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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백범일지 | |||
기타 | 피 묻은 적삼 · 경교장 · 묘소/기념관 · 대장 김창수 · 드라마 김구 |
1. 개요
백범일지(白凡逸志)는 김구의 자서전으로, 이광수가 윤문하였다고 한다. 상권과 하권, '나의 소원'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1929년,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구한말 당시의 과거를 전하는 한편, 하권은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상권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썼으며, 하권은 1943년에 충칭시에서 쓰였고 상, 하권과 '나의 소원'을 합친 판본이 1947년 12월 15일에 출판되었다. 현재는 백범기념관에서 원본을 소장 중.2. 내용
백범일지 - 위키문헌 문서 참조.상편은 '우리집과 내 어린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권은 '3.1 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말미에 있는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3. 기타
김구가 직접 쓴 백범일지 친필 원본은 1997년 6월 12일에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지난 1999년 6월 26일 이후로는 그 내용에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다.'나의 소원'은 상편과 하편 이후에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제목을 따온 독서 감상문 쓰기 대회도 2005년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개최되고 있다.기사
좌파 시민 운동가 김상구 씨가 쓴 책 ‘김구 청문회’에서는 기본적으로 ‘백범일지’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떨어진다고 판단하였다. 저자는 “자서전은 본래 과장될 수밖에 없다. 90% 이상 거짓으로 본다”며 “백범을 우상화하면서 백범일지의 내용이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실제로 치하포 사건에 대해 백범일지는 피해자 쓰치다를 일본 육군 중위라고 해 마치 국모 살해의 원수를 갚은 것으로 표현했지만, 당시 김구를 심문했던 관헌 문서와 언론에는 쓰치다가 일본 상인으로 나온다.
이런 주장에 도진순 창원대 교수[1]는 ‘김구 청문회’의 내용과 관련 “1∼2개 사례로 침소봉대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도 교수는 국내 백범 연구 권위자로 백범학술원 연구위원을 한 바 있다. 그는 “백범이 광복 직후를 제대로 읽지 못해 정치적으로 밀렸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면서도 ‘친일파가 만든 독립 영웅’이라는 ‘김구 청문회’의 주장에 대해 “작위적이고 난폭한 해석”이라고 비판했다.[2]하지만 도진순도 쓰치다가 군인이 아닌 점, 백범일지에는 젊은 날 청나라에 1번 갔다고 했지만 실제로 다른 기록을 보면 2번 갔던 점 등 사실 관계의 오류는 인정하고 있다.
느낌표(MBC)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2002년 5월 선정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나의 소원' 중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2000년대 이후 한류가 국제적으로 각광받으면서 인터넷상에서 종종 인용되기도 한다. 한류가 김구가 주장하는 '문화의 힘', 즉 소프트파워를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부분은 해방 이후 김구의 의뢰로 한자로 쓰여진 백범일지를 한글로 첨삭해 윤문한 친일파 이광수가 메이지 유신을 참고해 썼던 자신의 글에서 따와 추가한 내용이라는 주장이 있다. #
한반도가 일제의 지배에서 독립하면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지만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 어렵고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면 무너뜨리기 어려움을 경고하고 독재 중 제일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인데 조선은 유교, 그중에서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수백 년의 양반 계급 독재를 이어오며 정치뿐만이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 생활까지 규정하며 통제했고 조선 5백 년 동안 주자학만 붙들다가 민족 문화와 정기가 죽었고 이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경륜이 생겨나려고 해도 유교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이라고 짓밟히며 빛을 보지 못해서 예술, 경제, 산업까지 쇠퇴하여 망한 나라였다고 비판하며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새로운 사상과 경륜이 태어나며 진보한다고 강조했다.[3]백범일지 0.2.정치 이념
일제 강점기의 한인애국단의 활동, 그중에서 윤봉길의 훙커우 사건과 이봉창의 사쿠라다몬 사건에 대해 테러 운동[4]이라고 언급하였다.백범일지 하권 머리말
현재 보편적으로 읽히는 판본은 도진순 주해본이다.# 원문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사실 관계와 다른 것은 주석을 달고, 비문, 고어 같은 것은 손을 봤다고 한다. 1946년 국사원 초판을 그대로 인쇄한 영인본 버전도 있다.#
4. 번역 목록
제목 | 출판사 |
백범일지 | 돌베개 |
쉽게 읽는 백범일지 | 돌베개 |
정본 백범일지 | 돌베개 |
초판본 백범일지 | 지식인하우스 |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 | 보물창고 |
백범일지 | 매월당 |
백범일지 | 범우사 |
백범일지 | 스토리터치 |
백범일지 | 나남출판 |
어린이 백범일지 | 푸른나무 |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 읽는 백범일지 | 나남 |
백범일지 | 더스토리 |
백범일지 | 스타북스 |
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백범일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범일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백범일지
- 두산백과: 백범일지1929년(상권)1943년(하권)
6. 보물 제1245호
이 책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등의 제목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서술은 1945년말 정도에 첨부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상·하편 뒤에 붙은「나의 소원」은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더욱이 김구가 상해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등의 제목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서술은 1945년말 정도에 첨부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상·하편 뒤에 붙은「나의 소원」은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더욱이 김구가 상해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7. MBC에서 방영한 4부작 드라마
MBC에서 방영한 4부작 특집 드라마로, 김구의 타계 40주기인 1989년 5월 6일부터 1989년 5월 9일까지 방영되었다. 김기팔 작가-고석만 PD 콤비가 <억새풀> 이후 4년 만에 컴백한 작품이며, 조연출은 이강훈 PD, 해설은 성우 이완호가 각각 맡았다.기존 전기 드라마 등지에서 보여 온 백범 김구의 과장된 행동 묘사와 영웅적인 해석 등 '소영웅주의' 탈피에 중점을 두었으며, 김구의 생애 속에서 서사극 형식에 시대적 변화와 주인공의 행동 변화를 통해 객관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유년 시절의 추적과 언행은 김구의 실제 모습 이해, 민족주의자로서의 재평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방영 석달여 전인 1989년 2월 11일부터 6일 동안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미수교국인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을 시도하는 모험적인 면모도 보였다. 특히 임시정부 장면은 실제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에서, 훙커우 의거 장면은 사건 현장인 루쉰 공원에서 각각 찍었다.(경향신문 기사, 고석만의 한겨레 칼럼)
종영 후 2016년 MBC Archive를 통해 전편이 업로드되었다.
