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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 | }}}}}}}}}}}} |
제주 4·3 사건 濟州四三事件 | Jeju April 3rd Incident | |
시기 | |
1947년 3월 1일 삼일절 발포 사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 반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 체포 | |
장소 | |
제주도 전역 | |
교전 세력 | |
미군정 → 대한민국 정부 조선경비대 → 대한민국 육군 제주경찰감찰청[1] → 제주도 경찰국[2]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3] |
주요 인물 | |
대통령 이승만 경무부장 조병옥 대한민국 육군 대령 함병선 대한민국 육군 대령 유재흥 |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 김달삼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이덕구 |
병력 | |
약 3,000명 | 남조선로동당원 약 500여 명 제주도민 지원자 약 1,000여 명 |
피해 | |
확인 사망자 10,715명 추정 사망자 60,000 ~ 80,000명 # 3,171명 실종 군인 180여 명, 경찰 140여 명 사망 | |
결과 | |
소요 사태 진압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 대거 희생[4] | |
영향 | |
제주도민의 생활 기반 파괴 전국적으로 제주도 출신에 대한 사상검증·유언비어 발생 제주어 등의 토착 제주도 문화 말살 |
1. 개요2. 발단
2.1. 1947년 3.1 발포 사건과 이후2.2. 총파업에서 4.3 전야까지
3. 전개4. 결과5. 주요 인물6. 사건 이후6.1. 관련자의 이후 동향6.2. 피해자들의 후유증6.3. 문화적, 종교적 영향6.4. 정치적 영향6.5. 민주화(6.10 민주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6.6. 부족한 인지도
7. 진상규명 운동과 추모 및 사과8. 제주 4.3사건 희생자증 및 유족증 발급9. 문화에서의 4.3사건10. 학계의 시각과 평가10.1. 4.3 사건을 다룬 역사자료
11. 4.3과 일본12. 제주 4.3 사적지13. 여담14. 참고 문헌15. 관련 단체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clearfix]
1. 개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22.1.11.>
1.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22.1.11.>
1.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5] 무려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이런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로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165p)'으로 판단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6],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 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 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 시켰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 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 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7]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 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84-89p).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 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 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 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 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536-539p).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4.3 사건은 폭동적 시위진압을 시작으로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학살, 이념과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등등 사실상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총집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발단
제주섬, 강요배, 1989[8] |
2.1. 1947년 3.1 발포 사건과 이후
자세한 내용은 제주 삼일절 발포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총파업에서 4.3 전야까지
한편 제주 삼일절 발포 사건로 인해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로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친일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도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9][10][11] 거기에 3.1 발포 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동참하였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 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 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 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아갔다.[12]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저항 세력을 모두 좌파로 매도하고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 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13] 그 자리는 육지[14]에서 온 서북청년회[15]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을 비롯하여 응원경찰들을 제주도로 파견을 보내, 조병옥의 지휘하에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때문에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제주도민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부임이다. 1947년도에 도지사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 단체로부터 분리 시키기 위해 극우 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대놓고 발언하며 탄압 정책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미군정 관계자들조차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그(유해진)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보는 본인(군정장관)은 물론 도민들을 당혹케 했다. 제주도 우익 테러 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며 제주도에 조성된 탄압적 상황을 꼬집었다.[16]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 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 활동을 자행했다"[17]며 유해진 지사가 문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는데, 탄압 정책에 동원되어 입도한 서북청년회원들은 극우 테러 활동은 물론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우려가 있음에도 미군정은 4.3 전까지 제주도지사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의 이 같은 폭력 행위는 사상적 요인도 있었지만 경제적 요인과도 결부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없었기 때문에 자금 모금을 위해 테러에 의존했던 것이다.[18] 심지어 이들은 같은 우익 진영과도 갈등하였는데, 서청 세력은 4.3 사건 진행 과정에서, 5.10 총선거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우익 청년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약칭 족청) 단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집단으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9] 족청 단원 집단 사살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빨갱이(좌파)라는 지목은 순전히 탄압 주체의 자의적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1948년 1월 CIC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지식인층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으며, 좌익 인사들도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고, 좌익 인사로 불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익을 위시한 이들의 빨갱이 공포 선동이 테러의 1차적 요인이었다. 애초에 제주도 좌익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난의 해결이었다.[20]
이와 같은 극단적 탄압 국면이 심화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해졌다.
1948년 말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이들은 모두 처형 당했다. |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따라 사망한 것이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남한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질문했으며, 국제적인 관심이 있던 덕분인지 관련 경찰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벌을 내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점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경찰의 폭력 행위는 3.1절 발포 사건 이후 경찰력이 육지발 응원경찰 위주로 교체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는 증언이 속출하는 등 경찰의 강압에 대한 도민 사회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21]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일제는 앞서 1945년 패망했지만 아직 3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표준 일본어는 다들 학교에서 배워놓은 상태였으므로 이런 게 가능했는데, 이들이 당시 일본어로 소통한 것은 제주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대량학살의 촉발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
3. 전개
자세한 내용은 제주 4.3 사건/전개 문서 참고하십시오.4. 결과
제주 4.3 사건 민간인 피해자 조사 결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2]||<|2> 구분 ||<|2> 신고인 수 ||<-4> 희생자 수 ||<|2> 유족인 수 ||
계 | 사망자 | 행방불명자 | 후유장애자 | |||
총계 | 9,917 | 14,028 | 10,715 | 3,171 | 142 | 28,561 |
제주도 | 57 | 87 | 73 | 12 | 2 | 203 |
제주시 | 3,146 | 4,606 | 3,389 | 1,180 | 37 | 7,743 |
서귀포시 | 953 | 1,322 | 1,012 | 297 | 13 | 2,974 |
북제주군 | 3,404 | 4,714 | 3,626 | 1,024 | 64 | 10,031 |
남제주군 | 2,357 | 3,299 | 2,615 | 658 | 26 | 7,610 |
● 사망자 중 10955명(78.1%)가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 대부분의 사망자는 대토벌 작전이 벌어졌던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의 기간에 발생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된다.[23] 사실 일가족 전체가 몰살 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해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유골 발굴 작업. |
현재까지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유해 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허다해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해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 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에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적으로만 따져도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도에 인구학적인 영향(약 1/8 추산, 학살을 피한 주민의 한반도 본토 및 일본으로 이주 등은 별개)을 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4.3은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었고 4.3이란 명명에는 이 헬게이트의 원인을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으며, 실제 사건의 단초는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1절 발포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3 사건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 실시된 초토화 작전 때문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일부 내용 중 주인공이 어느 하루에 동네 집집마다 다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소설의 소재가 된 북촌리 학살은 1949년 1월에 발생하였다. 즉 토벌대가 전도를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각 촌락별로 학살이 발생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제주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또한 커밍스는 그 사망자가 8만 명일 수도 있다고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전남, 부산, 일본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다. 부산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 공교롭게도 영도도 부산 안의 섬이다. 일본으로의 피난은 밀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단 자료로 확인된 일본행 밀항자는 281명이다. 자료로 확인된 숫자만 저 정도고, 여러 가지 밀항 루트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살육에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 자체가 이전부터 이어진 당국의 탄압 조치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미국 입장에서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 되는 곳으로 보일 수도 있더라도 미군정은 결코 그 요충지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좋게 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던 일제에 협력했던 기존 관료들을 그대로 쓰고, 복시환을 비롯한 밀항선을 통해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로 빼돌리는 모리(謀利) 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에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어 일부 주민을 진짜로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좌파 탄압이라는 이념하에 폭력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키웠다. 결정적으로 경비대가 이 폭력의 소용돌이를 수습하려 무장대와 맺은 4.28 협정이 정체불명의 세력의 훼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정은 김익렬의 진상 보고를 무시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으로 생긴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이북 출신 극우 단체 등을 토벌 작전에 끌어들이면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 당하도록 방관한 것도 결정적으로 비판 받아야 하는 점이다. 게다가 정부는 제주 4.3의 영향으로 발발한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주도에서의 학살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한편 남로당 제주도당은 제주 도민을 선동하여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 주체이다. 삼일절 발포 사건 이후 경찰의 도민 탄압과 극우 단체들의 폭력 행위를 핑계 삼아[24] 자신들이 권력을 쟁취하고자 선동과 무장봉기를 통해 대안 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이후 상황이 악화되자 '등산(입산)'[25]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 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진 반면, 남로당 지도부 6인(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남로당 무장대 역시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러한 남로당의 행위는 내란이 맞으며, 이념적 색채가 옅었던 도민들의 평화적인 권리요구 시위를 '미군정 전복을 꾀한 무장봉기'로 아예 성격을 뒤바꿔 놓으면서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니 비판 받아 마땅하다.[26]
5. 주요 인물
※ 학살 및 폭력 행위에 관여한 경우 ★ 표시5.1. 남로당 제주도당/인민유격대
5.2. 군경토벌대
- 김상겸: 육군 대령. 러시아 제국군 및 폴란드군 출신으로, 독일 동프로이센에서 농장주로 지내다 1947년 국군에 임관하여 제5보병여단(현 5사단) 초대 여단장으로 부임했다. 제주도 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이었다. 부임 8일차에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벌어지자 그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고, 그 후임으로 부사령관이었던 송요찬 9연대장이 사령관 직에 대신 임명되었다. 제주도 경비사령관 직책을 수행한 기간이 고작 8일뿐이기에 그가 학살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불명확하다.
- 송요찬 ★
- 함병선 ★
- 유해진 ★[28]: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 임관호: 유해진의 후임 제주도지사 유해진과 달리 학살에 부정적이었다. 도지사 취임 이후 남로당에 의해 도지사 관저까지 점령 당하는 등 여러 가지 수모를 겪다 결국 해임되었다.
