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 |
| |
<colbgcolor=#e4541f> 출생 | 1943년 9월 5일 ([age(1943-09-05)]세)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데니슨 대학교 (심리학 / B.A.) 인디애나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M.A.)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Ph.D) |
직업 | 정치학자 , 국제관계학자 , 역사학자 |
주요 경력 | 시카고 대학교 교수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학자, 한국학자이며 시카고 대학교의 석좌교수이다. 아시아지역학의 거두로 꼽힌다.2. 생애
1943년 9월 5일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나고 아이오와와 오하이오에서 자랐다. 데니슨 대학교에서 심리학 전공으로 졸업한 뒤 1961년에 평화봉사단으로 대한민국에 온 것이 인연이 돼 한국 연구에 파고들었다. 미국에 돌아온 뒤에는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스와스모어 칼리지, 워싱턴 대학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좌교수가 되었다.3. 계보
미국의 1세대 한국학자인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 1924~2001),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1934~2006)[1]의 계보를 잇는 2세대 미국인 한국학자다.커밍스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팔레의 동료 겸 후임 교수가 됐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커밍스의 논문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가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하지만 팔레는 자신의 의견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편 커밍스를 워싱턴 대학교에 꽂아주었다.
와그너와 팔레의 학풍은 존 페어뱅크(John Fairbank, 1907~1991)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 외에는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Walt Rostow, 1916~2003)의 근대화 이론을 동아시아학에 적용한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1910~1990) 등이 학문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커밍스의 연구 경향은 이들과 많이 갈라섰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시카고 대학교의 해리 하루투니언(Harry Harootunian, 1929~)과 나지타 데쓰오(奈地田哲夫, 1936~2021)의 학풍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2]
워싱턴 대학교에서 가르칠 당시에는 특별히 제자를 많이 두지 않았으나, 시카고 대학교로 학적을 옮긴 이후부터 한국사를 전공한 제자들을 여럿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UCLA의 이남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마이클 신, 컬럼비아 대학교의 찰스 킹 암스트롱, 럿거스 대학교의 김수지(Suzy Kim) 등이 있다. 방송인으로 유명한 타일러 라쉬의 졸업논문도 지도했다.
4. 활동영역
6.25 전쟁 기원에 대한 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지한 학문의 영역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작품인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1년에 출간됐는데, 이미 그 전부터 우드로 윌슨 센터를 중심으로 6.25 전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냐면 6.25 전쟁은 냉전의 본격적인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냉전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6.25 전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1987년 말 김학준이 대한민국 학계에서 처음으로 6.25 전쟁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미국에서 논의된 6.25 전쟁에 대한 논의를 집대성한 것이다.커밍스의 업적은 당시 주류 이론이었던 전통주의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냉전에 대한 인식과 6.25 전쟁에 대한 인식은 전통주의적 시각이 주류였다. 전통주의적 시각이란 냉전과 6.25 전쟁의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전지구화의 공산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야욕에 미국이 나머지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이 바로 냉전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6.25 전쟁은 당시 냉전의 격화 속에서 미국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전초전, 대리전적 성격을 띠었다고 보았다.
이에 반대하는 수정주의는 1960년대에 등장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윌리엄 A. 윌리엄스가 있고, 그는 저서인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에서 국제사회의 문제를 잘못된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보았다.
커밍스는 한국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6.25 전쟁의 원인이 외부적 요인이나 김일성이나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개인적인 야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내부적 사회 모순에 의해 촉발됐다고 보았다. 그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편은 식민지 시대 한국사회의 계급, 사회적 모순을 실증적으로 분석했으며, 당시 공개된 미국의 기밀문서를 통해 분석의 신뢰도를 높였다. 2편에서는 과도한 해석, 해주 진공설이나 미국이나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을 차용해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1편은 상당히 높은 분석을 기반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전통주의적 시각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식민지 한국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체계적이었기에 이후 박명림 등 대한민국의 6.25 전쟁 학자들은 이러한 커밍스의 연구를 많이 부정하면서도 그 담론에는 상당히 따르고 있다.[3] 물론 외국의 경우 대표적으로 웨더스비를 비롯, 스툭 등 커밍스의 분석을 평가절하하고 국제사회에서의 힘의 역학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커밍스의 연구는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조선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또한 소위 자유 진영에서 북한을 '악의 무리'나 '공산주의 괴뢰 집단'이 아닌 진지한 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도 커밍스가 처음이었다. 북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제자인 찰스 암스트롱이 이어갔으나, 이후 연구 표절로 인해 학계에서 매장당했다.[4] 이때 커밍스도 수제자 암스트롱이 표절한 게 아니라고 실드를 치다가 암스트롱이 표절한 게 맞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망신 좀 당했었다.
