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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직책 변천 : 연합참모본부장(제1-5대) ▸ 연합참모국장(제5-6대) ▸ 합동참모본부장(제7-28대) ▸ 합동참모본부 제1·2·3차장(제29대) ▸ 합동참모본부 제1·2차장(제30-31대) ▸ 합동참모차장(제32대~현재) | |||||
<rowcolor=#fff> 계급 변천 : 소장(제1-6대) ▸ 중장(제7-28대) ▸ 대장(제29-31대 제1차장) / 중장(제29-31대 제2·3차장) ▸ 중장(제32-38대) ▸ 대장(제39-40대) ▸ 중장(제41-58대) ▸ 대장(제59대) ▸ 중장(제60대~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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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5월 30일 |
평안남도 평양부 | |
사망 | 2001년 2월 5일 (향년 80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군사 경력 | |
임관 | 군사영어학교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46년 2월 3일 ~ 1961년 7월 14일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장 |
주요 보직 | 제6보병사단 2연대장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부사령관 제2보병사단장 육군훈련소장 국방대학교 총장 육군교육사령관 제2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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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본관은 강릉(江陵)[1]이며 제주4.3사태때 조병옥, 박진경, 송요찬, 탁성록의 강경 진압 등으로 실패하자 최종적으로 제주에 투입되어 제주 4.3 사건을 진압했다.제주 4.3사건 당시 제2연대를 이끌며 1949년 1월 4일부터 항공기와 함정 지원을 토대로 강력한 토벌작전을 벌여 1949년 2월까지 제주4.3사건을 마무리 진압한 공이 있다. 6.25 개전초기에 6사단 2연대장으로 활동하며 초기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며 그 후 육군 제2사단장(노도부대)으로 취임하여 중공군과 북한군을 섬멸하여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미 은성무공훈장(미 육군 Legion Merit), 자유대만 최고무공훈장(운휘)등을 수여받았다. 육군 제2군단장, 육군훈련소장, 합참의장 서리, 연합참모본부장, 국가재건기획위원장(현 경제부총리)역임했으며, 2001년 2월 5일 서거하여 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되었다.
2. 생애
1920년 5월 30일 평안남도 평양부(현 평양시)에서 아버지 함광식(咸光植, 1890. 5. 4 ~ 1960. 1. 2)과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 任氏, 1891. 11. 20 ~ 1961. 9. 24)[2] 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숭덕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청소년기부터 학구적이고 신체적으로 뛰어났으며, 의협심이 강해, 겨울에 강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일로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에서는 효자, 신동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제국의 특별지원병제도로 당시 일제치하의 많은 조선젊은이들이 고질적인 조선시대의 양반제 반상차별의 저항, 군인으로의 신분상승의 출세와 동경을 꿈꾸며' 제1기로 일본군에 입대하였고 그중 가장 뛰어난 전투역량으로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든 일본군 공수부대(정진연대)입대하고 동남아전선에서 미국, 영국군 등 연합군을 대상으로 수많은 사선의 전투를 수행하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준위로 예편하고 조선으로 귀향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조선경비대에서 활동하여 1946년 1월 5일 제1연대 A중대요원으로 응시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가 되어 제1연대 대대구매관이 됐다. 1947년 5월에는 대전에 있던 제2연대로 들어가 육군 소령으로 활동했고, 1948년 12월 7일에는 보병제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어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런 와중에 1948년 말 발생한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압에도 참여했다.
1948년 12월 29일[3] 제주 4.3 사건을 진압을 위해 초토화작전을 펼치고 있던 제9연대와 교대하여 제2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제2연대를 이끌며 1948년 11월부터 펼쳐지고 있던 초토화작전을 이어받아 1949년 1월 4일부터 항공기와 함정 지원을 토대로 여전히 강력한 토벌작전을 벌여 1949년 2월까지 숱한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1949년 3월부터는 유재흥이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함에 따라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선무 공작을 벌여서 자진 하산, 투항을 유도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제2사단장과 제2군단장으로 활동하며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1950년 7월에는 문경 이화령 전투에서 제6사단 2연대를 지휘하여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육탄공격으로 막아내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지휘했던 2연대가 한국전쟁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6사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춘천-홍천 전투, 동락리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특히 북진 시에 2연대가 김일성의 자동차를 노획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상하는 전과도 올렸다. 매우 아깝게도 간발의 차이로 김일성을 생포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4] 1955년에는 육군 중장과 제2군단장, 1957년 7월에는 육군본부 기획참모장, 1959년 1월에는 작전참모부장, 1960년에는 연합참모본부장을 각각 맡았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안된다".는 군인적인 소신으로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군부숙청 성격으로 부정축재자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기 강제예편 당했고 퇴역하였다. 부정축재의 혐의는 정치적인 술수였던 것이다. 곧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고, 그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장 등을 맡다가 1961년 7월 14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됐다. 이후 2001년 2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81세의 나이로 별세했고, 2월 7일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묻혔다.
3. 비판
조병옥, 박진경, 송요찬, 탁성록과 더불어 제주 4.3 사건 당시 강경토벌과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한명이다. 일각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공적비와 마을 이름이 있다[5]는 것 등을 들어 그가 학살과는 상관없다고 여기지만 그는 최소한 2연대가 9연대와 교대한 1949년 12월 말부터 유재흥이 부임하기 전인 1949년 2월까지의 초토화작전과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지고 있다.당장 4.3 최대의 학살사건인 북촌리에서의 학살이 그가 부임하고 있던 시절(1949년 1월 12일)에 발생했었고, 미군 비밀문서조차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해놨다. 또한 그는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진압군으로 참여시켜 제2연대 제3대대의 경우에는 장병 전원이 서북청년회 출신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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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 제주도민 · 김시범 · 이도종 · 이경선 · 무명천 할머니 · 제주 출신 재일교포 · 4.3 수형자 · 보도연맹원 | |||||
예술가 | 현기영 · 김석범 · 강요배 · 오멸 · 이산하 · 김동리 | |||||
기타 | 제주 4.3 연구소 · 문화에서의 4.3 · 학계에서의 4.3 · 제주 4.3 유적지 · 제주 4.3 길 | |||||
유사 사건 | 방데 전쟁(프랑스) · 2.28 사건(대만) · 목호의 난 · 대구 10.1 사건 · 여수·순천 10.19 사건 |
[1] 동원군파 55세 병(炳) 항렬.[2] 임능헌(任能軒)의 딸이다.[3] 이날은 대한민국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고상돈의 생일이기도 하다. 묘하게 그도 제주도 출신이다.[4] http://www.econotalking.kr/news/articleView.html?idxno=104721[5] 실제로 제주시 봉개동의 옛 이름 함명리(咸明里)에 함병선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4.3 전에는 봉개리(奉蓋里)였는데 연대장 함병선의 성인 '함(咸)'과 작전과장 김명(金明)의 이름인 '명(明)'을 각각 따서 붙여 '함명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름이 붙여진 봉개리는 정작 함병선이 연대장으로 있던 시기인 1949년 1월 21일 수백여 명이 군경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하고 마을이 전소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4.3 진압 이후 다시 재건될 때 '함명리'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