- 조병옥 ★
- 탁성록 ★
- 김종원 ★
- 김창룡 ★
- 김익렬: 당시 9연대장. 경찰의 무분별한 진압에 회의를 느껴 김달삼과 직접 담판을 지어 동족상잔 상황을 멈추고 귀순 상황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학살에 적극 가담한 일부 경찰들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같은 우익 단체들의 귀순 방해 공작(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 유재흥: 한라산으로 도주한 제주도민을 '피난민[29]'으로 규정해 이들이 산에서 안전하게 내려와 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선무공작, 유화책을 펼쳤다. 이 유화책 덕분에 무사히 귀가한 도민의 수는 제주도 전체 인구의 20%(약 20,000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 문형순: 당시 성산포경찰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역임. 예비 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총살을 거부하고 모두 석방했다. 이때 일명 '자수 사건'도 벌어졌다. 위에서 설명했듯 군경이 주민들에게 '자수'를 강요해 놓고 정작 자수한 주민들을 '적색분자 혐의가 있다'며 학살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자수를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는 생각에 제대로 자수하거나 군경에게 협조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자 군경에게 협조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던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문형순에게 '자수하는 주민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문형순은 이를 받아들였다. 주민들이 자수하러 경찰서에 오자,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주민들을 처벌할(= 학살할) 준비를 하였으나 문형순은 이들을 내쫓고 이후 주민들의 자술서를 읽고는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노력으로 그가 관할하던 지역은 제주도에서 가장 적은 8명의 사상자만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때 미운 털이 박혔는지 1953년에 경찰에서 퇴직한 뒤 쌀 배급소, 극장 직원 등의 일을 하다가 1966년 병사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어 생전 1번, 사후 5번의 독립유공 심사를 거쳤으나 모두 반려되었다가 결국엔 6.25 전쟁 참전이력으로 참전유공자로 재심사를 요청한 끝에 2023년 12월, 참전유공자로 인정되었다. 문형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 제주 지역언론 기사. 이를 소재로 한 역사 만화가 존재한다. 상편/하편.
- 김두찬 ★: 제5대 해병대사령관. 4.3 사건 당시 정보참모 신분(당시 중령)으로 위의 문형순에게 총살 지시 공문을 발송하는 등 당시 자행된 예비검속 학살을 주도한 실질적인 명령자이다.[30]
5.3. 미군정
6. 사건 이후
6.1. 관련자의 이후 동향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4.19 혁명을 기점으로 많이 축출당하거나 사망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좌파 측 사건의 주동자인 김달삼은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 전쟁 때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 쪽을 헤집다 정선군에서 처형 당해 죽었다. 김달삼이 북한으로 향한 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자리를 넘겨 받은 이덕구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됐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 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우익 측 인물 중 강경 진압을 지시한 조병옥은 4.19 혁명 전 병으로 사망했고 탁성록은 언제 죽었는지 모르나 학살을 저지른 데다가 마약쟁이라 오래 못 살았을 것이고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충실하게 개 역할을 하다가 1956년에 프래깅 당하고 김종원 역시 4.19 혁명 이후 병으로 사망했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지사를 역임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 내 공직에 앉혀 불씨를 만든 유해진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나마 송요찬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인데 송요찬은 정군운동으로 강제 예편되기는 했지만 5.16 군사반란 이후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인천제철 사장을 지냈으며, 사망 직전인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윈회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이렇게 4.3 관련자들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 중 사망하거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쫓겨났지만 그 중 아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고 반공에 의해 4.3 사건이 부정되면서 그나마 살아있던 사람마저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처벌 받은 무장대 측 인물 역시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처벌 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학살을 방조 및 묵인과 더불어 강경진압을 직접적으로 지휘한 미군정 역시 사죄나 반성이 없이 본국으로 복귀했다.[31]
6.2. 피해자들의 후유증
제주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32]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 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총살은 기본으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사람을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군경은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들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하산해 투항하자(일명 '귀순자'들) 격리 수용하다가[33] 한국 전쟁의 발발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하에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이라는 곳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 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정방폭포나 천지연 폭포 등 제주 폭포 상당수는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남로당 성향을 지닌 부대원 일부에 의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고 경찰과 행정 기관들을 상대로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이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21세기에는 항해, 비행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섬도 단절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한반도와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한 것이다.
4.3 사건 기간 동안 가족과 지인 등 가까운 주변인들도 쉽게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계속 반복되자, 마을에 남아있으면 누구든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억울함에 휩싸여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걸 증명함과 동시에 민간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제주도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국군에 자원 입대했는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대가 해병대였기 때문에 자연히 해병대로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 제주도 청년들은 한국전쟁 동안 거제도 탈환 작전, 인천 상륙 작전 등에 참여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비슷한 예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싸운 것도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미국인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미국인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이유로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대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의 후반기 당시 제주 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소규모로나마 양민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 당시는 일반 주민들이 정보도 얻기 힘들고 워낙 정신 없던 아수라장일 때라서 제주도민을 학살한 게 정확히 어느 부대/조직들인지 일일이 알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병대라는 부대에 대해 특별히 반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전의 토벌대가 이미 죽일 만한 사람들은 다 죽였기 때문에 해병대가 계엄 임무를 맡은 시점에는 이전과 같이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 후 제주도에서 해병대 입대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제주도 내 예비군 훈련을 해병대에서 담당해 왔기 때문에 현재도 제주도에서 해병대에 대해 특별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사실 현재의 제주도민들도 구체적으로 어느 부대가 학살을 저질렀는지 잘 알지도 못한다. 경찰이 그랬다는 건 많이들 안다고 해서 오늘날의 경찰을 싫어할 리가 없는 것처럼 해병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해병대도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해병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해병대측은 제주도 계엄 임무 수행 시절을 미화해 왔고 2019년에는 예비검속 학살에 책임이 큰 당시 정보참모 김두찬[34]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이라는 건물을 교육훈련단에 개관하여 흑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얐다. 다행히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4.3 사건 후기에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송악산 기슭의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있다. 현재 그 희생자들의 무덤이 백조일손지묘란 이름으로 사계리에 조성되어 있다.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중 가족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에게 전과 기록이 남은 사람은 민주화 이전까지만 해도 연좌제를 적용 받아 공무원, ROTC나 부사관, 교사 등 공직에 진출하거나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 시험과 취직,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고, 심지어 해외로 출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본인이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제주도민의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 오거나 장가 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가 덧씌워져 고생한 일이 많았다. 21세기에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심하면 아예 대화를 끊을 정도이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걸 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덤덤하게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에서 이 슬픈 역사 때문에 육지 사람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육지 측에서는 제주도 출신을 공산주의자의 자손 취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21세기 들어 4.3 사건에 관련한 제주도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옛 이야기가 된 것처럼 보여졌다. 하지만 태영호 국회의원이 2023년 2월 13일 '4.3 사건 북한 지령설'을 학술적 근거도 없이 꺼내든 것에 이어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에서 가해자인 정순신 아들이 피해 학생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빨갱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알려지면서 # 큰 충격을 안겼다. 이에 대해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대책 마련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
6.3. 문화적, 종교적 영향
4.3 사건은 제주어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35] 사건 당시 제주어를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 하려고 억지로 제주어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 (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어는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 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 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 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 인구가 약 5,000~10,00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도 인구의 1/60 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히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주어교육 활성화 조례.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또한 이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기가 떨어졌다. 제주인들은 예전부터 신축민란을 계기로 이미 천주교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4.3 사건의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서북청년회는 기독교 우파 성향의 한경직 목사 휘하 영락교회 청년들이 구심점이 되어 조직된 곳이라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36] 단, 4.3 당시에는 개신교나 천주교나 둘 다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고 한다.
개신교는 5개 교회가 파괴되었다. 4개는 무장대에 의해, 1개는 토벌대에 의한 것이었지만 파괴된 교회는 금세 복구한 후 군경 인원들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무장대에 의해 순교한 이도종 목사 외에 16명의 교인이 사망했으며 4명은 토벌대에 의해, 12명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 천주교는 신도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4.3을 방관했고, 성당 시설이나 교인들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37]
불교는 제주도 내의 종교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60개 사찰 중 총 56개가 파괴되었다. 여기서 16개는 전소, 1개는 일부 소실, 8개는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 제주도 내의 사찰 3분의 2에 달하는 규모였으며, 현재까지 많은 사찰들이 복원되지 못한 채 부지들이 귤밭 등 농지로 쓰이고 있다.
21세기에도 제주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도 불교보다 낮은 형세이다. 제주도가 육지와의 종교 지형이 다르다곤 해도 현재의 구도가 이뤄진 것에는 4.3 사건이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신축민란은 이미 1세기 이상이 지났으며, 민란 당시 무고한 천주교인들까지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천주교도 일부 피해자의 입장을 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1999년에 천주교 제주교구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반면 4.3 사건은 해방 이후 일어난 사건이고 당사자들이 아직 생존한 경우가 있으며, 신축민란보다 더 길고 크게 일어난 유혈사태임에도 불구하고 학살에 참여한 영락교회는 별다른 사과를 표명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뜬 한경직 목사도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사실만 전해지지 따로 사죄를 표명하지 않아 현재는 사건과 관련이 없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진보 교단에서 대신 사과했다. #
6.4. 정치적 영향
4.3 사건은 제주 지역의 정치 성향이 '육지'에 있는 당과 상관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모두 우익 정당으로서 4.3 사건에 관여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인해 축출되고, 조병옥이 몸담궜던 민주당이 세운 장면 내각도 5.16 군사정변으로 축출되어 어느 당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되었기에 제주도의 선거 양상은 당보다는 지연에 기반한 인물을 중시하고, (일명 제주도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당, '궨당') 제주도 출신 중 중앙 정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하고 싶어하게 되었다.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제주도는 박정희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의 후신이었던 민정당 윤보선이 민주공화당 박정희를 상대로 남로당 전력을 들어 매카시즘 공격을 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4.3 사건의 악몽이 남아있는 제주도 사람들이 70%에 가까운 투표를 던져준 것.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는 대선과 총선 모두 민주공화당이 승리하였다.
21세기에는 전체적으로는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준 적이 많은 대통령을 배출한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과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고향을 떠나 육지로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육지에서 이주하면서 4.3 사건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제주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젊은 세대가 많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4.3 사건 추모식에 직접 참석해 진상규명과 사과를 약속하는 등 민주당 정권이 4.3 사건을 챙기는 것이 계속되면서 제주도의 성향도 차츰 민주당계 정당에 기울고 있다. 20대 총선에 이어 2020년 21대 총선, 2024년 22대 총선까지 민주당계 정당이 국회의원을 독차지한 것.
그렇다고 보수정당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와 원희룡이 각각 승리하였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4.3 사건, 지연 등이었는데 박 후보는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으며, 원 후보의 경우는 본인이 고향인 제주도에서 먼치킨 급의 좋은 이미지(학력고사 및 사법시험 수석, 보수 정당 내 소장파 등)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 출신을 중앙 정계에 고위 정치인으로 진출 시키고 싶은 것이 보수정당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현오봉 전 의원의 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19대 총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38] 제주도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보수정당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이라고 추앙하자 제주도의 노년층 표심도 돌아서면서 19대 대선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세탁하면서 개인기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원희룡을 제외하면 보수정당의 득표율이 대거 폭락하고 민주당에 거의 텃밭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이건 사드 배치 논란으로 중국의 보복에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도 있다. 원희룡 이전에 신구범, 김태환도 보수정당 출신 도지사로 선출된 바가 있다. 다만 둘 다 민주당계에 잠시 몸 담은 바가 있지만.
