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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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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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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및 청년 시절
1.1. 유년기부터 동학 운동 이후 무렵1.2. 치하포 사건1.3. 청년기
2. 흑역사: 독립운동가 암살3.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4. 해방 후 정치활동
4.1. 해방과 귀국, 정치 활동4.2. 이승만과의 관계
4.2.1. 장덕수 피살 사건 이후의 대립4.2.2. 남북연석회의 참여
4.3. 혁명의용군 사건
5. 죽음과 복권

1. 유년 및 청년 시절

1.1. 유년기부터 동학 운동 이후 무렵

무녀독남. 본관은 구 안동. 부친은 김순영, 모친은 곽낙원[1]. 방계 조상 김자점[2] 때부터 몇 대가 지나도록 숨어지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인조 대의 영의정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누설했고, 하마터면 만주로 압송될 뻔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김자점의 후원자였던 소용 조씨(인조의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당시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해주 텃골로 낙향해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백범 일지 따르면, 집안 어른이 청년 양반에게 하대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김구의 출생전후로 사실상 완전히 상민 신분으로 세탁된 상태였다.

180cm에 육박하는 거한이었던 김구는 1876년 태어날 때부터 덩치가 커서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난산이었다. 집도 가난했고 당시 의술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치성을 다 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다못한 김구의 아버지가 지붕에서 쇠질매[3]를 쓰고 음메음메 울자[4] 김구가 태어났다고 한다. 김구는 자라날때부터 개구쟁이었는데 애들이 곰보라고 놀리자 식칼을 들고 뛰어오고, 아버지가 아랫목에 숨겨둔 돈 20냥을 훔쳐서 떡 사먹으러 가다가 결국엔 대들보에 묶여 매를 맞고, 빨래하는 개울가에 물감을 푸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종아리 체벌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구 두 항렬 위 친척이 혼례를 올려 다들 갔다가, 신랑의 부친이 혼례 전날 갓을 사려다 양반한테 걸려 갓도 찢기고 심한 폭언과 욕설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분노한 김구는 반드시 아버지에게 갓을 쓰게 해주겠다고 마음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 철이 들던 순간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글공부를 했으며 일족들이 근처 마을 덕수 이씨, 진주 강씨들에게 천대받는 것에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시험은 독학으로는 어려웠다. 1894년 문과 전시가 열렸지만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와 폐단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곧 그만두었으며 그나마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없어졌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을 공부했다.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려서 석달동안 독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니 귀상이 아니고 외려 천격, 빈격, 흉격뿐이라 좌절했다고. 그러다가 다시 책을 뒤져 보니 마지막에 '좋은 관상이 좋은 몸만 못하고 좋은 몸이 좋은 정신만 못하니라[5]'라는 구절에서 안도하고 즉시 관상학을 걷어치워 버리고는 다시는 관상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곧 손자, 육도, 삼략 등 병법서를 읽었다.

18세 때 동학에 입문해 농민전쟁에 나섰다. 재밌는 게 김구가 동학 접주를 하던 당시 김구의 부친이 술자리에서 홧김에 함지박장수 김치경에게 '딸이 있다던데 우리 창수한테 주면 어떠냐'고 한 농담을 김치경이 덥석 받아들였다고. 김구네 집에 딸 사주단자도 들이고 딸도 집에 놀러오고 그랬단다. 그런데 김구가 동네 친구들이 '함지박 장수 사위'라고 놀려대는 게 싫어서 딸을 냉대했다고 한다. 한창 나이의 김구는 해야할 것도 많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접주들 중에서는 세력이 제법 안정적이었던 듯하나 근처의 다른 접주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고 김구도 몸을 피했다.[6] 그때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이 숨겨주었다. 안태훈은 진압하는 쪽이었지만 그를 거뒀다.[7] 그 집 도련님이 동년배였지만[8] 아무래도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가 안중근이다. 그 뒤로도 두 집안의 인연은 계속됐다. 김구의 큰며느리가 안태훈의 손녀인 안미생이다. 그리고 안태훈의 3남인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악연이 될 뻔도 했다. 1930년대 말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일제에 굴복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부친의 죄를 사죄하러 다닌다는 얘기를 듣자 김구는 그를 죽이려고 했다. 백범일지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1년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 안태훈의 식객인 유학 고능선에게 학문을 배웠다. 고능선은 척화파의 대표 집단인 화서학파의 제자로, 김구에게 척사와 국가관을 심어줬다. 청나라에 가서 의병을 일으키라는 가르침도 받았다고. 스승이 부추겨 젊은 백범은 백두산과 남만주 일대를 구경하고 돌아온다.