한때 6.25 전쟁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한 내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반도는 이미 1945년 해방 당시부터 사실상 내전 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존 학계에서는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8일으로 한정해 과연 6월 25일 누가 먼저 침공했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커밍스 교수는 해방 직후부터 좌익vs우익, 농민vs지주, 노동자vs자본가, 식민체제 협력자vs독립운동가, 소련vs미국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모순들이 겹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각종 반공/반소 의거(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대표적)와 남부에 벌어진 대구 10.1 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4.3 사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은 물론이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농민과 지주의 충돌 등으로 해방 이후 조선은 전국적 혼란 상태였다. 거기에 1948년 남북 양쪽 정권 수립 이후에는 1950년 6월 25일 직전까지 38선 전역에서 산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5] 즉 커밍스는 이 모든 것을 감안해 봤을 때 한반도 전역이 사실상 이미 내전 상태였고 6월 25일에 누가 먼저 선제 공격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초판 이후 개정판에선 견해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1949년까지의 한반도 내부의 혼란상을 강조하고 있다. 6월 25일의 상황은 북의 조선인민군이 보다 큰 규모의 국지전을 시도하다가 전면전, 총력전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에 나온 여러 정황 자료상 남침설이 근거가 적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내전 확전설 혹은 남침유도설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침설, 음모론적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에 대해 반발하는 모양이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보면 어쩌다 만나게 된 대한민국 정부 고위 인사가 "이제는 더 이상 북침설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죠?"라고 물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든 일도 있다고 한다. 커밍스가 이런 평가를 받은 데는 이유가 있는데, 당시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대학가의 필독서로 만들었던 전대협, 한총련 인사들이 이 책을 근거로 들어 남침유도설을 주장했고, 더 나아가 6.25 이전의 사건을 들어 북침을 주장해 북한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 읽었든 읽지 않았든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커밍스가 남침유도설을 주장한다고 생각했다. 1980~1990년대 운동권 출신자와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 중에서는 "6월 25일이란 전면남침 날짜가 의미 없다" 내지 "적어도 북한은 우발적으로 방어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배운 책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리고 커밍스 본인도 교묘하게 책에서 말장난을 많이 쳤으며[6]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진 않으면서 동조하는 서술을 많이 남겼다. 또한, 김일성이 정말 남침을 하고 싶었다면 겨울에 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뇌피셜로 남침설을 부정하기도 했고, 조선인민군에 복무하면서 전쟁 계획 작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전쟁이 준비되었음을 증언하자 사기꾼이라고 불필요하게 공격적으로 비난하는 등 자신이 역으로 비판당할 건덕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7] 또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무례하게 비난해서 적을 많이 만들었는데 커밍스로부터 터무니없는 연구를 했다고 매도를 당했던 한국의 원로 정치학자 신복룡은 커밍스가 대한민국 사회에 분열만 가져온 간사한 인간이라고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문제는 이러한 남침 유도설은 미국이나 서방에서 이미 진즉에 깨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남침 유도설 중 하나인 해주 진공설은 1960년대 굽타에 의해서 제시됐고, 콜코 부부는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타당하지 않았다. 흔히들 소련의 기밀자료가 풀려서 남침 유도설이 거짓이라고 밝혀졌다고 하지만 소련의 기밀자료가 나오기 전부터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것은 명백했다. 커밍스의 저서도 그러한 점에서 초판 당시에도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이미 1980년대에도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 소련이 전쟁을 지원한 사실은 넘치고도 넘쳤다. 참고로 소련 기밀문서의 경우 러시아 정부가 선별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뢰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커밍스도 캐서린 웨더스비가 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커밍스의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을 시작하자 방어 차원에서 소련 기밀문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웨더스비가 이 논쟁에서 압승했다. 기본적으로 증거가 너무 차고 넘쳤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북한의 침공이 확실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한국전쟁의 기원 개정판에선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자신의 생각보다 소련의 지원이나 남침이 훨씬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고 소견을 밝히면서 기존의 의견을 수정했다. 하지만 2010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6.25 전쟁의 성격을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이라고 정의하며 내전의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
