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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慶山-鑛山虐殺事件 Gyeongsan Cobalt Mine Massacre | ||
기간 | 1950년 7월 20일 ~ 9월 20일 | |
위치 |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652 | |
관련 기관 |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군, 경찰, 형정국[2] 보도연맹 | |
피해 내역 | 정부 추산[3] | 2,574 명 |
유가족 추산 | 3,500여 명 | |
부상 | 추정 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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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대한민국의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경산 안경공장 학살사건'[4]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사건이 벌어진 지 30년 이상 지난 1988년에 현장에 들어선 안경공장 국제광학[5] 건물이 폐업 후 공포체험 장소로 유명해지면서 이 사건과 연계된 괴담[6]이 네티즌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잘못 불리는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또는 1926년에 경산에서 발견되었고 당시에는 이름이 춘길광산(春吉鑛山)[7]이었으나 1937년 6월 26일 일본 광업인 니노미야 다이조(二宮泰三)가 보국광산(報國鑛山)[8]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걸맞은 이름으로 개명하고 광업허가 14403호로 등록[9]해 일본 육군 직영하에 개발한 후 금과 은을 채굴해 수탈했다. 금과 은의 생산량이 줄던 중 1940년 코발트 검출법이 발명되고 이곳에서 코발트 광맥이 발견되어 1942년[10]## 군사용 코발트가 주산물이 되었는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함에 따라 폐쇄[11]해 폐광이 되었다. 이때 일제에서 지은 광산 관련 건물은 이후에도 남아서 폐건물[12]이 되었다. 링크 6.25 전쟁 기간 중에 이 폐광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했는데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 경부터 9월 20일 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링크 #
국민방위군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2. 위치
위치는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652, 실제 광산은 평산동 683-1이다.
대구광역시에서 차로 약 20~30분 거리다.
약 486.5m의 백자산(栢紫山)에 있으며 주변에는 선술한 도움요양병원(구 파티마재활요양병원)(구 국제광학), 인터불고경산컨트리클럽(CC)(골프장), 대구한의대학교가 있고 대구미래대학교도 있었으나 폐교되었다.
입구에는 2013년 평산동 역사체험 관광지 사업예산 7억 9천만 원으로 조성된 위령공원과 탑, 관람데크 등이 설치되어 있다.
갱도는 백자산과 그 산에 있는 인터불고경산CC 골프장 지하에 위치한다.
갱도 구조.
제1수직굴 입구(2005년 사진, 2006년 사진, 2014년 사진, 2019년 사진)
제1수평굴 입구(2002년 사진, 2007년 사진, 2013년 사진(두 번째 사진), 2014년 사진, 2014년 사진 2)
제2수직굴 입구(2006년 사진, 2014년 사진(두 번째 사진))
제2수평굴 입구[13](2005년 사진, 2013년 사진(첫 번째 사진), 2014년 사진, 2014년 사진 2, 2019년 사진, 2020년 사진, 2020년 사진 2)
갱 내에는 수평 갱도와 수직 갱도가 있는데 제1수평굴, 제2수평굴, 제1수직굴, 제2수직굴로 이뤄져 있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수평 갱도가 총 5개가 있다. 광산 내부 구조는 일제가 자료 공개를 거부해서 확실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수직 갱도는 수평 갱도에서 파낸 코발트를 위로 나르는 역할을 했다. 기사
이 갱도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제1수평굴 입구는 도움요양병원(구 파티마재활요양병원, 구 국제광학) 바로 옆에 있으며 내부에 물이 차올라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인근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14]
3. 피해자
사건의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의 두 부류로 나뉜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7월에 학살되었다고 하며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 중 1,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1950년 당시 경상북도 경산, 청도, 영천, 경상남도 창녕, 밀양, 충청북도 영동 등의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직후 검속[15]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 부역자[16]나 농민[17]이었다.[18]
피해자들은 대부분 남성으로 10대에서 50대까지 걸쳐 있었으나 거의 다 20~30대였다.
학살 피해자로 항일운동가 이병기가 있다. 그는 독립유공자 이효정과 이병희의 친척이자 동지다. #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했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건 전향했다는 말인데도 서훈을 못 받고 있다.