고능선은 혼기가 다 돼가는 손녀가 있었는데, 장남 내외가 전염병에 모두 죽자 만주에서 돌아온 김구를 손녀사위로 삼으려 했다. 백범일지에
"고 선생이 나를 촉망하고, 자원하여 손녀를 허락하시다니 책임감은 물론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규수가 자품도 그렇고 가정교육도 잘 돼 만족한 마음이 들었다. 안채에서도 인정하는 빛이었고 예닐곱된 여동생이 늘 '안아주오, 업어주오'라고 보채는 것도 귀여웠다. 그 집 규수가 조부 밥상을 차리면서 내 밥그릇도 같이 놓아주고 내가 있는 곳에 들어와 앉기도 하였다. 장남 원명 부부의 장례도 내가 도왔다.''

김구의 부모도 너무 마음에 들어했고 이미 얘기가 다 돼 식만 올리면 됐는데, 함지박 장수 김치경이 와서 '내 딸의 정혼자'라고 길길이 뛰는 통에 혼사는 없었던 게 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치경은 이미 딸의 다른 혼처가 있었다고 한다. 김구에게 냉대도 받았었고, 동학 때문에 정부에 쫓기는 몸이 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김구는 아마 돈을 요구하려 그랬던 것 같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1.2. 치하포 사건

1896년 3월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무장 상태[9]의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譲亮)를 살해한 사건. 대개 이 사건은 백범일지의 기록에 근거해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 군인을 죽인 의거라고 알려져 있다.

김구는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살해 후 그가 일본군 장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쓰치다 조스케가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 출신 상인이며 계림장업단이라는 상회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을미사변 관련인을 처단한 것이라는 김구의 증언과 계림장업단 소속의 약재상을 살해하고 엽전 800냥을 갈취했다는 일본 측의 기록에는 모두 당시 정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건 당시 을미사변에 관련된 일본인들은 일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관계로 김구의 증언이 잘못되었다는 의견[10]이 있고 치하포 사건은 1896년 3월 9일인데 그 살해당했다는 상인이 소속되어 있다는 계림장업단이 생겨난 건 1896년 5월 17일인 오류가 있으며 엽전 800냥도 김구가 가져간 것이 아니라 주막 주인이 그대로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 사건을 우발적인 강도살인으로 왜곡했다는 학설[11]도 있다.

백범일지에서는 사형 직전에 고종이 사흘 전에 개통된 첫 시외 전화로 사면하여 살렸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사실은 진위가 의심되었으나 각종 사료의 발굴 이후 전화 자체는 개통 되었단걸로 밝혀졌다. 다만 살인죄가 사면되었다는 부분은 거짓으로, 사형집행 허가가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12]

그랬기에 체포된 그는 사면받아 출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인천감리소에 수감됐다. 경무관 김윤정과 감옥 동료인 투전판 두목 김주경의 비호로 비교적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이 무렵을 영화화한 것이 대장 김창수이다.[13]

1.3. 청년기

2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그는 탈옥을 감행했다. 도망친 그는 1898년 머리를 깎고 세상을 등졌다. 충남 마곡사에 숨은 그는 1년 만에 때려치우고 환속한다. 해주로 돌아온 고향 서당에서 훈장도 했다. 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그는 훈장일도 봐주면서 둘째 큰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고 있었다.

1902년 세밑에 친척들한테 세배를 다니다 어느 날 장연군[14] 무산리 사는 친척 할머니 댁까지 가게 됐다. 이눔아 왜 장가를 안가냐 잔소리를 한참하던 할머니가 당신 친정에 여옥이라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과년한 처녀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겠냐고 권했다고. 백범은 그 집을 찾아가선 부친 상중이니 정혼을 해도 혼례를 좀 미루되 그동안 자신에게 글을 배우라며 무리한 청을 했다. 승낙을 받은 그는 숙부에게 정혼자가 생겼다고까지 말했단다. 그런데 왠걸 이듬해 탈상을 하고 혼례를 하려 했더니 탈상 직전에 여옥이 죽는다. 그는 혼기를 이렇게 넘기고 있었다.

그해 그는 훈장질을 걷어치우고 신교육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장연군 사직동으로 이사했다. 감리교인이 된 그는 여옥의 모친도 전도하고 근처의 목사들은 물론, 은율의 김태성, 장련의 장의택, 오인형, 정창극 등과 신교육에 대해 격렬한 토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동네 유지였던 오인형은 자신의 사직동 근처 전답과 임야와 집을 김구에게 맡기면서 학교를 세우라고 허락한다. 그는 사직동에서 개신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펼 생각으로 봉양학교(鳳陽)를 연다. 사숙을 열어 가르치면서 공립소학교 교사도 동시에 맡아 가르쳤다.