물론 남한의 경우는 좀 다른데, 남한의 경우 6.25 전쟁을 금기시 해왔다. 1980년대 남한 현대사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그 논의를 그 논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다고 박명림 교수가 말했지만, 사실 남한은 1987년까지 6.25 전쟁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 속에서 6.25 전쟁에 대한 연구가 가능했던 것이고, 그 연구의 기반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있었던 것이다. "6.25는 스탈린이 독단으로 일으켰다"는 기존의 관념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냉전에서 있어서 특히 6.25 전쟁에 있어서 수정주의적 사조를 만들었고, 그 틀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6.25 전쟁에 대한 시각은 총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통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전쟁의 기원이 소련과 중국의 팽창정책에서 찾는다. 두 번째는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사회내부의 모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다고 본다. 물론 혹자는 3가지라고 해서 북한이 주장한 북침설도 넣기는 하는데, 이미 학문적으로 증명이 끝난 부분이다. #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1980년대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초판, 1988년에 박세길이 쓴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권에도 남침유도설 같은 수정주의 관점의 견해들이 대거 수록되었으나, 동시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명림의 "6.25 전쟁사 쟁점"도 같이 수록되었다. 특히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가 1995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출판하면서 6.25 전쟁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란 것을 풍부한 사료를 통해서 증명하여, 커밍스의 남침유도설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수정주의적 사조는 박명림도 따르고 있다.
원래부터 커밍스의 방법론은 철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실증주의이다. 미국인으로서 수천건의 한국어 사료를 섭렵하여 연구한 것은 대단하다. 당시 한국학자 중에서도 그만큼 자료를 수집해서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엄청난 사료를 섭렵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한국어 사료에 집중한 것도 나름 그의 연구에 한계를 가져왔는데, 그가 주목한 한국어 사료들은 주로 6.25 전쟁 중에 노획된 북한 문서들, 특히 강원도당의 지방 문서고들인데, 이런 문서에는 스탈린이 지시했다는 내용 따위 들어있을 리 없고 이러한 문서만 봐서는 북한이 매우 자주적인 건설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90년대까진 커밍스를 비롯해 노획된 북한 문서를 많이 본 학자들은 북한이 소련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오해석을 내놓곤 했지만 소련 문서고가 해금되면서 북한 정권 건설 독자성의 결정판으로 여겨졌던 토지개혁조차도 스탈린이 조만식의 지지기반인 중농과 부농을 조지기 위해 실행한 것임이 드러나면서 북한 자주론의 위상은 많이 박살났다.
논란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김구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것으로, 임정의 요인들이 해방 이후 귀국하자 김구가 일단의 첩의 무리들과 유급 총잡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다.고 했으며 송진우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김구라는 근거로 송진우 암살 배후를 김구라고 주장했다. 훗날 김자동은 김구가 송진우 암살 배후인건 우파의 음해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에 자신이 송진우 사위랑 같이 살았는데, 송진우 유족들도 김구가 배후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자동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다.
2021년에는 "미국이 6.25 전쟁을 끝내지 못한 것이 북한의 핵 보유를 촉발했다"고 발언했다.#
5. 비판
위에도 언급했듯이 그는 6.25 전쟁에 대해 일관적으로 "이 전쟁은 어느 측에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발발 책임여부를 부정하며[8] 한국 내부의 모순이 쌓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 북한 정권의 악행을 덮어준다는 비판이 있다.[9][10]또한 6.25 전쟁이 한반도의 모순점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점이 많은데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에는 6.25 전쟁이 김일성 개인의 욕망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11]
또한 그는 과거 6.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는 듯한 발언들을 자주 한 것도 사실인데 그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이승만은 38선 넘어 진격에 성공하면 일단 철수하여 북한을 남한 깊숙이 유인하여 미국이 개입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살길이라고 알았다. 그 무렵 남한의 지도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노망에 걸려 있었다.”라는 주장을 했다.[12]
6. 그밖에
2015년 5월 6일 세계의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 아베 내각의 과거사 왜곡에 항의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할 때 브루스 커밍스도 해당 성명에 동참했다.2015년 10월24일에는 한국 연구자와 교수들 154명과 함께 한국 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동참했다.