그리고 원희룡도 제주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국힘 대선 경선에 참가하고 윤석열 지원 유세를 돌면서 도정 공백이 생기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20대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거의 호남 다음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때문에 역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대선 후보 적중에 실패했다.[39] 이제 제주도에서 지지를 얻을 만한 보수 인사가 없기 때문에 경합지역이 아니라 민주당 텃밭에 가까워졌다.
제주도민이 많은 타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부산에서 제주도민이 많은 영도구에서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김철훈[40]이 영도구청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물론 영도구는 다른 원도심 지역처럼 보수 세력이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고 민주당계 득표율이 40% 이상 나오는 이유 중 하나를 제주도 출신 사람들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6.5. 민주화(6.10 민주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정도가 비교적 약해졌을 뿐이지, 경찰에서는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단순한 안부인사나 행정상의 가정 방문 등을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방문/소환조사를 하였으며[41],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다른 면에서는 이런 탄압이 존재하였다. 문민정부 시절과 역사바로세우기가 끝난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경찰의 감시/연행/연좌제 중단,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래 항목인 '문화에서의 4.3 사건'에 적혀 있듯 1990년 KBS1 <역사탐험> 불방사태, 1997년 <레드헌트> 사태처럼 다큐멘터리와 관련자들이 탄압 받은 적이 있으며, 이는 참여정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참여정부 이후 다시 돌아온 보수정부 시대에는 다시 묻으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어처구니없게도 최고의 대공(對共) 전문가도 탄압 받은 일이 있었다. 윤 모 단장은 2009년 5월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 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 끝에 해임 당했다.[42] 정작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 중 80% 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 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 끝에 해임 처분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뀐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설명이 줄기는 했는데 이건 과목 전반의 문제라...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43]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 사건의 발단부터가 남로당 문제와 거리가 멀고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더욱 논란이 된 것이다.
2014년에 박근혜 정부의 공약에 따라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공약을 안 본 거 같은)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파 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
그리고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하고 나타난 극우 단체가[44]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했다. 2015년 12월에 행정자치부는 보수단체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희생자 재조사를 시도하려 했으나 유관단체들의 반발로 2016년 2월에 보류됐다.
2020년 4월에는 미래한국당의 7번 비례대표 후보 정경희 영산대 교수가 4.3 사건을 두고 좌파의 폭동으로 지칭한 것이 드러나 4.3 사건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이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관련 기사.
2023년 2월 13일 태영호 국회의원은 4.3 사건이 남로당 지부가 일으킨 단독 행동이 아니라 김일성이 주도하여 발생했다는 북한 지령설을 주장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2023년 2월 24일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의 가해자인 정순신 아들이 피해 학생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피해 학생에게 '빨갱이'라는 말을 쓰면서 괴롭힌 사실이 밝혀졌다.
2023년 3월 21일에는 우리공화당, 자유당, 자유민주당, 자유통일당 등 4개 극우 정당이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제주도 곳곳에 게시하여 논란이 일었다.
6.6. 부족한 인지도
2017년 이후에도 제주 4.3 사건은 다른 대한민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 5.18 민주화운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만 해도 국사 과목 시절 국정교과서에는 4.3 사건이 날개로 아주 짧게 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반공 논리를 내세운 서술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나마 제7차 교육과정 내 한국사 검정교과서에서는 비상교과서 기준으로 서술도 좀 중립적으로 바뀌었고, 탐구 활동으로 관련 자료를 더 추가했다.<제주4·3 인지도 및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8.1%는 4.3 사건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 고 답하긴 했지만 4.3 사건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16.2%에 그친 반면, 관심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50.2%에 달했다. 이는 99%가 관심을 보인 5.18 민주화운동, 75.7%가 관심을 보인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수치이다. 관련 기사.
4.3 사건에 대해 인지도가 낮기 때문인지 각 지역구에서는 4.3 학살을 주도했던 군경 출신 인물들의 기념 사업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전히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 4.3 사건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예시로 제주도로 경찰병력을 증원한 조병옥 당시 경무국장의 흉상 건립 방안이 서울 강북구에서 논의되다가 4.3 단체들의 항의로 취소되었고, 송요찬 당시 제9연대장의 선양사업을 고향인 충남 청양군에서 실시하려다 역시 4.3 관련 단체의 항의로 철회되었다. 심지어 2019년에는 경북 포항 해병대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터 명칭을 예비검속 학살 명령권자인 김두찬 당시 중령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으로 명명하였다가 4.3단체의 항의 및 국방부의 시정조치로 이름을 충성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남로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4월 3일 이전에는 제주 4.3 사건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걸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 항쟁 등 다른 대한민국의 민중항쟁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 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 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십수 년 전 제민일보사에서 출간한 '4.3은 말한다' 같은 연구서만 해도 두꺼운 책이 5권이나 됐지만, 세월이 흘러 절판됐고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원문 보기 형식으로 올라와 있어서 굳이 보려면 시간을 내서 협약 공공/대학도서관의 원문 검색용 컴퓨터로 접속해야 한다.
7. 진상규명 운동과 추모 및 사과
7.1. 1960년대 ~ 1970년대
1960년 4.19 혁명 직후 제주대학교 학생 7인[45]이 모여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하여 4.3 사건이 종결된 이래 최초로 4.3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다.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는 당시 지역 신문인 제주신보에 호소문을 발표하고 제주도 전역에 대한 사실조사도 실시하였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성립된 군사정권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회원 이문교와 박경구, 그리고 제주신보 전무 신두방을 영장 없이 예비검속했으며, 이문교와 박경구는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가혹행위를 포함한 강압수사를 받고 6개월 뒤인 11월에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으나 이후에도 지속적인 감시와 사찰을 받았다.[46]
그렇게 군사정부의 탄압 아래 4.3 사건은 잊혀져 가는 듯 했으나 70년대 막바지인 1978년 9월 작가 현기영이 단편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4.3 사건이 다시금 재조명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순이 삼촌은 곧바로 금서로 지정되었고, 현기영은 1979년 10월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7.2. 1980년대 ~ 1990년대
민주화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추모와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1989년 4월 3일,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제주에서 '41주기 4.3추모제'를 지냈다. 같은 날, '제주신문'에서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0년 6월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를 조직하여 1991년 4월 3일에 유족들을 비롯한 제주도민의 주도로 위령제를 진행하였다. 제주도의회 역시 1993년에 '4.3특별위원회'를 설치해 피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1994년을 기점으로 위령제를 유족회와 제주도의회 공동 주도의 합동위령제로 지내게 되었다. 비록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는 이런 움직임조차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주화된 이상 탄압이 진상 규명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1992년 다랑쉬굴 사망자 유해가 발굴되자 현장에 출동한 제주도 경찰국[47]은 유해 중 9살 어린이가 있었음에도 이들을 세화리를 습격한 무장대원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에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수습자[48]와 유족들이 반박을 제기하였고, 증언을 통해 사망자들이 양민으로 밝혀지자 사인을 집단자살로 발표해 빈축을 샀다. 제주도 역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장례비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유해들은 발굴 45일만인 5월 15일 시내 병원에서 화장돼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뿌려지고 말았다.
언론도 4.3에 대한 보도에 나섰다. 제주 지역의 신문들이 앞장섰는데, 특히 『제민일보』가 1989년부터 연재한 <4.3은 말한다>는 1999년까지 10년 동안 5,0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의 증언과 한국과 미국의 관련 자료들을 통해 500회가 넘는 기사를 내는 성과를 내었다. 그리하여 제민일보는 19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으며, 연재 기사 대부분이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한편 일부 연구자와 저자를 통하여 4.3을 진보적 시각에서 다룬 책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대에는 역사바로세우기와 맞물려 "공인된 단체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할 경우 정부에서 모든 협조를 하겠다"는 정부 입장이 표명되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제주도의회에 의해 '4.3피해신고실'이 설립되었다. 1996년 3월에는 신구범 당시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고, 11월에는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야당시절부터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당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진상 규명에 힘을 쏟았다.
질문: 한국과 미국정부는 1948년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상을 서로 언제 공개할 방침입니까?
대통령의 답: 제주 문제가 국회에 청원되어 있습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문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해서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1998년 11월 23일 CNN 회견 중 #[49]
특히 15대 국회의 회기와 20세기가 거의 끝나가는 1999년에는 제주 4.3 사건의 문제 해결을 21세기로 미룰 수 없다는 구호 아래 4.3도민연대, 제주종교인협의회, 4.3범국민위원회 등이 4.3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하여 4.3특별법안을 발표하고 제출한 국회의원 113명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위원회 설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특별법 제정에 미온적으로 대응하자, 시민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선회하여 특별법 제정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해 2000년에 시행되었다. 비록 특별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부터 세세한 내용까지 살피는 완벽한 법안이었던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2000년대 이후 진상 규명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대통령의 답: 제주 문제가 국회에 청원되어 있습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문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해서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1998년 11월 23일 CNN 회견 중 #[49]
한편 MBC에서는 1999년 9월 12일 교양 프로그램인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회차로 4.3 사건을 방영하면서 관련자들의 세세한 증언과 당시 기록 등을 보여주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와서는 공산폭동이라는 단어가 사장되었다. 금기가 이젠 없어진 것이다.
7.3. 2000년대 ~ 2010년대
사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부는 참여정부였다.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로서 사과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 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를 했다. 2006년 4월 3일 4.3사건 58주기 위령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 약속을 포함한 추도사를 하여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사과하였다. 위령제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와 4.3 사건 유족 대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50][51]반면 참여정부 이후 들어선 보수정권 측은 사과와 진상규명을 하는 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나마 2014년에 박근혜 정부에서 '4.3희생자 추념일'을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며 진상 규명을 하겠단 태도로 표를 받아갔지만, 9년 동안 대통령(이명박, 박근혜)의 참석이나 특별한 언급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정보원 소속 간첩전문가[52]인 윤 모 단장이 2009년에 점심 식사 중 4.3 사건의 토벌대 책임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기발령을 당하고, 2015년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으로 나온 한국사 국정 교과용도서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술이 기존 교과서보다 축소·후퇴한다든지, 4.3위원회를 폐지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다던지, 희생자들을 재조사하려고 시도하는 등 제주 4.3 사건을 묻으려 한 정황도 있었다. #
4.3 사건 70주년을 앞둔 2017년 4월 8일에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였고, 10월 17일에는 제주 4.3 관련 유관단체들은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학살 당시부터 침묵해 온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자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개시하였다.
