의 행위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답: 대의멸친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단 돌아가신 뒤에는 재회할 수 없지만 임금은 다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의병은 다른 사람이 지휘할 수 있고 한국의 풍속으로는 부친 사망 후에 상을 치르는 것은 하나의 규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불효에 해당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몹시 불충에 해당합니다.
  • 이인영 의진은 창의록[6]이 중간에 유실되어 온당히 평가받는게 늦어지기는 했으나 적어도 지금은 신분제의 한계로 인한 실패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문제는 교과서나 한국사능력시험 등에선 전혀 그런 연구결과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 이인영이 을미년에 무엇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정미의병에 다시 투신했으며 13도 창의군이 양주에 모이기까지 어떤 험난한 과정이 있었는지 전후 사정을 대폭 생략해버리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다 부친상을 당했다며 귀환해버리는 바람에 서울진공작전이 망했다는 뉘앙스로 기술하고 아예 낡은 인식을 극복하지 못한 유생 의병장의 한계로 거론하는 바람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을 살릴 마지막 기회를 날려먹은 역적 취급까지 한다.
  • 귀향이 원인이 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꾸준히 일제에 저항하다 일제에 잡혀 순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3도 창의군을 마지막까지 이끌었던 허위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과 달리 1단계 낮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7]
  • 세기와 더불어에서 언급되는데, 김일성의 주장에 따르면, 나중에 김형직에게 이인영의 얘기에 들은 김일성은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한 이후 친구들과 이인영이 부친상을 치르러 낙향한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나라와 가정을 다같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라야 참다운 효자라고 할수 있다. 가정만을 중시하고 나라의 환난을 경시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효자라고 부를수 있곘는가. 이제는 우리도 효성에 대한 유교적가치관을 바로잡을 때가 되였다. 리린영이 만일 자기 책임을 다하여 목적을 성취하고나서 부친의 묘소를 찾아 술이라도 붓고 분향재배하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손들앞에서 더 빛을 냈을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욕만 하지는 않고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쌀짐을 지고 토기점골의 집으로 찾아갈 때 나는 새삼스럽게 리린영의 이 일화를 생각하였다. 어째서인지 그 창의대장의 행실이 옳은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지난날 쓸개빠진 의병장이라고 입을 모아 비난하던 그 사람의 행위에서 내가 약간의 정의나마 발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그를 동정하고 그에게 약간의 리해를 표시하게 된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졌다가 강반석에게 혼났다 카더라.


[1] [2] 35세 영(榮) 항렬.[3]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8월 7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구한말 의병장들은 대부분 고종이나 그 측근들 손이 닿아있었는데 황제의 신물인 밀지가 있어야 정치적, 군사적, 사상적 정당성과 합법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5]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h&levelId=jh_098r_0010_0020&types=r[6] 倡義錄. 의진에 참여한 인사들의 신상명세와 규모, 전적, 전개 과정 등을 담은 진중기록. 의병이 기의하면 편찬하도록 되어 있으며 과장이나 검증되지 않은 풍문이 많아 일본측(특히 공사관) 기록과 필히 대조해야 한다는 한계는 있으나 기본적인 1차 사료로서 의병 연구에 필수적이다.[7] 허위는 박정희와 동향인이므로 선정에 있어서 고려가 있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