가끔씩 세미나 수업 도중 자신의 가족 또는 정치와 관련된 얘기를 하는데, 열렬한 도널드 트럼프의 안티이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 자체를 예상치도 못했다고. 수업 분위기는 매우 단란한 편이며 오피스 아워 때 찾아가도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맞아준다. 다만 워낙 권위 있는 학자다 보니 조금씩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13] 견해가 반대되는 다른 학자들에 대해 솔직히 비판하는 반면, 학생들의 연구 주제나 방향에 대해서는 직설적인 비판은 삼가는 편이며, 최대한 건설적인 방향으로 지도와 조언을 해준다.
아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다. 무려 15살 차이다.(...)
시카고 컵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한국의 여러 교수들과도 친분이 있다. 6.25 전쟁에 관한 그의 학설을 깨트리는데 기여한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와도 친분이 있다. 예를 들면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박태균 교수 등과 안면이 있다고 한다. 자주 한국에 강제소환(...)당하는 처지다 보니. 최근 2017년에는 4.3 사건을 기리는 행사에 참가했다. 또한 전남대 사학과 임종명 교수도 그의 직속 제자로서 친분이 있다.
2018년 2월 동아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던 적이 있다.한국현대사의 세계적 석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 동아대서 특강 2018년 북미정상회담을 보며, 안티 트럼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새로운 북한 정책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브루스 커밍스 "미치광이 트럼프가 옳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되었을 당시, 미국의 Democracy Now!에 출연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해 이야기했다.Bruce Cumings: U.S. Bombing in Korea More Destructive Than Damage to Germany, Japan in WWII
2020년에 출판 예정인 케임브리지 한국사 시리즈의 제 4권 현대사 부분의 총 저자이다. 제1권 고대사는 이덕일이 시비를 걸던 하버드 대학교의 마크 바잉턴 교수, 제2권 고려사는 렘코 브뢰커(레이던 대학교)·셈 베르메르스(서울대학교), 제3권 조선사는 조지 캘랜더(시라큐스 대학교)·유진 박(펜실베이니아 대학교)·마이클 페티드(빙엄튼 대학교), 그리고 총 책임 편집자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도널드 베이커 교수가 맡는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특히나, 미군 고문단의 진압 작전 지휘 및 학살자들에 대한 훈장 수여 등, 미국이 제주 4.3 사건에 깊이 개입했고,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제주도에 있는 4.3 평화공원에 있는 박물관 전시실에도,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알린 학자로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연구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을 포함하여, 그가 쓴 많은 저작들이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가 항일 무장투쟁에서 만큼은 흠잡을 부분이 없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14] 한계라고 하자면, 커밍스 본인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에 대해 그리 진지하게 연구한 적은 없다. 이 부분의 전공자는 2022년 고인이 된 재미 한국인 학자 서대숙 교수와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김일성의 일제 시절 항일 무장투쟁에 대해 알고 싶으면, 커밍스보다는 서대숙 교수나 와다 교수의 책인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 대해 읽어보길 추천한다.[15]
2011년 KBS에서 제작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편 2부와 3부에 등장했었다. 본 다큐멘터리가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았지만, 커밍스의 인터뷰도 담고 있다. 물론 커밍스는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만.
