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다나카 나가히데(田中永秀) |
자 | 봉화(奉化) |
본관 | 담양 전씨[1] |
출생 | 1924년 12월 22일[2] |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가락리[3] | |
사망 | 1983년 2월 17일[4] |
경상남도 의령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7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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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전영수는 1924년 12월 22일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가락리에서 아버지 전용권(田溶權, 1907. 7. 19 ~ 1965. 2. 17)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수임(朴守任, 1904. 11. 13 ~ 1990. 1. 18)[5]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39년 3월 일본 오사카시로 건너가 견습직공과 신문배달로 고학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유학생에게도 독립투쟁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41년 9월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중학교[6] 야간반에 2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최후까지 투쟁한 영웅의 후손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으로 1943년부터 이를 조직화하여 단결을 굳히고, 일거에 봉기하여 완전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각오하에 맹세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우선 동지포섭에 나선 그는, 남상순·조경복(趙景福)·동방옥모(東坊沃模)·송촌대교(松村大敎)[7] 등을 포섭한 뒤 비밀결사 충성회(忠誠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국수대중당(國粹大衆黨)[8]에 입당하여 조직결성에 필요한 경험 및 지식을 닦았고, 또 당기 및 당원마크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충성회의 운동방략은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소가 개전하면 즉시 귀국하여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과거의 독립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실력의 결핍에 있었다고 보고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명각하면서 30여차례의 모임을 갖고 항일활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발각되면서 1942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오사카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의령군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2월 1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전영수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7월 3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했다.
[1] 경은파 27세 수(秀) 휘(煇) 항렬.[2] 담양전씨 인터넷족보에는 음력 3월 3일, 즉 4월 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독립유공자 전용선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음력 1월 5일.[5] 박승재(朴升在)의 딸이다.[6] 1944년 니혼대학으로부터 독립되어 현재는 사립 오사카고등학교로 남아 있다.[7]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고 한다.[8] 1931년 일본 극우파 정치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 ~ 1995)가 창당한 극우정당으로,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주요 이념을 채택했다. 사사카와 료이치는 실제로 태평양 전쟁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