2018년 4월 2일에 제주도 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교육청은 4.3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 # 같은 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주 4.3 사건 70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교황청 국무원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명의로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이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교황이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위로 메시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권교체 1년 후인 2018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70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하였다. 문 대통령은 12년 만에 4.3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다시 한 번 사과하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
2019년 1월 17일, 제주지방법원은 불법군사재판에 의해 수감된 4·3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을 재심 끝에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인정하였다. #
제주4.3평화상 3번째 수상자로 제주4·3 진상규명 운동을 주도한 현기영이 선정됐다. # 그리고 베트남의 인권운동가 2명과 함께 4.3평화상을 수상했다. #
국방부 또한 71년 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경찰청장도 4·3 사건 추념식에 참석해 4·3 사건 당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을 사죄했다. #
7.3.1. 노무현 대통령 위령제 추도사 전문
추도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주도민과 4.3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58년 전 남북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주도민과 유가족 여러분,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달에도 2,800여 명을 4.3사건 희생자로 추가 인정했고, 이곳 4.3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4.3사건위원회가 건의한 정부의 사과와 명예회복, 추모사업 등은 나름대로 많은 진전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가능한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4.3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확보되고 상생과 통합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수십년이 흐르면 이게 제주도의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믿음, 화해를 가리켜주는 그런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다시 한번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주도민과 4.3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58년 전 남북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주도민과 유가족 여러분,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달에도 2,800여 명을 4.3사건 희생자로 추가 인정했고, 이곳 4.3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4.3사건위원회가 건의한 정부의 사과와 명예회복, 추모사업 등은 나름대로 많은 진전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가능한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4.3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확보되고 상생과 통합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수십년이 흐르면 이게 제주도의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믿음, 화해를 가리켜주는 그런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다시 한번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7.3.2. 문재인 대통령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전문
추도사 전문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0,0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었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0,0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었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7.3.3.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와 문재인 대통령 소송
- 사건번호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합2368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31부(재판장 김상우 부장판사)
- 사건번호: 서울고등법원 2023나2029964
- 재판부: 서울고법 민사34-2부(김경란·권혁중·이재영 부장판사)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는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이승만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위자료를 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에서 연거푸 패소했다.
7.4. 2020년대
2020년 제주도에 따르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정세균 국무총리(위원장) 주재로 제주3중앙위원회를 열어 부친이 희생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로 고통 받은 송모씨를 처음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희생자로 인정했다. #2020년 4월 3일, 문 대통령이 다시 추념식을 찾았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에 2번이나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5월 6일, 제주4.3트라우마센터가 제주시청 근처에 있는 나라키움 제주복합관사(구 세무서)에서 개소한다고 한다. 센터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4.3생존희생자 및 유족들의 치유를 위해 개인·집단상담, 심리교육, 예술 활용 치유, 물리치료, 한방치료, 신체 재활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현재 파악되는 치유 대상자는 총 1만 8천여 명으로 후유장애인 84명, 수형인 33명, 1세대 유족 1만 3297명, 1세대 며느리 2881명, 그 외 국가사업에 의한 피해자 2천여 명 등이다.
10월 8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에서 4.3사건 당시 민간인 불법 체포 및 구금 등을 통해 이뤄진 일반 재판에 대한 첫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는 1948년 일반 재판이 이뤄진 지 72년 만이며 대상은 4.3 수형인 8명이다.
그리고 12월 7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는 일반 재판에 의해 투옥됐던 피해자 김두황 할아버지(92)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
12월 21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군사재판 수형인 7명[53]에 대한 재심 사건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군사재판 수형인에 대한 첫 무죄 판결이 되었다.
2021년 2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안이 찬성 199인, 반대 5인, 기권 25인으로 가결되었다. #
2021년 3월 16일, 제주지법은 4.3 사건의 재심에서 내란실행,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 333명[54] 및 일반 재판에 회부돼 형무소에 수감된 생존 수형인 2명 등 총 335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4.3 사건의 혼란기와 국가의 정체성을 갖추지 못한 이념의 대립에서 수많은 개인이 희생된 사건이며 자녀들도 연좌제에 시달렸다며 이 선고로 피고인들과 유족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벗겨지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
2021년 4월 3일, 문 대통령이 2018년 참석 이후 2020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추념식을 찾았다. 이 날 추념식에는 사상 최초로 서욱 국방부장관과 김창룡 경찰청장이 참석했다. 2019년에 국방부 차관과 경찰청장이 시민분향소를 찾아 4·3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한 일은 있었으나, 군경 최고 책임자가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1년 8월 9일, 내란죄 혐의로 일반 재판에 회부돼 징역 1년을 선고 받아 옥살이를 한 김두황에 대한 형사보상이 결정되어 일반 재판 무죄 판결을 받은 4.3 수형인 중에서 형사보상이 결정된 첫 사례가 되었다.
2021년 8월 11일, 제주도 차원의 지방공휴일로 지정된 '4.3희생자추념일'이 2022년 전국 달력에 공식적으로 표기된다. 제주도와 제주도의회에 따르면 '4.3희생자추념일' 지방공휴일이 천문법에 따른 2022년 월력요항에 반영되었다고 알렸다. #
2021년 8월 15일, 제주도에서는 4·3 희생자 가족관계등록부 개선 업무를 위해 오는 8월 말부터 4·3특별법 전부 개정에 따른 후속조치로 실무T/F팀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
2022년 4월 3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보수정당의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이 4·3 추념식에 참석하는 것은 윤 당선인이 처음이다.
2024년 4월 3일.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국(EAP)이 제주4·3과 관련해 '1948년 제주 사건은 참혹한 사건(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언급하였다. # 미국 정부의 입장 발표는 이것이 처음이다.
7.4.1.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4.3 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전문
국민 여러분 제주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제주도민 여러분
우리는 4.3의 아픈 역사와 한 분, 한 분의 무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억울하단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소중한 이들을 잃은 통한을 그리움으로 견뎌온 제주도민과 제주의 역사 앞에 숙연해집니다.
희생자들의 영전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통의 세월을 함께하며 평화의 섬 제주를 일궈낸 유가족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입니다.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생존 희생자들의 아픔과 힘든 시간을 이겨내 온 유가족들의 삶과 아픔도 국가가 책임 있게 어루만질 것입니다.
여러분, 무고한 희생자들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고 아픔을 나누는 일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74년이 지난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이어지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이 비극에서 평화로 나아간 4.3 역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곳 제주 4.3 평화공원이 담고 있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널리 퍼져나가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새 정부에서도 노력하겠습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지난 2월, 제가 이 곳을 찾았을 때 눈보라가 쳤습니다.
오늘 보니 제주 곳곳에 붉은 동백꽃이 만개했습니다.
완연한 봄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가슴에도 따뜻한 봄이 피어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무고한 희생자의 넋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약속,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희생자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4.3의 아픈 역사와 한 분, 한 분의 무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억울하단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소중한 이들을 잃은 통한을 그리움으로 견뎌온 제주도민과 제주의 역사 앞에 숙연해집니다.
희생자들의 영전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통의 세월을 함께하며 평화의 섬 제주를 일궈낸 유가족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입니다.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생존 희생자들의 아픔과 힘든 시간을 이겨내 온 유가족들의 삶과 아픔도 국가가 책임 있게 어루만질 것입니다.
여러분, 무고한 희생자들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고 아픔을 나누는 일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74년이 지난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이어지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이 비극에서 평화로 나아간 4.3 역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곳 제주 4.3 평화공원이 담고 있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널리 퍼져나가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새 정부에서도 노력하겠습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지난 2월, 제가 이 곳을 찾았을 때 눈보라가 쳤습니다.
오늘 보니 제주 곳곳에 붉은 동백꽃이 만개했습니다.
완연한 봄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가슴에도 따뜻한 봄이 피어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무고한 희생자의 넋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약속,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희생자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7.4.2. 희생자에 대한 무죄 판결
2022년 2월 제주 4.3 사건 직권 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4.3 사건 당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2530명 중 40명을 우선적으로 제주지방법원에 직권 재심청구를 제기하였다.3월 29일, 제주지방법원은 4·3사건 당시 열린 불법 군사재판에서 내란죄 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희생자 40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당시 일반 재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특별재심 대상자 33명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
4월 19일에는 군법회의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희생자 20명이 이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2024년 2월 23일 군법회의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2530명 중 1821명이 무죄를 선고 받아 명예회복이 되었다. #
8. 제주 4.3사건 희생자증 및 유족증 발급
2020년 8월 17일 제주특별자치도는 2019년 6월부터 시작한 '제주 4.3사건 희생자증 및 유족증'을 신청 받은 결과, 현재 2020년 7월 말 18,536명이 접수되었고 이 중 희생자 88명과 유족 18,422명 총 18,510명에게 발급됐다고 밝혔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증 및 유족증을 발급받으면 제주항공의 국내선 항공료가 감면(희생자 50%, 유족 40%)되고 제주도내 공영주차장 요금 50% 감면, 부민장례식장과 하귀농협장례식장 분향실 사용료 50% 할인 혜택 등을 받을 수 있다.9. 문화에서의 4.3사건
자세한 내용은 제주 4.3 사건/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10. 학계의 시각과 평가
- ※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평가 : 보기 / 접기
- || 구분 || 폭동론 || 반란론 || 사태론 || 인민무장투쟁론 || 민중항쟁론 ||
논자 김점곤 존 메릴 오성찬/현길언 김봉현/김민주/로동신문 현기영/김석범/양한권
이산하/박명림/김석희주체 남로당 좌파/우파 불분명함 또는 중립 남로당/인민 민중/남로당 원인 인민공화국 수립 좌파의 헤게모니 쟁탈 반제국주의 및 인민정권 수립 반제국주의 저항 및 통일정부 수립 성격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적 폭동 우파정부에 대한 좌파의 반란 민중수난의 역사 인민의 반제국주의 무장투쟁 민중의 방어적 자주항쟁 책임 남로당 좌파의 도전
우파의 탄압우파의 학살
좌파의 공격제국주의
우파제국주의
좌파/우파초점 남로당의 무모함과 잔인성 좌우파의 대결 제주도 공동체의 파괴와
민중의 수난인민의 무장투쟁과
미제국주의의 잔인성민중의 삶과 투쟁 및
민족민중문제에의 대응맥락 국내적 대결의 맥락
제주도의 지리적 조건
제주도 내에서의 혈연관계국내적 대결의 맥락
제주도의 사회역사적 조건제주도적 맥락
제주도 사회와 도민의 수난반제국주의 투쟁
사회주의를 위한 인민무장투쟁제국주의적 세게전략 및
분단전략에 대항한 민중항쟁문제점 민중의 객체화
사건을 축소/왜곡미국의 역할 간과
해석의 도식화원인/과정을 무시
역사적 인식 결여'남로당 = 인민'의 일반화
무장투쟁만 강조실증적 검증 미약
민중 - 남로당 간 관계의 불명확성
단독정부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지향한 4.3 민중항쟁? | 남로당 극좌파들이 대한민국[55]'을 무너뜨리고자 일으킨 4.3 폭동? |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새기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의 설명판에 적힌 글귀
해방정국에서 제1공화국이 무너지기까지 4.3 사건에 대한 평가는 남로당을 위시한 좌파의 무장폭동에만 초점이 맞추어졌고, 군경에 의하여 피살된 자는 모두 무장유격대원이거나 그 동조자라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1960년에 찾아온 짧은 해방기에도 불구하고 4.3 사건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 희생자들을 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20여 년 동안 이어진 군사정권 속에서 그러한 논의는 다시 금기시되었다.[56] 때문에 4.3 사건에 대한 조사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에야 비로소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1993년 5월 김영삼은 "정부는 공인된 단체의 진상규명 작업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1999년 10월 한나라당의 제주 출신 국회의원 3명이 관련 특별법을 발의했다. 당시 여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는 처음에는 특별법 발의에 부정적이었으나 반발이 거세지자 공동 발의로 선회했고, 국민의 정부가 집권 중이던 1999년 12월 15일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마침내 국회를 통과하였다.[57] 이후 참여정부 시절 국가적인 조사를 거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미군정의 기밀정보가 일부 해제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새기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의 설명판에 적힌 글귀
다른 역사적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4.3 사건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과 정치·사회적인 가치 판단의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4.3 사건이 (1) 무장폭동 내지는 인민봉기의 성격을 띄며 (2) 반란군·토벌군 쌍방이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사관과 민중사관 양측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예컨대 민중 사관에 가까운 김종민의 제민일보 기고에서도 일단은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 및 서북청년단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사건"으로 규정한다. 반면 정치적 관점에서 '반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존 메릴의 학술논문에서도 토벌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들이 존재했음을 인정하고, 4.3 사건을 "폭력이 얼마나 빠르게 증식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예시"라고 평했다. 또한 진행 과정에서 (3) 공산주의자들의 상당한 영향력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대체로 인정[58]된다.
