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5:14

장재성(191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장재성(張在成)
자 / 호 성팔(星八) / 원봉(園峰)
본관 인동 장씨[1]
출생 1914년 3월 3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동부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
사망 1939년 6월 25일[2]
대구형무소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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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재성은 1914년 3월 3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동부동(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에서 아버지 장병희(張炳熙)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경옥(金慶玉)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13대손으로, 선산보통학교(현 선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배재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고수중학을 졸업한 후 도쿄 소재 니혼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니혼대학 재학 중이던 1936년 배일사상집인 <말하는 침묵(沈默)>을 발행했고 1937년 <백의민족의 가요>, <명사십리>를 작사해서 보급했지만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비판하고 한국 민족의 궐기를 호소하는 지하잡지 <민족이여 일어나라>를 도쿄에서 동지 최원형(崔垣亨)과 함께 발간하여 국내외 동지들에게 배포했다. 또한 1938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배일사상 고취 시나리오 <홍주머니, 일명 아리랑>을 집필하여 영화제작을 기획하고 영화 촬영을 위해 귀국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미결수로 지내다가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재판에 회부되기 며칠 전인 1939년 6월 25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재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상장군 금용(金用)계 남산(南山)파 18대손 재(在) 세(世) 항렬. 인동 장씨 33세.[2] 인동장씨대동보 14권 남산파에는 1938년 5월 8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