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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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과학원장 정준기 鄭浚基 | Jung Joon-Ki | |
<colbgcolor=#004488><colcolor=#FFF> 출생 | 1924년 9월 15일 |
함경남도 북청군 | |
사망 | 2007년 6월 25일 (향년 83세) |
수훈 | 김일성훈장 (1982년)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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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4년 9월 15일, 함경북도 북청군 만춘리의 어촌 마을에서 혁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준기가 6살 때 혁명을 하러 집을 뛰쳐나가버렸고 어머니마저 일찍 죽는 바람에 어린 나이때부터 죽도록 고생하며 소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생계를 이어나갔다. 해방 후 북청군 민청부장, 고원군당 부장으로 사업했으며 문필활동으로 김일성의 눈에 띠어 함경남도 출판보도부문 과장에 배치되었다. 1949년 6월, 내무성 출판보도기관 책임일군에 배치, 전후에 내무성 정치국 선전부 출판담당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5년 로동신문 부장에 임명되었다. 8월 종파사건 이후 최창익, 박창옥을 맹렬히 규탄하여 김일성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1957년 4월, 주한미군 범죄를 맹렬히 규탄하는 논평 '두발가진 짐승들'을 발표하여 김일성의 호평을 받았다.이후 로동신문사 부주필에 이어 1962년 1월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이르렀다. 1963년 4월 로동신문 책임주필에 임명되었으며 1964년 2월,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장 및 조선로동당출판사 사장이 되었다. 로동신문 대표단장으로 1963년 4월과 1973년 4월 중국을, 1970년 12월 소련, 1971년 1월, 쿠바를 방문하였다. 기자동맹 대표단장으로 1973년 5월 일본을 방문하였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 집행부로 선출되는 등 잘 나갔으나 1967년 갑산파 사건 때 갑산파를 미리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비판을 받았으나 다시 복권되어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5년 9월 북한-인도네시아 친선협회 위원장, 1965년 9월, 북한-북베트남 친선협회 위원장, 1972년 10월 북한-페루 친선협회 위원장을 겸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3년 9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만약 이때까지 로동신문 책임주필 자리를 유지했다면 리용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73년 10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77년 4월, 강현수의 뒤를 이어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였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의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11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부총리에 유임되었다. 1978년에는 김만금에게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재선출되었으며 1981년 9월 자연보호연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0월에 조평통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2년 4월, 정무원 부총리에 유임, 과학원장을 겸하였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3월, 과학원장에서 해임되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부총리에 유임되었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4월, 정치국 후보위원 및 부총리에서 해임되었으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 및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민간 외교 분야를 맡게 되었다. 1990년 6월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1년 7월 북일우호친선협회 고문이 되었다. 1991년에 일본과 중국, 1992년 네팔을 방문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근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10여년간 두문불출하였다. 다만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과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에 대외문화련락위원장에서 퇴임, 리몽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은퇴 이후에도 김정일에게 2002년 장수를 축원하는 편지를 받고 2004년 80세 생일상을 받는 등 그런대로 대접을 받다가 2007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북한에선 아주 간략하게 그가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김정일이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었다는 것만 언급하였다. 2007년 12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2000 북한 주요 인물 자료집(서울: 통일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