삼일절 사건과 4.3 사건에서 남로당의 역할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나, 이것이 조직적인 개입이었는지 단순 가담이었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다. 가령 1994년 제민일보 기사에서는 남로당 중앙지령설을 거짓으로 결론 지으며 북한 지향적인 성격을 부정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예컨대 삼일절 시위 준비위원회에 우익 인사들과 관공서 및 검경 관계자들도 참여한 사실[59]을 근거로 제시한다. 삼일절 사건의 초기 시위 목적은 단순히 광복을 기념하고 정치적 혼란의 빠른 종식을 기원하는 자리였으므로, 좌우가 모두 참여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후 사태의 양상을 반정부 극좌 폭력 봉기로 바꿔놓은 책임은 남로당에 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으며, 이러한 관점에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지령서 및 초기 인민위원회 무장대 지도자들이 월북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60]
한편, 제주도의 좌파 진영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동기로는 "미군정 및 서북청년회 같은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의 탄압을 거치며 위기감을 느낀 좌파 진영에서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것이 일단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평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있으며, 단순한 좌우의 이분법을 넘어 같은 진영 내에서도 어디에 중점을 두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있다.[61]
- 폭동·반란론 (≒북한 지향의 항쟁론)
보수주의 우파 진영에서는 4.3 사건을 남로당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반대한민국 반란으로 간주[62][63][64]한다.
제주도 남로당 세력은 이미 동해의 삼일절 기념행사에서도 시위를[65] 기획·실행[66][67][68][69]하였으며, 대구에서도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발생한 사망자를 명분으로 대규모 무장 봉기를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특히 삼일절 사건에서는 '박헌영 체포령 철회'나 '토지 문제의 인민적 해결[70]' 같은 극좌적인 구호들이 등장했으며, "사회노동당을 위시한 일체의 기만적 회색분자들과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를 소탕할 것"을 주장[71]하는 등 반민주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여기서 석방하라고 외치는 박헌영은 민주주의자이기는커녕 훗날 6.25 전쟁의 전범이 되는 공산주의자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 때 있었던 학살이나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저항하는 건 민주국가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이지만, 그 과정에서 당대 한국 정부보다 더 비민주적인 이념을 지향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끼어들었다면 더 이상 민주적인 저항이라 볼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해당 구호들을 극좌적이며 반민주적이라 볼 근거는 충분하다.[72]
같은 맥락에서 4.3 사건에서도 남로당에 의해 불온 삐라가 뿌려졌으며, 남한의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미군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투쟁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73] 실제로 1948년 4월에서 5월 동안 <조선중앙일보>를 위시한 극좌 신문들은 4·3 사건을 항쟁 내지는 인민봉기로 보도했으며, 따라서 조직적이며 고도로 정교한 이데올로기성을 띤 친북, 친공산주의적 성격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74][75]
또한 이들은 4.3 사건 당시의 주요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남한의 단독 정권 수립 반대[76][77]였으며, 이것이 해당 시점에서는 남로당의 공식 노선이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한다.[78] 물론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 주장 자체가 비판점은 아니다. 오히려 이건 당대의 보편적인 정서였고, 오늘날에도 극우를 제외하면 김구가 방북해 김일성을 설득하려 했던 노력을 비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미 북한에 소련의 괴뢰정권 수립이 확실시되던 상황[79]에서, 평화적인 의견 표출도 아니고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건 남한은 무정부 상태로 남아 있다가 공산화되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의 선전물들을 볼 때 남로당은 남한의 합법 정부였던 미군정(~1948)과 대한민국(1948~)이 추구하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거부하는 반란 행위를 모색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80] 유엔에서 요구한 한반도 총선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북한과 김일성이지 남한의 이승만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정부/평가/외교 및 한미관계/제1공화국 참조.
한편, 북한에서는 4.3 사건을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민중들이 친북 좌익정당들의 지도 아래 벌인 항쟁"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대한민국의 반란론과 동일하다. 남북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주적인지라, 북한의 친남한 민중봉기는 북한 입장에선 반란이고 남한의 친북 민중봉기는 곧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반란이다. 쉽게 말해 ‘공산폭동’이 4·3에 대한 미군과 대한민국 우파의 입장이라면,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북한 및 좌익세력의 인식이 된다.[81]
- 적극적 항쟁론
전통적으로 진보 및 좌파 진영에서는 4.3 사건을 미군과 우익 지배세력이 추구하던 한반도의 분단 과정에 저항한 제주도민들의 항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북한과의 연계성은 부정하지만, 친일척결·토지분배·자주통일 등 기타 좌파 민족주의적인 성격은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계엄령의 절차적 하자와 민간인 학살과 같은 비인도적인 정부의 만행 등을 들어 이승만 정부의 토벌이 오히려 불법적이었다고 주장한다.[82]
적극적 항쟁론은 다시 통일운동·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반외세-반분단 항쟁론과, 제주도의 정서적·지정학적 특수성을 중시하는 제주도 항쟁론으로 나뉘어진다.
전자의 경우 ‘반민족적, 분단지향적’ 선거를 무산시킨 제주도민의 항쟁을 "통일정부를 갈망하는 민중의 의지를 대변"[83]한다고 평가하며, [84], 4.3 사건의 전조였던 삼일절 항쟁이나 3.10 총파업 역시 남로당의 불법성보다는 미군정의 강경한 탄압과 우파의 정치적 폭력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후자의 경우 4.3 사건을 해방정국의 좌우 이념갈등 요소보다는 제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나선 투쟁으로 평가한다. 제주도는 이미 일본 제국의 결7호 작전과 해방 이후 대량의 귀국자 문제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비록 일시적이었다지만 대(對)한국 경제순환 전략의 일환으로 쌀을 강제로 공출해갔으며, 이는 첫 1년여 간 미군정에 우호적이던 인민위원회를 위시한 제주 내 좌파 단체들이 서서히 노선을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85] 여기에 제주 지역의 도 승격 문제가 결정타를 가했다. 제주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육지의 정치에서 소외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이 강했기에[86], 섬 전체를 전라도에 귀속시키려는 미군정의 행정 개편안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4.3 사건은 "거대한 외압에 대한 지역민의 저항"으로 바라봐야 하며, "제주도민의 공동체적 특수성"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87]
* 자위적 항쟁론 (≒국가폭력론)
* 자위적 항쟁론 (≒국가폭력론)
4.3 사건을 제주도민들이 정치깡패들의 테러 행위와 국가폭력에 맞서 싸운,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바라보며, 좌우를 따지는 이념적 대의보다는 당시의 제주도 주민들과 그 희생자들에게 주목하는 관점이다.
김종민[88]으로 대표되는 시각이다. 김종민은 미군정과 토벌대의 책임을 지적하며 사건의 전체 과정 중에 ‘항쟁’의 시기가 분명히 있긴 하다고 주장하면서도, 4.3의 전체 과정을 단계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항쟁과 대학살 시기가 분명히 나눠지기 때문에 이를 전체적으로 ‘항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4.3은 서북청년단 등에 의한 탄압의 국면, 이에 대한 항쟁의 국면, 이후의 대학살 국면으로 나뉜다. 즉, 4월 3일 봉기 자체는 과거의 민란과 같은 저항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무장대에 의한 학살을 포함한 대학살 국면을 고려하면 4.3을 항쟁으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 예컨대 삼일절 발포 사건에서도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제주도 민•관 합동 파업에 고문치사 사건 등의 폭력적 대처로 일관하며 일을 키운 것은 미군정 및 우파 정부조직이었음을 지적하며, 시위대의 폭력은 그에 맞선 자위권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종민은 “4.3의 경우 가장 먼저 내세운 구호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였던 만큼 먼 훗날 통일이 된다면 ‘통일운동’이라는 취지의 명칭이 부합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관련기사 1 관련기사 2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자위적 항쟁론·국가폭력론에 가깝다. 즉, 좌우 가치판단의 영역인 4.3 사건의 좌우 이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보류하되, 4.3 사건 도중 저질러진 국가폭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죄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에도 역사적인 평가는 시대에 따라 합의된 선을 기준으로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진보 정부들은 자위적 항쟁론에 더해 4.3 사건의 정치적 대의도 긍정하는 적극적 항쟁론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며, 반대로 반공주의·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보수 정부들은 국가폭력은 인정하되 반란군에 의한 학살과 공산봉기의 반체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편이다.[89]
10.1. 4.3 사건을 다룬 역사자료
시인 김명식이 이끌던 재야 역사학 단체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원(이하 아라리연구원)'이 1988년에 엮은 <제주 4.3 민중항쟁(총 3권)>이 있는데, 이 책은 4.3 학살과 미국의 책임관계를 다룬 서적이었으나, 1990년에 해당 도서가 이적표현물로 판정되고, 이를 저술한 김명식이 국보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이던 노민영이 존 메릴의 논문과 항쟁 관련자인 김봉현의 현장기록 등을 토대로 같은 해에 쓴 <잠들지 않는 남도>가 있었으나, 이 책 역시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고 나오지 못하다가 2018년에 복간되었다.