1903년 황해도에서 교육에 매진하던 그는 때때로 평양으로 가 평양 예수교 사범강습소에서 재교육을 받는다. 그곳에서 숭실학교 학생 최광옥을 만난다. 최광옥은 김구에게 미혼이냐 묻고는 안창호의 여동생이 있는데 어떤가라고 물었다. 이름이 안신호였던 그녀는 백범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미국에 간 도산 안창호가 자기 후배 양주삼과 결혼하라고 해서 안 되겠다고 거절한다. 백범에게 미안했던 그녀는 양주삼과도 결혼하지 않았다고. 이때 헤어진 안신호는 50년 뒤인 1948년, 통일연석회의에 참석차 평양에 온 김구와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1903년 사숙과 공립학교 교사 일에 매진하던 그를 대한제국 농상공부가 종상위원에 임명한다. 종상위원은 산업진흥책으로 누에를 장려한 나라 시책에 따라 마련된 자리였다. 황해도의 양잠 사업 진흥도 도왔다.

1904년에는 사숙을 백남훈에게 맡기고 신천군의 광진학교 교사로 옮겨간다. 광진학교 근처에 사평동 예수교회가 있었는데 교회 어른인 양성칙이 백범에게 최준례를 소개했다. 최준례는 제중원 출신 의사인 신창희의 처제로 신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부모가 정해준 혼처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려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김구에게 떠넘긴 것. 선교사 쿤스는 최준례에게 책벌을 내렸는데, 백범이 구식 조혼 풍습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특히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감리회에서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는가 이치에 맞게 항의하자 쿤스가 책벌을 푼다. 13세 연하였던 최준례는 김구의 처가 됐다. 둘사이에서 2남 3녀가 태어났는데, 딸 셋은 어려서 모두 죽고 장남 김인, 차남 김신이 뒤를 잇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한다.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 계의 항의 데모에도 참가하고 독립문을 행진하는 것은 물론 가두연설까지 했지만 탄압을 받고 해산됐다.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에 있던 서명의숙으로 옮겨 교사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면서 처음 항일 운동조직에 가입한다. 신민회는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가 창설한 조직으로, 국권회복운동에서 점차 항일 결사단체로 변모했다. 이회영, 안창호, 양기탁, 김규식 등 유명인사들은 물론, 김구에게 안신호를 소개했던 최광옥도 가입해 활동했다. 김구는 황해도지부 총감을 맡아 황해도의 국권회복운동을 도왔다.

1910년 12월 양기탁의 집을 찾았다가 이듬해 1월 검거된 안악사건에 연루돼 투옥된다.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그는 15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김좌진도 이 때 마주쳤다고. 3년 뒤인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된다. 그동안 아내 최준례는 남편을 대신해 안신학교 등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김구는 1915년 가석방된다. 전과자 신세가 돼 교원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 남의 농장을 돌봤다. 그는 가는 곳마다 농촌계몽운동과 소작쟁의 등을 주도했다.

1918년 신한청년당에 입당한다. 이듬해 기미 독립선언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한다. 그는 의정원 의원, 초대 경무국장 등을 지낸다.[15]

경무국장 재임 시기 김구는 수하 20여 명의 경찰을 이끌며 일본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재판소장 대리로 친일파, 밀정에 대한 처벌을 주도했다.[16] 백범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 선생은 "김구 선생은 한인 밀정이 오면 비밀리에 체포해 상해시 변두리에 세 얻은 집으로 끌고 가서 처리해 버렸고 그 수가 30여 명에 달한다"라고 기록한 바 있으며, 이들에 대한 처벌은 훈방 아니면 사형이었을 정도로 강경했다고 한다.[17]

1923년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되었으며, 1926년 12월에는 당시 의정원장이었던 이동녕의 추천으로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1930년에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당 총재를 맡았다.

2. 흑역사: 독립운동가 암살

2.1.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 김립 피살 사건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2. 옥관빈 피살사건

김구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어두운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3.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

1931년 임시정부 산하 항일 특공대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을 영입하여 일본 정부, 고위 요원을 대상으로 한 암살을 지휘하였다. 이때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가 성공하게 되면서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와 장제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18] 1930년대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고 난 뒤 백범김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피신생활을 했었다. 그러던 중 밀정에게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맞은 총알이 기적적으로 심장 바로 앞에서 멈추어서 겨우 살았으나 탄환은 몸에 평생 박히게 되었다.

1939년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건군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인 이동녕이 서거함에 따라 주석에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의 구미외교위원부를 부활시켰으며,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동년 4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통합하여 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동년 9월 한국광복군 건군의 정당함을 중화민국 정부에 알리며 중국 정부의 지원이 줄어듦에 따라 임시정부를 미국으로 천도하여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41년 6월에는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명의로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1941년 건국강령을 제정함과 동시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이듬해 김원봉 등 좌파 계열의 무장독립운동 세력을 포섭하였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고, 중화민국으로부터 광복군 통수권을 이양받아 한국 광복군 통수부 의장에 취임했다. 이후 광복군과 미국 OSS 간의 합동 군사 활동을 계획하여 1945년 8월 18일 독수리 작전 (서울 진공 작전)을 미군과 합동으로 수행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이른 항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백범일지에 일본이 좀만 더 늦게 항복했더라면 성공했을텐데..! 이라는 식으로 아쉬워했었다.[19]

