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7 03:41:42

강현수(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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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 · 16대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강현수
Khang hwun su
<colbgcolor=#e40001> 출생 1917년 5월 1일
평안남도
사망 2000년 9월 17일 오후 3시경 (향년 83세)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가족 아버지 강용석
고모 강반석
고모부 김형직
고종사촌 김일성
소속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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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차례에 걸쳐 평양시 책임비서를 지냈다.

2. 생애

1917년 5월 1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용석의 아들로 즉 김일성의 외사촌동생이다. 중앙당학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으며 1952년 인민군 7사단 정치부사단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55년 3군단 정치부장, 1958년 총정치국 조직부 부장을 거쳐 1962년에 소장으로 진급 주소 북한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1964년 총정치국 부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67년 민족보위성에 근무하였다가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70년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5월,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예편을 하였는지 1974년, 강성산이 김성갑 사건으로 평양시 책임비서에서 쫓겨나면서 그 후임 평양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에는 인민위원장 자리를 정준기에게 물려주었고 1978년 서윤석에게 평양시 책임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평안남도 인민위원장으로 이임했다. 그 중간에 1977년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예산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 11월, 6차 당대회가 개최되자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6월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자 대의원에 재선, 법안심의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89년 황해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황북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자격으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91년 12월, 최문선의 뒤를 이어 다시 평양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돌아왔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자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김정일 시기부터 책임비서와 인민위원장을 분리하는 정책에 따라 량만길에게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평양시 책임비서로 남았다.

2000년 9월 8일, 정권 창건 52주년 경충 중앙보고대회에서 사회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2000년 9월 17일 15시에 83세를 일기로 급병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과 수령의 높은 신임에 의하여 일찍부터 무력정치기관과 지방과 중앙의 당 및 정권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당의 로선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동지는 다년간 평양시 당위원회 책임비서,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지니고 수도의 당조직과 인민정권기관들을 강화하며 인민들을 당의 두리에 굳게 묶어 세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당과 주체혁명위업에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괜찮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평양시당 책임비서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김정일은 강현수 사망 이후 무려 10년 가까이 평양시 책임비서를 공석으로 두다가 2009년에야 최영림을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한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 인물 자료집 2000(서울: 통일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