1994년에는 전예원이 제민일보에서 연재된 <4.3은 말한다>를 책으로 묶어 5권을 펴냈다.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 나와 6권이 출판되었다. 절판된 책이지만 전자책 형태로 아카이빙된 자료도 있으니 구글링을 해봐도 좋을 것이다.
제주 출신 소설가이자 전 한양대 교수였던 현길언이 사망하기 전 해인 2019년에 증언한 경험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소설가 현길언의 ‘내가 겪은 제주 4·3사건’ 중도적 시각에서 기록된 귀중한 자료이다.
2006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역사다시보기'라는 시리즈에서 <제주 4.3>을 펴냈다. 후에 이 책을 집필했던 허영선은 그 내용을 보강하여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2014년에 출간했다.
11. 4.3과 일본
원래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연락선 군대환(기미가요마루)이 운항했고[90], 이때문에 4.3 이전에도 제주도민이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 통해 제주도는 일본을 통해 배워 온 좌파 사상을 인민위원회를 통해 실현할 정도로 한반도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이 되었다. 4.3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미군정이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더라도 제주도에서 좌파 사상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진 것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제주도민 중 4.3 사건 당시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빨치산에 있다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본으로 도망간 친척 등을 통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재일교포 1세대 중에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91]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이 사건이 한국보다 일본 쪽에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가 본 사건에 대한 재일교포 문단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는 이 사건의 원인을 미국의 남한 점령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 주장하였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피와 뼈' 등으로 잘 알려진 최양일도 4.3 사건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제작이 무산된 듯하다.
또한 조류 때문에 학살된 제주도민의 시신들이 일본까지 떠내려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때 거두어진 시신들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를 세운 적이 있다고.
90년대 말에 은퇴한 한국통 일본 외교관이 쓴 회고록이 대한민국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이 외교관은 젊은 시절 제주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 외교관으로 보기 드물게 한국어를 전공했기에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일반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람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사귄 이웃 친구에게 형이 고발당하고, 그 형이 처형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는 참사를 겪었다. 이후, 아버지의 그 이웃 친구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기 아버지에게 "죽기 전에 용서받고 싶다."면서 노구의 몸으로 대문 앞에 무릎 꿇고 빌었으나,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문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아들은 저런 노인이 저렇게까지 비는데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문하고 가까운 일본으로 달아난 경우가 적지 않은 듯.
아직 한국에 대한 정보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전이었던 2000년대 초반에는 일본의 우익들이나 우파 네티즌 사이에서 상기한 4.3 사건의 일본에의 여파와 제주도민들의 일본으로의 탈출 때문에 제주도가 아직도 한국 본토와 사이가 안 좋다거나, 독립을 염원하고 있다거나 하는 낭설이 진지하게 돌았다. 거기에 근거해 한국과 전쟁하게 되면 제주도민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를 해방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흘러들어가며 그런 낭설이 떠도는 사례는 줄었지만 개중엔 아직도 제주도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2018년에 오사카에서 4.3사건 위령비가 건립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11월 18일에 위령비가 들어섰다.
2019년에는 4.3사건 피해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이 강제송환된 영상이 나왔다. 2019년 4월 2일에 제주도에서는 제주 4.3 예비검속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고, 일본인 모임인 제주 4.3 한라산회도 참석했다.#
12. 제주 4.3 사적지
제주 4.3 유적지와 제주 4.3 길 문서 참고.13. 여담
섯알오름의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서만 218명이 총살당했다. 죽기 전에 가족들이 자신의 고무신은 알아볼 거라며 고무신만 벗어놓고 가 고무신이 걸려있는 위령비도 있다. #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in Korea:Cheju-Do) 11분 53초 경에 불에 타는 오라리 마을이 보인다. |
제주 4.3 사건 초기에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은 4.3 사건과 관련한 여러 사건들 중 드물게 영상이 있다. 바로 미합중국 육군이 화재현장을 지상 및 상공에서 촬영한 영상인데, 미 육군측에서는 이 영상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in Korea:Cheju-Do)>라는 제목의 기록영상물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불의의 사건을 급작스럽게 찍은 영상치고는 퀄리티가 좋기 때문에, 미군 측에서도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고 대비하여 촬영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늘푸른 프로덕션의 한국전쟁[92] 마지막 권을 보면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김영삼, 노무현 정부는 바보같이 간첩들한테 보상금이나 줘서 잘못됐다.", "4.3사건 때 일어난 군의 학살은 정당했다"는 논조로 이야기한다. 애초에 이 만화는 극우적 성향이 아주 심한 만화이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등학생의 70%가 한국전쟁은 남한이 먼저 침략한 거라고 주장한다고 그려놓은 거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북한과 맞서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이라는 내용, 초등학교 교사들이 극좌여서 미군철수, 주체통일을 하게 만든다는 둥의 내용이 들어 있다.
5.18 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역사왜곡이 많은 사건이기도 하다. 인터넷이나 일부 극우 성향의 블로그 등지에서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폭동 진압을 위해 제주도민을 죽이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만큼 찬양하는 사람도 많다 보니 광주 학살보다도 역사왜곡이 더욱 많이 발견된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이 네이버에서 별점 테러를 받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남로당의 무장봉기는 엄연한 적색 테러 행위였고 민간인들까지 희생시킨 범죄이나, 남로당 봉기 이전부터 극우 정치깡패와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탄압하였고 초토화 작전 국면에서는 초법적 대량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제주도 출신인 배우 김부선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첫 남편과 아들들을 사건으로 인해 모두 잃고, 새 남편과 재혼하여 김부선 남매를 낳았다고 한다.
유명 어반 판타지 TRPG 룰북인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헨게요카이에서 늑대인간들인 스타게이저들의 제주도 케언(성역)이 4.3 사건 당시 파괴당했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 세계관에선 네판디 혹은 웜[93]이 남로당과 서북청년단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지역을 연고로 하는 K리그1 참가 프로축구팀 제주 유나이티드는 매년 4월에 치러지는 모든 경기에서 유니폼 가슴 부분에 4.3 사건 추모의 의미를 담은 동백꽃 문양을 달고 뛰고 있다.#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에서 가해자 정윤성은 피해 학생 중 1명에게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주도에서 온 빨갱이라는 폭언을 하였는데 이는 일부 극우 성향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사한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 3기와 4기는 전원 제주도 출신이었는데 이는 4.3사건 이후 제주도 청년들이 '빨갱이'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자원입대 했었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해병대만 주둔한 상태라 당연히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고[94] 이들은 영화 윈드토커의 나바호족처럼 무선 암호병으로 배치되었다.[95] 이들은 제주 방언으로 교신해서 북한군이 도청을 해도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2023년 4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96]
14. 참고 문헌
-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 70년 어둠에서 빛으로』, 2017.