4. 해방 후 정치활동

4.1. 해방과 귀국, 정치 활동

파일:242px-Kim_Gu_in_1949.jpg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다른 통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의 귀국이 불허되고, 한참 뒤에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귀국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미군정으로부터 임정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이미 국내에 여러 정치 세력이 토대를 닦아놓은 상황에서 김구의 입지는 생각보다 좁았다. 한때 임시정부의 법통을 빌려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한국민주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1945년 12월 29일 경교장에서 한민당 수석총무였던 송진우와 반탁 운동의 방법론을 두고 다투고 그 다음 날 새벽 6시, 한민당의 수석 총무 송진우가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 의해 암살되면서 관계가 크게 악화됐다. 미군정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는데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20] 김구보다 일찍 입국해 이미 권력을 다져놓은 이승만과는 한때 "우남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으나 이후 사이가 소원해졌다.

김구를 아예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한 조봉암을 비롯해 김구를 좋게 평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이는 김구가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이었음에도, 그에게는 동포, 그것도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피를 손에 묻힌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구는 임정 법통성을 지지하였는데, 후일 건준의 후신인 조선인민공화국과 임정의 통합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임정의 법통과 조직 계승 문제, 임정 인사들의 짙은 반공주의로 인해 실패했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며 대규모 반탁 시위가 일었다. 김구는 반탁 시위를 주도하며 이를 미군정에게 정권을 인수받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그 해 12월 31일 임시정부는 내무장관 신익희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여 경찰권 접수 등을 발표했다. 이미 서울 시내 경찰서장 대부분이 임정에 협조를 약속했고, 군정청과 서울시청의 직원들도 파업과 사직을 통해 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군정은 즉각 임정과 경찰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임정에 협조한 경찰서장을 파면했다. 1946년 1월 1일 군정장관 존 리드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한 번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며 경고했다. 김구도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받아쳤다. 살벌했던 두 사람의 갈등은 미국 본국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문이 도착하면서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날 밤 김구는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에게 지시하여 반탁운동 중지를 선언했다.

이후 김구는 이승만과 손을 잡고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켰으나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임정 내 좌익 세력들은 임시정부가 통일 전선 수립은 외면한 채 우익 세력 통합에만 열을 올린다며 비상국민회의를 탈당한다.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의 후신, 그 산하 조직인 최고정무위원회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후신으로 칭하며 임시정부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다. 그러나 최고정무위원회가 구성된 바로 다음날 미군정이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편입하며 김구의 권위는 실추됐다.

김구는 우익정당 통합운동으로 활로를 찾고자 했다. 김구는 한국민주당을 비롯해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 이갑성이 이끄는 신한민족당 등에 통합을 제안했다. 그러나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내건 조건은 다른 당들에 모욕적인 것이었다. 통합 정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 총재와 당명 역시 한국독립당이 정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저항이 특히 컸다. 결국 우익정당 통합운동은 한민당이 불참한 상태에서 한독당과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통합되며 끝났다. 우익 최대 정파인 한민당이 빠진 통합의 효과는 김구가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오늘우리 전 민족이 세계 무대에 발을 들여놓는 그런 시기를 맞았습니다. 세계 각 민족과 각 나라하고 우리와의 결사하는 관계가 맺어질 겁니다.
대한독립 만세!

1946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김구.

1946년 10월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를 공고하자 한독당은 내홍에 빠졌다. 김구 등 한독당 주류는 입법의원 설치가 임정법통론에 어긋난다며 소극적 입장을 보였으나 안재홍 등 국민당 계열은 입법의원 설치로 한국인의 자치권이 확대됐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독당은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입법의원에 선출된 당원을 등원시킬지를 두고 또 다시 당론이 나뉘었다.

1947년 2월 김구에게 새로운 기회가 온다. 김구는 민족통일총본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해 국민의회를 조직한다. 국민의회는 임시의정원 계승,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대한민국 유일의 역사적 입법기관'를 자처했다. 김구는 한독당과 한민당의 합당도 다시 추진했다. 김구는 한민당이 통합을 거부한다면 정계 은퇴도 불사하겠다며 한민당을 압박했다. 3월 1일 독촉국민회와 전국학생총연맹이 임정 추대를 결의하면서 과도정부 수립 운동은 점점 고조됐다. 3월 3일 국민의회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김구를 추대하고 정부 조직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실제 물리력을 가진 경찰과 관료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한민당은 언론 플레이를 통해 소극적,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합당을 무산시켰다. 당시 방미 중이던 이승만은 자신이 없는 사이 김구가 우익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국민의회를 저지하려 했다. 국민의회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역시 미군정이었다. 3월 5일 미군정은 엄항섭, 김석황을 체포하고 국민의회가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 반란죄로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김구는 이시영, 조완구 등과 미소공위 수석 대표 앨버트 브라운 소장을 방문해 다시는 미군정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4.2. 이승만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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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는 1941년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의장으로 임명되면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42년 이승만이 한길수 등 한인 사회 일부와 갈등을 빚었을 때도 김구는 이승만을 비호했다. 이승만 역시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김구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사실 해방 직후, 엄밀히 말하자면 단독정부 수립안 이전까지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는 매우 두터운 관계였다.

