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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9월 9일 ~ 2004년경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평양시, 평남 책임비서 등을 역임했으나 심화조 사건으로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1928년 9월 9일, 평안남도 혹은 북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 빨치산 유격대원이었으나 일본 경찰에게 사살되었고 서윤석은 아버지를 여의고 북간도와 강계 지역을 떠돌면서 유리걸식하다가 해방 직후에 문맹자퇴치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운 후 만경대혁명학원에 들어갔다...고 알려졌는데 현성일은 서윤석은 혁명 유자녀가 아니라고 반박한 바가 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으며 종전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배치되어 1959년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까지 올랐다.1964년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사업하면서 김정일의 측근이 된다. 일부 정보에 다르면 갑산파 사건 및 허봉학, 김창봉 사건 때 그들을 숙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70년 8월 해주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2월 황해남도 책임비서로 승진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다. 이후 다시 조직지도부로 돌아왔으며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973년, 김정일에게 김영숙을 간택하도록 추천한 것도 서윤석이라고 한다.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5년 10월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이르렀다.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박수동의 뒤를 이어 조직지도부장까지 올랐다는 얘기가 있지만 제1부부장과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시절 부주석 김동규를 숙청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 작성에 참여하는 등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10대원칙 재토의 사업' 실무총책을 맡아 수많은 간부들을 숙청하였는데 자신도 유자녀 출신이면서 많은 유자녀 간부들을 숙청하여 '유자녀들의 공동의 적'이라는 악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1978년 5월, 강현수의 뒤를 이어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통일부에서는 바로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리도 물려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1982년까지는 김만금이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83년에는 윤기복, 1984년에는 박승일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85년에는 서윤석도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니 나중에는 겸임한 것이 확실하다. 1980년 4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2년 8월, 조선로동당 6기 6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과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다. 평양시 책임비서 재임 시절 김정일에게 하도 아부를 잘해서 평양시민들이 그를 서대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강희원에게 평양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평안남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이임하였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일성이 죽은 후에도 평남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정치국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1998년 7월, 김일성 4주기를 기념하여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후 북한 뉴스에서 갑자기 실종되었으며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탈락했다. 평남 책임비서도 리길송이 물려받은 것이 확인되면서 그는 갑작스럽게 숙청되었다. 그의 운명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심화조 사건에 휘말려 끔찍한 처우를 받았다고 알려져있는데 죽임을 당한 문성술과는 달리 일단 살아남기는 했다고 한다. 그의 체포 사유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는데 우선 서윤석이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에 책임이 있다고 뒷담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김정일이 자기를 욕한 서윤석을 복권시켜줄리가 없으니 사실이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그외에는 사위의 비리 혐의 연루, 당시 심화조 사건을 총지휘한 채문덕을 과거 그가 책벌한 것에 대해 채문덕이 앙심을 품었다는 얘기 등이 있다.
어쨌거나 극심한 고문을 당한 서윤석이 고문치사당했다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의 증언들은 살아남긴 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100킬로그램이 넘던 거구에서 50킬로그램으로 급격히 줄 정도로 고문을 당한 나머지 정신이 나가버려서 나중에 봉화병원에 갔을 때 "선생님 제발 주사는 놓지 말아주십시오, 다 말하겠습니다"라고 간호원에게 빌 정도였다고 한다. 장군님이 알면 너넨 다 죽는다고 끝까지 대들다가 못에 머리를 찧어 자살해버린 문성술과 달리 목숨을 구걸했다고 김정일이 "문성술은 신념이 투철한 사람인데 서윤석은 신념이 없다"라고 독하게 씹어뱉었다는 말도 있는데 검증은 할 수 없지만 문성술이 애국렬사릉에 간것과 달리 서윤석은 가지 못했다. 어쨌거나 김정일이 나중에 서윤석을 보고는 경악하여 채문덕에게 니가 뭔데 사람들을 멋대로 죽이냐고 화를 내고 채문덕을 역으로 숙청하였다고 하는데, 일단 채문덕 등이 김정일에게 토사구팽당한 것은 사실. 김정일이 심화조에 대한 판단을 뒤집으면서 2000년 1월에 평양으로 돌아와 복권식을 치렀다는 탈북자 증언도 있었다.
이후 두문불출하였는데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2001년에 사망했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으며 탈북자 유수림은 2004년까지만 해도 그가 봉화병원에 있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당시 사회안전부에서 일했던 탈북자 박문일은 아들의 집에서 치료 받다가 얼마 안가서 그가 죽었다고 증언했고 대북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한 2004년 11월 7일자 연합뉴스 기사는 서윤석이 고문을 당하다가 식물인간 상태로 석방되어 치료를 받던 중 2004년에 사망했다는 보도를 하였다. # 진실은 저너머에.... 어쨌든간에 북한에서 정치적으로 복권이 확실히 되긴 했는지 나중에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김정일의 충신 중 한명으로 언급, 서윤석의 생애를 기리는 2부작 소개편집물이 제작되면서 복권이 확실히 확인되었다. 2017년에 출판된 최영림 회고록에 서윤석을 오랫동안 조직지도부 부부장, 평양시당 책임비서를 지낸 일군이라고 좋게 써놓았다. 이를 보면 애국렬사릉 안장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사회문화담당관실, 2005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5).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구순표, 심화조사건과 사회안전부의 위상 추락, 월간북한 2009년 5월호.
- 박문일, 심화조 사건(2), 월간북한 2012년 3월호.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