-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 4·3 초토화 작전에 사라진 마을…학살의 현장
- 《4.3은 말한다》(전 5권)[97], 제민일보 4.3 취재반, 전예원, 1994 ~ 1998
- 1권 : 해방의 환희와 좌절, 3.1절 발포와 4.3의 길목
- 2권 : 4.3 봉기와 거부된 단선
- 3권 : 유혈사태 전초전
- 4권 : 초토화작전(上)
- 5권 : 초토화작전(中)
6권[98] : 초토화작전(下)7권: 초토화작전 이후의 4.3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으로 연재 중)- <4.3과 제주역사>, 박찬식, 각, 2018
- <4.3 그 진실을 찾아서>, 양조훈, 선인, 2015
-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2014
- <잠들지 않는 남도>, 노민영, 온누리, 2018
-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9
- <제주민중항쟁>(전 3권),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구원(아라리연구원), 소나무, 1988
- <제주 4.3 항쟁>, 양정심, 선인, 2008
- <4.3과 미국>, 허상수, 다락방, 2015
- <화해와 상생(제주4.3위원회 백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8
-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제주4.3연구소, 역사비평사, 2002
- <늑인>, 4.3도민연대, 각, 2018
- <다랑쉬굴의 슬픈노래>, 제주민예총4.3문화예술제사업단, 각, 2002
-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제주4.3제50주년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학민사, 1998
- <이제사 말햄수다>>(전 2권), 제주4.3연구소, 한울, 1989
- <제주4.3유적>(전 2권), 제주4.3연구소, 각, 2003 ~ 2004
- <제주 4.3 구술자료 총서>(전 8권), 제주4.3연구소, 제주4.3평화재단, 2015
- <제주4.3 사건자료집>(전 12권)[99],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1 ~ 2002
- 1~3권 : 신문
- 4권 : 정부문서, 국회속기록, 잡지
- 5권 : 군경자료
- 6권 : 관보
- 7~11권 : 미국자료
- 12권 : 북한자료, 러시아자료, 무장대 자료
- <양민학살사건보고서>, 대한민국 국회, 1960
- <제주 4.3 피해신고서>, 제주도의회, 1994
- <김익렬 장군 유고록>, 김익렬
-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허호준, 선인, 2014[100]
- <4.3 미국에 묻다>, 허호준, 선인, 2021[101]
- <4·3, 19470301-19540921> 허호준, 혜화1117, 2023
15. 관련 단체
-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 제주 4.3 평화재단
- 제주 4.3 평화공원
- 제주 4.3 아카이브
-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 제주 4.3 연구소
-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회
- 제주국제평화센터
- 제주4.3연구정립유족회[102]
16. 관련 문서
- 사건 사고 관련 정보
- 여수·순천 10.19 사건
-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 북한판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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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7년 3월~1948년 11월.[2] 1948년 11월 승격.[3] #, #, #[4]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조의 정의를 따름.[5]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됨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렸다. 한라산 금족구역이라는 말은 당시 이승만 남한 정부가 무장 공비라 지칭한 사람들이 한라산에 숨어 지냈기에 한라산을 금족구역(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고 해변가에 통제 받던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던 것을 말하는데, 이를 해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청, 민보단 등의 무차별 진압으로 인해 한라산으로 도망친 일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산에 올라간 사람들을 공비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산폭도'라고 불렸다. 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해 '귀순자'라고 불리며 일종의 게토에 수감되었다. 이 게토의 정체는 귀순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거주하는 마을로, 4.3 사건을 겪은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의 증언에 따르면 귀순자들은 직접 마을을 지은 뒤 마지막으로 마을 주변에 현무암 돌담을 둘러 스스로들을 격리 시켰다고 한다. 돌담을 지은 것은 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상부의 지시에 따른 행위였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6.25 때 간첩으로 몰려 사살 당했다.[6]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제주도 주민들이 경제적 동인으로 일본으로 도항하였는데, 1934년에는 그 수가 제주도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였다. #[7] 이상의 내용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의 결론(533~540p)에 의거하여 작성하였다.[8] 한반도 본토에서 제주도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렸다. 즉 아래 방향이 북쪽이다.[9] 박헌영의 비서 출신이라고 자처하는 박갑동에 따르면 이 사건을 이용 및 선동하여 공산당이 제주도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10]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에 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에 증가한 인구에 비해 제주도의 산업 구조는 농업 중심이었다. 섬인데 농업 중심? 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이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대표적인 유배지였던 만큼 죄인들이 유배지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 이용을 철저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어업도 우리가 생각하는 큰 배나 최소한 배처럼 생긴 어선이 아니라 '태우'라는 거의 돛단배나 뗏목 수준의 작은 배를 이용하게 했으며, 이마저도 관청에서 허가제로 운용하여 섬인데도 불구하고 어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해녀 문화가 생긴 것이다. 결국 이런 영향으로 많은 실업자가 발생했는데, 육지에서는 제주도 출신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 필연적으로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유배지로서 몰락한 지식 계층이 제주도에 모여 살면서 조선 말부터 해방 후까지 한반도에서 제일 문맹률이 낮은 지역으로, 당시 일본의 근대 교육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당시 일본 지식인 계층에 유행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도 제주도 출신은 더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 대우에 맞서기 위해서 노동 조합을 만드는 등 사회주의적 운동을 경험해 본 사람도 많았다.[11] 더군다나 조선은 예전부터 양반이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였기에, 사회주의는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하는 세상'이라는 건 절대 다수였던 농민들, 특히 소작농들에게는 꿈과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토지 무상 분배 같은 것은 불에 기름 붓기 같은 것이었으니, 사회주의가 파고들기에는 아주 좋은 토대가 조선 반도 전역에 펼쳐지던 중에 발생한 일이기도 하다.[12] 이러한 관점은 경찰 간부들에게도 나타났다. 어느 경무부 차장은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파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매카시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총파업 상황을 보러 왔던 조병옥 정무부장의 인식도 이와 거의 비슷했다.[13] 중문지서원 6명은 사직했는데 그들 중 2명 강수헌, 양경한 2명은 다수의 가족이 희생되었다. 강수헌 가는 갓난아이 포함 7명 희생, 양경한 가는 형제 2명 포함 3명의 희생이 확인되며 추가적인 가족들의 희생도 있었던 듯하다. 양경한은 아직 4.3 희생자로 신고도 안 되어 있다. 송공삼 순경은 본인 희생은 확인되나 가족들의 피해는 확인불명. 해당 사건으로 당시 경찰 조직에 의해 죽임 당했다. 한태화 순경은 한 달여 고문 폭행 당한 후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강경진, 강석 2명의 피해는 확인 불명. 파업에 참가한 경찰들도 피해 상황을 전수 조사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당시 경찰지휘부의 불법적이고 독단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14]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본토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제주 화자가 '육지'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이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15] 약칭 서청. 북한 평안도 지역 지주 계층 출신으로 북한의 토지개혁 때 재산을 몰수 당하고 빈손으로 월남한 사람들,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개신교인 등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다가 소련군정에게 탄압을 당하던 사람들이 탈출해 조직한 단체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해 엄청난 적대감을 가진 복수귀들이었다. 이들은 정부 수립 초기까지 의용군 비슷한 조직을 꾸려 군경과 함께 좌파 탄압, 빨치산 토벌 등에 참여했고, 이 인원들은 정부의 체계가 잡혀감에 따라 군경 조직에 흡수됐다.[16] 4.3 진상규명보고서 p.137~138.[17] 4.3 진상규명보고서 p.138.[18] 4.3 진상규명보고서 p.143.[19] 4.3 진상규명보고서 p.144.[20] 4.3 진상규명보고서 p.146.[21] 4.3 진상규명보고서 p.149.[22] 위 조사 자료는 2000년 6월 8일부터 2001년 5월 30일까지 조사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조사되지 않은 피해자 수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23] 기록상에는 자체 조사를 했을 때 '신고만' 들어온 게 15,000명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고만으로 파악한 인원이 15,000명이다. 3.1운동 사망자보다 더 많은 수치이다. 그리고 130여 개의 마을도 소각되어 사라졌으며, 특히 중산간지대의 마을은 사실상 초토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제주시 화북동의 곤을동 마을터와 같이 흔적만 남아 있는 마을터가 곳곳에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배리어 마이너'지는 1950년 9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수신한 소련 통신을 인용해 미군 고문단들이 3만 5,000여 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1만여 채의 집을 파괴하도록 남한 정부에 명령했다는 기사를 실기도 했다.[24] 단, 여기서 "핑계 삼았다"고 해서 당시의 탄압 국면이 날조된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본 문서의 발단 항목에 서술된 바와 같이 당시 도민 사회는 명백히 탄압 당하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탄압 국면의 진짜 피해자인 제주도민들의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던 제3의 세력(남로당)이 정권 찬탈이라는 정략적 목표를 위해 비극적인 상황을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핑계 삼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25] 산에 올라가는 그 등산 맞다. 당시 빨치산은 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산을 오른다고 표현하였다.[26] 또한 4.3 때 체포된 사람들 중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갔고 이후 한국전쟁 발발 시 국군에게 학살되었다.[27] 미군정 기 초대 제주도사. 오노 토라이시 제주도사의 후임으로 천거되었으나 임명 당시 좌익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임지에 부임하지 않아 미군정 제주도 장관 셔먼 스타우트가 도사로 부임할 때까지 제주부도사로 행정사무를 인계받은 김문희가 권한대행으로 제주도사직을 대리할 수밖에 없었다.[28] 신임 제주도 도지사. 4.3 사건 이후 제주도 도지사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6.25 전쟁 때 귀향 도중 북한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총살 당했다. # 배우 유해진과 동명이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둘은 서로 아무런 관련 없다.[29] 훗날 제민일보(제주 지역 언론)와의 인터뷰에서 쓴 단어.[30] 2019년 11월 26일 경북 포항의 해병대 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터 명칭을 김두찬관으로 명명해 논란이 되었다. 이에 4.3 관련 단체들의 항의로 2020년 2월 3일 국방부에서 이를 시정하도록 조치해 이름을 충성관으로 바꾸었다.[31] 그러나 브라이언 마이어스 등은 미국이 이 학살을 직접적으로 지휘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고 방조했다는 것만 동의했다. 주류 미국 학계의 견해를 주로 반영하는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미군정이 학살 기록만 남겼고 직접 개입하진 않았다(The US military documented massacres but did not intervene)는 옛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미국 주류 학계에선 이 사건이 미국에 대한 책임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분위기인데, 정작 제주 4.3 사건과 유사한 대만의 2.28 사건은 민주화 후 중국국민당조차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했다.[32] 여담으로 위의 영상은 나무위키의 제주어 문서에도 수록되어있다.[33] 이때 귀순자들이 현무암으로 돌담을 쌓아 일종의 게토를 형성했는데, 해가 지면 아무도 출입하지 못했다고 한다.[34] 자세한 내용은 문형순 문서 참조.[35] 이 단락에서는 제주어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제주도 사투리를 구분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제주어 항목을 참조할 것.[36] 참고로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도 독실한 감리회 신자였다.[37] 그 외에 제주도를 휩쓴 제9연대의 신임 지휘관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혐의로 국군 제1호 사형수가 된 문상길 중위가 개신교인이었다. #, #[38] 나중에 알고 보니까 7인회의 일원이었는데, 김기춘을 제외하고는 주로 최순실에 대해서 멀리 하라는 등 좀 센 조언을 한 결과 그걸 수용하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과 모두 멀어졌다.