주변인들의 기록이나 증언을 보면,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묘사된다. 8.15 해방 이전까지 김구가 항상 이승만을 '우남이 형'[21]이라고 부르면서 절친한 사이였고 서로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구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나의 이 박사에 대한 충절은 결코 변치 않을 것이오. 남산 위의 소나무가 그 색깔을 변한다 해도 나는 안 그럴거요.'라고까지 하기도 했었다.[22]

그러나 1945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의 환국이 지체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진다. 임시정부 환국 이전 정국의 주도권은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쥐고 있었다. 독촉이 주도하는 정당 통일운동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대중의 관심은 환국을 앞둔 임시정부에게 옮겨갔다. 임정 환영 행사로 사회의 분위기가 들뜨자 이승만은 "환영 소동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환국 이후, 임시정부와 독촉 사이의 통합 협상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이승만이 독촉을 중심으로 한 통합을 고집하여 실패했다.

1946년 1월 4일 김구는 정권 인수운동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발표한다. 임시정부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런 의도를 알고 있던 좌익과 미군정은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무시한다. 미군정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원치않았던 우익도 임정 추대운동을 포기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김구의 위기를 포착한 이승만은 독촉과 비상정치회의를 통합할 것을 김구에게 제안한다. 정치적으로 고립돼 있던 김구는 이승만과 다시 손을 잡고, 두 세력의 통합 단체인 비상국민회의가 출범한다. 이후 김구가 독자 세력화를 위해 우익정당 통합운동을 진행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독당과 한민당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김구가 이끄는 반탁총동원위원회와 독촉의 지방조직을 통합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군민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우익 최대의 대중조직이었다. 김구와 이승만, 두 세력은 조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초반에는 '독촉군민회 전국도부군지부장회의'를 거치며 김구 세력이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1946년 봄,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이 이른바 '남선순행'을 통해 삼남 지방의 지역 조직을 다진 결과, 김구 세력은 6월 '독촉군민회 전국대회'에서 이승만 세력에게 총재직을 비롯해 조직의 주도권을 빼았겼다.[23]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정읍발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김구는 정읍발언 절대지지를 표명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24]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임정법통론을 주장했던 김구는 불참을 선언하자 안재홍, 권태석 등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이승만 역시 미소공위 불참을 선언했으나 자신의 후견 세력이던 한민당이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위기에 빠졌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반탁시위를 주도하는 등 미군정을 공격한다. 그 해 7월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김구와 이승만은 정부 수립 방법과 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두고 다시 대립된다. 김구는 국민의회를 통해 단독정부 수립 반대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취임을 거부한다.

1947년 9월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김구는 임정법통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김구는 조소앙 등 중간파가 주장하는 남북지도자회의에 입각한 남북 총선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에 한독당은 조소앙이 주도하는 12정당 협의회에 가입한다.[25] 이승만과 한민당은 한독당과 중간파가 연합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결과 한독당은 12정당협의회에서 이탈해 다시 이승만 세력과 통합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국민의회와 이승만 측의 한국민족대표자대회가 통합을 결합했다. 그러나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이후 미군정에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김구와 관계를 단절하면서, 둘은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4.2.1. 장덕수 피살 사건 이후의 대립

한민당 정치장관 장덕수가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자 미군은 김구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며 증언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김구가 이미 미군정에 송진우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은 바 있고, 반탁운동을 진행하며 신탁통치의 주체가 될 미군정과 정면으로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난폭한 호랑이란 뜻의 'Black Tiger'라고 부르기도 했다.

박광옥, 배희범 등 장덕수 암살범과 그 일당은 이틀 만에 체포됐다. 이들이 속한 대한학생총연맹은 김구가 총재로 있는 단체였다. 이로 인해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세력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됐고 그 중 김석황은 체포됐다. 범인 가운데 박광옥, 배희범은 사형을, 김석황은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송진우에 이어 장덕수가 암살되자 "미군정은 김구가 암살에 개입했다고 의심했고, 이승만의 측근이자 미군정 정보참모부에서 일하던 장석윤을 통해 김구를 증인으로 재판정에 소환했다. 강력한 연대자였던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목전에 두고 김구와의 연대를 중단키로 결정했다. 또한 1946~47년간 한독당과 합당의 대상으로 논의되기도 했던 한민당 역시 김구·한독당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7년 말에 이르러 김구는 남한 우익진영에서 완벽하게 고립되었다."[26]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주도한 비상국민회의를 버리고 한민당과 연합해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구는 대한민국 검찰청에게 미군정 재판정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당하게 된다. 이 일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사실상 완전히 단절된다.

