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6:29:31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수도권/강원권
2.1. 서울형무소2.2. 마포형무소2.3. 인천소년형무소2.4. 춘천형무소
3. 충청권
3.1. 대전형무소3.2. 공주형무소3.3. 청주형무소
4. 호남권
4.1. 광주형무소4.2. 목포형무소4.3. 전주형무소4.4. 군산형무소
5. 경상권
5.1. 대구형무소5.2. 김천형무소5.3. 안동형무소5.4. 부산형무소5.5. 마산형무소5.6. 진주형무소
6. 둘러보기

1. 개요

6.25 전쟁이 터지자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일반 재소자들을 석방하였고 형무소 직원들은 피난시켰다. 그러면서 국군조선인민군에 밀려 후퇴와 동시에 대한민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피학살자들은 대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좌익 혐의를 받아 형무소에 소감된 좌익수와 정치범들이었다.[1]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6.25 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 전국의 각 형무소에 일시 구금되었다가 군경에 의해 집단 희생된 경우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분류하고 6.25 전쟁 발발 전 각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 들이 전쟁 직후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우와 각 지역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이 열악한 환경 아래 고문과 가혹행위 등으로 사망한 경우를 ‘전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으로 분류하여 조사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사건에 대한 접수를 받고 있으며, 2021년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2]

2. 수도권/강원권

중부지역 형무소 수용 현황 (1946 ~ 1950)
구분 서울형무소 마포형무소 인천소년형무소 춘천형무소
1946.7 3,281 1,356 미상 456
1947.3 4,395 1,616 미상 462
1948.5 4,509 1,928 미상 469
1949.8 8,623 3,334 1,638 1,218
1950.6 약 7,000 약 3,500 약 1,300 약 1,250

2.1. 서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로 알려진 서울 형무소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1,7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부소장의 후퇴 명령으로 형무소 직원들은 후퇴하고 이후 재소자들은 출옥하였는데 출옥한 재소자 일부가 수원시에서부터 검거되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희생되었다.[3]

2.2. 마포형무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던 마포형무소[4]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3,5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형무소 직원들은 후퇴하고 이후 재소자들은 출옥하였는데 출옥한 재소자 일부가 수원에서부터 검거되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희생되었다.

2.3. 인천소년형무소

인천 소년 형무소(인천시 학익동)[5]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1,3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30일 형무소 직원들이 수원시로 후퇴하자 재소자들이 탈주를 감행하였는데,국군과 형무소 직원들이 탈주 재소자들을 체포하여 재수용되었다. 1950년 7월 3일 형무소 직원들이 재소자들을 남겨둔 채 다시 후퇴하여 재소자들이 출옥하였는데 출옥한 재소자 일부가 수원에서부터 검거되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희생되었다.

2.4. 춘천형무소

춘천 형무소(춘천시 약사동)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1,25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형무소 직원들은 형무소장의 후퇴 명령에 따라 중범죄 재소자 184명을 제외한 모든 재소자들을 일시 석방하였다. 남아 있던 중범죄 재소자 184명은 형무관이 인솔하고 수원으로 후퇴하였는데 중범죄 재소자 일부가 수원에서부터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희생되었다.

3. 충청권

3.1. 대전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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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공주형무소

파일:공주형무소 학살.jpg
학살지로 끌려가는 형무소 재소자들[6]

공주형무소는 6.26 전쟁 당시 109명의 직원과 1,000여 명의 재소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대전교도소에서 많은 좌익수를 수용하고 있었다지만 공주형무소도 여수·순천 10.19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수감되면서 수백여 명의 좌익사범을 가둔 상태였다. 6.25 전쟁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공주 지역의 군대와 경찰에게 "좌익과 보도연맹을 처리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특무대는 공주교도소로 가서 좌익사범들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형무소가 이를 수용하면서 좌익사범들은 50여 명씩 여러 대의 트럭에 실려 이송되었다. 이 이송작업에는 공주형무소 특별경비대, 공주 경찰, 헌병대, 청년방위대, 우익 청년단체까지 동원되었다. 개머리판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이송된 수감자들은 '왕촌 살구쟁이'[7]라는 곳으로 이송되어 학살되었다.[8] 군인과 경찰이 학살지 부근을 통행금지시키는 바람에 피난민들은 길을 우회하며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해질녘까지 총살이 벌어졌다고 한다. 공주경찰서가 쓴 <경찰연혁사>에서도 6.25 전쟁 관련 부분에 "형무소 수인 처치, 보도연맹원의 조치"라고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시인하고 있다.

학살로부터 59년 후인 2009년 6월부터 7월까지 진실화해위원회의 주도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6개 구덩이 중 3개 구덩이에서 317구의 유해와 수백 개의 탄피를 발굴해냈다.[9] 그리하여 약 400명에서 700여 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3.3. 청주형무소

청주형무소에는 6.25 전쟁 당시 14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고 1600여 명의 재소자가 수감되어 있었다.[10] 전쟁이 터지자 특무대가 형무소의 지휘권을 장악했고 곧 형무소 좌익사범들과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 지시가 내려왔다. 이렇게 되자 1950년 6월 28일 만기출소했던 사상범들도 잡혀왔고 수백 명의 보도연맹원들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직후 형무소는 면회와 차입도 금지시켰고 더 이상의 출소와 주변 통행까지 막아 버렸다. 6월 30일부터는 여수·순천 10.19 사건 관련자 36명을 시작으로 800여 명의 재소자들이 피학살지로 이송되어 7월 초까지 전원 총살당했다. 학살은 청주 부근의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는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약 1,2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 호남권

호남권 형무소 재소자 현황 (1946 ~ 1950)
구분 광주형무소 목포형무소 전주형무소 군산형무소
1946.7 1,111 636 730 514
1947.3 966 824 810 673
1948.5 1,152 862 1,308 535
1949.8 1,780 1,085 1,533 631
1950.6 약 1,700 약 1,000 약 1,000 약 1,000

4.1. 광주형무소

광주형무소에는 6.25 전쟁 당시 1,700여 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전쟁 직후 좌익사범들은 헌병에 호출되어 광주광역시 산동교 인근에서 학살당했다고 생존한 재소자들과 형무소 직원들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증언한 바 있다. 그리하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피학살자 55명의 유족들이 진상규명 신청을 하여 이 중 29명이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공식 문서에는 좌익사범에 대한 처리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생사는 여전히 불명이다.

