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04 18:09:06

남상순(1926)

파일:남상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흑구(黑鷗)
본관 의령 남씨[1]
출생 1926년 2월 19일
충청남도 대전군 외남면 대흥리
(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사망 1978년 3월 3일
경상북도 구미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8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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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상순은 1926년 2월 19일 충청남도 대전군 외남면 대흥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서 아버지 남경희(南景熙)와 어머니 용궁 전씨(龍宮 全氏)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선산군 무을면(현 구미시 무을면) 무등리로 이주했다.

그는 무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1월 일본으로 유학하였고,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 나카쓰하마도리욘초메(中津濱通四丁目)[2]에 거주하는 한편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중학교[3] 야간반에 재학했다.

그러던 1941년 9월, 학우 전영수로부터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청년 및 학생이 주동이 되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설득을 들은 그는 이에 동의하고 항일투쟁에 앞장서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충성회(忠誠會)를 조직하고, 1942년 12월까지 30여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충성회의 운동방략은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본소련이 전쟁을 벌이면 즉시 귀국해 국내의 청소년들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실력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본받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1942년 12월 충성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남상순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44년 1월 27일 오사카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귀국한 그는 이범석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고, 구미시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78년 3월 3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남상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10월 12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24세 상(相) 항렬.[2]일본 오사카시 키타구 나카쓰욘초메(中津四丁目).[3] 1944년 니혼대학으로부터 독립되어 현재는 사립 오사카고등학교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