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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제4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백남운 白南雲 | Baek Nam Woon | |
<colbgcolor=#E40001><colcolor=#FFF> 출생 | 1894년 2월 11일 |
전라도 흥덕현 이서면 반암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1] | |
사망 | 1979년 6월 12일 (85세) |
북한 평양시 | |
학력 |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 도쿄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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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경제학자, 북한의 정치인. 본관은 수원(水原)[2], 호는 동암(東巖).2. 생애
1894년 2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에서 백낙규(白樂奎, 1866 ~ 1935)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에서 2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1918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4월 도쿄상과대학[3]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으며 이후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비롯한 사회경제사 연구 저술로 유명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해 조선총독부 어용 학술 단체인 조선사 편수회에서 주창하는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여러 편 썼다. 1920년대 중국에서 고조되었던 자본주의 맹아론에 영향을 받아 한국사의 마르크스주의적 5단계 발전론을 설정하고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이론을 내세워 식민사관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세 부재론을 반박하기 위해 고려시대를 중세로 설정했는데, 이는 이후 긴 시간동안 고려사 해석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지다 고려사회 관료제설 대두 이후 엄청난 논란이 된 끝에 일부는 살아남고 일부는 폐기된다. 다 폐기되지 않은 이유는 현대 사학계가 고려사회를 귀족제와 관료제를 절충한 다원사회로 파악하기 때문이다.백남운이 쓴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일부 내용. |
193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학자로 명성이 높아졌고 제자들을 중심으로 '경제 연구회'라는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 동아리를 이끌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38년 2월 '연희전문학교 적화 사건'#이라는 시국 사건을 조작하였고 백남운은 같은 학과 교수인 이순탁(李順鐸), 노동규(盧東奎) 등과 함께 체포되어 2년여간 투옥되었다.# 1940년 석방된 이후 김광진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 이외에는 은둔하며 지내다가 1941년 친일 전향자 단체인 야마토주쿠(大和塾)에서 열린 제1회 사상선도강습회에 참석하고# 이 단체에서 일제의 전시 통제 경제 체제를 지지하는 강연을 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는데 1948년 11월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편찬한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대화숙 일을 돕는다고 각기 유혹과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총력연맹 부·과장의 지위를 교묘히 단호히 배척하였던 인사로 이묘묵(李卯默), 최용달과 함께 백남운을 거론하였다.# 이로 보아 1940년 출옥 이후 친일로 전향한 것 자체는 사실이나 함께 거론된 이묘묵, 최용달과는 달리 친일인명사전이나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소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연안파의 남한 쪽 조직이었던 남조선신민당를 결성해서 정계에 뛰어들었다. 연안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김두봉과 인연이 있어서 당수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인 백남운은 정치인으로는 부적격이었고 끝내 입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여러 번 심하게 부딪쳤는데 박헌영 지지자들은 백남운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1946년 11월 남조선신민당이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과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했으나 합류하지 않은채 정계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민족문화연구소를 꾸리고 문화 운동에 전념하다 1947년 4월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고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을 결행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백남운.
이후 북한에서 남북연석회의에도 참석하였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초대 교육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마르크스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 등을 맡았다. 해방 이전부터의 명성 덕분인지 꽤 고위직을 맡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월북 인사들 중 홍명희, 이극로, 박문규 등과 함께 끝까지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인사들 중 한명이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5년 3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환갑기념 국기훈장 제1급을 또 받았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최원택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을 지내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면서 상설회의 의장 겸 의장인 황장엽에게 의장 자리를 물려주고 사회과학원 부원장으로 물러나서 조용히 지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7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960년대 말에 김정일의 손에 숙청당했으며, 김병하가 백남운을 통제구역으로 끌고 갔는데 백남운을 위한 작은 집을 하나 지어주었더니 그가 좋아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황장엽의 추정으론 기껏 불평 몇마디 정도 했다가 그 꼴이 났을 것이라고 1979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일체의 부고도 발표되지 않았다. 이후 남한 학계에서 백남운이 인기가 좋은 것을 보고 복권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 직함으로 애국열사릉에 안장,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북한에서 일체의 부고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1991년에 나온 양성철 교수의 저서 북한정치연구에는 생존자로 기록되는 등 많은 월북자들과 함께 남한에선 전혀 운명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3.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1 - 1942 | 정계 입문 |
[[조선독립동맹| 조선독립동맹 ]] | 1942 - 194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6 | 정당 해산 |
| 194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6 |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
| 194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6 |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4] |
| 1946 - 1947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7 | 정당 해산 |
| 1947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7 - 1948 | 정당 해산 |
| 1948 - 1979 | 입당(월북) 정계 은퇴 |
4. 여담
- 일제강점기 시기 경제학을 제대로 전공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인지도는 폭망 수준이지만 한국 현대 사학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투척한 사학자이다. 그가 식민사학을 반박하기 위해 끌어온 카를 마르크스 유물 사관은 북한 사학계야 당연하고 한국에서도 역사 해석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 이후 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 더이상 시대 구분이 중요해지지 않아 요즘은 영향력이 적다.
- 신채호와 함께 일제의 식민사학을 정면으로 반박한 대표적인 학자이며 해방 이전 이후로도 국내 사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지만 사회주의 계열에다가 월북한 역사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실 후대 학자들에게 학설 면에서 미친 영향만 보자면 백남운이 신채호를 능가하지만 사회주의 역사학의 계보가 분단으로 인해 끊겼고, 실증주의+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을 베이스로 깔면서도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인해 현재는 신채호가 훨씬 유명하다. 현재 전남에 남아있는 그의 생가도 최근까지 지붕 한구석이 무너져내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 연희전문학교 재직 당시 친구였던 정인보의 납북을 주도하였다는 카더라 통신이 현대 한국의 사회주의 사학자들 사이에서 언급된다. 환갑이 몇 년 남지 않았던 정인보는 6.25 전쟁 중에 감행한 월북의 여독으로 사망하여서 나중에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 때 후회를 하였기 때문에 백남운은 정치적인 권한을 사적으로 쓰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숙청을 모면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 2011년 10월 그의 손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탈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