4. 살해 방법
피해자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원으로서 보도연맹에 가입할 당시 이름과 주소까지 기재했기 때문에 손 쉬운 표적이 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경산중앙국민학교(현 경산중앙초등학교)에 끌려가 2~3일이 지난 후 머리가 깎인 채 교실에 구금되었다가 5~6일 후 코발트 폐광으로 이송되었다.이후 2~3명 단위로 손과 발을 철사나 밧줄로 한 데 엮고[19] 백자산 산 중턱의 수직 50m나 되는 수직 갱도 앞에 세우고 앞에서 밀어서 혹은 갱도 쪽 사람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하거나 부상 당해 중심을 잃고 수직 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 쉽게 말하자면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 입구에 사람들을 줄줄이 묶어놓고 그대로 밀어 넘어뜨리거나 앞의 몇 명만 총으로 쏘면 묶인 줄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도 떨어지도록 하였다.
게다가 일부 인원이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발굴 과정에서 터지지 않은 76mm 고폭탄까지 발견된 걸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한 걸로 보인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21]들은 있었으나 일부는 삶에 대한 의지로 갱도 위로 기어 나오려다 힘이 다해 죽은 사체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규모가 작은 제2수직굴에도 사람을 몇 명 넣은 후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수직굴이 꽉 차자 인근의 골짜기인 대원골에 끌고 가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기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의 가창골[22]에 있는 숲의 화약창고에도 약 3천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걸로 추정되는데 이후 가창댐이 생겨서 식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학살 이후 이 지역의 개울은 핏빛이 되었고 이 현상은 1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 수 있다.
5. 사후 처리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인 1960년 6월 유족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23]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강제 해산시켰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위령탑은 쇠망치로 부서졌다. 출처, 출처 2
이렇게 학살이 10년도 채 안 되어 다시 잊히고 갱도 중 제2수평굴 입구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업용수를 위해 콘크리트 수중보로 만들어 막아 놓는 등 폐쇄된 상태로 있었으나 남은 제1수평굴 입구는 뼈가 나오는 동굴이라고 하여 주변 대학교 학생들은 그곳이 어떠한 장소인지도 모른 채 공포 체험을 위해 쓰는 등 문제가 심각하였다. 적어도 2002년까지만 하더라도 제1수평굴 입구 기준 갱도 입구가 큰 안전장치 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제1수평굴 입구는 철문으로 굳게 막아 놨고 앞에 학살지라고 안내판도 붙어 있다. 싸이월드 사진 하지만 무속인이나 폐허 덕후,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지 주변에 양초, 과자봉지, 술병, 담배 꽁초, 콘돔 등의 쓰레기와 과거 유해 발굴했을 때 사용하던 도구들이 돌아다니고 발굴 현장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며 컨테이너 안에는 유해가 계속 보관되어 있다. 기사 CCTV를 달아놓은 제2수평굴 입구와는 달리 제1수평굴 입구는 사유지라 관리될 법도 하지만 해가 떠 있을 때는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경비원이 제재를 하더라도 밤에는 감시가 안 되어서 그런지 인근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을 타고 찾아와 잠금장치를 파손한 후 갱도 내로 들어가는 등 소란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폐허 매니아가 가서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꽤 나오고 이 중 2개는 후술할 제보자들에서도 나왔다. 영상
2000년 3월 경산유족회가 재결성(기사 1, 기사 2)되어 위령제를 다시 지내기 시작[24]했다. 2001년 2월 경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보도연맹과 관련된 취재 중 이곳을 발견해 민간 차원의 유해 발굴을 제안해서 준비한 후 동년 3월 9일부터 발굴을 시작했고 6시간 만에 퇴적물을 치우고 제1수직굴에서 70m 아래에 있는 제2수평굴 입구를 발견했지만 콘크리트 옹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 날인 3월 10일에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뒤 3월 11일 오후 2시 45분에 콘크리트로 막아놓은 제2수평굴 입구를 폭파해 개방했다.
2005년 5월 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동년(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07년부터 정부 주도로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2009년 11월 17일 과거사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은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판정했다.[25] 하지만 예상되는 유골의 절반 가량도 채 수습되기 전에 정권이 바뀐 후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수습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많은 유골이 이곳에 남아 있고 수습된 유해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었다. 기사
2008년 무렵 인터불고 경산컨트리클럽 진입로를 개설하고 안경공장 건물을 파티마요양병원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상당량의 유해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수습된 유골들도 정부 계약에 따라 특정 대학[26]의 박물관을 거쳐 2019년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되었지만 당시 대학은 유골이 있다는 이유로 괜히 혐오 시설이 될까 봐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절대로 노출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등 이 보도연맹 문제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제대로 청산되거나 기록되지 못 하고 또 잊혀 일개 흉가 체험 장소가 되어버린 비극을 보여주었다.
컨테이너와 뼈 한 상자는 2014년~2015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장에 전시된 적이 있다. 모르고 보면 전혀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전시실에는 과거사위원회 조사 당시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촬영한 영상을 상영했다. Navigation ID 참조.