1948년 1월 초, 김구는 단정 수립론과 남북 통일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였다. 이러한 노선의 차이 때문에 이승만과 틀어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는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a]
기자 : 지난 1월의 회견 때 주석 선생님은 이승만 박사에게 충성을 다 할 것을 밝히셨는데 지금의 심정은 어떠하신지?
김구 : 그 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소. 이승만 박사에 대한 나 김구의 충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오. 만고 남산 위의 소나무가 그 빛을 갈지언정 나의 이같은 마음은 추호도 변할 리 없소. 그러나 그 분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그 분에게 맹종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통일된 독립 정부의 수립에 대한 나의 신념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승만은 "한국의 소나무가 모두 시들어가고 있다."며 총선거에 대한 그의 미온적 태도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었다.[a]

4.2.2. 남북연석회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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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9일, 38선에 도착한 김구 일행.[29] 김일성의 보고를 경청하고 있는 해방 직후 북 주석단 모습.[30]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건곤일척으로서 김규식과 방북하여 김일성과 연석회의를 열어 남북 총선거를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 북한의 프로파간다의 대상이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31]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김구.

김구 본인은 극렬한 반공주의인데다 김일성 암살시도의 배후[32]로 지목받아 김일성과는 원수에 가까운 관계였으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가하면서 일시적인 협력관계가 된다.[33] 김구가 이승만의 지지율을 넘기 위해 북행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은 한독당 보고서외에도 여러 인물들의 회고와, 정황에서 드러난다.

장건상이라는 인물에 따르면 김구는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하기 직전까지 북한에 가고 싶은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말년에 이승만과의 사이가 얼마나 소원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애초에 남북 연석회의 자체가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자리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남북한 정부 수립은 사실화되었고 애초에 김일성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북한영화 위대한 품에서 보면 조롱을 당하는데, 김구가 김일성에게 절을 하면서 자신에게 땅을 몇 마지기 주면 황해도에서 과수원한다면서 반공운동을 한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34] 이로 인해 김구는 평생 반공주의자로 살았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그러나 김구가 진정성 없이 이승만이 싫어서 남북협상을 했다고만 볼 수는 없는게 김구는 남북협상 실패 이후에도 암살당할 때까지 줄곧 일관성 있게 남북한의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으며 그러한 주장의 이유로 남북간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들었다. 실제로 김구가 암살된지 1년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음을 생각하면 남북협상 자체는 실패했음을 부인할 수 없더라도 김구의 미래를 보는 안목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의 의의는 높게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이승만김구남북연석회의에 참석을 위해 북한으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듣고 "백범, 백범!"하며 안타까운 듯 허공에 대고 외치고는 "독립의 영웅이, 애국에 불타는 그가 왜 지금 돌이키지 못할 오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정년 모르는 것인가!"라며 긴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35]

4.3. 혁명의용군 사건

1948년에 국회의장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김구가 선거를 포기하여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기 때문에 7월의 제헌의회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도 불출마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13표(6.67%), 2위로 낙선했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도 65표(32.99%)로 2위로 낙선했다. 이는 김구가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한독당소속 정치인들의 국회의원 출마를 금지시키고 출마한 당원들을 쫓아낸 것에 기인한다.[36][37]

같은 해에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와중에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이 일어난다. 이승만은 김구를 이 사건에 엮어서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고 했지만 완벽하게 실패한다. 이승만이 유도하려던 내용은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출마한 최능진과 오동기 14연대장이 공모해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내용인데 막상, 최능진과 김구 사이에 아무런 접점도 없고 제대로 만난 적조차 없던지라 오히려 국내에서 이승만의 이미지가 악화되고 말았다.

남북협상이 실패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주장했으며 암살 직전 말년에는 반민특위를 강력히 지지하는 등 정치에 다시 뛰어들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김구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38]

5. 죽음과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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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내부에 자리한 묘역

1949년,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서예를 하던 도중에 미국 CIC 비밀 정보원이자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 김창룡이나 장택상, 미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실행범이 안두희란 것뿐이다. 그러나 안두희 역시 47년 뒤에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둔기에 피살당한다.