2024년 11월 30일 윤석열 정부가 계엄을 선포하기 3일 전 “김건희 수사·윤석열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윤석열 쿠데타에 대해 "윤석열은 서울과 테구시갈파, 세계 12대 경제국인 대한민국과 2022년에 바나나 560톤을 생산한 온두라스를 혼동하는 것 같다"[16] "윤석열은 또한 한국에서 마지막 계엄령이 선포되고도 45년이 지나지 않은 듯한, 괴기한 시간 왜곡(time warp) 속에서 사는 듯하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복원을 선언한 것처럼 시대착오적이다"라고 촌평했다. 그러면서 탄핵소추 가결과 탄핵 시위에 대해서는 "윤석열 탄핵은 한국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드러내는 증거다." "한국 민주주의의 견고함과 회복력은 존경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이 수십 년의 군사독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진화한 가장 성공적 사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사에서 강조한 커밍스의 핵심 주장은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가까운 장래에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이다. #
7. 저서
[1] 한홍구나 카터 에커트, 존 덩컨 등 많은 한국학자들을 길러냈다. 2000년대 초반, 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냐는 문제를 놓고 한국 학계와 격렬한 논쟁을 한 것으로 그나마 대중들에겐 알려져 있었는데, 당시 팔레에 맞서 노비가 노예가 아니라고 반박한 사람이 그 유명한 이영훈이다.[2] UC 버클리의 사회학자 존 리(John Lie, 1959 ~ )에 의하면, 시카고학파 내지는 나지투니언(Najitoonian)이라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다만, 커밍스는 시카고 학파로 딱잘라 분류될 인물도 아니다.[3] 박명림 교수 또한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반박을 다루고 있는 <6.25 전쟁의 발발과 기원 1,2>에서, 자신의 초기 연구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평가했다.[4] 암스트롱은 2013년 자신의 저서 <약자의 폭정>에서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발라즈 샬론타이 교수의 2005년 저작인 <흐루쇼프 시대의 김일성>(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ashington, D.C.: Woodrow Wilson Center Press with Stanford Univ. Press, 2005)을 대거 표절하거나 날조된 출처를 제시한 것이 확인되면서 브라이언 마이어스, 안드레이 란코프 등 저명한 북한학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정밀 조사 결과 세르게이 라첸코를 비롯해서 다른 학자들의 글마저 줄줄이 다 표절한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2017년에 <약자의 폭정>으로 수상했던 존 페어뱅크 상을 반납하고 안식년을 보내던 2019년, 24년이나 재직했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불명예 해임됐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NK NEWS에서 암스트롱의 프로파일은 삭제된 상태이다.[5] 현역 장병을 대상으로 편찬된 정훈만화 같은 곳에서 관련 자료를 제시해 주는데, 건국~1950년 6월 초까지의 국지전 횟수가 세자리에 육박한다.[6] 인민군이 남으로 가다가 국군과 조우했다는 해괴한 서술이라던가....[7] 대표적으로 조선인민군에 복무하면서 소련에서 작성해준 남침 계획을 번역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된 브라질 교포 주영복이 1979년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밝히자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2권에서 'gross falsehood' 운운하면서 그를 남침론자들의 사주를 받은 사기꾼으로 매도했다. 개정판에서 그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내용은 삭제했지만 여전히 그의 증언이 의심스럽다는 식의 부연설명을 길게 달았다.[8]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커밍스가 남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침보다 당시 한국사회의 모순에 훨씬 더 중점을 두며, 이승만 또한 전쟁 발발 이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북한에 일방적 책임을 묻지말고 사화구조적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9] 예를 들어 어느 역사학자가 "2차세계대전을 누가 일으켰는지는 말할 수 없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폴란드와 중국을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1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모순들이 쌓여 일어난 전쟁이다" 하고 주장한다면 이를 추축국에 대한 옹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10] 또 그는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 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또한 북한 정권의 침략을 옹호한다고 비판받았다.[11]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침공 승낙을 받기 위해 수십번이나 승낙을 요구했지만 계속 거절당했고 결국 승낙을 받고 한국을 침공하였다. 이 사실은 커밍스가 주장한 한반도 내부의 모순점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위 정보들로만 본다면 6.25 전쟁은 김일성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12] 만약 커밍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왜 전군에게 휴가를 줬을까?[13] 본인도 스스로의 권위를 알며 은근 즐기는 경향이 조금 엿보인다. 다만, 절대 학생에게 거만하거나 권위주의적이지는 않다. 조금 직설적으로 다른 학자들을 비판하거나 하는 편[14] 예를 들면, 커밍스는 <김정일 코드>에서 1940년 홍기하 전투에 대해, 1953년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다 병역 습격보다 규모나 성과 면에서 큰 업적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의 정통성에 대해선 2017년 국내에 번역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강조했다.[15] 다만 두 권의 책 모두 현재는 절판된 상황이다.[16] 실제로 한국은 2024년 현 시점에서는 이탈리아와 동급 내지 그 이상의 강대국의 최소로 평가받는다. 그런 나라에서 군부를 동원한 친위 쿠데타를 하려 했으니 국제적으로 망신거리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한 것.[17] 영어제목은 'Korean War A History'로, 연평도 포격 이후인 2011년에 출간됐다. 국내에는 북미관계가 긴장관계에 놓여있던 2017년에 번역됐다.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를 번역한 조행복씨가 번역했다.[18]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 김자동이 1권만 번역했었다. 그러나 2023년 4월에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완역작업에 들어간 상태고, 5월에 공식 출판됐다.[19] 마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의 공동저자인 존 할리데이와 같이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