2016년 11월 유족회가 제2수평굴 근처에 비를 세웠으며 위령탑과 주변 시설이 정비되었다. 이후 제1수평굴 근처에서 지내던 위령제를 제2수평굴 근처 위령탑에서 지내게 되었다. 입구는 철문으로 폐쇄하고 CCTV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6. 매체
영상[27]
선술했듯이 2001년 2월 경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보도연맹 취재 중 유골 발굴을 제안해 동년 3월부터 진행하게 한 내용이 동년 4월 27일 29회에서 방영되어 처음으로 사건이 조명되었다.
2005년 10월 23일에 MBC 스페셜에서 다뤄졌다.
2014년 극단 희망새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뮤지컬인 고스트 메모리의 공연을 시작했다. 대박 콘텐츠를 찾던 생계형 유튜버 왕코와 별성이 경상북도 경산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제보를 받고 촬영을 위해 현장으로 떠나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데 유튜브가 유행하기 전인 2014년에는 아프리카TV BJ(인터넷 방송인)이었다.
동년(2014년) 9월 2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956회에서 다시 조명되었다. 방송 초반에는 선술한 안경공장 괴담으로 시작했다가 전체적으론 보도연맹 학살 문제를 중심으로 방송했다.
2015년 7월 6일 출판된 《미완의 꿈》에서는 저자 성유보가 6.25 전쟁이 일어났던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50년 7월 하순에 어느 날부터 보름 넘게 흰 옷 입은 어른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신작로를 줄지어 지나갔던 기억을 기록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편찬한 보고서인 <경산 코발트과산 민간인 학살 관계 보고서(2010년)>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여 이 사건의 경과를 기록하였다.
2016년 9월 5일 TV조선 이것은 실화다 99회에서도 '동굴 괴담의 진실'로 방영되었다. 재연 배우 신신범이 해당 사건의 유족들 중 한 사람으로 재연되어 나왔다. 작중 유족 이름은 이한구.
2020년 7월 22일 KBS 제보자들에서 다시 한 번 조명되었다. 영상
2020년 9월 15일 KTV 국민방송의 유튜브 채널 '온통 KTV PLAY'에서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올렸다.
2021년 8월 5일 MBC 심야괴담회에서 '안경 공장'이라는 이름의 에피소드로 언급됐다. 보도연맹 학살과 관련된 내용은 '6.25 때 사람이 많이 죽은 동굴' 정도로만 묘사되었다.[28] 영상 1, 영상 2
2021년 출판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언급된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일부가 대구교도소 이감 후 이곳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2023년 9월 5일 심야괴담회 시즌 3에서 '안경 공장 2'이라는 이름의 에피소드로 재언급됐다. 영상, 1편, 2편 Full
7. 피해 보상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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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수평굴 입구. 굳게 잠겨있으며 허가 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아마 흉가 체험이나 담력훈련이랍시고 들어갔다가 시설을 파괴하거나 다치는 사례가 늘어서인 듯.[2] 현 교정본부.[3] 공식적으로 발견된 사망자다. 대구형무소의 피해자 1,402명과 부산형무소에서 재소자 명단에 없는 1,172명을 합친 수치.[4] 안경공장이 대구에 먼저 세워져서 그런지 대구 안경공장 학살 사건으로도 잘못 알려져 있다. 후술할 심야괴담회 방송분에서 인터넷 검색 결과를 공개했는데 나온 글의 제목들을 보면 '대구 안경공장 학살 사건'도 몇몇 섞여있다.[5] 1946년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당시 경상북도 대구부 원대동)에서 김재수가 일본의 안경 제조 기술과 시설을 한국에 들여와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한국 최초의 안경테 제조공장. 1960년에는 한국 최초로 안경테를 홍콩에 수출했고 대구를 한국 안경테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선도 역할을 한 업체이기도 하다. 김재수 창업주가 작고한 후 아들 김태홍 대표 시절인 1980년 법인 전환하면서 국제광학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1988년 백자산 산기슭의 이 학살 사건 현장 앞(경산시 평산동 591-2)에 신공장을 준공하여 확장 이전했으나 1992년 이후 안경테 시장의 침체로 어려움을 겪다가 1997년 부도로 폐업했고 법인은 2002년에 청산됐다. 공장 건물은 잠시 다른 안경 제조업체가 들어와 가동했으나 몇 년 안 가 문을 닫고 한동안 방치되다가 동오의료재단이 인수해 리모델링하여 2004년 7월 10일 파티마 재활요양병원이 문을 열었다. 2020년 7월 도움요양병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동년 9월 부지 내에 지은 신 건물로 이사했고 구 건물은 동오요양원으로 쓰기 시작했다.