이승만은 백범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해서 묘한 발표문을 내놓으면서 대중들 사이에서 김구가 암살당한 배후에 이승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강해지게 되었으며, 1949년 6월 26일 순국한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거물이었던 만큼 국장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장례위원회측이 이승만 정권이 추진하던 국장에 니들이 죽여놓고서 무슨 국장이냐면서 반발하여 민족장으로 치르려고 했는데, 김규식이 절충해서 국민장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의 연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 30분께 사망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 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져서 조문객수는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9]

김구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역사 속에서 김구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김구의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업적, 즉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고 지시하였고, 교육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40] 그렇지만 이승만의 이러한 의심스러운 행보로 인해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을 사게 되었고, 이승만의 평판을 떨어트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헌병사령부의 발표에 의하면 김구는 반 이승만 쿠데타를 계획했다니 절대 찬양이 불가능했다. 김구의 반 이승만 쿠데타 계획은 미국의 배반(리처드 로빈슨), 실리 보고서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김구가 본격적으로 복권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의 일이다.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김구를 높게 평가했고, 이승만이 196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귀국도 거부했다.[41] 특히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해 격찬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12년만에 박정희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42]

박정희 시절 정권 차원에서 김구를 복권시킨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김구의 차남인 김신이 군사정변의 주요 협력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정권의 입장에서는 전정부를 배격하고 그 정치적 라이벌을 복권하는 것이 쿠테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 방법이었다. 현재 대중들에게는 김구가 중도적인 스탠스를 가진 독립운동가로 보여지지만, 사실 김구는 민족주의 색채가 매우 강한 우파 성향이었다.[43] 사회주의자들을 일컬어 정주(程朱)의[44]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고 한다며 비난하기도 했으며, 특히 해방 후 친일세력들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백범을 빨갱이로 매도하려 했기 때문에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다.[45]

김구는 1946년 3월 1일, 북한의 3.1절 기념식에 맞춰서 백의사 요원들을 북한으로 올려보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들은 먼저 김일성의 외증조부인 강양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했다. 강양욱을 노렸으나 강양욱은 살아남았고, 강양욱의 아들 딸 며느리와 강양욱 목사 집에 심방온 다른 목사 및 경비병만 폭사하였다. 김책을 노린 테러는 실패하였으며, 김일성을 직접 겨냥한 폭탄 투척은 김일성의 곁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떨어진 폭탄을 되집어 던져[46]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북한군에 체포된 요원들은 김구, 이승만 명의의 신임장과 고당 조만식에게 보내는 서한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백의사가 김구에게 보고한 김일성, 김책, 강량욱에 대한 암살 계획을 김구가 승인했음을 진술했다. 이는 당시 소군정 문서에 기록되어 남아있다. 도진순[47]의 1997년 저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에 따르면 김구의 전 약혼자였던 안신호가 김구에게 강양욱 암살에 대해 물으니 김구가 몹시 난처해했다고 한다.

이처럼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나 리처드 로빈슨 등 한국 현대사 전공자들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각종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처럼 각종 암살과 백색테러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는 평가는 비단 현대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미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김구에 대한 각종 의혹은 김구의 존재 자체를 덮어버리려던 이승만과 의도적으로 미화를 시도한 박정희 때에 쉬쉬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이라 보면 된다.[48]


