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9 15:03:55

허위(독립운동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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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4년 4월 1일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
(現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1]#
사망 1908년 10월 21일 (54세)
한성부 경성감옥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묘소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본관 김해 허씨(金海 許氏)
왕산(旺山)
직업 평리원 재판장 → 의병장
종교 유교
가족 허윤(조부) 허조(부)
허훈(백형) 허신(중형) 허겸(계형)
허학(장남) 허영(차남) 허준(삼남) 허국(사남)

1. 개요2. 생애3. 평가4. 트리비아

1. 개요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와 '창'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중략)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수어 칼을 만들고…
(중략)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위


許蔿
1855년(철종 6년) ~ 1908년

호는 왕산(旺山)이다.
  • 1854년 출생
  • 1896년 을미사변 후 의병부대 창설
  • 1899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역임
  • 1904년 한일의정서, 황무지 개척권 반대 통문 전국 배포
  • 1908년 순국

2. 생애

1855년 경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의병 해산 명령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2]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이 직접 그를 심문하고 고문했지만 오히려 그는 일제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3. 평가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 용맹의 기상이었던들 늘과 같은 국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안중근

4. 트리비아

심문을 받던 중 '의병을 일으킨 주동자와 대장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동자는 이등이며 대장은 나다.'라고 대답하고, 이유를 묻자 '이등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의병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이등이 곧 주동자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야사가 있다.

김구백범일지에서는 허위가 순국하자 그곳에 있던 식수로 쓰는 우물이 빨갛게 물들어 더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 라는 말이 쓰여있다.[3]

여담으로 그의 증조카가 일제강점기 시기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 무장투쟁 활동을 했던 허형식이다.# 또한 당조카인 허길의 아들이 바로 시인 이육사이다. 직계 제자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이 있다. 박상진은 허위가 순국한 후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과 주변인들까지 애국자 가문, 애국자 집단인 셈.

순국 이후 김천시에 매장되었으나, 2009년 후손들이 고향 임은동에 묘를 이장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성공원 안에 왕산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SBS의 드라마 제중원에서도 후반부에 중요 조연으로서 등장한다. 손현주가 연기하였고, 외유내강형의 인자한 인물로 그려진다. 총상을 마취 없이 치료하는데도 버텨냈으며 그 대가로 주인공 황정의 호를 지어준다. 주인공이 독립운동가로 각성하도록 돕는 인물 중 하나.

직계자손들은 구 소련 및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신분으로 어렵게 살다가 2006년 귀화하였다 #.

2018년 10월 21일 순국 110년만에 고향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하였다. 구미시 임오동에 그를 기리는 홈페이지 주소 기념관 자리는 본래 허위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유허비와 허위의 묘지 및 사당도 이곳에 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역오거리에서 시조사삼거리를 잇는 도로명인 왕산로는 그의 호에서 따와 지었다.

서대문형무소 설립 이후 처음로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로 알려져 있다.


[1] 김해 허씨 집성촌이다.[2] 허위가 이끌던 13도 창의군이 최종적으로 머물었던 길을 오늘날 그의 호를 따 명명하게 됐는데, 바로 왕산로이다.[3] 출처. 백범일지. 치하포 사건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