[39] 참고로 역대 대선에서 100% 적중에 성공한 곳은 충청남도 금산군과 충청북도 옥천군밖에 없다.[40] 문화적으로 전라남도와 가까운 추자도 출신이라 제주도 본섬과는 거리가 꽤 있지만 학창 시절을 서귀포에서 보냈기 때문에(서귀포고등학교 출신) 제주도 본섬에서 성장한 거나 마찬가지다.[41] "○○ 잘 지내냐", "요즘은 허튼 짓 안하고 잘 사느냐", "순찰 도중 생각나서 들러봤다" 이런 식이다. 이미 과거 군사정권 시절 연좌제에 휘말려 수시로 연행되거나 참고인 등으로 소환조사를 받아 진절머리가 날 텐데 민주화 이후에는 더욱 교묘해져서 표면상의 이유를 들먹이니 항의를 할 수도 없다.[42] 출처는 여기. 해임은 파면 다음가는 중징계이다.[43]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학자 출신이다.[44] 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소속 단체이다. 단체이지만 듣보잡의 인지도였는데, 뉴스타파에서 제주 4.3 사건을 왜곡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내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재향군인회 소속 회원이 주요 구성원들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영관장교 연합회라면서 위관급 장교들까지 짬뽕으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장과 훈장을 전투복에 주렁주렁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보이는데, 실제로 이들은 군의 흑역사를 감추고 싶어하는 국방부에게 아주 호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다.[45] 고순화, 고시홍, 박경구, 양기혁, 이문교, 채만화, 황대정.[46] 2023년 2월 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1961년 4·3진상규명동지회 회원에 대한 불법 구금과 강압적 수사는 당시 국가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결정했다.[47] 어쨌거나 사람의 시체가 발굴되었으니 경찰이 출동해야 했다.[48]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채정옥 씨.[49] 여담으로 이를 '4.3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부분에서 끊어 버리는 식으로 발언의 의도를 곡해한 기사도 있었는데, 이를 홍준표가 그대로 인용하면서 공분을 사기도 했다.[50] 그로부터 3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4.3 사건 유족들이 직접 봉하마을을 찾아가 눈물로 애도했고, 김태환 제주지사 또한 도내 분향소를 직접 찾은 뒤 서울에서 열린 영결식에도 참석했다. 당시 기사.[51] 김태환 제주지사는 현재까지도 보수정당 소속이다. 그만큼 많은 제주도민이 바라왔던 것이었던 셈.[52] 심지어 이 사람은 국내 최고의 대공전문가이기도 하다.[53] 이들은 1948년부터 1949년까지 국방경비법 위반 등을 명목으로 군사재판을 받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였다.[54] 이들은 현재까지도 행방불명이다.[55] 사실 봉기 당시는 미군정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었다.[56] 사실 당시에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 사건을 제외한 모든 국군의 학살에 대한 언급이 철저히 금기시되었다.[57]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35-39.[58] "한라산에서 내려온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지도 하에, 그 섬의 주민들은 남한에서 예정된 선거에 반대하여 4월 3일 봉기했다"(Led by Communist guerrilla bands rushing down from Halla mountain, the people of the island rose up on April 3, 1948, in opposition to elections scheduled for the southern zone.), John Merrill. 참고로 존 메릴의 연구는 대놓고 공산당의 입장에 동조하며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악으로 몰아가는 극좌적 관점을 제외하면, 민중항쟁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서도 "탄탄한 근거 위에 과학적인 해석을 가했다"고 인정 받는 편이다.[59] 제주4.3사건 진상규명보고서 p.104.[60] 무장대 지도자들의 월북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탄압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하기도 한다. 다만 조선의 노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고 친일파가 아닌 것은 아니며,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 넘게 투쟁을 이어가 끝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뤄낸 좌파 민주주의자들이 있는 이상 적성 진영을 선택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는 궁색하다. 심지어 당대나 현대나 북한이라고 대한민국보다 딱히 민주적인 국가도 아니었으니 더더욱.[61] 김민환, 전장이 된 제주 4.3 평화공원.[62] 대한민국 국방부, 한국전쟁사.[63] John Merill, <The Cheju-do Rebellion>[64] Yang Sang-ick, <Echos of Mt. Halla>[65] 제주도 삼일절 시위가 무허가 시위라는 주장이 있으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보고서에서는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허가 받은 집회로 결론 짓고 있다. 동 보고서 108페이지 참조.[66] "3.1절 기념대회는 민전의 주관하에 개최되었지만 실제로는 남로당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 등 12개항의 투쟁방침을 정하고 하부기관과 각 외곽단체에 시달하였다." - 송정심, <제주 4.3항쟁에 관한 연구>, p.9.[67]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3·1운동기념투쟁의 주체는 남로당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제주도당이고 실질적으로 제주도민전이 주도하였다.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을 그대로 승계한 정당이다. 당연히 공산주의 이념과 체제 실현을 지향하는 정당이다. 따라서 친소, 친공, 친북한, 반시장경제, 반자유민주주의, 반미(反美), 반대한민국성(性)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정당이다. - 김영중,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서 분석> p.109.[68] "봉기 발발 후 남로당 중앙당의 추인이 있었고 전남도당 조직원이 4.3봉기 결정에 개입했음은 분명해 보이나, 현재까지 중앙당의 계획적인 결정임을 밝혀주는 자료는 문건이나 증언록 모두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개 도당 차원에서 중앙당에 보고·협의 절차도 없이 무장봉기라는 최고의 투쟁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 박찬식, <4.3 연구의 쟁점>, p.94.[69] "Among the persons arrested in the wake of the demonstrations were two organizers from the SKLP who had been sent to the island from the mainland." - John Merill, <The Cheju-do Rebellion>, pp.154-155.[70]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105, 김영중, <남로당제주도당 지령서 분석 -1947년 3.1운동기념투쟁 당시> pp.21-22.[71] 김영중, <남로당제주도당 지령서 분석 -1947년 3.1운동기념투쟁 당시>.[72] 다만 봉기에 참여했던 대다수는 특정 이념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부가 헌법에 규정된 공정한 사법 절차 없이 자의적으로 국민들을 고문 처형하던 상황에서 전략적인 항거 수단으로 인식했을 뿐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문서의 발단 부분에 서술된 바와 같이 당시 도민들은 유해진 지사를 지지하지 않는 한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도 없었고, 경찰의 고문과 극우 단체의 테러 및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도민들은 민주 사회의 혜택을 누리기는커녕 탄압 받고 있었으므로, 봉기는 그 항거 수단으로 인식되었다는 것.[73] "남로당은 단순히 3·1절을 기념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한의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질서를 파괴하고 미군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투쟁 방편으로 이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 신상준, <제주도 4.3사건> 하권, pp.26-27.[74] "≪독립신보≫, ≪우리신문≫, ≪조선중앙일보≫ 등 좌익계 신문들은 1948년 4월에서 5월 동안 4·3 사건을 다루면서 '소요사건', '무장봉기', '제주도의 항쟁', '제주도 인민봉기' 등으로 보도했다" - 김민환, <전장이 된 제주 4.3 평화공원>.[75] 문장 후반부는 김점곤 저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을 원 출처로 2차 인용.[76] 김봉현, <4.3무장투쟁사>.[77] Kim Ye-Jin, <National Ideology and the Cold War in the Republic of Korea (1949-1950)>, Korean Studies, 2차 인용.[78] 존 메릴, 제주도 반란.[79] 1947년이 되면 이미 소련군정 치하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한 지역의 유일 정당으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80] 심지어 폭동·반란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박명림조차 "선거 거부가 갖고 올 파장과 영향에 대해 저항 지도부는 더욱 신중했어야 한다"는 평을 남겼다.[81] "‘공산폭동’이 4·3에 대한 미군과 지배세력의 입장이라면,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북한 및 좌익세력의 인식이 된다. 이들은 제주4·3을 미군과 지배세력이 추구하던 한반도의 분단 과정에 저항한 ‘제주도 인민들의 항쟁’으로 해석했다." - 김민환, <전장이 된 제주 4.3 평화공원>, p.78[82] 쉽게 비유하자면 4.3 사건을 5.18 민주화운동과 거의 똑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된다.[83] 양정심, 제주 4· 3 항쟁에 관한 연구-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중심으로[84] 단, 앞서 언급했듯 남한 단독선거를 "반민족적"으로 평할지 "현실주의적"으로 평할지는 "통일 한국"과 "자유 대한" 혹은 "민족주의"와 "공화주의" 중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추느냐에 달린 문제로, 역사학적인 판단보다는 개개인의 가치 판단에 달린 문제라고 봐야 한다.[85]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86] "Cheju-do has a long history of weak government control periodic rebellion. (...) The long-range result of the rebellion was existing tradition of separatism and resistance mental demands that was heavily conditioned and strong local traditions.", John Merill[87] 박찬식, 4.3 연구의 쟁점[88] 2024년 현재 제9대 제주 4.3 평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89] 제주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공화당 문대탄 역시 4.3항쟁론을 비판하며 사건의 시초를 '해방정국의 혼란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이를 구실로 '남로당이 폭동을 벌인 것'이라 분명히 하고, 서청을 비롯한 극우 백색테러주의 세력을 등에 업은 토벌대의 잔혹한 토벌과 극좌 남로당 무장대의 만행을 들어 제주도민이 수난을 당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90] 후대에도 이는 계속 이어져 코로나 이전에는 제주 ~ 나리타, 제주 ~ 오사카 항공노선이 운항하기도 했다. 제주 ~ 오사카 항공노선은 지금도 티웨이항공이 운항하는 것으로 남아있으나, 정작 제주항공은 제주 ~ 오사카 노선을 잠깐 운항한 거 외에는 제주 ~ 일본 노선을 운항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2024년 들어 제주 ~ 일본 노선 복항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91] 1945년 당시 조선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1%인 30만 명 정도가 제주도민인데, 재일 한국인의 20%가 제주도민이다.[92] 말 그대로 한국전쟁 만화로, 초, 중, 고등학교 도서관에 있는 경우가 많다.[93] 일종의 파괴신, 한차례 미쳐버린 이후로는 세상 그 자체를 파멸시키려고 하며 이에 저항하는 변신족들을 몰살시키려고 한다.[94] 해병대 뿐만 아니라 육군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군은 육지에서 내려온 장병들의 신병교육만을 담당했다. 육군제1훈련소[103]와 해병 훈련소는 같은 지역[104]에 공존 하고 있었는데 이는 구 일본군 58군 사령부의 신병 훈련기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탓이다.[95] 영화 윈드토커는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병대에서 영어와 나바호어 모두 능숙한 나바호족 원주민들을 입대시켜 무선 암호병으로 배치한 것이다. 주인공인 조 앤더스 병장(니콜라스 케이지 분)의 임무도 나바호족 무선 암호병을 보호하는 것이었다.[96] 당시 국가폭력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입었던 피해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97] 사실 '4.3은 말한다' 전 5권은 1998년까지의 취재기사(411개)만 출판한 것이다. 제412회부터 제456회는 1999년까지 연재되어 6권으로 출판될 예정이었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 연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 당시 취재기자 중 하나인 김종민이 2017년 3월부터 제주의 소리, 오마이뉴스 등에서 제457회부터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이라는 제목으로 재연재를 하고 있다. 김종민에 따르면 <4.3은 말한다>는 전 7권으로 완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98] 실제로 출판된 것은 아니지만 4.3 아카이브 사이트에 자료가 있다. 1부 2부[99] 1~11권은 책자로 출판되었고, 12권은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복사본으로 존재한다. 이 자료집은 모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발간된 것이다.[100] 그리스 내전을 학위논문으로 다룬 유일한 책이다. 해당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101] 제주 4.3 당시 미국의 개입 과정을 상세히 다룬 책이다.[102] 제주 4.3 사건의 올바른 역사적 정립을 말하고 있음에도 4.3 사건이 폭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중립적 시각과는 거리가 있는 입장을 견지히고 있다. 이들은 남로당 혹은 무장대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 104명(혹은 107명)의 위패를 묘지에서 내리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단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가 2010년 4.3 희생자 결정에 항의하여 제기한 위헌 심판은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된 바있다. 이 단체는 강경 우익 성향의 단체인 어버이연합, 시스템클럽[105]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