4.2. 목포형무소

목포형무소는 6.25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좌익사범에 대한 처리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응한 형무소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 법무부에서 "사상범은 군에 인계하고, 잡범은 석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며 전쟁 직후 소속 미상의 군인들이 좌익사범들을 트럭에 싣고 가 사라졌는데 아마 이들은 목포 인근 바다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39건을 확인하였다.

4.3. 전주형무소


전주형무소는 6.25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좌익사범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경 군인들에게 끌려나가 전부 공동묘지 부근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면회인, 형무소 근무자, 군인이 공통으로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70건을 확인하였다.

4.4. 군산형무소

군산형무소는 6.25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전쟁 직후 일반 수용자는 석방하고 중형을 받은 수형자는 타 형무소로 이송하였다고 하는데 좌익사범의 처리는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9건을 확인하였다.

5. 경상권

경상권 형무소 재소자 현황 (1946 ~ 1949)
구분 대구형무소 김천형무소 안동형무소 마산형무소 진주형무소 부산형무소
1946.7 2,003 843 446 528 601 1,632
1947.3 2,218 951 416 572 466 1,496
1948.5 1,877 538 687 606 834 2,021
1949.8 4,397 961 872 741 803 1,977

5.1. 대구형무소[11]

1950년 7월 중순 특무대와 경찰이 주도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들이 학살당했다. 이들은 대부분 가창 계곡이나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 4대 국회에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402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던 1,172명의 행방이 모연하여 이들도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최소 1,402명, 최대 2,574명이 학살당했다.

5.2. 김천형무소

김천시 평화동에 있었던 김천형무소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김천형무소 재소자들이 7월 초순에서 15일 사이 김천지구 CIC와 김천지구 헌병대, 김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와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대항면 직지사 계곡에서 집단으로 살해되었다.

5.3. 안동형무소

안동형무소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안동형무소 재소자들이 1950년 7월 15일 후퇴 직전까지 8사단 25연대 소속 헌병대, 안동경찰서 경찰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안동시 남후면 수상리 청골과 도둑골, 와룡면 태리 기름땅고개에서 희생되었다.

5.4. 부산형무소

부산형무소(부산시 대신동)에는 6.26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2,5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1950년 7월 26일에서 30일 사이, 8월 2일에서 3일 사이, 9월 25일 세 차례에 걸쳐 부산지구 CIC와 부산지구 헌병대, 부산지역 경찰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 해운대구 장산골짜기에서 집단 사살되거나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집단 수장되었다. 해상에서 학살된 사람 중 일부 시신은 일본 쓰시마 해상에서 발견되었다.

5.5. 마산형무소

마산형무소(마산시 오동동)에는 6.26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63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마산형무소 재소자들이 1950년 7월 5일, 7월 21일에서 24일 사이, 8월 24일, 9월 21일 네 차례에 걸쳐 마산지구 CIC와 마산지구 헌병대, 마산중부경찰서 경찰에게 적법한 절차 없이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서 집단 수장되었다.

5.6. 진주형무소

진주형무소(진주시 상봉서동)에는 6.26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1,0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1950년 7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진주지구 CIC와 진주지구 헌병대,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2022년부터 진주시 집현면 등 24곳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주형무소 학살 사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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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시대에 걸친 경우 시작 시점을 기준으로 함[2]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 포함
}}}}}}}}}

[1] 이 재소자들은 남조선로동당,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 사건,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 공안사건 등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었다.[2] 진실화해위원회 2021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p. 114[3] 진실화해위원회 2021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p.117[4]서울서부지방검찰청 자리[5]인천지방검찰청 자리[6] 이 사진은 사진기자 헤이우드 마기(Haywood Magee)가 찍어 1950년 7월 「픽쳐포스트」지에 실렸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동조 혐의자", "스스로 무덤을 파서 총살됐다"라고 적어 놓았는데 나중에 "전쟁 초기에 양쪽 모두 야만적인 행위가 저질러졌다. 다소의 재소자들은 다른 편에 의해 당했다"고 바뀌었다. 사진에는 빡빡 깎은 머리를 한 재소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트럭에 타 있고 그 주위로 군인, 경찰, 특무대원 등이 지키고 있다.[7] 공주시 상왕동 산 29-19[8] 당시 이 학살을 유엔한국위원단 야전관측조에서 복무하던 호주군 장교 피치 소령이 목격했는데 그는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죽는 것을 봤다. 그들의 머리는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계란처럼 으깨졌다"고 후일 증언했다.[9] 유해들은 모두 구덩이를 향해 시선을 향한 채로 두 손은 결박당하거나 목을 움켜쥐고 무릎은 꿇린 채로 사살되었다. 피학살자들은 전부 남성이었으며 20대 이상으로 추정되었다.[10] 이 교도소는 사실 수용정원이 500여 명이 불과하여 그 3배가 넘는 인원이 수감되자 재소자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공장 하나를 임시감방으로 사용해야 했을만큼 시설이 열악했다.[11]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교회 뒷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