[6] 한국 5대 흉가(기사에는 3대 흉가라고 나와 있다)로 꼽혀서 그런지 인터넷 등지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1960년대 섬유공장이 들어섰는데 화재로 공장이 망해서 사장이 자살했으며 이후에 들어선 구두공장도 같은 이유로 망해 역시 사장이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것은 안경공장이라고 하는데 사장이 미쳐 공장과 기숙사에 불을 질러 22명의 직원이 모두 죽고 사장도 자살했다"고 알려졌지만 폐광에서 학살이 일어났고 이 부근에 실제로 안경공장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모두 미확인된 괴담일 뿐이다. 기사 괴담이 사실이라면 20여 명의 직원이 죽었다는 말인데 아무런 기사를 찾을 수 없다. 단, 제보자들에서는 한 마을 주민이 이 소문에 대해 말하기는 했다.[7] 등록번호 제14403호로, 당시 보국코발트광산과 등록번호와 일치했다.[8] 또는 보국코발트광산이라고 하기도 한다.[9] 1935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있다.[10] 1942년 일본지질학회가 펴낸 지질학잡지 49권 585호에 '보국코발트광산의 광상(鑛床)'이란 이름으로 해당 내용이 실렸다.[11] 1942년 폐쇄되었다는 설도 있다.[12] 따라서 이 문서의 분류 중 폐건물이 있다. 그 안경공장과는 관련이 없다.[13] 제2수평굴 물웅덩이 아래에 유골이 있다.[14] 경산시의회 2003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진상조사 청원심사결과보고서』.[15] 이때 A, B, C등급으로 보도연맹원들을 분류해서 C등급은 풀어주고 A, B등급을 끌고 가서 죽였다.[16] 빨치산이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내려와서 민가에 가서 총 들고 먹을 것을 갖다 달라고 협박해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잔심부름을 했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사람도 있다.[17]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김영신(이은주 분)이 보리쌀 한 됫박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반공청년단에게 살해 당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정부에서 자세한 조직에 대한 설명과 내막을 알려주지 않은 채 '여기에 서명만 하면 쌀 한 바가지, 비료 한 포대, 고무신을 준다.'는 등 여러 방법으로 가입시켰고 아무것도 모른 농민들이 보답에 현혹되어 이름을 쓴 경우가 많았다.[18]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노용석,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 실태와 진상 규명 방안,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2006년 동계워크숍, 2006.[19] 이는 탄약을 아끼고 집행의 간편화를 위해 세계대전 및 동 시기 보도연맹원들을 바다 위에서 처형할 당시에도 암암리에 쓰였던 방식이다. 다만 대부분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익사하는 깊은 강가, 바다 위에서만 했으며 돌이나 무게추를 함께 엮은 뒤 던지기도 했다.[20] 육해공(해병대는 해군 산하라서 독립된 정보부대가 없다.) 정보부대 중 이 사건에 당시 육군본부 지구정보파견대 CIC 소속(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었던 22헌병대도 연루된 걸 보아 사용된 무기류는 최대로 38구경 리볼버, M1919 브라우닝, M1911, M1 카빈, M1 개런드, 소이탄, MK2 파인애플형 파편 수류탄 등, 기타 대검류 등으로 추정된다. 시체를 태우려는데 소이탄을 안 썼을 리가 없으며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기관총을 사용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최대로 사용한 무기종은 8종으로 추정되는데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였는지... 이후에도 미스터리인 아픈 흑역사의 일면으로 남은 채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21] 현지 소문에 따르면 3명이 살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후술하듯이 기어 나오려다 굶어 죽었고 두 번째 사람은 도망쳤으나 다시 붙잡혔고 세 번째 사람이 달아났다고 한다. 단, 실제 생존자는 그 도망간 한 명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2]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구형무소에 끌려왔고 이후 이곳에서 죽었다. 기사[23]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1960년 4.19 혁명 직후 유족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24] 2007년 제1수평굴 입구 앞[25]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결정서에 따르면 "육군본부 정보국 CIC와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후 집단학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사[26] 경북에 있는 대학은 아니다. 해당 타지역의 보도연맹원도 이곳에 끌려왔다.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의 한 교수가 그 대학의 교수와 함께 공동발굴팀을 이끌었다.[27] 유골이 나와서 그런지 성인 인증을 해야만 볼 수 있었는데 어느샌가 풀렸다.[28] 안경공장으로 가는 길에 샛길로 들어가면 별명이 뼈가 나오는 동굴인 동굴이 있다고 언급되었는데 정황상 코발트 광산 갱도 중 제1수평굴 입구일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