[1]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뒷바라지했다.[2] 김자점의 10촌 형제 김대충(金大忠)이 김구의 11대조이다.[3] 쇠질매: 소 안장[4] 평안, 해서지방에서 볼 수 있는 의식으로, 산모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라고 한다.[5]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씁쓸한 농담으로 관상학에서 가장 잘먹고 잘사는 좋은 관상은 친일파 이완용이고, 엄청 고생하는 나쁜 관상은 김구라는 얘기가 있다. 후대의 평가와는 별개로, 이완용은 일신 편하게 산 반면 김구는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한 청년기부터 죽는 순간까지 평생 고초를 겪으며 살았다.[6] 김구가 유달리 '내부의 적'에 민감하게 군 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7] 이 둘은 그 전부터 상호불가침조약 비슷한 것도 맺고 있었다.[8] 김구가 3살 많다.[9] 일본도를 차고 있었다. 김구가 쓰치다를 사무라이 내지는 군 관련 인물이라고 확신하게 된 계기 중 하나이다. 당시 일본은 군인을 제외한 민간인의 무기 소유를 엄격히 금지했고 일본군의 무장 상태도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상태라 일본도를 차고 다니면 눈에 금방 띈다.[10]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속 이우연 박사가 이런 주장을 한다.[11] 前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한철호 박사의 주요 의견이다.[12] 다만 당일 사형집행이 예정되어 있었던 11인 중 김구에게만 사형집행 중지를 명령한 것이기 때문에 고종황제로 인해 김구가 목숨을 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다.[13] 조진웅이 젊은 백범으로 나왔다.[14] 해주 인근의 군. 유명한 장산곶이 있고 백령도의 원래 행정구역이 장연군이었다[15] 임정 건국 당시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대한민국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고, 1919년 8월 12일 도산은 김구를 경무국장(현 경찰청장)에 임명하였다. 당시 백범은 학식과 사람됨의 부족을 이유로 사의를 표했으나, 도산은 이를 반려하였다.[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2/2016080202019.html[17] 물론 협소한 임정 청사에서 장기간의 징역을 선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징역형을 선고하면 어찌되었든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데, 독립운동가들의 사생활이나 정보가 노출될 수도 있고...[18]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고난 이후 장제스는 이에 감명받았다 한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19] 하지만 서울 진공 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광복군을 이용한 작전을 폈어도 이후 정세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을께 뻔하며 '참전'을 의미로 두고 했어도 역시 도움이 안되었을것이다. 애당초 성공할 수 있는 작전도 아니였다. 곽가 찾는 조맹덕급[20] 브루스 커밍스, /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001, 287쪽.[21]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당시에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당시 예법과, 그리고 형이라고 불렀을 만큼 친근한 사이였음을 암시한다.[22] 훗날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가 틀어지자, 이승만은 기자에게 남산 위의 소나무가 다 말라버렸다며 이를 비꼬기도 했다.[23] 이때 신익희가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이 김구가 밀리는 결정적 패인이 됐다. 당시 신익희는 임시정부 내무장관 직함을 이용해 사조직을 운용하며 임정 지도부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24] 이전까지 서술에서 김구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한다고 서술돼 있었으나, 한국독립당 내의 일부 인사가 지지한 것일 뿐 김구 차원에서 지지한 적은 없다. 더욱이 김구는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하는 여운형과 몹시 불편한 관계이기도 했다.[25] 한독당, 근로인민당, 인민공화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조선공화당, 한국당, 조선민주당, 민주독립당, 사회인민당 등이 참여했다.[26] 정병준,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 역사와현실 제61호, 2006. p.318[a]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80[a] [29] 왼쪽부터 선우진, 독립운동가 정이형, 백범, 차남 김신, 중절모쓴 사람은 조선통신 기자 유중렬이다.[30] 앞줄 왼쪽부터 김일성, 백남운, 박헌영, 김두봉. 뒷줄 왼쪽 두번째는 김구, 네번째는 김원봉.[31] 김규식은 북한을 방문한 것까지는 맞지만, 북한의 계략에 이용당할 것을 눈치채고 병을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32] 김일성은 죽지않고 한 소련장교의 팔이 절단되었다[33] 미군정 관리이자 교수인 리차드 로빈슨은 김구의 방북이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혐오감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34] 한국에서는 당연히 개봉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를 모 교양프로에서 일부 편집으로 틀어준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본 김구의 차남 김신 장군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왜냐면 김신 장군 본인이 바로 부친을 수행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산증인이기 때문.(…)[35] “元老의 證言 · 南北分斷의 責任者”, 《자유공론》, 1985년 5월, 218호, p. 102-111[36] 초대 대통령선거는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졌기 때문.[37] 1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체 의석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던 무소속 의원들 사이에서 김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7월 20일 오전 김구는 "단정 수립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본인에게 표를 던지지 말라."라며 성명을 냈고, 이에 소수의 김구 지지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은 아쉬움을 표하며 이승만 후보에 투표를 하게 되었다.[38] 실제로 5.10 선거에 불출마했던 남북협상파, 중도파들이 이 선거에는 대거 출마해서 당선되었다.[39] 북한 쪽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김일성의 남침에 회의적이던 연안파가 김구의 암살을 계기로 남한은 친일파의 손에 떨어졌다는 판단을 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연안파와 김구는 성향은 달랐지만 일제말기에 협력을 시도하는 등 인연이 있었다. 김구의 존재감이 좌우를 막론하고 컸다는 걸 알 수 있다.[40]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멤버이자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구의 차남 김신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별다른 불이익 없이 군생활을 지속했다.[41]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들었던 관계일 정도로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다.[42] 박정희 본인은 해방 이후 임시정부 계열과 접점이 있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가 광복군의 세를 키울 목적으로 군경력자들을 모집할 때, 박정희는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평진지대의 중대장을 맡은 바 있었다. 이때 인연으로 훗날 군부 대숙군 속에 박정희가 체포됐을 때, 박정희의 구명에 나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학규 장군이었다...라는데 증거가 없다. 박정희는 5.16 성공 이후,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김학규 장군을 즉시 석방했다...지만 4.19가 일어난 뒤에 석방되었다고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나온다.[43] 오히려 중도적인 스탠스를 가졌던 인물은 김규식 이었다.[44] 주자와 그 스승 이정자(二程子, 정호程顥 · 정이程頤 형제)를 일컬음[45] 김구는 장덕수 암살 이전에는 이승만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찬성했으나, 장덕수 암살 이후 이승만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으며 이후 주한미군 철수운동을 했는데 유어만 회담록을 보면 한국 건국에 참가하라는 유어만 중국총영사의 부탁을 거절하고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강하고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거라고 말했다.[46] 되집어 던지는 순간 폭발하여, 노비첸코의 한 쪽 팔이 날아갔다.[47] 백범일지의 주해를 담당한 사람이다.[48] 다만 미군정은 애초부터 자신들과 충돌하는 김구를 좋게 보지 않았고, 언급된 여러 암살사건의 배후에는 이승만을 포함해서 여러 인사들이 배후로 지목되던 혼란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