7.1. 등장인물
- 김구: 김진태 / 박영용 / 김만수(이하 아역)
- 곽낙원: 김용림 / 전미선(청년)
- 김순영: 김영인 / 송영웅(청년)
- 최준례: 이상숙
- 김인: 정승호 / 박정우(아역)
- 김신: 허용일 / 노형석(아역)
- 안태훈: 한인수
- 고능선: 박종관
- 안중근: 양형욱
- 쓰치다 조스케: 천호진
- 치하포 주막 주인: 박인환
- 치하포 주막 노인: 유춘
- 치하포 주막 손님: 이영범
- 와타나베: 김동현
- 해주 관아 심문관들: 이영달, 차윤회
- 해주 관아 아전: 최선균
- 김구의 사진을 찍으려는 일본인 관리: 최항석
- 김구의 사형 일자를 알리는 군졸: 오현섭
- 이동주
- 박성식
- 안용근
- 마곡사 주지: 최성관
- 하은당: 박종상
- 105인 사건 당시 일본 경찰 수사관들: 문용민, 문창근
- 이승만: 김인태
- 안창호: 이묵원
- 이동휘: 심양홍
- 신채호: 남성훈
- 이시영: 이도련
- 이동녕: 홍순창
- 양기탁: 신귀식
- 이봉창: 김두삼
- 김기현
- 윤봉길: 박영태
- 김원봉: 나영진
- 지청천: 한규희
- 김규식: 신충식
- 김민석
- 이명수
- 전희룡
- 박성식
- 노형석
- 송진우: 정승현
- 신익희: 전운
- 안재홍: 변희봉
- 조소앙: 황일청
- 여운형: 김길호
- 조완구: 임현식
- 장준하: 심우창
- 엄항섭: 최병학
- 선우진: 윤순홍
- 허헌: 김수일
- 박헌영: 홍성민
- 정태식: 김주영
- 김성수: 정욱
- 장덕수: 박경현
- 김사천
- 김두봉: 박영지
- 김일성: 국정환
- 안두희: 정성모
- 정선일
- 이원재
-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공산당원: 이재훈
- 장덕수 암살범: 한영수
- 김영일
- 김영두
- 장덕수 암살 재판 당시 김구의 통역관: 이성
- 송인혁
- 박용팔
- 임해림
- 박광진
- 이필훈
7.2. 여담
- <TV가이드> 1989년 1월 21일(9권 2호) 기사 '이영후 제치고 김구 역 맡은 김진태(허남주 기자)'에 따르면, 기획 단계이던 1988년 8월경부터 MBC 내부에선 김구 역에 이영후로 캐스팅해야 할지를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진 바 있었다. 이에 고석만 PD 측은 "이영후는 겉모습이 백범과 비슷한 건 응당 맞지만, 작가와 연출자, 작품, 시대에 따라 인물의 분석이 달라질 수 있기에 외형보다 표현되는 이미지를 고려해서 김진태의 캐스팅에 만족한다"며 '김구 = 이영후' 등식을 깼다. 해당 배역을 맡은 김진태는 그 막중한 배역을 소화해 내기 위해 <백범일지> 등의 관련 자료들을 탐독했다고 한다.[5]
[1] ‘쉽게 읽는 백범일지’와 ‘백범일지(이상 돌베개)’ 주해본의 저자[2] 문화일보 2014.8.6 기사 “백범일지 일부 과장에 침소붕대로 독립운동 폄훼”김상구 ‘김구 청문회’ 출간… 백범 전문가 도진순 ‘반박’ #[3] 여담으로 공산주의는 이러한 독재 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며, 독재 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조금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것은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북한은 이 견해처럼 조선로동당과 주체사상으로 독재 국가가 되었다.[4] 사전적인 의미로서.[5] 해당 잡지 p46~47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